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쓰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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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선고를 받은 순옥. 그녀는 어렸을 적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사라졌던 ‘빠쓰정류장’을 떠올린다.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곳엔 분명 버스정류장이 아니라 ‘빠쓰정류장’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서 있었다. 죽음을 앞둔 순옥과 직장에서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남편, 그리고 남자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여자로 살아가고 있는 리브. 세 사람은 어디엔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빠쓰정류장’을 찾아서 무작정 전국을 떠돌기 시작하는데….
작가정보
저자 김비는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를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데 함께 했다.
목차
- Prologue. 언니, 탱고 알아요? 9
1. 있으면 좋겠다, 거기 17
2. 예쁜 담배 27
3. 가방을 머리에 쓴 시인 39
4. 시간의 이름 59
5. 양평의 근처에서 73
6. 금화다방 87
7. 눈썹을 그리는 법 107
8. 여기, 있다 123
9. 줄무늬 물고기 139
10. 딸기 맛이 날 때 161
11. 고래의 말 177
12. 그녀의 이름은 안미옥 195
13. 빨간 웃음 209
14. 마음을 움직이는 말들 223
책 속으로
"어느 날 나는 그가 찍어온 사진들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예쁘고 기분 좋아지는 것들도 많은데, 왜 맨 날 이런 걸 찍으러 다녀?’
그의 사진 속에 있는 건 하나같이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사람이 없는 버려진 의자이거나, 기울어진 나무문이거나, 주인을 잃은 자전거이거나, 깨져 도드라진 도로의 블록이거나. 그 때 그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예뻐지라고. 너희들도 이렇게 누군가의 사진 속에 담기고 있으니, 언제나 예뻐지라고.’"
"울고 있던 건 언제나 남편의 등짝이었는데, 꿈속의 아이처럼 내가 볼 수 없는 그런 뒷모습뿐이었는데. 이렇게 내 품에 안겨 우는 그를 나는 처음 보았다. 울고 있는 남자의 어깨가 이렇게 작고 안쓰러운 건지 미처 알지 못했다. 불쌍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었을까. 틀린 말이 아니라면 그건 나쁜 말이었을까.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약한 사람으로 폄하시키고야마는 그 이기적인 말.
불쌍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고맙다고 할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 왔다. 미안하다, 라고 말하지 않고 고맙다, 라고 말했던 것처럼,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 반갑고 고마운 사람이라고.
토닥토닥 아이를 달래듯 남편의 등을 두드렸다. 그런데도 남편의 흐느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불쌍하다는 말 한 마디로 얼마나 많은 아픈 시를 떠올리고 있는지.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내 사람."
"하늘을 올려 보았다. 하얀 눈송이들이 나풀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흰 눈 위에, 커다란 꽃송이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핑크와 보라가 엉켜 눈 속에 핀 봄꽃의 무더기. 눈 위에 커다랗게 너부러진 그것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물론 꽃이라면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고귀한 모양새로 움직이지 않는 일은 당연하겠지만, 처음부터 그는 꽃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저 꽃이 되고 싶어 했을 뿐.
- 리… 리브야?
나는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꽃의 이름을 불러 주었고, 이른 봄 날, 그는 나에게로 와, 한 무더기 꽃이 되었다."
"리브는 피식 웃었다.
- 근데 시간이 너무 짧긴 하더라. 시간이 그렇게 짧은 건지 몰랐네. 주구장창 늘어진 게 시간이고 계절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것 같더라. 짧아, 너무 짧아. 뭐 사람을 알고 자시고 하기에는 너무 짧아. 그러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그는 응급실 천장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봤다. ‘짧다.’ 하는 이야기를 이제야 나도 알게 되었는지,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 근데 그거 하난 알겠더라.
고개를 들었는데, 그의 모습은 물빛으로 흔들렸다.
- 언니도 나도… 돌아갈 데가 없다는 거.
무슨 말인가 싶어, 큰 눈을 멍청하게 껌뻑였다. 무언가에 찔린 듯 가슴이 아팠다.
