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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겨레신문
카토는 나치 저항의 대명사인 조피 숄과 같은 1943년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지만, 그녀의 이름은 나치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조차 생소하다. 히틀러가 물러가고 서독과 동독에서 나치 청산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붉은 오케스트라'의 활동은 악용되고 왜곡되었으며, 그 일원이었던 카토의 활동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는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생존해 있는 가족, 같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들, 카토와 직접 동시대를 공유했던 생존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료를 찾아내 그녀의 생애를 콜라주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카토의 생애와 그 사후의 조명 과정을 통해, 역사 속에 던져진 개인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양장본]
작가정보
Hermann Vinke
1940년 독일 레데(Rhede) 출생. 방송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 1981년부터 아에르데(ARD) 동아시아 특파원, 북독일방송(NDR)의 미국 특파원 등을 지냈으며, 2000년부터는 아에르데의 동유럽 및 발트 3국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프리츠 하르트나겔 - 조피 숄의 친구』, 『제3제국』, 『조피 숄의 짧은 생애』 등이 있다.
충북 영동 출생. 한남대학교를 거쳐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육학, 정치학을 공부했다. 지금은 한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다. 시민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함석헌 기념사업회, 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 환경운동연합 등에 관여하고, 격월간 〈표주박통신〉 주필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성찰의 창문으로 바라본 세상』, 『지역이 학교요 학교가 지역이다』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공역)가 있으며, 〈표주박통신〉 20주년 기념 『사랑하는 벗에게』를 펴낸 바 있다.
목차
- 머리말 -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의 짧은 생애
1. 북서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비밀에 가득한 빛 | 아름다운 금발의 수병, 얀 본트여스 판 베이크 | 무용수 올가 브렐링 |
어려운 시절은 언제나 가득했어 | 도예의 길을 가기로 한 얀 |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올가 |
얀을 대신한 프리츠 |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집 | 네덜란드를 다녀오다 | 뷔메에서 가져온 세례수
2. 삶의 무대를 넓히다
시골 마을에까지 번진 나치 행렬 | 이혼 그리고 재혼 | 타히티나 멕시코 | 영국에서의 모험 |
하늘을 날다 | 영국인 친구 존 홀 | 베를린으로 가다 | 비행단에 가입하다 | 새 옷과 새 머리 |
피셔후데에 온 존 | 헬무트 슈미트와 친구가 되다 | 죽는 꿈을 꾸다
3. 회의와 저항 사이에서
전쟁의 광풍 속에 느끼는 무기력함 | 제국노동복무에 소집되다 | 이미 전쟁은 가까이에 |
이 편지를 불태우세요 | 옛 사랑과 새 친구 | 베를린에서의 저항 |
금발의 미녀 리베르타스에 이끌리다 | 전단 | 지옥에서 추는 춤 | 얀의 가정에 찾아온 위기 |
하인츠와 함께 살다 | 거친 들판에 서 있는 것 같아 | 벽보 붙이기 |
단번으로 그친 슐체보이젠의 송신 | 군부대 속의 ‘범죄자’ | 나는야 방랑자
4. 게슈타포에게 잡히다
아침 8시에 초인종이 울리다 | 마비되는 듯한 충격 | 배신자 앨범 | 시를 읊고 괴테를 읽는 시간들 |
체포의 물결 | 라이너 퀴헨마이스터 | 함께하지만 서로 볼 수는 없는 곳 |
이곳에서도 웃을 수 있다 | 얀의 석방 | 공개재판의 결과가 나오다 | 1942년 12월 22일
5. 사형 선고
군인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 | ‘슈트렐로와 그 외의 사람들’에 속하다 | 주임검사 뢰더 |
스스로를 용서하고 스스로와 화해하기를 | 선고 | 나는 내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
평안이 깃들기를 | 전선에서 죄과를 치르게 해주오 | 나에 대한 배려는 요청하지 않겠다 |
제국원수 괴링 | 바라는 것은 없다 | 안경 두 개
6. 희망과 기다림 사이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 하얗게 얼다 | 누나 꿈을 꾸고는 해요 | 집중포화 속으로 |
쓰러져간 친구와 전우들 | 고향에서 보낸 휴가 |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다 |
알렉산더 광장을 떠나다 | 철창 앞에 올려놓는 꽃 | 여성감옥으로 다시 이감되다
7. 마지막 교도소
재회이자 마지막이 된 만남 | 얼마나 더 견딜 수 있겠어? | 플뢰첸제 교도소 |
사면을 거부한 히틀러 | 그날 1943년 8월 5일 | 팀에게 | 미트여에게 | 엄마에게 |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 3분마다 단두대가 동작하다 |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아 |
죽음은 나를 보지 못했다 | 사랑하고 사랑하는 팀에게 | 마지막 단계를 향하여 |
