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먹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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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구의 다섯 번째 시조집『복사꽃 먹는 오후』!!
1967년 강남 창원에서 태어나 1994년 《현대시조》 신인상으로 등단한 임성구 시인은 시조집 『오랜 시간 골목에 서 있었다』 『살구나무죽비』 『앵통하다 봄』 『혈색이 돌아왔다』가 있으며, 현대시조 100인선 『형아』가 있다. 경남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2020.올해의시조집상, 제16회 오늘의시조문학상 수상, 2016.세종문학나눔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현재 한국시조시인협회 상임자문위원, 경상남도문인협회 이사. 노산시조문학상운영위원회 상임이사. 오늘의시조시인회의 부의장, 창원문인협회 부회장,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 시전문지《서정과현실》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다섯 번째 시조집인 임성구 시인의 『복사꽃 먹는 오후』는 4부로 나뉘어져 총 79편의 시조를 수록하였다. 그의 시조집엔 웅변이 없다. 주먹도 없고, 다그침도 없다. 팽팽한 긴장 대신 장과 장 사이를 느릿하게 거닐 수 있는 여유만이 가득하다. 시인을 따라 아련한 풍경 너머의 오솔길을 함께 걷다보면 슬며시 배어나오는 미소를 만날 수 있다. 시조집 전체를 관통하는 가슴 저릿한 이미저리는 수채화 빛 감성에 있다. 그것은 도시화의 길섶에서 밀려난 목가적 풍류와 잃어버린 순수를 일깨운다. 바람과 구름과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싱싱하게 키워내는 꽃과 나무의 노래다. 그가 즐기는 노래와 춤은 심미적으로 움직이는 목소리이자 몸동작이다. 또 그가 마시는 공기와 술은 가족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불공정한 사회의 저항과 조국 평화를 염원하는 환한 달이다. 언제나 순수서정을 환하게 밝히는 임성구 시인은 어쩌면 이 시대의 진정한 음유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맑은 문장이 열리는 길
벚꽃야시장 13
들꽃 14
풍금을 그리는 밤 15
과수밭의 詩 16
춘분에 내리는 눈 17
포도나무 이발사의 꿈 18
따뜻한 습성 19
달빛 등목 20
화양리 딸기밭 정원 21
화양리 126번지 22
오렌지 정원에서 23
저 새들이 깔깔깔 24
복사꽃 먹는 오후 25
백운동 26
자전거 탄 풍경 속으로 27
달빛과 연못과 그리고 남자 28
물벽 29
첼로 30
겨울, 가덕도에서 몸을 풀다 31
누가 이 밤에 비트빛 물을 엎질렀나 32
2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문장의 길
골몰 35
웃어버리다 36
겨울 딸기밭에서 37
부모님 탐구영역 38
밑창 39
천년으로 남을 이 하루 40
논거울 41
달강달강 42
다시, 분이네 살구나무 43
암전暗轉의 꽃 44
종이학 목걸이를 한 소녀상 45
말모이 46
무중력의 밤 47
숨비소리로 오는 봄 48
늙은 우산 49
별목련, 늪에 들다 50
햇빛비상구 51
좋은 꿈 52
고아 53
행복을 주는 사람 54
3부 꽃과 나비의 문장으로
춘몽 57
홍옥 58
나비처럼 59
즐거운 감전 60
그 감꽃 입술 61
답답한 날의 편지 62
농부가 모를 이앙하는 동안 63
탈고脫苦 64
은근히 65
술래 66
모가 많은 세상 67
구절초 여자 68
찐, 대구 사람들 69
졸도卒倒할 뻔 70
하늘 눈물 71
이런, 드렁허리 72
늘, 그 자리 맴도는 시 73
붉은 저녁 74
동두천 해바라기 75
사랑이 오는 방식 76
4부 얼룩의 문장을 씻으며
능소화가 내 등에 툭! 하고 떨어졌네 79
제일 가난한 집 80
거풍擧風 81
빈잔 82
지나가는 비 83
노래가 피어나는 방 84
엄마가 필요했어요 85
봉안당에서 종일 놀다 86
집 87
나뭇잎 장례식 88
결탁의 꽃 89
나를 의도적으로 쳐내는 밤 90
관념 91
감잎 눈물 92
막 대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 93
돌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94
식물도 잠을 잔다는데 96
시는 활어처럼 97
쓸쓸하고 추운 것들은 세상에서 꽃 피우면 안 되나 98
해설
촌사람 임성구가 부르는 촌스런 노래의 아름다움
