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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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 정석희는 1943년 경남 진주 출생. 여덟 살 때 6·25 전쟁을 겪었고, 할머니와 삼촌 그리고 아버지를 잃었다. 그해 사천군 산골마을로 들어가 할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땔나무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초등학교를 마친 뒤 서당을 다녔고, 장학금 주는 곳을 찾아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공부를 했다. 중앙대 경제학과 재학 중 군에 입대해, 철들고 나서 처음으로 하루 세 끼를 밥으로 먹었다. 1971년, 한일은행에 입사했다. 지점장으로 네 번째 지점을 맡았을 때 IMF 사태를 맞았고 1998년, 27년 간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저서로 수필집《보리는 늦가을에 씨를 뿌렸다》및 옛 직장 동료들과 10년 간 전국의 이름난 산사들을 찾아다닌 기록을 모아 펴낸 《10년 간의 하루출가》가 있다. 5년 전, 50일 간격으로 태어난 두 외손주를 키우겠다고 나선 건 순전히 딸들에 대한 AS 차원이었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대단한 재력도 권력도 없는 아비로서 반듯하게 잘 자란 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모든 게 낯설고 어렵하기만 하던 두 아이 돌보기는 이내 난생 처음 맛보는 환희와 보람을 선물했고, 내 인생 최고의 자랑이 되었다. 이 책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는 두 손자 도헌, 경모와 함께 한 지난 3년 간의 아름다운 기억 모음이다.
목차
- 프롤로그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아이들을 중심으로 우리는 돈다
새 생명을 만나다
우리집은 어린이집
이름은 운명이다
아이와 함께 사는 이의 노파심
충일하게 늙어가는 방법
잔병 치닥거리
일회용 기저귀 예찬
안아주지 말라고?
뱀딸기를 찾아서
다 사람 사는 소리
엄마들을 위하여
아이를 많이 낳게 하려면
네 아이의 추억
콩 심은 데 콩 나고
딸들에 대한 AS
엄마는 약하다
아내는 슈퍼할머니
젖먹이 젖먹이기
이모랑 결혼할래요
할아버지가 놀아주는 법
유모차의 힘
놀이터 순례
손자는 다 소용 없다고?
수리수리 마수리
옛날얘기 해주세요
싸움의 기술
젖병과 담요
고무공과 자동차
모델의 추억
아는 것이 더 많아요
순위놀이
오래된 위안, 오래된 협박
최고의 생일선물
아이들에게서 얻는 깨달음
너는 어디에서 왔니?
너 같은 때가 있었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사람은 다 죽어요?
아기는 근심
어디에나 모성은 있다
사위들의 육아법
자식은 뜻대로 안 되는 것
근본적인 질문들
성장과 이별
기저귀 떼기
이등변 삼각형
개와 고양이
세월을 재촉하는 아이들
경모를 보내다
도헌을 보내다
오면 반갑고 가면 섭섭하고
에필로그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며
책 속으로
그것은 오직‘내리사랑’이라고밖에는 일컬을 수 없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웅크리고 있었던, 제어불능의 끌림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겠다. 부모가 모두 밖에서 일을 해야 하니 가장 따뜻한 품에서 떨쳐내어질 어린 생명들을 누군가는 거두고 보듬어야 했다. 생판 모르는 남도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것이 피를 이은 가족만 할까 하는 당연한 생각이 솟구쳤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에게는 손바닥만한 파밭 한 뙈기도 없었고, 방아깨비를 대신할 장난감도 없었다. 외할아버지의‘육아 가담기’는 이처럼 별 기대 없이 담담하고도 당연하게 시작되었다. | 프롤로그 중에서 |
아이들을 중심으로 우리는 돈다
응가만 하면 아기를 들고 화장실로 부랴부랴 달려가는 나를 보고 아내는“할아버지는 똥방자.”하고 놀렸다. 나는 평소의 근엄은 내팽개쳤다. ‘녀석들 똥방자면 어때? 좋기만 한데.’하는 유쾌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내는 언제나 주방 가운데 욕조를 가져다놓고 아기들을 씻겼다. (…) 목도 제대로 못 가누는 아기들을 목욕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묘기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딸들은 쩔쩔 매는 일을 아내는 혼자서도 아무렇지 않게 잘해냈다. 그야말로 네 아이를 혼자 키워낸 내공이 아닌가 싶었다. | 본문 26~27쪽, <우리집은 어린이집> 중에서 |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가고 몸은 늙어진다. 