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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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죽은 연인을 홀로그램으로 만들어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김현의 《고스트 듀엣》, 퀴어 퍼레이드에서 만난 두 직장 동료의 이야기를 담은 윤이형의 《정원사들》, 보리스, 아셈, 조앵, 은수, 차차가 아바나의 게이 클럽에서 있었던 사건을 각기 다른 시점으로 이야기하는 정지돈의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등 각기 다른 이력과 연령의 작가들이 자기만의 문체로 선보이는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작가정보
2011년 《문학동네》로 등단. 소설집 《그녀 이름은》, 장편소설 《귀를 기울이면》 《고마네치를 위하여》 《82년생 김지영》 《사하맨션》이 있다.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글로리홀》 《입술을 열면》, 산문집 《걱정 말고 다녀와》 《아무튼, 스웨터》 《질문 있습니다》 《당신의 슬픔을 훔칠게요》 등이 있다.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 《러브 레플리카》, 중편소설 《개인적 기억》, 청소년소설 《졸업》, 로맨스소설 《설랑》 등이 있다.
2003년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소설집으로《연대기》 《달로》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등과 장편소설《불가능한 동화》가 있다.
저자(글) 최정화
2012년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으로 등단. 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장편소설 《흰 도시 이야기》 《없는 사람》, 중편소설 《부케를 발견했다》 등이 있다.
저자(글) 듀나
1992년부터 영화 관련 글과 SF를 쓰고 있다. 장편소설 《민트의 세계》, 소설집 《구부전》 《두 번째 유모》 《면세구역》 《태평양 횡단 특급》 《대리전》 《용의 이》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연작소설 《아직은 신이 아니야》 《제저벨》, 영화비평집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 에세이집 《가능한 꿈의 공간들》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등이 있다.
저자(글) 최진영
2006년 《실천문학》의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이제야 언니에게》 《해가 지는 곳으로》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끝나지 않는 노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구의 증명》, 소설집 《팽이》, 중편소설 《비상문》 등이 있다.
목차
- 이혼의 요정 ㆍ 조남주 7
고스트 듀엣 ㆍ 김현 39
정원사들 ㆍ 윤이형 77
에디 혹은 애슐리 ㆍ 김성중 115
원을 구하기 위하여 ㆍ 한유주 147
라디오를 좋아해ㆍ ㆍ 최정화 183
바쁜 꿀벌들의 나라 ㆍ 듀나 217
XOXO ㆍ 최진영 251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ㆍ 정지돈 285
책 속으로
“효림 엄마는 이름이 뭐예요?” “김은경이요.” “그럼 나는 은경 씨라고 부를게요. 나는 최수연인데 수연 씨라고 불러도 되고 다인 엄마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 수연 언니라고 할게요.” 언니. 수연 언니.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수연은 팔짱 끝에 삐죽 나온 은경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은경 씨.” 손가락 끝이 무척 차가웠다. 수연은 은경의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다시 쥐면서 자신의 인생이 아주 불행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완전히 행복해지거나.
_조남주, 〈이혼의 요정〉, 31~32쪽
석찬을 순식간에 철들게 한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과의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_김현, 〈고스트 듀엣〉, 44쪽
사람에게 인정이란 무엇일까. 왜 혼자서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가끔은 참을 수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찔리고 피가 나고 붕대를 감을 일이 생길 걸 알면서도.
_윤이형, 〈정원사들〉, 100쪽
“다른 건 별거 아니고 맨 아래 통장이 하나 있어. 혹시라도…… 수술을 받아야겠다면 힘들게 돈을 모을 필요는 없어. 수술비를 마련하느라 학교를 그만둔다거나 원하는 걸 포기하지 말라는 소리다. 엄마는 네가 원하는 삶으로 가봤으면 좋겠다. 잠도 잘 자고, 애인도 생기고, 애인이랑 싸우기도 하는 뭐 그런 삶 말이야.”
_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121쪽
너는 63빌딩을 좋아했다. 어쩌면 지금도 좋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한 건물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너는 해 질 녘 구리 방향 강변북로를 달릴 때마다, 여의도를 지날 때마다, 간간이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저무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장엄한 건물을 바라보고는 했을 것이다. 거기까지였을 것이다. 그러면 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_한유주, 〈원을 구하기 위하여〉, 155쪽
이렇게나 다른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이 있기나 할까?
_최정화, 〈라디오를 좋아해?〉, 195쪽
“성욕도, 식욕도 다 귀찮아서 벗어던진다면 다음엔 무얼 버릴 건가요?” 채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모르겠군요. 하지만 무언가를 버린다면 그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겠지요.”
