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과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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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움도 차가움도/ 비바람도 견뎌내며/ 탄탄히 뿌리내리고 내려/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의 저 아름다움(「상처」)’처럼 그의 나라가 임했으면 좋겠다.
- 이월춘(시인)
이규석 시인은 생존의 ‘갑·을’ 관계 속에서 늘 ‘을’의 입장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본다.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작은 공장(하청업체)을 운영하다 공장의 일용직으로, 시한부의 삶을 살며, 동네북으로 구조조정을 당한다.
이름 모를 별처럼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전봇대처럼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시인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잠 못 들며 ‘회의’의 생리통을 시로써 앓고 있다. 우우우 목마른 울음을 울고 있다.
- 이순일(시인·함안 군북 주민)
작가정보
저자(글) 이규석
작가의 말
두 번째 시집을 묶는다.
첫 시집 이후 11년이나 걸렸다.
팍팍한 삶을 떠나 게으르고 나태했다는 것이다.
변명만 쌓고 핑계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성의 아픔이 오도록 후회를 빡빡 긁는다.
이제는 흔들리지 말고 가야 한다.
흔들리면 무너지고 뽑힌다.
질끈 다시 마음을 다잡아 맨다.
특히 표성배 시인께 고맙다.
선뜻 제 시집을 허락해 주신 황금알 출판사께 감사드린다.
2018년 가을
이규석
목차
- 1부
전봇대·12
도마·13
돼지·14
가시·15
근시안·16
왜·17
더덕·18
향수·19
꾸중·20
상처·21
묵은김치·22
로봇시대1·23
로봇시대2·24
잠 못 드는 밤·25
똘기·26
화풀이·27
손톱을 깎으며·28
외상·29
2부
갑과 을 1·32
갑과 을 2·33
갑과 을 3·34
갑과 을 4·35
갑과 을 5·36
갑과 을 6·37
갑과 을 7·38
갑과 을 8·39
갑과 을 9·40
갑과 을 10·41
구조조정·42
너무 맑아서·43
동네북·44
비정규직·46
가뭄시대·48
동물원·49
3부
잡초·52
무명씨·53
자리·54
얼굴·55
누굴까·56
등불·58
센스등·59
갈증·60
옹이·62
가로수·64
바가지·65
명퇴·66
4부
촛불·68
꽃·70
조짐·72
박산골짜기·74
성형수술·75
강·76
해바라기·77
뚫어·78
마·79
만남을 두고·80
횡단보도·82
역사교과서·83
기회주의·84
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86
아직도 산은 말이 없고·88
■ 해설 | 권온
깨어있는 의식이 찾은 심오한 의미·92
책 속으로
1부
전봇대
?
어깨 무겁다고
슬쩍
내려놓을 수도 없는 짐
스스로 길이 되어
흔드는 말들은 삼켜야 했다
?
세찬 바람 불고 갈 때마다
우우우 속울음 울어도
감히 일탈할 수 없는 제자리
꿋꿋하게 지키고 섰다
도마
?
고향 빈집 부엌에 뿌옇게 먼지 덮인
낡은 도마를 본다
제 몸 닳고 닳아 상처뿐인 몸
?
배꼽시계 생떼 쓰며 울릴 때마다
고픔 채우는 그 칼질 소리
징검다리로
버팀목으로
묵묵히 썰고 썰어주셨던 어머님
?
팔순이 넘는 당신의 연세보다
자나 깨나 자식들 위한 걱정 앞세워
시리도록 하얗게 피어난
한 송이 꽃
돼지
?
어제도
오늘도
시곗바늘에 밀려가는 시계추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하루
?
주면 주는 대로
먹고 또 자고 또
?
하루가 건성으로 쌓인 달력
무관심으로 넘기고 넘어갈 때
피둥피둥 게으른 살만 찌고
?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의 고민이 없어
하늘을 쳐다볼 줄 모른다
가시
?
손에 가시가 박혔나 보다
따끔따끔 찔러올 땐
아찔할 정도로 소스라친다
?
너무도 작아서 가물가물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것이
이렇게 맥 못 추게 만드는 걸 보면
?
살아오면서 작고 약해 보인다고
거만하게 무시한 적은 없었던가
체면만 앞세워
남의 가슴 시리게 한 적은 없었던가
두렵다고 몸 사려
잘못을 보고 외면한 적 또한 없었던가
?
손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
투명하지 못했던 내 양심을 향해
충고처럼 아프게 콕콕 찔러온다
근시안
?
머물지 못하는 바람처럼?
슬픈 일을 당하거나
가슴 아픈 고통 생길 때마다
거짓말하지 않는 눈물 가졌던 내가
손에 잡히는 만족들만 챙기고부터
분명한 옳고 그름을 두고도
내 눈은 차츰 외면하기 시작했고
남을 위한 조금의 귀찮은 일도
내 몸은 당연하게 모르쇠로 변했다
그 외면의 모르쇠들이
긍정의 시각과 마음마저 멀게 한 지금
가야 할 삶의 길목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꼼짝할 수 없는
아 내 발목
왜
?
아닌 것은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
그렇게 하면 안 돼 하고
입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하는데
발바닥이 꼼짝하지 않는다
?
입과 발을 스스로 묶어버리는
저 두려움과 불안함
언제 어디서 만들어진 것일까
?
하느님께 물어볼까
부처님께 물어볼까
더덕
?
향과 맛이 너무 좋아
거름을 넣고 물도 주며
고향에 있던 더덕
화분에 옮겨 심으면서
마음은 벌써 안달이다
?
술을 담을까
양념구이 해 먹을까
향이나 즐기게 그냥 둘까
?