오른손을 관통하다 |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을까
8. 카토, 냉전의 희생자
남겨진 것 | 저는 얼굴을 그리지 않습니다 | 완전히 달라진 것과 여전히 그대로인 것 |
‘붉은 오케스트라’를 소련 스파이조직으로 몬 뢰더 | 스파이 히스테리 | 뢰더의 변모 |
허위 신화의 탄생 | 색칠하기 | 이중의 형벌 | 부당한 과정들이 계속되다 |
드디어 완전히 명예가 회복되다
에필로그 - 죽은 자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를 또 한 번 죽이는 것이다
옮긴이 후기 - 죽어서 영원히 사는 자
주
1차 출전
참고문헌
책 속으로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아주 놀랐습니다. “얘, 너 미쳤구나!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카토는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라고만 했지 그 집단에 속한 어느 특정 인물의 이름을 대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의무야.” 카토는 저에게 한동안 선전 연설이라도 하듯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말했지요. “그렇게는 되지 않아! 스스로 호랑이 입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어. 미친 짓이야.”
- 본문 113쪽에서
저는 지금 저 바깥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놀랍고 무서운 사실에 대해 듣고 있어요. 그러나 더 이상 살고 싶은 의욕마저 상실하게 하는 그런 일들이 저 멀리 바깥세계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저는 지금 놀라움에 사로잡혀 있어요. 이런 일을 저지를 생각이 인간의 머리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행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아무도 믿을 수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는 믿음을, 특히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어서는 안 돼요.
- 본문 118~119쪽에서
카토는 우리 집을 방문할 때면, 항상 정치 상황에 대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우리에게 읽어보라고 전단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 전단에는 정부가 선전하는 긍정적이고 좋은 문구의 이면에는 독일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들이 숨어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카토가 직접 그 전단을 만드는 데 참여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카토에게 위험하니 조심하라고 충고했을 때, 카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모나 이모부처럼 나이 많은 분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요. 어른들은 항상 말만 해. 그러나 우리 젊은이들은 행동해야 해요!”
- 본문 151~152쪽에서
사람들은 말하겠지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야”라고요. 그 말에는 너무나 많은 책임과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라이너, 사람은 자신이 정말로 누구인지를 증거 자료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지막 진술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 본문 197쪽에서
휴가 기간 동안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감옥에 갇혀 있는 누나 도도를 면회했던 일이다. 누나가 교도관을 따라 면회실에 들어섰을 때,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누나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매일 허여멀건 수프만 먹은 탓에 피부는 속이 비칠 만큼 잿빛이 되어 있었고, 얼굴과 몸은 보기 흉하게 부어 있었다. 누나는 나를 보자 흐느껴 울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본문 252~253쪽에서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활동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더 이상의 자료는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가 확신을 가지고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나치 폭압자들이 스물두 살밖에 안 된 여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겠습니까? 단순히 반국가 행위를 곁에서 도왔다는 것 때문이겠습니까?
- 본문 330쪽에서
한 문장 한 문장씩 조금씩 읽고 옮기면서 점점 더 깊이 그녀에게 빨려 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즐기고 기뻐하다가, 이것이 아닌데 안타까워하다가, 밑 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졌다가, 이럴 수가 있을까 하고 치솟는 분노를 느끼다가, 그래도 거기에 빛이 있구나 하고 깊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다 읽고 옮기고 난 지금, 아주 어둡고 음산한 긴 굴을 빠져나와 햇살 찬란히 비추는 밝은 세계를 거니는 느낌이다. 모두가 다 성난 짐승처럼 날뛰는 때, 차분하게 사람임을 증명해 보이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큰 위로요 휴식이 되기 때문이다.