한가롭게 세월을 보낸다고 절대로 젊어지진 않는다. 사람 나이 예순을 넘기면 고작 어떻게 늙어가느냐의 선택만 남는 게 아닐까. 누군가는 평온하고 여유롭게 늙어가는 쪽이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내가 갓난쟁이 두 녀석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길은 이미 포기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길을 즐겁게 가는 수밖에 없다. 종일토록 기저귀를 갈고 또 갈고 똥 묻은 엉덩이를 닦고, 하루에도 몇 번씩 토한 냄새가 진동하는 옷가지를 갈아입혔다. 그러다가도 아기들의 배냇웃음 한 번에 묵은 피로는 씻겨나갔다. | 본문 45쪽, <충일하게 늙어가는 방법> 중에서 |
아기들이 부모를 특히 못살게 구는 시기가 있다. 낮밤이 바뀌고 한밤이나 새벽의 칭얼거림이 심해지는 때다. 그런 기간은 실상 몇 달에 불과한데도 겪는 처지에서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딸과 사위들은 한밤에 아이 때문에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노상 아기를 안아주었던 우리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를 기르는 것은 장거리 경주다. 잠시만 참으면 될 어른의 불편함을 덜기 위해 아이들을 냉정한 방식으로 키우는 것은 나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 애당초 아내와 나는 아기들에게 부족한 엄마를 대신해주고 싶어서 맡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는 모든 자식들의 궁극적인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돈이나 물건으로는 절대 대신할 수 없는 게 바로 그 따스함 아닌가. | 본문 60~61쪽, <안아주지 말라고?> 중에서 |
엄마들을 위하여
아버지니까 괜히 참견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정말 잘 모르는 소치였다. 지금도 딸들에게 심리적으로 충분히 지원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후회스럽지만, 지나간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딸들에 대해서 부족하나마 애프터서비스라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대단한 권력이나 재력으로 뒷받침해줄 수도 없었고 심정적으로 따뜻한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했지만, 그래도 이즈음의 최대 난제라는 육아에서만큼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본문 94쪽, <딸들에 대한 AS> 중에서 |
출판사 서평
저녁 해가 더 빨리 떨어지는 것처럼 나의 남은 세월이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그러나 내 인생이 다 저물기 전에 손주들의 시작과 내 삶의 끄트머리가 겹쳐질 기회가 주어졌으니, 나에게는 다시 없을 축복이었다.
아이의 성장과 발달 과정에서 세대를 넘어선 소통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조부모의 손자 양육은 자식 세대의 수고를 덜어준다는 물리적 측면을 떠나 아기의 안정적인 인격 형성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50일 차로 세상에 나온 외손주들을 위해 난생 처음 기저귀를 갈고 젖병을 물리고 자장가를 부르는 저자의 이야기는 육아기의 전범으로 읽혔다. 전공을 떠나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딸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고마웠고, 외손들과의 교류도 참으로 애틋했다.
자녀교육이라는 난제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이 땅의 무수한 부모와 그 부모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 이희란(부산가톨릭대학교 언어시청각치료학과 교수) |
생의 황혼녘, 서툴게 시작된 한 남자의 ‘진한’ 육아기!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아이 키우기는 어느 시대 누구에게든 최고의 난제지만, 요즘처럼 어려운 적이 있었나 싶다. 한쪽에서는 세계 최저 출산율을 근거로 요즘 젊은이들이 통 고생을 감수하지 않는다며 닦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손주병病”이니 “황혼육아”니 하며, 부모 세대에게 아이 맡기고 출근하는 딸들을 은근히 질책한다. 육아를 개인의 문제로 방치하는 사회 속에서 직장 가진 엄마들이 마지막으로 기대고 의탁할 언덕조차 ‘불효’라는 딱지를 붙여대니, 이 시대 엄마들은 참으로 고단하고 막막하다.
