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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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출판사 서평
우리 역사의 의문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역사의 실체를 왜곡시키는 그 뿌리를 추적하고
지난 오천년간 끈질기게 이어져온 정치 이데올로기의 배후를 밝힌다!
다른 나라의 왜곡을 탓하기 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우리 역사의 실체!
최근 또다시 불거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파동은 "역사의 진실은 도대체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관련하여 각 단체마다 일본 규탄 성명을 발표하는 등 일본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역사 왜곡을 일본만이 하고 있는가? 과연 우리는 깨끗한가?" 하고 진지하게 되묻는다. 실제로 일본의 역사 편찬자들은 이렇게 힐난했다. "과연 당신들이 우리를 비판할 자격이 충분한가? 역사 교과서를 나라에서 대량 복제하고 있는 당신들의 역사를 먼저 살피라."
[한국사, 그 끝나지 않는 의문]의 저자 이희근 씨 역시 우리 역사부터 먼저 살펴보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한다. 그리고 우리 역시 "민족주의 사관"과 "실증주의 사관"이라는 양극단의 사관에 지나치게 몰입된 탓에 역사를 엄정하게 사실 그대로 해석하고 재현하지 못했고, 역사의 진실 또한 이익집단의 조작에 의해 덮여지곤 했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통해 날카로운 역사 인식과 정통 역사주의의 한 모델을 보여준 저자 이희근 씨가 우리 역사에 관한 상식적인 의문 30가지에 대해 적정한 1차자료 분석과 감식안을 동원하여 왜곡된 역사의 이면을 들추어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기존의 역사 해석이나 학계의 정설을 깨부수자는 의도가 아니라, 역사의 앞면을 해체하여 진실이 숨겨진 뒷면을 보여주자는 취지이다. 즉,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역사에 관심 있는 대중들과 역사를 배워나가는 학생들이 교과서에 갇힌 역사 범주에서 벗어나 역사 전반을 보다 핵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올바른 역사관을 세우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1. 한국사는 언제나 "신화 만들기"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우리 역사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근원적 문제점은, 우리가 "신화"와 "역사"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나라는 나라의 뿌리, 즉 그 태동을 신비롭게 치장하고 과장한다. 그 결과가 신화로 나타났는데, 이 신화를 분석해보면 그 당시 나라를 세운 시조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화"를 이용했음을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즉, 우리 역사의 시작은 언제나 '신화 만들기'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이것을 역사로 이해할 때 그것이 바로 역사 왜곡의 시작이 된다.
- 김수로왕비 허왕후의 출신지는 과연 인도인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의 출신지를 추적하다보면, 권력층이나 이익집단에 의해 역사 사실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 그 진상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 즉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요,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열여섯입니다."에 나타난 허왕후의 고백을 근거로 그녀의 출신지가 인도라고 기정사실화했다. 한때 태국이라는 주장도 있긴 했으나, 대개의 학자들은 역사 사료를 그대로 해석하여 그녀의 인도 출신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런데 과연 허왕후는 인도에서 온 것일까? 삼국유사의 기록만 놓고 보자면, 분명 그렇다. 아유타국이란 곧 인도를 가리키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저자는 이렇듯 사소한 부분에서 잘못 사용된 실증주의 사관이 결국 역사의 오류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역사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사서(史書)를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사료만 가지고 그것이 사실(事實)인 것처럼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 허왕후의 출신지가 "아유타국(인도)"라는 것은 후대인의 윤색·조작이었다!
저자는 "김수로왕비 허왕후는 과연 인도에서 왔을까"에서, 허왕후가 다름 아닌,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임을 대전제로 한 후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전제는 바로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흔히 말하는 "시조전승"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지시하는 것이다. 시조전승이란 나라를 일으킨 시조와 관련된 신성한 이야기를 뜻하는 것으로서, 후대인들에 의해 미화되고 각색되는 것이 보통이다. 단군신화, 동명신화, 김수로왕의 신화 모두가 그러했다. 저자는 이러한 상식에서 출발하여 허왕후 이야기 역시 김수로왕 신화와 함께 윤색의 작업을 거쳤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가야에의 불교 전래와 함께 질지왕대에 허왕후를 기리는 왕후사가 창건된 것을 들어, 시조전승에 불교 신화가 차용된 듯하다고 말한다. 요컨대 저자는 불교 전래 이후 불교를 신봉하던 가야의 허왕후 후손들이 아유타국, 즉 불교의 성지인 인도의 권위를 빌어, 그녀를 신성시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사가가 그녀의 출신지를 "아유타국"이라고 표기한 것은, 가야의 후대인들이 허왕후와 불교를 연관시키기 위해 꾸며놓은 가야본기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가 허왕후 당대는 불교가 가야에 전래되기 한참 전이라는 사실이다.
