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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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옛날 신호가 잡히던 오래된 라디오 같은 면이 있습니다.
가끔은 새로운 채널을 찾아 다이얼을 돌리듯,
이 글이 여러분께 새로운 즐거움으로 닿기를 바랍니다.
《설록》, P6. 기획 노트 중
다른 꿈을 꾸다.
오늘날, 책은 쉽게 쓰여지고 쉽게 잊혀진다. 빠른 생산과 빠른 소비가 미덕인 사회 속 보통의 이야기는 관심을 잃고 오직 날카로운 펜촉에 찍힌 점처럼 현실에 집중해야 하는 시대에 과거는 쉽게 잊혀진다. 그러기에 마땅히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할 것들이 사라진다.
〈토마토 슬라이스〉는 시장의 규칙을 무시하는 프로젝트다. 점차 지역을 기록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단순화되는 출판 시장 속 지역 이야기는 어느덧 칼 끝으로 올라간다. 그렇기에 월간토마토의 아카이빙 브랜드인 〈토마토 슬라이스〉는 직접 책을 인쇄하고 제단하며 제본함으로 분업을 통한 빠른 생산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멀어지는 출판을 한다. 그리고 개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소비하는 시장에 내놓음으로 독자도 어떤 삶이 가치 있는지 비교할 수 있게 한다.
〈토마토 슬라이스〉가 만든 첫 작품 『설록』은 지역에서 ‘공간, 사람 그리고 기록’이라는 모토로 잡지를 만들어 온 편집장이 매달 독자에게 쓴 편지를 골라 묶었다. 2016년, 도시민의 삶과 가치를 모아 지역출판을 시작한 월간토마토는 이제 이 편집장 편지를 시작으로 도시민에게 대안적 삶을 제안한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를 더는 기대할 수 없다면 이제는 과감하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는 산업군에서 제외할 때도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출판 부문은 농업 부문과 같은 운명이라는 생각입니다. 농업이 인류의 신체 활동을 지속하게 한다면 출판은 정신 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구실을 하겠지요. 농업과 출판, 인류가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입니다.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책을 짓겠습니다」_이용원, 9쪽)
끊임 없는 상상.
상상할 수 있는 권리.
이 글에 담긴 글들은 ‘도시 재생’, ‘대전방문의해’, ‘문화도시’ 등 지역 이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며 ‘상상’, ‘지역 출판’, ‘권력’ 등 일상에서 한 번쯤 생각해 볼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짧게는 몇 달 전, 길게는 9년 전에 쓴 글도 있지만 글을 읽다 보면 오늘의 문제는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것이 아닌 과거로부터 이어 온 것임을 알게 된다.
〈아귀가 안 맞는 퍼즐 조각〉에선 지역 이슈를 이야기하며 문제와 대안을 제안한다. 〈지금은 인증시대~〉에서는 인증사회 현상을 진단하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다시 ‘지역’을 생각하다〉는 지역에서 가치 있다 생각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진솔한 고민과 성찰도 읽어 볼 수 있으며 〈우리 도시에 ‘문화예술’은 어떤 의미일까〉를 통해 ‘자치분권’ 속 문화예술이 가야 할 방향을 상상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끊임없는 상상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독자에게 전한다.
지금껏 인류가 지나쳐 온 순간은, 그 이전 순간 인류가 상상하거나 혹은 상상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지금 세상을 만들어 낸 이 상상의 합에 보편타당하게 모든 인류가 참여했는지를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럼에도 인류는 끊임없이 상상했고 그 상상은 다양한 순간을 만들어 왔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권리, 상상할 수 있는 자유」_이용원, 15쪽)
작가정보
저자(글) 이용원
월간토마토 편집국장. 글을 쓴다고 나대며 산 지가 이제 20년은 좀 안 되고 10년은 훌쩍 넘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글로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살아낸 세월을 듣고 기록하거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공간에 스며들어 글을 쓰는 것이 훨씬 더 좋다. 그만큼 부담도 크다. 내 앞에서 빗장을 풀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내주는 이의 마음 앞에 내가 얼마나 가닿았는지 늘 걱정스럽다.
목차
- 기획 노트_시그널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책을 짓겠습니다
상상할 수 있는 권리, 상상할 수 있는 자유
익숙함을 거부할 용기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시민이 행복한 콘텐츠로 관광객이 아닌 방문객을…
아귀가 안 맞는 퍼즐 조각
다시 원칙과 원론을 생각하며
우리 도시에 ‘문화예술’은 어떤 의미일까?
문화도시총괄기획자 먼저 영입하는 것이 어떨지요?
다시 ‘지역’을 생각합니다
꼰대, 계룡문고, 그리고 기적
“그래서, 요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지금은 인증시대~
제작 노트_설록을 제작하며
책 속으로
미움을 받을 용기, 외로워질 용기보다 더 필요한 것은 익숙함을 거부할 용기일지도 모릅니다. 미움을 받아야 하고 외로워져야 하는 이유도 익숙함을 거부하기 위해서입니다.