그런데 여기, 딸들의 짐을 기꺼이 나누어지겠다며 남들이 팔 걷어붙이고 말리는 길을 택한 남자가 있다. 풍족하게 지원해주지는 못했지만 자식 4남매는 줄줄이 명문대를 졸업해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 사회복지학자, 법조인, 신문기자가 되었다. 팍팍하고 어렵던 시절 이 악물고 키워낸 자식들이 순탄하게 제 갈 길 가고 있으니 이제 한숨 돌리며 편안한 노년을 즐겨도 되련만, 그와 아내는 기꺼이 외손자를 키우겠다고 나섰다. 그것도 한꺼번에 둘씩이나!
노년의 봄
2006년 11월, 그리고 이듬해 1월에 50일 간격으로 손자 둘이 태어났다. 첫째 손주이자 둘째 딸의 아들인 도헌과 뒤이어 태어난 큰딸의 아들 경모를 저자와 그의 아내는 쌍둥이처럼 함께 맡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기로 한 건 순전히 딸들에 대한 AS 차원이었다. 아이들을 맡아서 돌보게 될 아내가 결정한 일이기도 했지만, 내심 딸들에게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던 지난 시절을 보상해주고 싶은 부정이 간절했다. 물려줄 대단한 재력도 권력도 없는 아비로서, 반듯하게 자라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직장생활에 매여 사느라 자식들은 대부분 아내 혼자 키웠고, 그에겐 손자를 돌보는 일이 첫 번째 육아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모든 게 낯설고 어려웠지만 품에 안은 두 아이는 난생 처음 맛보는 환희와 보람을 선물해주었다. 누군가에게 절실한 존재가 되었다는 뿌듯함, 그리고 하루하루 몰라보게 달라지는 갓난쟁이들을 살피는 일은 미처 예상치 못한 경이와 기쁨이었다. 이들을 맡겨둔 딸과 사위들이 모여들어 집안엔 오랜만에 사람 냄새가 났다. 그에게 아이들과 함께 지낸 3년은 노년에 찾아온, 파릇한 봄이었다.
이 책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는 두 손자들을 돌보며 노년의 즐거움과 가족의 의미를 새록새록 발견해가는 할아버지의 기록이다. 책 속에는 저자가 두 아이들과 티 없이 교감하고, 순수한 헌신의 기쁨을 누리는 모습이 정성스런 육아앨범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담겨 있다. 저자는 손자들과 부대끼는 유쾌한 에피소드와 더불어 육아가 힘들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현실적 장애들, 그리고 인생 후반기를 사는 남자로서의 소회 등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들려준다.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
처음엔 그에게도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외손자를 봐주느니 파밭을 맨다.’거나 ‘외손자를 귀애하느니 방아깨비를 귀애하지.’ 류의 오래된 속담이 환청처럼 들려왔고, 아기를 맡기로 했다는 말에 짜기라도 한 듯 입을 모아 혀를 차는 지인들도 적잖이 신경 쓰였다. ‘나도 결국 늙어서 애나 보게 되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오기도 했고, 마치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는 것 같은 육아의 힘겨움 앞에서 신경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다.
도헌과 경모와 함께 지내게 된 이후, 그의 삶은 철저히 아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집안의 모든 가구에 안전장치를 달고, 문턱 없애는 공사를 하고, 육아용품들이 줄줄이 자리를 잡았다.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칠판에는 아기들이 우유를 얼마나 먹었는지, 응가와 쉬야는 언제 했는지 등 일과가 빼곡하게 기록됐다. 아기들이 아플 때면 체온계 숫자 하나에도 마음을 졸였고, 피부에 빨긋빨긋한 발진이 돋아나자 아토피에 좋다는 뱀딸기를 찾아 유모차를 몰고 주변 야산을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밤낮없이 기저귀 갈고 우유 먹이고, 유모차 한 대씩 번갈아 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 건 피로나 권태가 아니었다. 첫 아이를 키우는 엄마처럼 먹먹한 기쁨에 순간순간 목이 메었고, 정신은 나날이 충일해졌다. 외출하려는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서럽게 울던 녀석은 조금 더 자라자 “누가 제일 좋아?”라는 빤한 질문에 “하버지.”를 외치며 눈을 맞춰주었다. 등에 업혀 동네 놀이터를 순회하던 녀석은 어느새 삐뚤빼뚤 쓴 축하카드와 함께 “우이 하버지, 생이 추카함미다.” 노래를 불러주었다. 손주들 앞에서 평소의 근엄은 사르륵 녹아내렸다. 평생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던 그였지만 유모차만 앞세우면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논리적이고 사려 깊은 경모와 관찰력이 뛰어나고 몸이 재빠른 도헌이 점점 개성을 빛내며 자라는 모습은 마음이 터질 듯 자랑스러웠다.
