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코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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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그가 옳았다고?
“현대생물학에 의해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의 진리가 확인되었다.”
“센세이션!: 리센코 원사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나!”
“트로핌, 당신이 옳았소!”
“위대한 생물학자 리센코를 기리며”
러시아 언론이나 블로그에서 리센코를 재평가하며 붙인 제목이다. 리센코가 옳았다고? 이제 와서? 논란의 발단은 후성유전학이다. 리센코를 ‘틀린’ 과학자로 규정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획득 형질 유전설’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리센코는 당시 서방에서 주류를 이루던 다윈주의 유전학을 거부하고 획득 형질도 유전된다는 일종의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였다. 다윈주의 유전학에서는 획득 형질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서방 세계의 과학자들에게는 틀린 이론을 붙들고 자국의 과학계를 좌지우지한 리센코가 공포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획득 형질이 유전되는 것으로 보이는, 후성유전학으로 설명해야 할 사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비록 리센코가 정치적으로 ‘나쁜’ 과학자였을지언정, ‘틀린’ 과학자는 아니었던 것인가? 리센코는 수많은 비운의 선지자들처럼,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할 운명을 지녔던 걸까?
이 책은 ‘리센코는 옳았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 생물학계의 상황, 후성유전학의 전통, 리센코의 이론, 소비에트 과학계의 모순, 현재 러시아의 실상을 폭넓게 조망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않으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리센코 현상’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마치 미스터리 소설 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곁들이며 리센코 현상에 숨어 있는 디테일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리센코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갈수록 과학과 정치, 국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구조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질문의 답은 명확해질 것이다. 리센코는 옳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
작가정보
Loren Graham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과학기술학 및 하버드대학교 과학사 명예교수이다. 1933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나 1955년 퍼듀대학교에서 화학공학 학사 학위를, 1964년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인디애나대학교, 컬럼비아대학교, MIT, 하버드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영미권에서 소련 및 러시아 과학사 분야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 원로학자이다. 주요 저서로는 『소련과학원과 공산당, 1927~1932(The Soviet Academy of Sciences and the Communist Party, 1927-1932)』(1967), 『소련의 과학과 철학(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Soviet Union)』(1972),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The Ghost of the Executed Engineer)』(1993), 『우리는 러시아의 경험으로부터 과학과 기술에 대해 무엇을 배웠나(What Have We Learned about Science and Technology from the Russian Experience?)』(1998) 등이 있다. 2016년에 출간된 『리센코의 망령』은 그의 최신 단행본 연구서이다. 고령임에도 코로나19 팬데믹 직전까지 정정한 모습으로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곳곳에 나타나 후학들을 격려해 주었으며, 이 책의 한국어판의 실물을 받아보기를 고대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하버드대학교 과학사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회주의, 과학, 농업, 동물, 건강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 간의 역사적 상관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주로 중국과 베트남을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관심사의 연장선에서 리센코주의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으며, 중국과 베트남에서의 리센코주의 및 소련 토양학의 수용에 관한 논문인 「주의주의적 생산주의와 변증유물론의 결합: 사회주의 중국과 북베트남에서의 리센코주의의 인식론적 토대(Dialectical Materialism Serves Voluntarist Productivism: The Epistemic Foundation of Lysenkoism in Socialist China and North Vietnam)」를 미국 《생물학사 저널(the Journal of the History of Biology)》에 발표했다. 공역서로 『사회정의와 건강: 사회 불의에 맞서 어떻게 건강을 지킬 것인가?』(한울, 2021)가 있다. 현재는 가난하지만 삶의 의지로 가득 찬 중국 공유경제 공동체를 배경으로 인간과 동물 사이의 돌봄, 폭력, 유대, 착취, 노동, 희생을 다룬 박사 논문 「인민을 넘어서는 인민공사: 수의 노동자들, 동물들, 그리고 일상 속의 마오주의(More-than-People’s Communes: Veterinary Workers, Animals, and Everyday Maoism)」를 준비하고 있다.