- 옮긴이 후기 342쪽에서
사람이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일생을 살다가 사람답게 죽어서 다시 살아 사람으로 남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이지만 사람을 뛰어넘을 때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람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시대와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홍수처럼 밀려 내리는 물결을 헤치고 치솟아 오르는 물고기 떼처럼 물살을 거스르는 삶을 살 때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
- 옮긴이 후기 342~343쪽에서
출판사 서평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는…
1920년 독일 북서 지역의 브레멘에서 태어나, 그 부근의 조그마한 마을인 피셔후데(Fischerhude)에서 자랐다. 당시 피셔후데는 보르프스베데(Worpswede)와 함께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카토의 집 역시 음악을 하고 도자기를 굽는 예술가 집안이었다. 카토의 아버지 얀 본트여스 판 베이크(Jan Bontjes van Beek, 1899~1969)는 독일의 유명한 도예가였으며(1999년에 회고전이 열린 바 있다), 어머니 올가(Olga Bontjes van Beek, 1898~1995)는 무용수이자 화가였다. 카토의 사후에, 여동생 미트여(Mietje Bontjes van Beek, 1922~)는 화가로, 남동생 팀(Tim Bontjes van Beek, 1923~)은 피아니스트이자 음향 전문가로 활동했다.
카토는 1941년 하로 슐체보이젠(Harro Schulze-Boysen, 1909~1942)이 이끈 반(反)나치 저항 조직의 일원이 된다. 당시 이 조직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게슈타포가 명명한 ‘붉은 오케스트라(Rote Kapelle, 로테 카펠레)’라는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 조직을 일컬을 때 쓰이고 있다. 카토는 ‘붉은 오케스트라’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체포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2년 9월 20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인 1943년 1월 18일 제국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해 8월 5일 베를린의 플뢰첸제 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단두형).
나치 정권이 무너진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시대 동안 ‘붉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재통일(1990) 이후에 ‘붉은 오케스트라’ 및 그 조직원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역사는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을 거부했다!
1980년대 군사독재 치하의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읽혔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이 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에 항거하여 저항 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처형된 조피 숄(Sophie Scholl, 1921~1943)에 대한 이야기다. 조피 숄은 오빠 한스 숄과 더불어 지난 2003년 독일의 체데에프(ZDF) 방송사가 실시한 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독일인’ 4위에 오를 정도로 독일 국민들에게 반(反)나치 레지스탕스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조피 숄보다 한 해 일찍 태어나고 조피 숄과 같이 1943년, 즉 스물두 살의 나이에 나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여성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Cato Bontjes van Beek, 1920~1943)다. 이 두 사람의 생애는 놀랄 정도로 비슷하지만, 사후에 독일 사회로부터 받은 평가는 극단적으로 상반된다. 조피 숄이 독일의 온 국민들이 알 정도의 이름이 되었다면,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는 나치 당대를 살았던 이들에게조차 생소했다. 역사는 왜 이러한 선별적인 기억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헤르만 핑케(Hermann Vinke)가 쓰고 김조년 교수가 옮긴 이 책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는 이러한 의문을 용의주도하게 파헤친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의무입니다!”
‘저항’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억되는 이들을 보면 그 모든 일들의 시작이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 역시 어떤 특정한 계기에 의해, 이른바 이데올로기적인 ‘의식화’ 과정을 거치거나 해서 저항 운동에 몸담게 된 것이 아니었다.
예술가들이 모여사는 마을 피셔후데의 ‘예술가’ 가정에서 자란 카토는 종교나 정치 문제에 있어서 어떠한 태도나 생각을 가지도록 강요당하지 않는, 한마디로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컸다. 본트여스 판 베이크 집안이 ‘제복을 입고 떼를 지어 열 맞추며 행진하는’ 나치의 전체주의, 독일 민족 지상주의, 국가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카토가 반나치 저항 조직에 몸담게 된 것도 거창한 대의나 사명감을 염두에 두었던 게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나치가 보여 주는 광기가 자신이 어려서부터 보아 온 세상과 인간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와 어긋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행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카토는 여동생 미트여와 함께, 베를린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있던 프랑스인 포로들에게 비누나 담배 등을 몰래 건네주는 행동을 ‘위험한 줄 알면서도’ 행했던 것이다. 카토는 그것을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의무”라고 말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러한 행동들은 동생 미트여의 표현처럼 “정치적인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지만, 동시에 아주 높은 차원의 정치 행동”이었다.