이승하(시인, 중앙대학교 교수) 99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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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조집엔 웅변이 없다. 주먹도 없고, 다그침도 없다. 팽팽한 긴장 대신 장과 장 사이를 느릿하게 거닐 수 있는 여유만이 가득하다. 시인을 따라 아련한 풍경 너머의 오솔길을 함께 걷다보면 슬며시 배어나오는 미소를 만날 수 있다. 시조집 전체를 관통하는 가슴 저릿한 이미저리는 수채화 빛 감성에 있다. 그것은 도시화의 길섶에서 밀려난 목가적 풍류와 잃어버린 순수를 일깨운다. 동틀 녘 이슬에 움츠리는 수줍은 들꽃처럼, “햇빛과 구름의 말, 바람과 비의 말을, 나비처럼 읽어내”는 ‘어른이’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노회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동심으로의 회귀는 “서정과 현실 사이”에서 “탈고되지 않을 노래”로 형상화된다. “맑은 하늘에 쓴 몇 글자의 그 순수함”을 위해 피어난 “사리탑 속 꽃 한 송이”처럼 “세상 모든 슬픔을 깨끗이 지우는 노래”로서 우리의 마음을 위무하는 것이다. 그것이 임성구 시인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따뜻한 희망이자 세상살이의 인정이라 할 수 있다.
-
이 시조집은 바람과 구름과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싱싱하게 키워내는 꽃과 나무의 노래다. 그가 즐기는 노래와 춤은 심미적으로 움직이는 목소리이자 몸동작이다. 또 그가 마시는 공기와 술은 가족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불공정한 사회의 저항과 조국 평화를 염원하는 환한 달이다. 언제나 순수서정을 환하게 밝히는 임성구 시인은 어쩌면 이 시대의 진정한 음유시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꽃과 노래, 그리고 술이 익어가는 임성구 시인의 『복사꽃 먹는 오후』에 나는 이미 취했다.
출판사 서평
천편일률과 대동소이에서 벗어난 순수 서정의 봄노래
꽃 위에 또 꽃은 펴서 출렁인 환한 가지 끝
하르르 ‘벚꽃엔딩’이 잔을 자꾸 재촉한다
통기타, 각설이타령이 궁합이 맞긴 한 건가?
청춘은 꽃을 찍고, 중년은 술잔을 찍고
밤늦도록 서로 다른 퍼즐을 맞추는 사이
어둠을 밀어내는 낙화, 깊은 밤이 더 깊다
사람아! 꽃 진다는 그 아픈 말 하지 마라
진다고 아주 지랴, 자식 하나 놓고 가는
해마다 웃음으로 떨어진 감탄사의 장례식.
- 「벚꽃야시장」 전문
벚꽃이 만개해 있는 야시장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이는 시적 화자다. 젊은이들은 사진을 찍으면서 희희낙락하고 있겠지만 인생이란 피었다 금방 지는 벚꽃 같은 게 아닌가. 화자는 잔바람에도 하르르 떨어지는 잔망스런 꽃잎을 보며 회한에 사로잡혀 술을 마신다. 그런데 꽃은 몽땅 다 지더라도 그 다음해가 되면 어김없이 또 피어난다. 사람은? 어린애가 청년이 되고 청년이 장년이 되고 장년이 노년이 된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간다. 가수 버스커버스커는 「벚꽃엔딩」에서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어요”라고 노래했지만 이 시의 화자는 술만 자꾸 마시고, 깊은 회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무심코 생각 없이 들길 하냥 걷다가
불현듯 마음을 빼앗길 줄 몰랐다
화려한 수사도 없이 혼자 웃는 널 보며
적당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고민 끝에 ‘반하다’라고 몇 번 더 불러주곤
봄날의 눈웃음 지단 정성스레 올린다
초록이 반들반들 햇살에게 손 건네주면
덜 외로움과 더 외로움이 의좋은 형제처럼
즐거운 밀당으로 와서 뜨겁도록 반하다
-「들꽃」 전문
이 작품도 촌사람 임성구의 눈에 제일 많이 뜨이는 들꽃을 소재로 삼았다. 들꽃은 “화려한 수사도 없이 혼자 웃는” 존재다. 화자는 꽃 이름을 몰라서 뭐라 불러줄까 고민하다 ‘반하다’라고 몇 번 불러준다. 셋째 수가 아주 매력적이다. 저 혼자 즐거워하기도 하고 이웃한 들꽃들과 잘 어울리기도 하는데 들꽃은, 아니 촌놈은 신경림의 시구대로 “못난 몸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파장」). 유유상종을 한글로 쓰면 끼리끼리가 될 텐데, 들꽃들끼리 혹은 나와 들꽃이 다 동류의식을 갖고 있다. 촌스럽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잘 통하고 정답다는 것이다.