가족과 삶을 돌아보다
아이들이 가져다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젊을 땐 직장에 매여, 나이 들어선 가부장적 타성에 젖어 무심히 지나쳤던 아내와 딸들의 삶이 그에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보조역할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에 부치건만, 아이들과 온 집안 살림을 돌보는 아내는 얼마나 아프고 힘겨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변변한 세간도 없는 낡은 집에서 혼자 4남매를 키워낸 아내의 노고가 새삼스러웠다. 아들에 비해 딸들에게 제대로 마음 써주지 못했던 지난 시절도 자꾸만 마음에 밟혔다. 일과 가정을 다 지키기 위해 남자들보다 몇 배나 더 힘겹게 분투하는 딸들을 보고 있자니, 그간 무심하게 생각하던 남성 중심 조직문화의 명암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껏 가슴으로 껴안지 못했던 아내와 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육아를 ‘아이 가진 엄마’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현실 속에서 젊은 부모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에 가슴 아파하고, 품속의 아이들이 뛰놀게 될 미래를 그려보는 사이 그의 노년은 너그럽고 풍요롭게 성숙해졌다.
이 시대, 할아버지의 진짜 목소리
아이들은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준비하기 시작한 아이들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 날아간 방아깨비처럼 그의 품을 떠났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는 헛헛함과 그리움, 그리고 고즈넉한 평화가 찾아왔다. 이제 아이들과 ‘매일매일 함께 하던 일상’은 ‘종종 만나는’ 즐거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와 아내는 여전히 아이들을 위한 비상대기조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 놓아두는 우산처럼, 부부는 언제든 딸과 아이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
여기저기서 ‘황혼육아’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내는 지금, 그는 말한다. 나이 들어 아이를 돌보고 키우는 일은 아주 힘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라고. 가만히 있어도 세월은 가는 법이라면,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 진한 행복과 감동을 느끼며 늙어가는 일이야말로 노년을 풍요롭게 보낼 썩 괜찮은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이 책 《네가 기억하지 못할 것들에 대하여》는 명쾌한 자녀교육서나 육아지침서를 넘어, 인생의 황혼기를 정직하게 살고 있는 한 어른의 사려 깊고 묵직한 에세이로 읽힌다. 저자는 정갈한 필체로 일과 육아라는 미로에서 고통받는 젊은 부모들을 위로하고, 밋밋한 시간 속에 놓인 동년배 노인들에게 ‘멋지게 나이 드는’ 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고 다정하게 권유한다. 훈풍처럼 불어오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세대를 넘어 새롭게 소통하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딸들은 언제나 3중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사무노동, 가사노동, 육아노동……. 나만 해도 직장생활을 할 때에는 사무노동만 하면 되었다. 가사와 육아에서는 자유로웠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의 수발을 받으며 편히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딸들은 집에 돌아와도 전혀 쉬지를 못한다. 오히려 전혀 다른 종류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셈이다. (…) 그 분주함과 고됨은 직접 당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가히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렇게 바쁘고 힘든 엄마들이 많은 세상이 편안하고 행복해지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 본문 99~100쪽, <엄마는 약하다> 중에서 |
