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민의 한양읽기: 도성
도서+교보Only(교보배송)을 함께 15,000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20,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Box 기준 : 도서 10권
해외주문/바로드림/제휴사주문/업체배송건의 경우 1+1 증정상품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패키지
북카드
키워드 Pick
키워드 Pick 안내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다른 연관 도서를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로, 클릭 시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최근 많이 찾는 순으로 정렬됩니다.
수상내역/미디어추천
-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중앙일보 > 2017년 6월 1주 선정
작가정보
저자 홍순민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조선 후기 정치사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조선 후기 국가경영의 실상을 밝혀보려 공부하고 있다. 정치의 배경이 되는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꼴, 곧 문화로 탐구의 대상을 넓혀가고 있다. 도성에 대한 책을 낸 다음에는 바로 궁궐에 대한 책을 전면적으로 고쳐서 낼 계획이다. 그 다음에는 종묘, 그리고 조선시대 서울을 쓸 궁리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 궁궐 이야기》, 《한양도성, 서울 육백년을 담다》, 《서울 풍광》, 《조선시대사 1》(공저) 등이 있다.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서 문화자원을 가르치고 있다.
목차
- 머리말
제1장 서울을 품은 도성
1 서울의 얼굴, 도성
왕도, 수도, 국도
도성은 왜 쌓았을까
2 내사산 따라 도성 한 바퀴
도성이 앉은 자리
직접 도성 돌아보기
제2장 도성의 탄생과 시련
1 태조, 도성을 쌓다
새 나라의 수도, 한양
두 해 겨울 만에 쌓은 도성
직접 순성에 나선 태조
2 태종과 세종,
도성을 고쳐 짓다
태상왕 태종이 주도한 도성 수축
토성이 석성으로 변모하다
3 도성, 전란을 겪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반정과 반란
호란, 그리고 도성의 퇴락
제3장 도성, 위엄을 갖추다
1 숙종, 도성을 다시 세우다
본격적인 수축을 논의하다
도성의 부활
2 영조, 도성 사수를 선언하다
도성에 깊은 관심을 쏟다
삼군문 도성 수비 체제 정비
정조 이후의 도성
제4장 도성 깊이 읽기
1 도성의 짜임새
도성의 본래 모습을 찾아서
북경성과 한양도성
도성의 역사, 성돌로 남다
산세를 읽어 도성을 보완하다
치성과 수문
2 도성의 관리
보수와 감독
순라 돌기
3 성벽의 지문, 각자
태조 대 자호 각자
세종 대 군현명 각자
숙종 대 직명, 인명 각자
순조 대 이후 여장 각자
안이토리 애사
제5장 나라의 문, 도성문
1 도성문 바라보기
닫으면 벽, 열면 길
성문의 구조
도성문, 높은 문
도성문의 위계
도성문 여닫기
도성에는 암문이 있었을까?
2 도성문 돌아보기
으뜸가는 문, 숭례문
동쪽 대문, 흥인문
새 문, 돈의문
동북으로 가는 혜화문
서소문, 소의문
장례 행렬이 나갔던 광희문
자줏빛 노을이 물드는 창의문
비를 부르는 숙정문
제6장 도성의 수난, 그리고 재발견
1 도시의 팽창과 일제의 파괴
훼철이 시작되다
국망, 그리고 본격화된 파괴
2 도성이 돌아오다
서울, 도성과 공존을 모색하다
시민의 곁으로, 그리고 내일로
맺음말
참고 문헌 / 주석
도판 출처 / 고서화, 고지도
출판사 서평
책소개
서울에서 가장 거대한 문화유산은 무엇일까. 바로 옛 서울, 한양을 감싼 내사산을 따라 쌓은 도성(都城)이다. 오늘날 “서울 한양도성”이란 이름으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는 도성은 수많은 성곽 중 하나가 아니었다. 임금과 조정 그리고 그 안의 백성들을 지키는 성곽이자, 왕도 한양의 경계이자 표상인 유일한 존재였다.
서울을, 그리고 조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도성, 궁궐, 종묘를 차례로 다룰 ‘홍순민의 한양읽기’의 첫 번째 책인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궁궐, 종묘와 더불어 한양을 조선의 왕도이자 수도, 국도로 만든 도성의 역할과 상징성에 주목하고, 그 역사와 가치를 강조한다.
도성이 쌓인 자리와 그 지리를 읽으면 왜 한양이 한 나라의 수도로 선택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도성에는 조선왕조의 역사가, 도성을 쌓은 전국팔도 백성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 도성은 서울의 역사를 증언하는 거대한 기록물이자, 옛날의 한양을 오늘의 서울을 연결하는 고리다. 도성을 읽는 것은 한양, 그리고 서울을 읽는 첫걸음이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도성, 궁궐, 종묘로 향하는 ‘홍순민의 한양읽기’, 그 첫 번째 책
조선의 왕도 한양(漢陽)으로 500여 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로 70년을 넘기고 있는 서울. 무엇이 서울을 서울로 만들었는가? ‘수도’라는 뜻의 순우리말이기도 한 ‘서울’이라는 이름의 이 도시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한양을 조선의 도읍으로, 나라의 중심으로 만든 세 건조물은 종묘(宗廟), 궁궐(宮闕), 도성(都城)이었다. 이제 막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에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올린 글에는 “이들은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바입니다”라고 하여 그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셋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면서, 지금 서울의 밑바탕을 이루는 옛 서울 한양의 이면과 내면을 찾는 것이 ‘한양읽기’를 하는 뜻이다. 그리고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그 출발점이다.