- 허왕후 출신지를 "인도"로 바꾼 것은 권력 장악을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일반적으로 시조전승은 왕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가야인들은 왜 허왕후까지 신성시한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찾아낸다. 허왕후가 금관가야를 주도했던 두 핵심 세력 중 한 세력에서 나온 인물이라는 것이다. 고대의 결혼이란 많은 경우 권력간의 결합이었다. 실제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조는 수로와 허왕후 집단이 3대 마품왕대까지 교혼했음을 전하고 있다. 즉, 금관가야의 두 주도 세력이 결혼을 통해 결합되어, 금관가야 왕실을 배타적으로 구성하였기 때문에 수로와 수로왕비 모두가 후대의 왕족들에 의해 신화화되었다는 해석이다.
2. 한국사 최대 이슈는 왕권강화, 역사를 좌우하는 건 바로 "정치논리!"
- 무신집권자들은 왜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까?
우리의 근현대 정치사를 말하기 위해서는 5·16 군사정권을 빼놓을 수 없다. 문민정부를 넘어 국민의 정부로 역사는 개혁적인 변화를 밟아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정치구조의 뿌리가 군사정권에 여전히 붙들려 있음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사회 현실이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 고려시대로 거슬러올라가보면, 또 하나의 군사정권을 만날 수 있으니 정중부에서 시작되어 이의민, 경대승, 최충헌, 최우로 이어지는 무신정권이 그것이다. 이 역시 고려 전반기와 후반기를 가르는 대전환점에 놓이는 사건이다. 그런데 5·16 정권과 고려의 무신집권자들이 동일한 군사 정부임에도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5·16 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장기집권하여 권력의 최상층부에서 군림하였던 반면, 고려의 무신들은 그 누구도 "왕위"를 꿰차지 않았다는 점이다. 충분히 왕위를 넘볼 만한 권력을 차지하고도 그들이 스스로 왕이 되지 않은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 정치논리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된 한국사의 실체!
광개토대왕릉비는 비석의 나라 중국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함을 자랑한다. 이 능비를 세운 사람은 바로 그의 아들 장수왕이었다. 장수왕이 이토록 거대한 능비를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 알려진 바처럼 선왕의 치적을 길이 남기기 위함일까? 저자는 "장수왕은 왜 광개토대왕릉비를 세웠을까"에서 장수왕 당대의 현실로 돌아가 그가 선왕의 능비를 통해 이루려던 딴목적을 찾아낸다. 그 거대한 능비를 통해 장수왕은 선왕과 같은 강력한 왕권이 자신에게로 이어졌음을 선포하여 전제왕권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왕권강화"와 "정치논리"를 앞세운 이러한 역사 사례를 우리는 조선의 세종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흔히 세종은 온유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백성을 사랑하여, 중국에 구별되는 자주국가로서의 조선을 세우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성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세종이 자주와 민본만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했을까?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속뜻은"에서 저자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의 이면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조선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백성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하고, 궁극적으로는 태조로부터 이어지는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훈민정음을 반포하기도 전에 용비어천가부터 지어 관료들에게 읽힌 사실만 봐도 이러한 세종의 의도는 매우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대부분은 사실 민(民)들의 역사가 아니라, 이익집단들간의 권력싸움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역사를 좌우했던 '정치논리'를 이 책의 여러 부분에서 파혜치고 있다. 우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왜 평양을 차지하지 않았을까"에서는 신라가 고대 삼국을 하나로 통일한 매우 자주적인 나라인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신라인들(넓게는 고대인들)에게는 사실 "통일관" 자체가 없었음을 강조한다. 즉, 당시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영토를 빼앗길 위험에 처해 있던 신라가 그것을 막기 위해 치른 생존전쟁이었을 뿐, 신라는 삼국통일이라는 지고의 가치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놓고도 그 중앙의 한강유역을 통치하지 않은 사실이 그 반증이라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고려가 세 개의 수도를 둔 까닭은"에서 고려가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풍수지리설"에 입각해서라기보다는 "지방 권력을 견제하고 방어하기 위한 목표"에 따라 삼경을 둔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 왕자들은 왜 승려가 되었을까"에서는 고려 조정이 "소군제도"를 통해 후궁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들이 왕권을 넘보지 못하도록 애초에 '승려'로 귀의시켜버린 고려 기득권자들의 정치논리를 여실히 밝혀주고 있다.