절망 속에서도 인간과 자연을 노래한 ‘삶의 서정시’들
카토가 ‘붉은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서 “국민들 사이에 독일의 미래에 대한 걱정이 퍼져 있다”라는 제목의 전단을 작성하며 활동한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혐의로 받은 판결은 ‘사형’이었다. 여러 감옥을 전전하며 보낸, 생의 마지막 아홉 달은 카토의 또 다른 저항의 시간들이었다. “줄 밖에는 쓰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인쇄된 편지지에 적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던 ‘삶의 서정시’들이 담겨 있다. 감옥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을 ‘사형수’로서 보내면서도 인간과 삶을 긍정하는 초인적인 에너지를 보여 준 것이야말로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의 진면목이었다.
사랑하는 딸을, 언니를, 누나를 잃은 가족들은 카토의 삶과 관계된 모든 자료들을 수집했다. 카토가 남긴 편지들, 감옥에서 동료 수감자들과 주고받은 비밀쪽지들, 자신들이 기록한 일기와 메모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그때의 소중한 자료들이 오늘날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를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 셈이다.
지은이 헤르만 핑케는 생존해 있는 가족(여동생 미트여와 남동생 팀)은 물론, 당시 같은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이들을 비롯해 카토와 직접 동시대를 공유했던 생존자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자료들을 찾아내, 카토의 생애를 콜라주 형식으로 재구성해 내는 데 성공했다.
나치의 희생자에서 냉전의 희생자로! -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러나 카토의 가족들은 자신들이 모은 그 자료들이 빛을 발하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리리라는 것은 미처 몰랐다. 히틀러의 나치가 물러가고 종전 뒤 독일이 동서로 양분되면서 나치 청산 작업이 각각 이루어졌지만, 양 독일에서 각각의 체제를 공고히하기 위해 행한 과정을 거치면서, 또 뒤이은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붉은 오케스트라’를 각국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재단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동독은 ‘붉은 오케스트라’를 영웅주의·공산주의적인 저항 단체로만 보았고, 본트여스 판 베이크 가족이 살았던 서독에서는 게슈타포가 카토가 속한 조직을 추적하면서 붙였던 ‘붉은 오케스트라’라는 이름 때문에 이 조직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세계적으로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50~1960년대에는 ‘스파이 히스테리’와 ‘공산주의 색깔 입히기’ 광풍이 휘몰아쳤다. 동독에서는 ‘붉은 오케스트라’가 독일 공산당의 지휘를 받아 반나치 저항을 했다며 체제 선전에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 저항 조직들이 공산당의 지도하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생존자들의 의견은 무시됐다. 서독에서는 ‘붉은 오케스트라’와 공산주의를 연관시키는 ‘색칠’ 작업이 확산돼 갔다. 특히 청산되지 않은 나치 ‘잔존’ 세력들이 앞장서서, 반나치 저항 조직을 오히려 공산주의로 몰아붙이는 ‘반나치 공산주의 히스테리’가 휘몰아쳤다.
이 모든 과정을 몸소 지켜봐야 했던 카토의 가족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다 간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가 느꼈던 것과는 또 다른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를 보며 한국 사회를 생각하다
동·서독의 적대 관계 속에서 나치 희생자들은 죽은 사람이건 살아남은 사람이건 다시 한 번 산산이 부서졌다. 특히 서독에서는 반나치 저항 운동을 하였어도 공산주의적 성향을 보이기라도 하면 논의조차 금지되었고 사후(事後) 보상이나 평가 과정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카토와 ‘붉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시각이 변하는 과정, 본트여스 판 베이크 가족이 카토의 보상 문제와 관련해 독일 사회와 싸워 온 과정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한국 현대사의 여러 장면들이 떠오르게 된다.
분단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독일의 역사는 우리 역사와 많이 닮아 있다. 독일은 나치즘에 의해, 우리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해 강점되었다가 이들 전체주의 세력이 무너지면서 종전을 경험하고, 승전국들에 의해 동서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그 분단의 주체 역시 한쪽은 소련이고, 다른 한쪽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서방’ 진영이라는 것도 같다. 분단의 결과 세워진 동서, 남북의 각 정권은 체제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다른 정권에 동조하거나 현 체제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하에서 똑같이 민족의 독립을 외쳤어도, 좌익 진영에 몸을 담았거나 분단이 되면서 북한 지역에 남게 된 사람들이 남한 사회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았고 받고 있는지를 봐도 알 수 있다.