목차
-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서론
1장 시베리아의 다정한 여우들
2장 획득 형질의 유전
3장 생물학계의 이단아 파울 캄머러
4장 1920년대 러시아 인간 유전 대논쟁
5장 리센코와의 조우
6장 리센코의 생물학
7장 후성유전학
8장 리센코주의의 부활
9장 신리센코주의의 충격
10장 반리센코주의적 획득 형질의 유전
결론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주
참고문헌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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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여우 농장에서 시작해 소비에트 인간형 창조를 위한 유전학과 우생학 논쟁을 거쳐, 리센코의 성공과 몰락, 냉정한 평가에 도달하는 여정을 긴장감 넘치는 문체로 펼쳐낸다. 유전학, 우생학과 사회주의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관계를 알고 싶은 독자에게 권한다. 특히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면 꼭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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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코 또는 리센코주의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는 “과학과 정치의 잘못된 만남”의 대표적 사례로 간혹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좋은 역사가라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얼마나 기묘하거나 예외적인 일이었는지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그 시대의 맥락 안에서 인물과 사건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시도했고, 리센코를 해외 토픽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의 세계에서 과학과 과학사의 세계로 다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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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코주의’ 논쟁으로 소련 생물학계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는 최근까지도 스탈린주의 시대 유사과학과 그로 인한 한 학문 분과의 괴멸에 가까운 퇴보로 기억되어 왔다. 후성유전학 분야의 발전을 계기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일부 학자들이 트로핌 리센코를 복권시키려 하지만, 저자는 엄밀한 과학사가로서 러시아 유전학의 전통, 리센코주의 논쟁의 역사, 그리고 현대 후성유전학과 리센코주의 이론 간의 괴리를 치밀하게 서술함으로써, 리센코와 리센코주의는 과학적 이론으로서 정립될 수 없으며, 이를 둘러싼 여러 현상들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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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악명 높고 중요하지만, 가장 덜 알려진 사건에 대한 안내서. 그레이엄은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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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적절하고 중요한 그레이엄의 이 책은 유전에 관한 주류 담론과 배치된 모든 것을 리센코주의로 치부해 버리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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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에 따르면, 리센코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일련의 배경에는 소련 우생학 운동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길지 않은 책은 과학적 탐구의 진실성을 위협하는 두 가지 종류의 위협을 다룬다. 즉, 과학계 외부로부터의 제도적인 간섭과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염이 그것이다. 특히 후자의 위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 소련의 리센코주의와 우생학에 관한 그레이엄의 연구는 과학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관해 중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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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센코의 망령』의 핵심은 온갖 종류의 정치, 종교, 문화적 규범, 이데올로기가 과학을 왜곡시키는 방식들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사실에 관한 우리의 해석을 변형시키며, 자연적인 현상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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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특히 러시아와 리센코주의를 중심으로, 후성유전학이라는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분야의 여러 쟁점과 그것이 획득형질의 유전을 둘러싼 유서 깊은 논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새로우면서도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레이엄은 방대한 관련 자료를 완벽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 많은 자료들을 섭렵한 극소수의 연구자 중 한 명이다.
책 속으로
이 책은 리센코의 등장과 몰락의 역사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는 이미 다른 책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졌다. 대신 여기서는 유전에 관한 서방 학계의 인식의 변화 과정을 정리한 후, 오늘날 러시아에서 후성유전학과 리센코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후성유전학의 발달에 비추어 보았을 때, “리센코가 결국 옳았는가”라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다루어 볼 것이다. 나는 50년 이상 ‘리센코 현상(the Lysenko phenomenon)’을 직간접적으로 연구해 왔고, 그를 직접 만나 그의 연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경력을 가진 비(非)러시아인 학자들 가운데 아직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으로서, 나는 리센코에 대한 나의 연구와 현재까지 밝혀진 유전학 및 후성유전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러한 분석을 수행하고자 한다.
_16~17쪽, ‘서론’ 중에서
“우리가 여우들을 끔찍이 아끼고 보살피며 또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녀석들을 쓰다듬어 주고, 최고의 사료를 공급하며, 각자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 마리 한 마리 녀석들의 이름을 부르지요. 그렇게 여우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보여준답니다. 여우들은 이에 반응하여 우리에게 사랑으로 보답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사랑이 유전되는 것이지요.”
그의 대답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유전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을뿐더러, 그의 대답이 상사인 벨랴예프가 부정하는 원리인 획득 형질의 유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 보조원의 생각은 리센코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_27쪽, ‘1장 시베리아의 다정한 여우들’ 중에서
다비덴코프 또한 세레브로프스키가 사회주의적 우생학에 대해 가졌던 정치적 열정과 헌신을 공유했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소비에트형 인간의 창조를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서 인공수정을 비교적 덜 강조했다. 다비덴코프는 “소련의 도시 인구를 대상으로 의무적인 우생 조사(eugenic survey)”를 실시한 이후, “임금의 비례적 인상을 통해 육아 비용을 국가가 보상”하여 ‘올바른’ 결혼을 유도함으로써 동일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쉽게 말해 지적으로 가장 우수한 부모에게 아이를 낳을 때마다 임금을 50퍼센트씩 인상해주어 그들이 보다 많은 자녀를 낳도록 장려하면 된다는 것이다
_85~87쪽, ‘1920년대 러시아 인간 유전 대논쟁’ 중에서
1971년 어느 이른 봄날, 나는 레닌도서관에서 오전 작업을 마친 후 으리으리한 궁궐 같은 과학자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한 수척한 남자가 편안한 모습으로 식당 뒤쪽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가 트로핌 리센코라는 걸 알아차렸다. 소련에서는 낯선 사람들끼리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리센코 옆에 앉아 보르쉬(borscht,러시아 전통 수프 요리) 한 그릇을 주문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리센코를 향해 몸을 돌렸다.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 씨 되시지요? 저는 미국의 과학사학자 로렌 그레이엄이라고 합니다. 당신에 대해 이런저런 글을 꽤 썼습니다. 당신에게 제 글을 보낸 적도 몇 번 있지요.” 리센코가 대답했다. “당신의 이름이 기억납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도 있습니다. 당신, 러시아 과학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더군요. 그러나 당신은 나와 내 연구를 서술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는 즉시 그 실수가 무엇인지 물었다. 리센코는 대답했다.