한편 정치논리에 의해 다시 쓰여지는 역사의 예는 조선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불교신자였던 이성계가 불교를 배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불교신자였던 이성계는 왜 불교를 배척했을까"), 조선시대에 서원이 점점 늘어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유학의 탄생지인 중국보다도 더 많아진 까닭 또한 바로 기득권자들의 정치 논리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서원은 애초에 "교육의 산실"로 세워지기 시작한 것인데, 점차 그 기능이 변질되어 "조상 제사 및 예향의 기능"은 물론 마침내는 "붕당정치의 후방기지" 역할로 바뀌어 권력을 잡았거나 꿈꾸던 향촌 사림파에 의해 마구잡이로 설립되어 그 수효가 증가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조선시대에 서원이 점점 늘어난 까닭은").
3. 잘못 알고 있던 인물, 미처 몰랐던 역사, "맨눈으로" 다시 보기!
- 백제는 과연 중국에 식민지를 건설했는가?
백제의 대륙진출설은 여전히 한국 사학계의 논쟁거리이다. 그럼에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백제가 대륙에 진출했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는데, 비교적 객관적인 자료인 중국측 사서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백제의 대륙진출설을 부정하는 견해들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편 다음, 대륙진출설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들을 펼쳐 보인다. 가령 《북사》 백제전의 "처음 백가로서 바다를 건넜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불렀다."라든가, 《송서》의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나 《남제서》의 "이 해(490)에 북위의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갔다. 이에 백제의 모대(동성왕)가 ... 오랑캐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등을 예로 들면서 백제가 뛰어난 해양술을 가진 민족이었으며, 그 해양술을 바탕으로 중국에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남제서의 기사와 일치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공격하다가 우리에게 패배하였다."라는 내용은 중국의 사서들에 적힌 백제 관련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준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 외의 여러 사료들을 동원하여 당시 한반도의 주변 정세에 대해 깊이 고찰하면서 백제가 비록 한반도에 위치한 작은 나라였으나 당시 군사력이 뒷받침되어 있었고, 반면 중국은 왕조 교체의 여파로 분열과 혼란이 거듭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충분히 대륙을 공략할 만한 틈새가 있었다고 역설한다.
만약 저자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제 백제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저자가 새롭게 밝히고 있는 역사 사실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21세기인 현대보다도 더 많은 인구가 모여 살았던 통일신라의 광역도시 경주의 '매우 자본주의적인' 풍경을 되살려내고("통일신라 경주에는 정말 백만 명이 살았을까"), 고려와 조선의 세곡 및 물류 유통 경로를 알기 쉽게 소개해준다("고려의 세곡은 어떻게 옮겼을까"/"팔만대장경은 어떻게 해인사로 옮겨졌을까"). 또 고려시대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성차별이 있었는지를 그 당시의 혼인풍속 및 제도를 관련 사료에 입각하여 살펴보고 그 시대에는 오늘날과 달리 오히려 여성의 지위가 높았었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즉, 그때에는 여자라고 해서 상속의 차별을 받지도 않았고, 여성이라도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또한 여성도 부모를 공양해야 할 마땅한 책임을 분담했었다고 밝히고 있다("고려시대에도 여성 차별이 있었을까").
- 평양재건과 주체사상 간의 함수관계
6·15 남북정상 회담 이후 TV 화면에서 평양을 본 많은 사람들이 평양은 어떻게 저리도 완벽하게 구획된 깨끗한 계획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을까 하는 점에 의문을 품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김일성은 왜 평양을 완벽한 계획도시로 만들었을까"에서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역사를 더듬어가는데, 역설적으로 그 해답은 해방과 한국전쟁에 있었다. 저자는 한국전쟁에 의해 평양이 너무나 완벽하게 파괴된 탓에, 아주 완전히 새롭게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이고, 해방과 분단을 거치면서 평양이 사회주의 국가의 수도로서 김일성의 주체사상의 혁명적 전초기지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뛰어난 건축문화를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김일성이 전후 복구사업 과정에서 건설사업 부진 등을 명분으로 삼아 반대파를 숙청하여 자신의 유일지배체제를 구축해나갔으며, 이것이 평양도시계획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사실은 최초로 밝혀지는 놀랍고 신선한 이야기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88964095 |
---|---|
발행(출시)일자 | 2001년 03월 31일 |
쪽수 | 316쪽 |
크기 |
152 * 223
mm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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