(「익숙함을 거부할 용기」_24쪽)
‘대전방문의해’ 3년 기간은 외지인이 방문하고 싶을 만큼 시민이 행복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콘텐츠의 생산과 매개, 수용 생태계를 갖추는 데 ‘예산과 시간’을 투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도시에 사는 시민 행복을 배제한 관광은 왜곡된 착취와 수탈 구조일 뿐입니다. 많은 관광도시가 앞서 저지른 과오를 굳이 따라하는 우매한 정책은 과감하게 폐기하는 것이 옳습니다.
(「시민이 행복한 콘텐츠로 관광객 아닌 방문객을…」_37쪽)
‘재생’의 전제는 사실 ‘쇠락’입니다. ‘쇠락’이라는 것의 절대적 기준이 없어 이 부분에 관한 합의를 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재생’은 그 태생부터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귀가 안 맞는 퍼즐 조각」_39쪽)
자치분권이라는 큰 흐름에서 재정분권과 사무이관이 이루어지면서 중앙정부가 틀어쥐고 있던 예산을 지방으로 이양합니다. 예산 편성 항목과 규모를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문화 분권이라는 측면에서 고무적이고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이런 원칙적인 반가움 뒤에 불안감이 따라옵니다. 과연, 각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예산 편성을 하면 수많은 지역 현안 가운데 문화예술 영역이 얼마나 무게감 있게 다루어질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 도시에‘문화예술’은 어떤 의미일까?」_52쪽)
그래도 우리가 ‘대전’이라는 도시에서 처음 잡지를 만들 때 가졌던 감성을 끄집어 올린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지역은 그 자체로 혁신이며 혁명입니다. ‘지역’을 이야기하며 지속가능성을 갖는 건 그래서 힘이 듭니다. 지역이 곧 혁신이고 혁명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락함과 온전함을 주는 듯합니다. 이것이 현실이든 착각이든 지킬 것이 없을 때 가질 수 있는 평온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지역’을 생각합니다」_66쪽)
필요한 건 인증 자체가 아니라 댓글입니다. 공감 말이죠. 사회를 유기체로 놓고 볼 때 ‘상호 반응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상호 반응을 통해 사회 안전망 안에 놓여 있다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는데, 이 연결 고기라 약해 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응답’은 1988, 1994, 1997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해야 할 무엇입니다. 이제 응답의 시대로 접어드는 메시지를 더 많이 접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인증시대~」_82쪽)
출판사 서평
■ 기획 노트 - 편집자 황훈주
說 말씀 설, 달랠 세
말과 관련된 여러 글자 중 ‘이야기 하다’라는 뜻이 가장 두드러진 한자. 말씀언과 기쁠태가 결합한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뜻하는 한자이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달랜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錄 기록할 록
쇠금과 새길록이 결합한 한자이다. 새길록은 염색용 염료를 천에 넣고 짜는 모습을 표현한 한자로, 기록할록은 쇠에 글 을 각인하여 보존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잉크를 짜 글을 기록하는 인쇄의 모습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說錄 설록
말을 기록했다는 의미이나 ‘설록’이라는 어감은 뜻과는 관련 없이 녹차 중 ‘설록’을 떠올리게 한다. 눈속에서 피어나는 녹차라는 뜻의 설록처럼 이 글은 편집장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어려운 출판 시장 속에서 피어난 작가의 성찰이 담긴 책이다.
■ 제작 노트 - 디자인 양다휘
토마토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일종의 지식산업 운동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건 이 프로토타입에 어느 정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좀 어설플 것이다. 직접 하는 인쇄, 말리기 까다로워 번지기 일쑤인 잉크. 겨우 꾸린 종이 더미를 제본하는 과정에 서는 기계가 말썽이다. 시작부터 벌써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낸 책 한 권이 과연 독자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해 볼 뿐이다. 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의 운동은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활동일 것이다. 우리가 서툴게 삶을 살아내듯, 이리저리 빙 돌아 걷기도 하고 가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며 새로운 길을 갈 것이다. 어느날은 둘러앉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것이고, 심각하게 이야기하다가도 툭 농담을 던질 테다. 아이처럼 즐겁게 뛰놀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그 다음날은 말 그대로 아이들과 함께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그 모든 순간 행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겠다 는 초심이다. 뜨겁게 삶을 살아내며 사유할 것이고, 상황이 허락하는 한 닥치는대로 나눌 작정이다. 함께하지 않는 혼자만 의 생각은 책장 속에 감추어 둔 일기장 만큼이나 덧없다.
다시 시작하는 토마토의 이 뜨거움이 식지 않으려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가끔은 열띤 응원을 던지기도, 따끔한 충고를 해주기도 하는 누군가가. 물론 묵묵히 지켜봐 주 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월간토마토를 키우고 지켜온 것은 그 모든 사람들이다.
『설록』에는 그간 편집장 이용원이 던져온 화두들을 모아 담았다. ‘편집장의 편지’는 월간 토마토를 펼치면 보이던, 말하자면 매호의 첫 장면이다. 그 첫 장면들을, 그동안 월간토마토 가 해온 고민들을 함께 돌아보고 또 앞으로도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기본정보
ISBN | 9791196927318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3월 13일 | ||
쪽수 | 84쪽 | ||
크기 |
120 * 181
* 6
mm
/ 76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토마토 슬라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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