도성은 임금과 나라의 표상이었다
흔히 도성을 “한양도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사적 제10호로 지정된 정식 명칭도 “서울 한양도성”이다. 하지만 한양을 도읍으로 삼은 조선의 도성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는 “도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도성은 “엄내외(嚴內外). 고방국(固邦國)”하기 위해 세워졌다. “안팎을 엄히 가르고, 나라를 공고히 한다”라는 뜻이다. 안팎을 엄히 가른다 함은 곧 한양의 경계를 가른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오늘날의 ‘국가’와는 다른 개념으로, 임금과 조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성 역시 단순히 수도를 두른 성곽이 아닌, 임금과 나라의 권위를 보여주는 표상이었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도성을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을 돌아보며, 주변에 다른 문화재나 유적도 함께 돌아보면 그만인 답사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대신 상징성과 역사에 주목한다.
도성은 한양의 내사산을 따라 쌓은 성곽이다
이 한 문장에 도성의 자연적, 지리적 위치가 담겨 있다. 한양이란 말은 그 자체로 ‘산의 남쪽, 물의 북쪽’, 즉 백두산에서부터 내려온 백두대간의 한 끝자락인 북한산, 바닷길과 강길을 이어주는 한강, 그 둘 사이에 있는 자리를 가리킨다. 북한산에서 마저 내려와 한양을 감싼 산줄기인 내사산, 즉 백악(북악산), 인왕산, 타락산(낙산), 목멱산(남산)의 능선. 도성은 그 위에 서 있다. 이러한 한양의 지리를 읽고, 내사산 중에서도 주산(主山)인 백악에서부터 타락산, 목멱산, 인왕산 그리고 다시 백악의 기슭인 창의문까지 지금의 도성을 한 바퀴 휘 돌아보는 것은 도성을 만나기 위한 첫걸음이다. 내사산을 따라, 자연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쌓은 도성의 모습은 조선시대에 많은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고, 특히 한양 인근의 명소를 즐겨 그린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단골손님이었다.
도성에는 조선의 건국과 수난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도성의 역사를 읽는 것은 곧 조선의 역사를 읽는 것이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도성의 역사를 따라가며, 시대의 변화와 임금들의 치세를 읽어본다. 태조는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고르고 불과 두 해 겨울 만에 도성을 완성하였다. 도성을 쌓기 전에 그 자리를 직접 돌아보기도 하였고, 완공된 후에도 타락산에 오르는 등 합쳐서 세 차례에 걸쳐 도성을 돌아보았다. 조선을 건국한 창업군주로서의 과단성과 무장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장면이다.
다만 태조 대에 쌓은 도성은 흙으로 된 부분도 일부 있었는데, 세종 대에는 이를 석성으로 완비하였다. 실제로 수축을 주도한 것은 당시 태상왕이었던 태종인데, 백성들의 고통을 감수하고도 전국팔도에서 32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다. 태종은 비정하면서도, 자식을 위해서는 스스로 나서 악역을 자처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세종은 수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지는 못했으나, 고된 노동과 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이런저런 조처를 취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도성의 역사를 보면 조선의 변화해가는 사회와 정치가 보인다
도성은 왜란, 이괄의 난 그리고 뒤이어 두 차례의 호란 때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버려져 황폐화되었다. 나라가 다시 안정을 찾은 뒤, 버려졌던 도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다시 세운 것은 숙종이었다. 하지만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던 개인사와 마찬가지로, 숙종은 도성의 수축에 있어서도 우유부단하게 결정을 번복하거나, 유사시의 도피처로 북한산성을 짓는 등 도성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 뒤를 이은 영조는 대대적인 공사는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정국을 주도하는 탕평 정치를 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성을 왕권 강화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영조는 목숨을 바치더라도 도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담은 〈어제수성윤음〉을 내려 도성의 위상을 다시 세우고,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는 도성 방위 체제를 마련하고 그 중심에 자신을 두었다. 그렇기에 영조는 도성에 더욱 큰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도성은 그 몸에 수많은 기록들, 각자들이 새겨져 있다
도성 곳곳에는 300개가 넘는 각자가 성돌에 새겨져 있다. 주로 도성의 축성과 보수와 관련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이 각자들은 도성을 도는 답사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료 등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유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태조 대의 각자들은 백악 정상을 기점으로 97개의 천자문 자호로 나뉘었던 도성의 각 구간을 알려준다. 세종 대의 각자들은 해당 구간을 쌓은 군현의 이름이 있어 일종의 군현 단위의 실명제를 했던 증거가 된다, 실제로 성벽이 무너졌을 때, 그 구간을 맡았던 고을의 관원들이 불려와 다시 보수를 한 기록도 남아 있다. 숙종 대 이후의 각자는 군현명이 아닌, 당시 도성의 수축을 맡았던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의 명칭과 담당자들의 이름, 공사를 한 일시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어 조선 초기와는 달라진 도성 관리 체제, 더 나아가 조선의 사회의 변동을 짐작케 한다.