그때부터 근 30년 동안 나는 밖에서 직장에 충실했고 아내는 안에서 살림을 했다. 소위 살림이라는 것이 해도 해도 표 안 나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몸만 녹아나는 일의 연속이라는 것을 그땐 전혀 몰랐다. 아내는 살림의 고충을 심각하게 토로한 적이 거의 없었고, 나도 아내가 사회생활을 못 해본 것에 별 불만이 없는 줄 알고 지냈다. (…) 이제 와 생각하니 아내의 그 수고스러움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나는 아내에게 조력자가 아닌 또 하나의 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 본문 101~103쪽, <아내는 슈퍼할머니> 중에서 |
할아버지가 놀아주는 법
특별한 계획 없이 시작했던 이 방식은 차츰 일종의 순서를 갖춘 의식이 되었다. 입이 궁금해진 녀석들이 먼저 수리수리 하자고 조른다. 나는 큰소리로 부엌 쪽에 묻는다. “할머니, 애들이 수리수리 마수리 하자는데 해도 돼요?”아내는“착하니까 해도 될 것 같은데요.”라고 신호를 보내준다. 그 사이에 아내는 준비작업을 한다. 이제는 할아버지랑 마주보고 양손의 집게손가락 하나씩을 편 뒤 서로 맞대어서 빙글빙글 돌리며 큰 소리로“수리수리 마수리, 얍!”을 똑같이 외친다. 그러고는 그 손가락으로 함께 권총 쏘는 시늉까지 박력 있게 하고 나서, 냉장고 문을 여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언제나처럼 두어 개 정도의 달콤한 것이 들어 있다. 돌 지나고 말을 배우면서부터 시작된 할아버지의 신통술은 만 네 살을 넘긴 지금까지도 위력을 발휘한다. | 본문 135~136쪽, <수리수리 마수리> 중에서 |
주중에 내가 데리고 자는 날이 많았던 경모는 말이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얘기를 들려달라 청했다. 처음에는 익숙한 소재의 창작물에 흥미를 보였지만, 갈수록 정통 옛날얘기에도 맛을 들였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번을 반복해서 듣고 나자 흥부와 놀부 얘기는 외울 정도가 되었고, 얘기 내용을 복습해도 척척 맞추었다. “제비가 뭘 물어왔다고?”하면“박씨!”,“ 흥부가 뭐가 됐다고?”하면“부짜!”,“박을 탔더니 뭐가 나왔다고?”하면“보무!”하는 식이었다. 나중에는 둘이서 이 보물의 내역에다 온갖 바라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다 집어넣는 놀이도 했다. 엄마 아빠에게서 받고 싶은 선물까지도 포함시켰다. | 본문 140~141쪽, <옛날얘기 해주세요> 중에서 |
“어제 제가 엄마한테 선물 사자고 계속 말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샀대요.”
“그래서 네가 서운했어?”
“네.”
“그래서 네가 어젯밤에 할아버지 위로해주려고 돌아왔던 거야?”
“네.”
고작 만 네 살 난 녀석의 마음 씀씀이에 울컥 목이 메고 눈이 시큰해졌다.
이날 도헌이는“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라는 글자가 분명한, 색종이에 추상화처럼 그린 생일축하카드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그 카드를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장식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내가 손자에게서 처음으로 받은 생일카드인 것이다. | 본문 180~181쪽, <최고의 생일선물> 중에서 |
성장과 이별
몇 달이 지난 후 경모는 산책을 나가서 어른 몸집만한 개 한 마리를 만났다. 경모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어… 어… 난 스무 살이다!”이 녀석들 나이 많은 것이 무슨 큰 벼슬이나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어린 것들은 오는 시간을 안달하며 재촉한다. 재촉하는 모양새가 대견하면서 안타깝기도 하다. 어린 날의 시간은 왜 그리도 천천히 흘렀던 것인지. 지금은 왜 시간이 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흐르는 것인지. 지금은 너희들이 시간을 쫓아가지만 언젠가는 시간이 너희들을 쫓아올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시간을 아껴서 후회 없이 온전히 그 시간을 누리거라. | 본문 242쪽, <세월을 재촉하는 아이들> 중에서 |
기본정보
ISBN | 9788991508811 |
---|---|
발행(출시)일자 | 2011년 07월 30일 |
쪽수 | 262쪽 |
크기 |
148 * 210
* 20
mm
/ 414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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