_듀나, 〈바쁜 꿀벌들의 나라〉, 244쪽
나는 너를 닮아갔다. 너의 감탄사, 너의 깔끔함, 너의 신중함, 바람이 불 때는 눈을 감고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행동, 밥을 먹기 전에는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 습관. 내게 주인공이란 너뿐이어서 내가 쓰는 소설 속 인물은 죄다 너를 닮아버렸다.
_최진영, 〈XOXO〉, 272쪽
저는 레즈고 그는 게이지만 ……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늘 헷갈려요. 동성애자도 이성과 자고 싶을 수 있지 않나요? 이성애자도 동성과 자고 싶지 않나요? 이성애자와 자는 동성은 동성애자인가요, 이성애자인가요, 동성애자와 자는 이성은 이성애자인가요, 동성애자인가요……. 바이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저는 바이가 아닌데…… 퀴어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헤테로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늘 헷갈려요…….
_정지돈,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291쪽
출판사 서평
“우리는 네가 원하는 삶으로 가봤으면 좋겠다”
한국 대표 작가들의 퀴어 소설집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수전 손택이 했던 말이다. 아마도 지금 한국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은 퀴어를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고서 우리가 원하는 삶으로 가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퀴어문학 단편집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출간은 그 회복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환하지 않게, 너무 그늘지지 않게
삶을 제자리로 데려가는 아홉 편의 퀴어 소설
‘큐큐퀴어단편선’의 첫 권인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는 여섯 명의 젊은 작가가 퀴어의 존재와 사랑을 이야기했다. 탄탄한 문학적 입지를 다져온 김금희, 임솔아, 퀴어문학의 새로운 계보를 잇는 김봉곤, 박상영,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를 쓰는 강화길, 이종산 작가가 참여했다.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은 아홉 명의 작가들이 퀴어에 잣대를 세우고 빤한 해석을 내리는 세상에 반대하며, 다양한 퀴어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써 내려간 작품집이다. 《82년생 김지영》으로 한국사회에 페미니즘 열풍을 불러온 조남주 작가를 필두로 김현, 윤이형, 김성중, 한유주, 최정화, 듀나, 최진영, 정지돈 작가가 참여했다. 각기 다른 이력과 연령의 작가들이 자기만의 문체로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품 속 퀴어의 모습은 익숙하다. 대부분이 출퇴근길, 아파트 단지나 휴일의 공원과 동네 카페에서 마주하는 우리 이웃의 모습이다. 이혼한 두 모녀 가정이 모여 가족 공동체를 이루고(조남주, 〈이혼의 요정〉), 안 가면 지는 거 같아서 간 퀴어 퍼레이드에서 회사 상사를 만나고(윤이형, 〈정원사들〉), 동거인과 불화하는 와중에 직장 동료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며(최정화, 〈라디오를 좋아해?〉), 지구가 평평하다는 음모론을 믿고(한유주, 〈원을 구하기 위하여〉), 죽은 애인의 홀로그램 영상과 여행을 떠난다(김현, 〈고스트 듀엣〉). 일상의 모습이 지나간 곳에는 삶의 질문들이 자리한다. “젠더의 변화가 영혼의 변화도 가져오는지, 그렇다면 젠더란 무엇인지를 묻고”(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이성애자와 자는 동성은 동성애자인가요, 이성애자인가요, 동성애자와 자는 이성은 이성애자인가요, 동성애자인가요……”(정지돈,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같은 질문을 쳇바퀴처럼 늘어놓는다. “이렇게나 다른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라디오를 좋아해?〉)라는 질문에는, “글쎄요. 모르겠군요. 하지만 무언가를 버린다면 그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겠지요”(듀나, 〈바쁜 꿀벌들의 나라〉)라고 대답하고, “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한유주, 〈원을 구하기 위하여〉)라고 묻고 난 뒤에는,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는 것”(최진영, 〈XOXO〉)이라는 결론 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인생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면, 우리는 무얼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할 수 있다.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해 없이, 서로를 사랑”(정지돈,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할 수 있다.
《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이어 ‘큐큐퀴어단편선’ 시리즈는 앞으로도 매년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2000년 서울에서 처음 열렸던 퀴어문화축제가 2019년 현재 여덟 곳으로 확장되었듯이, 큐큐가 펴낼 퀴어문학의 축제 또한 매년 확장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에서 문학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말하기 위해서, 모든 부당한 해석에 반대하기 위해서, 뭘 할 수 있죠? 하고 묻는 이들에게 우리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무너진대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퀴어(queer)’는 ‘기묘한, 괴상한’이란 뜻으로 성소수자를 지칭한다. 애초 동성애자를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으나, 현재는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모두 아우르는 말로 사용된다.