도성에는 백성들의 피와 땀, 그리고 삶이 배어 있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흔히 외면당하곤 하는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도성을 바라본다. 도성을 쌓을 때 직접 돌을 뜨고, 쪼고, 나른 이들은 백성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기도 하였다. 시대에 따라 달리 다듬어진 성돌들의 모양, 각자에서 찾을 수 있는 지금은 낯설기도 한 지역명과 안이토리(安二土里) 같은 어쩐지 친숙한 이름들은 500년 긴 세월에 걸쳐 고된 성역(城役)에 동원되었던 이들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도성의 존재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이도 백성들이었다. 도성문의 문루에 달린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잠에 들었으며, 문이 열리고 닫힘에 따라 도성의 안팎을 왕래하였다. 도성은 임금과 나라의 권위를 보여주는 표상들 중 가장 백성들에게 친숙하고 가까운 것이었다.
높은 문 도성문. 하지만 “사대문, 사소문”은 없었다
도성이 수많은 성곽들 중 하나가 아니었듯, 도성의 문들 역시 단순히 사람과 물자가 오가기 위한 통로에 그치지 않았다. 도성문은 국문(國門), 곧 나라의 문이었다. 도성문 밖으로 쫓겨나는 것은 공식적인 처벌은 아니지만 문외출송이라 하여 중앙정계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각 성문에는 위계가 있어 임금은 대부분의 경우 숭례문으로 출입하였다. 사신들 역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에 따라 출입하는 문이 달랐다. 장례에도 그런 위계가 적용되어, 대부분의 장례 행렬은 광희문이나 소의문으로 나갔으나, 임금의 장례 행렬은 숭례문으로 나갔고, 다른 왕족들의 장례 행렬은 흥인문이나 돈의문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다만 도성문들 간에 위계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흔히 말하는 “사대문, 사소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북대문”이라고 일컫는 숙정문은 대문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돈의문 역시 “서대문”이란 이름으로 불린 적은 적어도 조선 말기 이전까지는 거의 없었다. 《홍순민의 한양읽기 : 도성》은 도성문의 이름과 별칭에 대한 막연한 통설을 받아들이는 대신, 당대의 기록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달라진 대문-소문, 정문-간문의 개념을 확인해본다.
도성은 지금도 살아 있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종묘, 궁궐, 도성. 이 셋 중 가장 먼저 파괴와 왜곡의 대상이 된 것은 도성이었다. 근대화와 도시의 확장으로 도성은 본래의 기능을 잃고 훼손될 수밖에 없었겠으나, 나라가 망하기 전부터 시작된 도성의 훼철은 그런 자연스러운 변화의 결과가 아니었다. 1907년에는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후일 다이쇼 천황이 되는 요시히토 친왕의 방문에 맞추어 헐렸으며, 경술국치 이후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도성은 곳곳이 끊기고 소의문, 돈의문, 혜화문이 차례로 헐렸다. 해방 이후에도 도성은 관심을 받지 못해 목멱산 구간 도성의 성돌은 자유센터의 축대로 쓰이는 등 수난을 면치 못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국방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이 시작되었으나, 면밀한 고증과 연구 없이 성급하게 이루어져 도리어 그 가치를 훼손하기도 하였다. 지난 2008년에는 숭례문이 어이없이 방화로 불타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도성은 지금도 살아 있다. 조선신궁, 동대문운동장 등에 깔려 사라졌던 성벽의 발굴조사와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도성을 찾고 있다. 600년 동안 자리를 지킨 도성은 그만큼 길고 굴곡 많았던 서울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도성을 보면 서울이 보인다.
기본정보
ISBN | 9788990620941 |
---|---|
발행(출시)일자 | 2017년 05월 29일 |
쪽수 | 408쪽 |
크기 |
157 * 230
* 23
mm
/ 739 g
|
총권수 | 1권 |
Klover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리뷰 종류별로 구매한 아이디당 한 상품에 최초 1회 작성 건들에 대해서만 제공됩니다.
판매가 1,000원 미만 도서의 경우 리워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일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불편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에 해당하는 Klover 리뷰는 별도의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도서나 타인에 대해 근거 없이 비방을 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리뷰
- 도서와 무관한 내용의 리뷰
- 인신공격이나 욕설, 비속어, 혐오발언이 개재된 리뷰
- 의성어나 의태어 등 내용의 의미가 없는 리뷰
리뷰는 1인이 중복으로 작성하실 수는 있지만, 평점계산은 가장 최근에 남긴 1건의 리뷰만 반영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200원 적립
문장수집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주문취소/반품/절판/품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