히틀러의 충복이자 제국군법회의 군사재판에서 카토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나치 검사(후에 판사) 만프레트 뢰더(Manfred Roeder)는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미군은 증빙 자료 불충분의 이유로 1947년 그를 석방했다. 미국의 CIC(미 육군방첩대, CIA의 전신)는 ‘붉은 오케스트라’의 자료를 모으면서 뢰더에게 전적으로 의존했으며, 뢰더는 ‘붉은 오케스트라’가 저항 조직과는 관련이 없고 소련의 스파이 조직이었다고 주장했다(매카시즘 광풍이 불기 직전인 당시, 미국이 ‘붉은 오케스트라’를 어떻게 바라봤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뢰더는 후에 나치당의 후신인 사회주의제국당SRP의 연설자로 활동했고, 1960년대 말에는 글라쉬텐(Glashuten) 부시장 겸 검사로 일하기도 했다.
나치 검사 뢰더가 냉전 이후 보인 변모를 보면, 청산되지 못한 부당한 역사가, 그 역사로 인해 고통을 받았던 이들에게 이중·삼중의 고통을 더욱 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하의 친일 세력들이 해방 뒤, 정부 수립 뒤에도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친일로 쌓은 재산으로 넉넉한 삶을 살았던 우리의 지난날과도 너무나도 똑같은 상황인 것이다. “한번 가해자였던 사람은 언제라도 다시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이들이 비단 독일의 본트여스 판 베이크 가족 사람들만은 아닐 것이다.
역사 속에 던져진 개인, 어떻게 기억되는가의 문제!
이 책은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의 생애와 그 사후의 조명 과정을 통해,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 던져진 일개인의 의미를 묻고 있다. 고향 마을 피셔후데의 자연을 사랑하고 ‘하늘을 날고 싶어’했던 한 여성이 반나치 저항 운동에까지 나서게 된 일, 누나를 처형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전장에 뛰어들어야 했던 그 남동생, 그렇게 사랑하는 딸, 누나, 언니가 그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인정받기는커녕 ‘공산주의 스파이’로 몰려 오히려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살아남은 가족들…… 그들에게 있어 과연 역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또한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다. ‘○○명 몰살’ ‘○○명 전사’와 같이 간단하게 표현되는 역사적 기술(記述) 속에 포함된 그 수많은 일개인들, 그 숱한 ‘무명성(無名性)’ 속에 숨을 수밖에 없는 그 개개인들이, 역사를 기록하고 평가하는 현시대의 시스템 속에서 올바로 기억되고 있는가의 문제다. 이 책은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보다 역사적으로 더 큰 족적을 남겼던 이들, 혹은 그 반대 경우의 사람들이 오늘날 왜곡된 평가와 외면과 무관심 속에 잊혀 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기록”,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역사 자체가 정복자와 권력자 중심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세(勢)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자 종래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미 검증된 역사적 사실마저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고 호도하고 악용하려는 이들에 의해 덧칠이 가해지기도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20세기 중후반의 암울했던 독재 시대에 조작되고 왜곡된 여러 사건과 판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국민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정치권의 선동에 따라 그 재평가마저도 온전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와 ‘붉은 오케스트라’에 대한 재조명은 독일의 재통일(1990)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카토를 보면서, 일제 강점하 및 해방공간에서의 우리의 독립 운동과 정치 활동, 한국 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색깔을 입히지 않고 정치적 선동에 휘둘리지 않고 최대한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과연 언제일까 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20세기 말 독일에서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의 굴레와 억압을 벗어던지고 아름답게 부활할, 숨겨진 역사 속의 위대한 한국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본다.
기본정보
ISBN | 9788992467117 | ||
---|---|---|---|
발행(출시)일자 | 2007년 11월 19일 | ||
쪽수 | 368쪽 | ||
크기 |
128 * 188
mm
|
||
총권수 | 1권 | ||
원서명/저자명 | Cato Bontjes van Beek : "Ich habe nicht um mein Leben gebettelt" : ein/Vinke, Her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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