1.
아내가 시장에서 사 온 백도를 먹는다
물컹한 단맛들이 입안에서 녹아내린다
어디서, 다가온 사랑이기에
이토록 너는, 만발한가
2.
천도복숭 먹으며 하늘로 간 여자여
그 봄날의 꽃가지가 바람에 출렁이면
어여쁜 웃음이 울컥, 젖꽃처럼 환하다
3.
햇살이 끈적끈적한 꿀물로 떨어지는 오후
손거울을 면경面鏡이라 부른 시절을 채록한다
한 장의 첫사랑이 부풀어
가슴이 그만, 꿈틀 한다
-「복사꽃 먹는 오후」 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다. 첫 수에 아내가 시장에서 사온 백도白桃를 먹는 데서 시작하는 이 시조는 둘째 수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환영으로 만나 복숭아 과즙을 젖처럼 빨며 마음속 깊은 곳에선 복사꽃을 피운다. 셋째 수에서는 엉뚱하게도 화자의 마음에서 지워져 있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녀(어머니)는 천도복숭을 먹으며 하늘로 갔다고 한다. 복사꽃이 아니라 백도를 먹은 것이지만 물 많은 백도와 복사꽃의 분홍색은 화자에게 어머니와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여 가슴이 그만 울컥하면서 또 꿈틀, 한다. 이런 시조를 보면 임성구의 시조가 지향하는 세계가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는 순수서정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세계는 자칫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식상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어느 해인가 계간평을 쓰는데 천편일률적인 봄노래가 문예지 발표작의 절반 이상이었다. 겨울이 가고 새봄이 왔다는 것 말고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하고 성토하였다. 이 모든 시를 합쳐도 T. S. 엘리엇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는 「황무지」의 한 구절만 못하고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 하나에 못 미친다고 마구 짜증을 냈다. 이 땅의 수많은 귀거래사, 자연예찬, 향토정서는 일언이폐지왈, ‘거의 같다’. 임성구의 시조를 읽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것은 이러한 ‘천편일률’이나 ‘대동소이’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식물만도 못한 사람들 야근을 밥 먹듯 한다
시퍼렇게 돈독 오른 어느 회사 사장님은
오늘도 돈꽃이 피는 통장 들고 다그친다.