_ 102~103쪽, ‘5장 리센코와의 조우’ 중에서
이 연구들이 보여준 결과는 놀랍게도 초세대적 후성유전적 유전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기근 동안 임신 중이었던 여성의 손자손녀들은 비정상적으로 높은 비율로 장애를 겪어야 했다. 정작 이 손자손녀 세대의 어머니들은 임신 기간 정상적으로 음식을 섭취했음에도 말이다. 한 논자는 이를 두고 ‘할머니 효과(a grandmother effect)’라고 이름 붙였다. 이들 손자손녀들은 매우 높은 비율로 비만, 당뇨, 관상 동맥성 심장 질환(coronary disease), 유방암, 폐 및 신장 질환, 우울증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렸다.
_153쪽, ‘7장 후성유전학’ 중에서
미국의 언론과 러시아의 언론은 이 논문을 두고 충격적일 정도로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미국에서는 주로 “동성애가 유전될 수 있다”(CNN) 또는 “연구에 의하면 동성애는 후성유전적이다”(《사이언스》) 등의 헤드라인이 나타났다. 러시아 언론이 내세운 대표적인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은데, 유독 ‘실수’라는 단어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세포기억(Cell Memory)상의 실수가 동성애의 원인일 수 있다”(《리아노보스티RIA Novosti》). “게이와 레즈비언은 실수에 의해 창조된다”(《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Komsomolskaia pravda》). 다시 말해 러시아 언론들은 ‘비전통적인(nontraditional)’ 성적 취향이 유전학적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유전적 ‘실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려 하는 것이다.
해당 논문의 원문을 살펴보면, 러시아 측의 해석이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계간 생물학평론》 논문에서 공저자들은 단 한 번도 ‘실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성적 기호(sexual preference)의 형성에 기여하는 후성유전적 변화가 “우연히 그리고 평균 이하의 확률로”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공저자들이 보기에 이는 하나의 정상적인 과정이다.
_197~198쪽, ‘9장 신리센코주의의 충격’ 중에서
출판사 서평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후성유전학의 전통
후성유전학과 러시아 생물학, 그리고 우생학
리센코의 현상을 이해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제반 사항이 있다. 바로 후성유전학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생물학계의 상황이다. 획득 형질의 유전에 관한 믿음은, 그것을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2000년이 넘도록 거의 보편적으로 유지되어 온 관념”이었다.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찰스 라이엘도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고 믿었다. 심지어는 다윈도 자신의 진화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부 변칙들을 설명하기 위해 획득 형질의 유전을 수용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이 유전한다는 관념은 라마르크가 내세운 이론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라마르크 이전에도 획득 형질이 유전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인 생물학자는 많았고, 그런 전통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는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에서는 라마르크주의와 다윈주의 간의 모순이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어쨌든 둘 다 ‘진화론’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영국과 미국 등에서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힘을 얻으며 획득 형질 유전에 관한 이론이 비판을 받기 시작했지만 라마르크주의자들이 많던 러시아에서는 라마르크주의에 유리한 방식으로 최신 유전학을 수용했다. 요컨대 소련 내에서 획득 형질 유전의 중요성은 리센코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떠오르던 우생학은 정치적으로 여러 논란을 일으킨다. 생물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커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만 우생학적 기획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우생학을 적용하려던 생물학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과학적ㆍ정치적 지형이 리센코주의가 태동할 토양이 되었다.
