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이런 자료들로 책이라도 한 권 만드시죠!
약 30년 전 어느 날, 대선배가 작업한 디자인자료를 감탄하면서 보다가 "선배님! 이런 자료들로 책이라도 한 권 만드시죠! 그러면 저희 같은 후학들에게 무척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그 선배의 반응은 "음! 그래야지!"였었다. 그러나 필자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분은 지금 우리 세상에 안 계신다.
그리고 30년 후 필자가 그 '선배'의 입장이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필자는 대선배께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 작업을 끝내는 날을 즈음해서 꼭 그동안 작업했던 것들을 엮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자료를 만들어 보관하는 것도 열심이었다. -p. 9

TV 세트 디자인을 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
필자가 입사한 87년의 디자인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고 싶다.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이 나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디자인 기법이 완전하게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TV 세트 디자인의 기본적인 기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촬영에 필요한 공간을 만드는 시스템이 지금은 건축설계와 비슷한 형태로 도면을 작성하고 제작도를 만들어서 진행하고 있지만 TV 방송을 시작하던 초기에는 과연 어땠을까?
입사 초기에 선배들의 도면을 훔쳐보다가 드라마 세트의 도면집에서 초가집이나 기와집의 외부와 방의 내부를 그린 스케치식의 그림을 많이 보았는데 그것이 그냥 작업에 필요한 도면이었던 듯했다. 평면도와 입면도와 제작도 등의 도면을 그려서 제작을 진행하는 방식은 그 이후의 일이었던 듯하다.
당시 Y 선배는 자신이 지금의 '건축형 도면'을 그리는 것을 시작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드라마 세트 디자인에서 건축에서 설계를 하듯이 세트를 디자인하는 방식은 적어도 방송의 초기에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가 입사할 당시에는 100:1의 스튜디오 기본 도면에 세트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기본(유닛) 세트(벽체와 문, 창)를 조합하여 설계를 하고, 그에 맞춰 세트 제작팀이 제작, 조립을 하는 형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새로 만들기'보다는 '있는 것을 조립'하는 개념의 작업의 비중이 더 컸던 것이다. -p. 728

영상 문화의 발전에 따라 역할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TV 세트 디자인은 오페라와 뮤지컬, 연극, 무용 등의 극장 공연을 위한 무대(세트)를 만드는 작업에 그 뿌리가 있다. TV라는 영상 매체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가상 공간을 필요로 하고, 그 필요성에 부합하는 인공 공간을 만드는 작업은 공연예술의 무대와 가장 닮아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의 변화에 따라 공연예술보다는 영상 산업의 활성화로 콘텐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유튜브 등을 통한 동영상 콘텐츠들이 우리 생활의 일부분이 되는 상황이 되었다.
'TV'라는 영상매체를 위한 동영상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작업인 TV 세트 디자인은 TV 콘텐츠(영상 콘텐츠) 제작을 위한 가상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고, 그것을 위한 노하우를 꾸준히 축적해 왔다. 그러므로 영상 콘텐츠가 이렇게 활성화되는 시점에서는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영상 콘텐츠는 언제나 '카메라'라는 기계적인 눈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그 노하우를 활용한 가상공간의 설계(또는 설계자)는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p. 750

TV 세트 디자이너를 지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언
필자는 젊은 친구들에게서 "TV 세트 디자이너가 되려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었다. 그런데 딱히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만족할 만하게 해준 기억이 없다. 아마 지금 물어도 그럴듯하다.
TV 세트 디자이너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질문은 소위 '지름길'을 알려달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필자는 그 지름길이라는 것에 그다지 좋은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지름길로 가다 보면 목표한 곳으로 빨리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대로의 길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그 목표지점에서 다음 목표지점을 향해 갈 동력이 부족하기 마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TV 세트 디자이너는 TV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세트, 즉 가상의 공간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직업이다. 우리가 보는 TV 프로그램의 가상공간에 대한 법칙이나 원칙은 따로 없다. 그것은 디자이너가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녹화를 위한 기능에 적합해야 하므로 소위 '디자인'이라는 장르에 속해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떤 실험적인 접근도 가능하다는 의미에서는 꽤 창의적인 것을 요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가가 백색의 여백을 마주 보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고뇌하고 번민하듯이 TV 세트 디자이너도 빈 공간을 눈앞에 두고 그것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뇌하고 번민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p. 7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