며칠 지나 물을 주려고
베란다 문을 여는 순간
더덕 잎들이 풀죽어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는 것이
?
자식 위해 고향 등지고
체질 맞지 않는 산성의 땅 도시에서
손자 손녀의 재롱에도 빠지지 못해
시름시름 웃음 잃어 가시는
내 어머님 같다
향수
?
나이 탓일까
이건 분명
나를 부르는 소리이다
?
가만히 귀를 모아도
주위를 둘러보아도
바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
흑백추억처럼 질기고 질긴
그 아린 가난에 지긋지긋했던 고향
미련 없이 다 지운 줄 알았는데
?
봄볕 화사한 오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꾸중
?
한바탕 잘못을 꾸짖듯
아버님의 따끔한 회초리 맛 같은
쨍쨍한?햇볕의 뜨거운?말씀들
땅벌의 침처럼 살 속으로 파고든다
?
불판 위 삼겹살 그 기름같이
줄줄 땀 흘리면서도 꼼짝 못 하고
지글지글 익어간다는 이 따가움
어머님의 위로 같았던 바람은
모두 어디로 외출 간 것일까
선풍기마저 지쳤는지
단내 나는 열기만 덜덜 뿜어내고
?
시원하게 들렸던 매미울음 소리도
오늘따라 지청구로 왁자하게 몰려오는
카랑카랑한 한여름 오후
뿌리 깊은 저 넉넉한 숲을 본다
출판사 서평
이규석의 이번 시집에서 이 글이 각별히 주목한 시편으로는 「전봇대 」, 「가시 」, 「잠 못 드는 밤 」, 「화풀이 」, 「갑과 을 4―결재 」, 「갑과 을 5―블랙리스트 」, 「갑과 을 6―단가를 위하여 」, 「무명씨 」, 「가로수 」, 「박산골짜기 」, 「아직도 산은 말이 없고 」 등이 있다. 「전봇대 」에서 시인이 관찰하는 대상은 ‘전봇대’인 동시에 ‘자기(自己)’이다. 이 시의 대상이 하나의 ‘전봇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곧 가장(家長)이며 무엇보다도 진정한 인간이기 때문일 테다. 「가시 」에서 “손에 박힌 작은 가시하나”에서 아픔을 느낀 ‘나’가 스스로의 ‘양심’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이규석이 ‘사물’과 ‘주체’가 하나가 되는, ‘대상’과 ‘나’가 동일화하는 시적인 순간을 기꺼이 껴안는다는 사실과 다른 말이 아니다. 우리 시대 수많은 가장의 입장을 절절하게 대변하는 「잠 못 드는 밤 」에는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울분의 근원에 ‘나’가 존재한다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대인이 겪는 화, 울분, 분노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경우가 많다. 「화풀이 」는 경쟁 사회를, 피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 있다.
‘갑과 을’ 연작은 이규석이 이번 시집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핵심 테마 중 하나이다. ‘갑(甲)’과 ‘을(乙)’의 관계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갑과 을 4―결재 」의 화자 ‘나’는 “하루벌이로 사는 것과 같은” 입장인데, “결재일이 지났는데도 입금 소식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는 ‘나’의 문제이자 시인의 문제이며 이 시대를 헤쳐 나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악성 거래처를 퇴출시켜야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늘 허물어”지는 게 현실이다. 「갑과 을 5―블랙리스트 」는 “갑과 을”의 구조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수작(秀作)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과 을의 공고한 관계를 보여주는 지점에 「갑과 을 6―단가를 위하여 」의 핵심이 위치한다.
민중(民衆)’ 곧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일반 국민 또는 피지배 계급으로서의 일반 대중의 대부분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 곧 무명씨일 테다. 「무명씨 」는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일반 국민 또는 일반 대중의 진면목을 포착한다. 이규석은 ‘가로수’를 이야기하지만 독자들은 ‘가로수’ 너머에 위치한 누군가를 찾는다. 우리는 「가로수 」를 읽으며 “명퇴 강요 당”한 누군가를, “하루아침에” “낯선 곳으로 발령 난” 어떤 이를 생각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생각할 때, 이규석의 「박산골짜기 」는 유의미한 시이다. 우리는 시인이 환기하는 “그 억울한 역사”를, “그 날의 현장을”, “이 박산골짜기를 먼저 기억할 일이다” 역사를 향한 이규석의 관심은 일회적인 게 아니다. 시인은 거창 ‘박산골짜기’ 학살에 이어서 이번에는 마산 ‘진전면 곡안리’에서 발생한 학살에 주목한다. 전자(前者)의 주체가 국군(육군)이었다면 후자(後者)의 주체는 미군이었다. 이규석은 「아직도 산은 말이 없고 」에서 “진실과 정의와 평화”가 깃든 대한민국을 세울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음을 잔잔하면서도 힘찬 음성으로 말하는 게 아닐까?
이규석의 이번 시집은 첫 시집 「하루살이의 노래?를 간행한 지 11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맞이하는 새로운 시의 아침인 셈이다. 시인이 내세우는 다양한 시편 중에서 ‘갑과 을’의 구조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 일련의 연작과 한국 사회의 치유되지 않은 아픔 중 하나인 국군 또는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 시편 등은 우리 시단(詩壇)에 심오한 의미를 던지는 작품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깨어있는 의식으로 가득한 이규석의 시 세계가 따뜻한 전진을 지속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시인의 말
기본정보
ISBN | 9791189205263 |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11월 30일 | ||
쪽수 | 111쪽 | ||
크기 |
129 * 211
* 12
mm
/ 15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황금알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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