- 왜, 사람들한테는 그런 게 있잖아? 뭐 설날이나, 추석날 같은 때, 돌아가고 싶고, 돌아가는 그런 고향. 좋았든 싫었든 어린 시절 생각하면서 호호 거리고 웃을 수 있는 사람들 만나는 거. 그래서 그렇게 웃고 떠들고 그럴 수 있는 고향. 근데, 언니도 나도 그런 게 없잖아, 안 그래?
그가 한 말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졸졸 내 안에서 물이 흘렀다. 봄 햇살 때문에 내 마음 속에도 쌓였던 무언가 녹고 있는지.
- 맞잖아? 언니도 없잖아? 빤쓰인가, 빠쓰인가, 거기가 언니 고향은 아니잖아? 거기 간다고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언니가 거기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거기에서 터미널 간판 붙들고 울고 짜고 한 기억 밖에 없다면서?
지워졌던 것들이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텅 빈 간판을 붙든 채였다. 그 위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빠쓰 정류장’이든, ‘버쓰 정류장’이든.
- 나도 그렇거든. 고향에 가도 거기에는 내가 없어. 사람들도 나를 모르고, 나도 사람들에게 나라고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도, 내가 알고 있는 나도 거기에는 없어. 그렇다고 날 수술해준 의사선생님 병원이 있는 압구정 사거리에 가서 여기가 내 고향입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호홋.
그는 또 다시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누가 지웠는지, 그의 손톱 끝에 분홍빛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죽으면, 영혼이라도 고향에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아무데도 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무섭고, 두렵고…….
그의 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너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그건 여자가, 여, 자, 가! 자기 언니와 결혼을 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야, 알아?
‘여자’라고 말하는 남편의 목소리는 다시 도드라졌다.
- 오빠, 그만, 그만해.
있는 힘을 다해 리브의 등 뒤에서 그를 뜯어냈다. 그러나 쏟아진 그의 말은 벽 앞에 서서도 계속되었다.
- 여자 옷 입었다고 다 여자냐?
- 오빠!
있는 힘을
출판사 서평
한편의 시와 로드무비를 닮은 소설,
여성동아 등단작가 김비의 신작 장편소설
- 생의 마지막을 선고받은 사람, 경계 너머로 밀쳐진 사람, 한 발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
세 사람이 함께 여행을 떠났다. 목적지는 빠쓰정류장이다.
"알고 있다. 꿈이란 원래 그런 것. 날개 없는 것들은 하늘을 날고, 사랑을 잃은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그런 것이 바로 꿈 속. 팍팍하고 칙칙한 현실을 살고 있는 것들에게는 언제나 보드랍고 환한 희망이던 것이, 그런 꿈 속."
폐암 선고를 받고 망연자실한 순옥. 그녀는 문득 어렸을 적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사라졌던 빠쓰정류장을 다시 떠올린다.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곳엔 분명 버스정류장이 아니라 ‘빠쓰정류장’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 앞에 불쑥 등장한다.
성별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는 분명 남자였다.
- 언니, 탱고 알아요?
그는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눈물을 훔쳐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올려보는데, 그는 팔꿈치를 들어 올려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 왜 있잖아요? 짠짠짠짠, 짠짠짠 짠짠. 짠짠짠짠, 짠짠짠짠 짠짠. 몰라요, 탱고?
병원의 계단참이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선고를 들은 후였고, 기대어 엉엉 울어버릴 수 있는 누군가의 가슴이 간절하던 순간이었다.