넓은 밭 한나절에 가는 소를 다그치듯
이랴! 자랴! 빨리빨리 불호령의 농부같이
목이 쉰 저항의 노래와
붉은 띠가 안쓰럽다
-「식물도 잠을 잔다는데」 전문
시조의 현대화 속에서 엿볼 수 있는 시인의 아름다운 성장
이번 시조집의 일부는 시인의 유년기에 대한 추억담이다. 이 시편을 쓰면서 임성구 자신은 아슴푸레한 향수에 잠기는 시간을 가졌겠지만 비슷한 추억이 있는 독자라면 시인과 함께 시간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년의 밑동에서 눈감아 보는 밤이다
내 國民학교 그 언덕길, 초록 꿈만 꾸던 시절
풍금을 예쁘게 쳐주시던 선생님이 계셨지
-「풍금을 그리는 밤」 첫째 수
그 고장 제일 큰 동네 섬처럼 떠 있는 집
마지막 호롱불이 스산하게 흔들리는 창고
가난이 퉁퉁 불어터진 허름한 노래가 사네
-「제일 가난한 집」 첫째 수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오래된 아이가 있다
곯은 배 움켜쥐고 희미한 대본처럼
가슴을 반주먹으로 치면
쇠북소리가 난다
-「지나가는 비」 첫째 수
우리들에게는 ‘초등학교’보다는 ‘국민학교’가 익숙하다. 풍금을 예쁘게 쳐주신 선생님도 생각나고 늘 배가 고프고 가난했던 시인의 유년기의 초상이 떠올라 해설자는 가슴이 아프다. 아아, 경남 창원시 북면 동전리, 성구네 집이 참 가난했었구나. 하지만 외로운 성구는 시인이 될 꿈을 키운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초롱불 아래서 책을 읽었을 것이다. 정완영 선생의 시조도 가슴에 와 닿았고, 시보다는 시조가 체질에 맞는 것 같았다.
네 집이 허술하다고 울지 좀 마라 사람아!
한 알의 내가 폐타이어 고무냄새에 익숙하다, 밤의 골목 골목을 휘청거리며 돌아다닌다, 닳고 닳은 고무 수액을 젖처럼 빨아먹는다, 한 잎 싹을 틔워 뼈대를 세운다, 마디마디 골수를 뽑아 수십 수백 개 손가락 가지를 만든다, 밤마다 가장 빛나는 별에게 기도 올리며 꽃을 피운다, 분홍분홍 노래하는 천상의 여자가 이름 지어 꽃의 호적에 올려주었다, ‘분꽃’, 그날부터 나는, 분꽃이라는 이름표를 등불처럼 가슴에 달고 산다, 맑은 밤이면, 세상 모든 슬픔을 깨끗이 지우는 노래를 부른다, 남쪽의 나팔꽃처럼 노래하고, 북쪽의 예술단처럼 춤을 춘다, 그때마다 멀리 갔던 나비와 벌이 팔랑팔랑 윙윙거리며 돌아온다. 화려한 집이 없어도, 오로지 당신 위한 웃음선물을 준비 중이다,
그러니, 혼자 울지 마라
웃는 나는 어쩌라고
-「집」 전문
이 작품은 중장이 상대적으로 아주 긴, 사설시조다. 그런데 중장도 음수율을 대체로 지켜가면서 진행된다. 초장은 음수가 3, 5, 5, 3이고 종장은 3, 6, 4, 4이다. 다소 파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조뿐만 아니라 임성구는 등단 초기부터 음수(字數 개념으로 봤을 때)를 철저히 지키는 이와는 달리 시조의 현대화 작업을 꾸준히 해온 시조시인이다. 하지만 자유시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파격적이지는 않다. 다만 편편의 작품이 모양새를 고착시키지 않고 거의 다 달리 하는 제한적인 실험을 꾸준히 행하고 있다. 이런 시조는 얼핏 보면 시조가 아닌 것 같지만, 율격을 따라 읽다 보면 시조임을 알 수 있다.
깊고 깊은 잠 속에서 환영幻影을 읽는다
꽃상여 앞소리에 갈잎 한 장 떨어진다
아버지 그 강직함이 일순간,
무너지는
찰나…
-「나뭇잎 장례식」 전문
음수를 헤아려 보자. 4, 4, 3, 3/ 3, 4, 4, 4/ 3, 8, 4, 2이다. 자유시 쪽으로 아슬아슬하게 가지 않고 시조가 되었다. 이런 아슬아슬한 재미가 위태롭지 않고 흥미진진한 것이 임성구 시조의 매력이 아닌가 한다. 「집」의 내용을 잠시 살펴본다. 주택정책은 정권마다 특단의 조처를 취하건만 현 정권의 최대 악수가 바로 주택정책이다. 워낙 국토는 좁은데 인구는 많다 보니 땅과 집은 투기의 대상이 되어 왔고 사람들은 재테크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문학평론가의 평론집 제목이 ‘집 없는 시대의 문학’이었던 것이 생각난다. 이 시조에 주목을 요하는 부분은 “남쪽의 나팔꽃처럼 노래하고, 북쪽의 예술단처럼 춤을 춘다”이다. 분꽃은 나비와 벌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데 한반도 남과 북 사이에는 휴전선이 놓여 있다. “네 집이 허술하다고 울지 좀 마라 사람아!”라는 구절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집’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꾸짖는 것처럼 들린다. 북한사람들을 생각하자는 말로도 들린다. 제목이 ‘집’이니 자기네 집을 버리고 떠난 탈북민들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 하나씩의 분꽃이 되어 남과 북을 자유로이 넘나들 날을 꿈꾸어 본다.