“왜 우리가 불행하고 혼란스럽고 우울할 거라고 넘겨짚고 그러지”
새로운 가족의 탄생 - 조남주 〈이혼의 요정〉
조남주 작가의 〈이혼의 요정〉은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은경’과 ‘수연’은 각각 아이를 데리고 집을 합친다. ‘은경’은 이혼을 했고, ‘수연’은 이혼을 하는 중이다. 소설의 부제가 ‘한남 아빠에게’여도 어색하지 않을 이 소설은 얼핏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에서 보여준 혼자도 결혼도 아닌, 조립식 가족을 떠올리게도 한다. 하지만, 가족 공동체에서 가장 약한 고리인 ‘주부’와 ‘아이’를 모아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놀랍고도 용감한(아니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여성 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애들은? 애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다인이는 그 여자를 뭐라고 생각해?"??“엄마라고 생각해. 은경 엄마라고 부르고. 효림이는 나를 수연 엄마라고 불러. 걔들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 넷 지금 되게 좋은데?"?
_35쪽 조남주, 〈이혼의 요정〉 중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그래서 오늘도 무너졌구나.”
상실한 자들이 품은 단 하나의 문장 -김현 〈고스트 듀엣〉
김현 작가의 〈고스트 듀엣〉은 죽은 연인을 홀로그램으로 만들어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인생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우리는 어제를 희망하고, 오늘을 이어간다. 그러려면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이 필요하다. ‘뭔가를 영원히 기억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그 기억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창조할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던 수전 손택의 말처럼 소설은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소설이 말하는 건 위대한 사랑도 불가능한 사랑도 아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은 보통의 우리 곁이며, 일상적인 삶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사랑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면 사람, 짐승이면 짐승. 고등어의 유령은 마리, 먼나무의 유령은 그루,
이형우의 유령은 한 명. 한상민의 유령은 두 명.”
“형, 우리도 나중에 고스트 듀엣이나 하자. 붙어 다니자.”
_50쪽 김현, 〈고스트 듀엣〉 중
“안 오면 지는 것 같아서. 이런 마음으로 퀴퍼에 오는 사람도 있을까.”
내 안의 숨겨진 정원들 - 윤이형 〈정원사들〉
윤이형 작가의 〈정원사들〉은 퀴어 퍼레이드에서 만난 두 직장 동료의 이야기다. 애인과 헤어져 홧김에 퀴어 퍼레이드에 온 젊은 여자와 사랑하는 딸과 가정이 있기에 퀴어 퍼레이드에 오는 거 말고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중년 여자의 대화가 진행된다. 소설을 읽는 우리는 자연스레 둘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고 우리를 막고 있는 벽과 우리가 모른 척했던 거대한 삶의 정원을 마주하게 된다.
저는 기뻤어요. 그 정원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한 존재로서 온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로 갈 수도 없고, 유리를 깨거나 문을 만들어 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냥 그게 있다는 게 좋았어요.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 돼요.
_98~99쪽 윤이형, 〈정원사들〉 중
“엄마, 난 사실 아들이 아니라 딸일지도 몰라요.”
“그걸 이제 알았니?”
백 년 동안의 퀘스처닝-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김성중 작가의 〈에디 혹은 애슐리〉에는 100년 동안 시간이 정지한 세계가 나온다. 죽음이 사라지고 끝없이 여름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나’는 머리를 기르고 호르몬제를 맞는 걸 시작으로 여러 젠더를 횡단하고 실험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진짜 자신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던 ‘나’는 가사로봇 엔도를 만나면서 ‘젠더’와 ‘영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만약 엔도가 인간이라면 어떤 젠더였으면 좋겠어?” “저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되고 싶어요. 몸에 털이 나 있고 꼬리도 있는 육식동물, 이를테면 표범이나 재규어 같은 고양잇과 동물이요.” 인공지능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선입견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엉뚱한 소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_137쪽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중
“너는 유일하게 혼자다. 하나, 유일, 혼자.”
나를 증명하고 너를 설득하기 위해 - 한유주 〈원을 구하기 위하여〉
한유주 작가의 〈원을 구하기 위하여〉에는 ‘지구 평면설’을 믿는 인물이 나온다. 하지만, 소설은 단순히 음모론이라는 소재에서 멈추지 않고,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가 평평하다면 끝은 어디일까, 라는 ‘끝’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소설을 이어간다.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끝의 끝은 있을까.