죽음을 앞둔 순옥과 직장에서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남편, 그리고 남자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여자로 살아가고 있는 리브, 세 사람은 세상 어디엔가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빠쓰정류장을 찾아서 무작정 전국을 떠돌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자칫 암울하고 지루하고 절망적일 수도 있는 그들의 여행을 뒤쫓으면서 독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짓게 된다. 세상 저 아래 어둡고 비좁은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에 가슴 한편이 아려오면서도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런데, 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웃고 있었다.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시간을 지나는 사람들을 그리며, 그들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며 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햇살이 드는 쪽을 바라보았다. 희망이란, 거기 환하고 밝은 곳이 아니라, 여기 어둡고 축축한 곳인지도 모르겠구나. 가장 끔찍한 곳을 들여다보며 어스름 새어드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일이, 참으로 내게 절실했던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건 납작하게 깔려있던 삶을 슬쩍 들어 올리는 참으로 고귀한 깨달음이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살아가는 쪽을 선택한 작가 김비. 그녀는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소설가로 등단했다. 신작 <빠쓰정류장>은 장편소설이지만 문장마다 아름답고 처절한 시가 흐른다.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이 끝난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드는 걸 보면 한 편의 로드무비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무작정 길을 떠난 세 사람은 과연 빠쓰정류장을 찾게 될까?
소설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반전으로 마무리된다. 이야기의 힘이 뛰어난 소설 <빠쓰정류장>은 장르 소설로도, 퀴어문학으로도 분류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로 치면 정극에 가깝다. 세밀하고 섬세한 심리묘사와 여성적인 언어, 아픈 이야기를 담담하면서 치열하게 풀어내는 힘의 원천은 문학을 대하는 그녀의 철저한 작가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가의 말:
잘가라, 새벽 ...
오래도록 '희망'이란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그건 내 안에 없는 언어였다. 사람들은 유행처럼 너무도 쉽게 그런 말들을 떠올렸는데, 도무지 나는 그러지 못했다. 억지로 입안에 밀어 넣은 말들은 모래알처럼 서걱거렸고, 번쩍거리는 희망이나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 앞에 나는 점점 작아졌다. 결핍이나 소외는 언제나 내 삶의 일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제일 구석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나는 외롭다고 느끼기보다는 평화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생의 마지막을 선고받은 사람과, 경계 너머로 밀쳐진 사람과, 한 발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은 어쩌면 그러한 고립 속 나 자신의 파편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들을 억지로 일으키지 않고, 물끄러미 그들의 발걸음을 지켜보는 이야기를 써내려갔던 것은 그대로 주저앉은 나를 들여다보는 응시(凝視)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말을 가르치거나, 어디선가 새어 들어오는 '빛'을 가리키지 않았던 것은 내 안에 그런 언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는 웃고 있었다.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시간을 지나는 사람들을 그리며, 그들의 마지막을 이야기하며 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햇살이 드는 쪽을 바라보았다. 희망이란, 거기 환하고 밝은 곳이 아니라, 여기 어둡고 축축한 곳인지도 모르겠구나. 가장 끔찍한 곳을 들여다보며 어스름 새어드는 빛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일이, 참으로 내게 절실했던 바로 그것이었구나. 그건 납작하게 깔려있던 삶을 슬쩍 들어 올리는 참으로 고귀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아직도 '희망'이라는 말을 모른다. 누군가에게 목소리를 높여 '희망'을 외치거나, 환한 빛을 가리키며 '거기'라고 말할 자신도 없다. 다만 그들에게 보여주려 한다. 내가 숨어들었던 그 어둠 속을, 그들이 지나가고 있는 절망들을, 그럼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나와 그들의 발걸음들을.
사람들에게 소외되었던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나오게 해 준, 도서출판 가쎄의 김남지 님께 감사를 전한다. 자칫 우울하게만 읽힐 수도 있었던 이 이야기의, 그 어떤 밝음보다 더 환한 진심을 읽어주신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또한 이번에도 역시 내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어준 내 짝지, 박조건형 씨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직장을 다니는 바쁜 중에도, '영업이사'를 자처하며 부끄러운 내 원고의 산파 역할을 하는 그에게 사랑보다 더 커다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름없는 소설가로서, 또 한 권의 책을 받아들었다. 이것은 내 삶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했지만, 또한 여러분 모두의 삶을 일으키는 소중한 선물이기를 바란다.
2012년 가을 남쪽에서 김비
기본정보
ISBN | 9788993489279 |
---|---|
발행(출시)일자 | 2012년 10월 31일 |
쪽수 | 336쪽 |
크기 |
144 * 210
* 30
mm
/ 394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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