예순 살 K 시인이
팔순 엄니 보내면서
“성구야! 우리 이제, 같은 고아다 그쟈”
명치 끝, 깊숙한 우물물
화장장으로 흘러간다
우물물 타고 남은 사리가 매달린 하늘
밤마다 빛나는 위안으로 내려와서
토닥여, 토닥여 줄 것만 같은
한 살 때 떠난 어머니
쉰 해 동안 달고 산 뼈가 시린 그 이름을
두 해도 채 못 달고서K 시인이 떠나셨다
소주를 목넘김하는 저녁
굵은 비가 내린다
-「고아」 전문
이 작품의 외양적 특징은 첫 수 중장을 따옴표를 써 얼추자유시의 느낌을 주게 했다는 것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외양이 자유시에 가깝다, 혹은 시조의 틀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예순 살 동료시인이 팔순 어머니를 보내고 우리 이제 다 같이 고아가 되었다고 한 말에 속뜻이 들어 있다. 이 시조의 화자는 어머니를 태어나자마자 잃었다.
임성구 시인의 작품에 깃들어 있는 알 수 없는 비애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리라. "밤마다 빛나는 위안으로 내려와서/ 토닥여, 토닥여 줄 것만 같은" 어머니, 그 ‘어머니’라는 대명사는 “쉰 해 동안 달고 산 뼈가 시린 그 이름”이다. 이 시에 배어 있는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서러움 같은 것을 해설자가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성구야! 우리 이제, 같은 고아다 그쟈”라고 말했던 예순 살 K시인도 2년이 채 안 되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그이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져 소주를 마시는 저녁, 굵은 비가 내린다. 눈물 같은 비다.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우산도 없이 굵은 장대비를 뚫고 세파를 헤쳐온 임성구 시인을 생각하면서 나도 소주 한 잔을 마신다. 전작 「어머니라는 이름과 아버지라는 이름 사이, 내 이름이 참으로 따뜻하게 피어 있음을……」이라는 시도 감동적이었는데 이 작품은 해설자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푸르게 출렁이는 오래 전 보리밭과
망초꽃 흐드러진 강둑을 달려가는
저만치 개구리교복을 입은 한 소년이 있습니다
맑은 하늘에 쓴 몇 글자의 그 순수함
종이비행기 곱게 접어 소녀에게 날려 보내고
힘차게 페달 밟으며 쑥스러움을 숨깁니다
바짓자락에 스치는 풀꽃들의 붉은 입들
몽정 같은 이야기 꺼내 깔깔깔 놀려대던
회상의 저녁 풍경이 단풍 물로 번집니다
-「자전거 탄 풍경 속으로」 전문
어느덧 사춘기를 맞이한 성구 소년은 그리움의 대상이 부모님에서 소녀로 바뀐다. 자전거 탄 풍경 속에는 서툴게 쓴 시가 있고 소녀가 있고 부끄러운 소년이 있다. 소년은 아마도 스스로 세상의 파도를 헤치며 성인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그 순수한 마음을 지우지 않고 간직해 왔기에 시인이 된 것이 아닐까. 이 작품은 성장통을 아름답게 그린 가편이다.
우리가 누리는 최첨단 세계로 가는 전환점의 이정표 같은 임성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복사꽃 먹는 오후』를 통해 순수 서정을 환하게 밝히는 이 시대의 진정한 음유시인 임성구의 수채화 빛 감성을 느껴보자.
기본정보
ISBN | 9791190566230 |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7월 15일 | ||
쪽수 | 120쪽 | ||
크기 |
127 * 201
* 12
mm
/ 189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작가기획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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