너와 나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때 너는 나였고, 나는 너였으므로, 그렇다고 믿었으므로, 그때는 너와 나를 우리라고 부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
_158쪽 한유주, 〈원을 구하기 위하여〉 중
“이렇게나 다른 우리들이 어떻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
내 안에 자리 잡은 편견 ? 최정화 〈라디오를 좋아해?〉
최정화 작가의 〈라디오를 좋아해?〉에는 흔히 우리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종교를 가진 직장 동료에게 아무 정당한 이유 없이 색안경을 끼고 미워하는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를 통해 소설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생각하고 생활하는 편견은 무엇이냐고.
편견이라는 것.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편견일까?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눈으로 그저 자연스럽게 보고 행동하는 게 편견이야.
_194~195쪽 최정화, 〈라디오를 좋아해?〉 중
“무언가를 버린다면 그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겠지요”
이상한 나라의 꿀벌들 ? 듀나 〈바쁜 꿀벌들의 나라〉
듀나 작가의 〈바쁜 꿀벌들의 나라〉은 A.I.의 승리로 끝난 마지막 전쟁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기존 인간성이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인간들은 성욕도 식욕도 다 벗어버린 채 퀸, 드론, 워커 등 꿀벌처럼 구분되어 살아간다. 마지막 전쟁 전 도약선을 타고 ‘해랑 4’로 온 지구인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지구인들은 새로운 세상에서조차 살인을 저지른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인간성과 욕망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우린 다양한 세계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걸 원해요. 단지 당신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인간성의 스펙트럼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 뿐입니다.
_244쪽 듀나, 〈바쁜 꿀벌들의 나라〉 중
“근데 우리 예전에는 세 시간씩 키스하고 그랬잖아.”
알콩달콩 중장년 레즈비언 로맨스 - 최진영 〈XOXO〉
최진영 작가의 〈XOXO〉를 읽고 나면 누구든 사랑이 하고 싶어질 것이다. 가짜 사랑 말고, 진짜 사랑. 남자와 여자가 하는 사랑 말고, 두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사랑. 오래오래 키스할 수 있는, 세상 곳곳에서 매일매일 사랑스러운 키스를 나눌 수 있는, 언제든 어디서든 우리가 있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사랑.
여자랑 여자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웃어버릴 것 같다.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는 것.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때 그것은 거기 없다. 너의 가족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면 나도 미소 지을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면, 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가요? 당신들도 이상합니다.
_279~280쪽 최진영, 〈XOXO〉 중
“게이는 끝났어. The end of gay.”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 정지돈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정지돈 작가의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는 보리스, 아셈, 조앵, 은수, 차차가 아바나의 게이 클럽에서 있었던 사건을 각기 다른 시점으로 이야기한다. 작가는 말한다. “내 소설을 우연히 읽는 독자들은 하나의 모순이 아닌 여러 가지 모순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색조가 아닌 다양한 색조, 하나의 선이 아닌 여러 원형들. 그래서 내 소설이 연계된 사건의 역사가 아니라, 퍼졌다가 돌아오고 확대되었다가, 참기 힘든 것이 때때로 자유로운 것이 되는 극한 상황에서, 쉼 없이 더 부드럽고 더 열정적으로 다시 돌아오는 파도와 같기를 바란다”고. 그런데 정말 게이는 끝났을까? 그렇다면 퀴어는? 그렇다면 소설은?
영원은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죠. 순간은 마주침입니다.마주침은 한번 존재하면 사라지지 않습니다.
_309쪽 정지돈,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중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썼다”
이 시대 작가들에게 ‘퀴어 소설을 쓴다는 것’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문학의 몫임을 말한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윤이형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런 이야기가 받아들여질까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써야겠다는 생각보다 이런 이야기가 받아들여질지 아닐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남주 작가는 “그저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쓸 수 있는 데까지 썼다”고 말한다. 김현 작가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투쟁”을 먼저 떠올려야 했고, 김성중 작가는 쓰는 내내 “정체성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율하고 분노해야 했다고 말한다. 한유주 작가는 “나를 증명하고 너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며 아름답고 슬픈 부조리극 한 편을 완성했다. 최정화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맑게 닦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최진영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조차 “소설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 소설집의 마지막에서 정지돈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이 말은 우리가 퀴어 소설을 계속 써야 하고,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 ‘나’가 아닌 ‘우리’가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퀴어 소설을 계속 쓰고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기본정보
ISBN | 9791196438135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09월 27일 | ||
쪽수 | 312쪽 | ||
크기 |
136 * 200
* 23
mm
/ 443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큐큐퀴어단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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