논란의 당사자를 직접 대면하다
역사가의 앞에 둔 리센코의 변명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가장 손에 땀을 쥐는 대목은 저자인 로렌 그레이엄이 리센코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책을 쓴 로렌 그레이엄은 1933년생으로 90세를 넘긴 노학자다. 영미권에서 러시아 과학사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1년 어느 날 그는 러시아 최고 도서관인 레닌도서관에서 리센코에 대해 연구하다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과학자의 집’이라는 레스토랑을 찾는다. 그곳에서 이미 명예가 실추된, 평생의 연구 대상인 리센코를 직면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 리센코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리센코가 악명을 떨치게 된 행위를 한 개인적인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책이기도 역사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토리텔링에 매우 신경을 쓴다. 단순히 상황을 서술하거나 이론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를 부각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내용에 빠져들도록 만든다.
하지만 ‘리센코는 옳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리센코가 내세운 이론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이 책에서는 한 장을 할애해 리센코의 연구 방식, 이론의 핵심, 결론, 파급 효과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 리센코 이론은 신화화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 현대유전학과 결정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이 부분 때문에 서방 세계 과학자들은 리센코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논란의 한 축을 담당하는 후성유전학도 다룬다. 현대 후성유전학이 등장하고 발달한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기초적인 수준에서 후성유전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리센코주의와의 관련성을 논한다.
현재진행형인 리센코주의의 논란들
리센코주의는 러시아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리센코의 망령』은 국내에는 처음으로 번역 출간된 리센코에 관한 단행본 분량의 책이다. ‘리센코’라는 이름을 아는 국내 독자들은 대부분 그 이름을 생물학이나 과학사 책에서 스쳐가듯 보았을 것이다. 예전 소련에 리센코라는 가짜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소련 생물학계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정도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리센코’라는 이름의 중요성과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그를 집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 이제라도 출간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지적하는 건, 이게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리센코와 관련된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의미 또한 매우 중층적이다.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리센코와 관련된 논란은 역사적인 맥락에서뿐 아니라 현재적인 맥락에서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진다.
일단 러시아 내에서 극우 공산주의(자칫 형용 모순처럼 들리는 이 표현은 현재 러시아의 상황에서는 성립될 수 있다) 성향의 세력이 리센코를 복권시킴으로써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스탈린 시대의 향수를 일으키려 한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리센코가 옳았고, 리센코에 힘을 실어줬던 스탈린 체제도 옳았다는 논리 구조는 이들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반대로 러시아 주류 유전학계에서는 리센코가 옳았다는 결론을 지지하게 될까 봐 후성유전학 연구를 기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후성유전학의 주요한 사례가 될 수 있는 기근 연구가 러시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그것이 리센코주의를 확증할까 두려워서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내부의 종교, 정치 상황 때문에 후성유전학의 연구가 왜곡되는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리센코의 망령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을 보면 과학사에 나타나는 여러 부조리를 알 수 있다. 몇 번이고 강조되는, ‘용례(usage)’가 ‘정확성(accuracy)’을 압도하는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라마르크는 획득 형질 유전설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획득 형질 유전설’을 ‘라마르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리센코는 획득 형질 유전설을 신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리센코 또한 라마르크주의자였어야 한다. 그런데 리센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마르크주의적 관점에서 행해진 작업에서는 그 어떠한 긍정적인 결과도 얻을 수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획득 형질 유전설’을 ‘라마르크주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이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린다. 라마르크는 당대를 대표하는 생물학자이자 유전학자였고, 획득 형질 유전설은 그가 주장한 다양한 이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획득 형질 유전설과 라마르크주의를 동일하게 취급하기엔, 획득 형질 유전설을 주장한 다른 생물학자도 매우 많았고 라마르크의 이론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일반 대중뿐 아니라 과학자들도 획득 형질 유전설과 라마르크주의를 동일시한다. 용례가 정확성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과학자보다는 과학사가들이 더 잘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와 과학의 관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공모를 리센코 현상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한국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과학적 발견을 했다는 뉴스를 본다. 많은 경우 과학적 발견의 내용이나 과정보다는 그 발견이 향후 이뤄낼 수 있는 성과나 ‘한국인’이 그 발견을 해냈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지곤 한다. 그러니까 과학이 한국인의 긍지나 위상을 높여주는 수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뉴스 수용자 입장에서 과학적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게 엄청난 발견이라든지, 한국인이 이룬 업적이라는 건 눈길을 끌기 쉽다. 다행인 것은 한국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 리센코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이런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상처를 간직한 러시아 과학계는 후성유전학의 발전을 아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리센코의 사례를 마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황우석의 그림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 책만큼 과학과 역사,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사점을 던지는 연구도 많지 않을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62623949 |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10월 29일 | ||
쪽수 | 268쪽 | ||
크기 |
147 * 215
* 22
mm
/ 366 g
|
||
총권수 | 1권 | ||
원서명/저자명 | Lysenko's Ghost/Graham, Lor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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