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루스 노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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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 진중권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유리 로뜨만의 구조기호론적 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1994년 출간한 『미학 오디세이』로 미학이라는 낯선 학문을 대중에게 친숙하게 만들었으며, 그 이후 줄곧 독창적인 미학 세계를 펼치며 대중과 호흡하고 있다. 현재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미학 오디세이』 1·2·3, 『춤추는 죽음』 『천천히 그림 읽기』(공저) 『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1·2·3, 『현대미학 강의』 『생각의 지도』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진중권의 이매진』 『교수대 위의 까치』『아이콘』 등이 있다.
목차
- 제2판 서문
제1판 서문
1. 미와 에로스: 존재미학
2. 피그말리온의 꿈: 미메시스의 근원적 의미
3. 헤라클레스의 돌: 예술의 디오니소스적 특성
4. 말의 힘: 미와 숭고의 대립
5. 메갈로프쉬키아: 위대한 영혼, 디오게네스
6. 죽어가는 것들: 신체의 억압과 부활
7. 옛것과 새것: 이성의 독재에 대한 투쟁
8. 물, 불, 공기, 흙: 자연의 숭고
9. 자연의 결함?: 자연미 Vs. 예술미
10. 앙겔루스 노부스: 역사의 천사
닫는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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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근대의 합리주의는 주체와 객체, 인식과 대상,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낳았다. 주체가 객체를 지배하고, 인식이 대상을 장악하고,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여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폭력적 관계. (......) 옛사람들이 사물에까지 영혼을 부여했다면, 우리는 영혼까지도 사물화한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이 되고, 죽은 자가 꽃이 되고, 무생물이 인간이 되던 까마득한 옛날엔, 인간과 자연은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소통을 했다. 서로를 닮는 미메시스를 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할 게다. 그런데 예술은 바로 그것을 시도한다. 과학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그것을. 인간과 자연의 평등한 소통은 오직 예술의 정신, 즉 미메시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_「피그말리온의 꿈」(pp.65)
근대문명의 한계를 지적하는 ‘포스트모던’이 종종 고대의 디오니소스적 시 정신(『비극의 탄생』)을 부활시키려 했던 니체에게서 출발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은 시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던 플라톤 이전의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합리성이 지워버린 신적인 힘, 차가운 이성에 억눌린 디오니소스적 열광, 계산과 관찰의 건조함에 밀려난 신적 영감, 한갓 재현의 진리가 아닌 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계시의 진리. 포스트모던은 그리스적 시의 정신, 디오니소스의 부활이다.
_「헤라클레스의 돌」(p.90)
하지만 오늘날에도 과연 숭고의 글쓰기가 가능할까? 나는 포스트모던의 글쓰기를 이 하나의 물음으로 요약한다. 오늘날의 인간들은 더 이상 진지하게 신적인 힘의 역사를 믿지 않는다. 과거에는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숭고한 현상이었다면, 오늘날의 인간은 고도로 발달한 자연과학의 그 가공할 파괴력을 가지고 외려 자연을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자본주의적 산문성에 묻혀 사는 현대인의 정신은 고대인과 달리 너무나 냉정하고, 게다가 오늘날과 같은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숭고의 도덕적 바탕을 이루는 귀족주의적 이상은 더 이상 적합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과연 이 시대에 숭고가 가능할까? (.......) 아마 과거와 똑같은 형태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 신과 인간의 위대함에 자신을 내맡기고 거기에서 영감을 받아 창조를 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고귀한 존재로 끌어올리는 숭고의 글쓰기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제 영혼을 팔아먹는 천민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제 영혼을 위해 제 자존심의 최소한을 지키려 하는 민주주의적 인간귀족들을 위한 존재미학으로서.
_「말의 힘」에서(p.112~13)
“미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합리적 이성이라면, 디오게네스의 그것은 냉소적 이성이다. 소크라테스가 입으로 논증을 했다면, 디오게네스는 몸으로 논증을 했다. 그는 이론과 실천의 구별을 몰랐다. 그리하여 그의 이론을 우리는 그가 저지른 행동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나누고 미학이 이 두 왕국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디오게네스의 몸속에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은 애초에 하나였고, 이 하나는 동시에 미학이었다. 그의 기행은 그가 자기의 존재를 예술적으로 양식화하는 방식이었다. 이것이 우리의 창조적 개새끼가 실존하던 방식, 그의 존재미학이다.
_「메갈로프쉬키아」에서(p. 139)
근대라는 시대의 질병을 치유하려면 두 개의 자연, 즉 내 안의 자연과 내 밖의 자연을 해방시켜야 한다. 기술 합리성에 의해 오염되고 파괴되는 외적 자연을 부활시키고, 잘못 이해된 이성에 의해 억압되고 말살된 우리의 내적 자연(=육체와 정념)을 부활시켜야 한다. 새로운 시대가 낡은 시대의 오류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의 죽음을 미워하고 죽어가는 것의 삶을 사랑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_「죽어가는 것들」에서( p.165)
이 시대에 부활시켜야 할 감각과 상상력이란 얄팍한 딜레탕트 취향이 아니다. 포스트모던의 감성과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는 진보적 감수성, 그리고 그 고통 극복의 실천적 방안을 찾아내는 창조적 상상력이어야 한다. 예술? 아 그것은 잿빛 이론에 싫증난 게으른 지식인들의 해방구가 아니다. 부르주아적 삶을 치장하는 한 조각의 시도 아니고, 향유라는 이름의 소비의 대상도 아니다. 예술은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적으로 조직하도록 이끌어주는 영감의 원천이어야 ㅎ나다. 미메시스. 예술작품과의 존재론적 닮기. 이것이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다."
_「옛것과 새것」에서(p.189)
천사의 째진 눈은 하늘로 쌓아 올려지는 파국의 더미만을 바라보며 슬퍼할 뿐 아니라, 그 암울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반짝반짝 터지는 희망의 불꽃들을 포착하는 감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검은 하늘에 뿌려진 별들의 배열 속에서 감추어진 형상을 찾아내듯이 산산이 흩어진 이 불꽃들을 이
출판사 서평
미에서 숭고로, 미학에서 삶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밝혀주는 진중권의 미학을 만난다
2003년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후 많은 독자들이 복간을 바라왔던 『앙겔루스 노부스』가 도판을 보강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재발간되었다. 미학에 관한 ‘에세이’로서, 진중권 특유의 재기 넘치는 문체로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미학사를 탈근대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며, 그 과정에서 근대미학이 간과했던 해석의 지평을 열어, 미학이 단지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살아나가는 태도이자 방법이 될 수 있는 존재미학으로 나아가는 바탕을 세운다.
책의 제목은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에서 따왔다. ‘신천사(新天使)’라는 뜻의 이 그림은 한때 발터 베냐민이 소장했던 것이다. 이 책은 플라톤의 『향연』부터 시작해 베냐민의 「역사철학테제」까지 기존 문헌을 재해석하고 그동안 배제되었던 문헌들을 새롭게 독해하며, 혹은 중심적으로 다뤄지지 않는 문헌들을 재조명함으로써 근대미학의 패러다임을 탈근대의 그것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지은이는 10편의 에세이를 통해 ‘숭고’라는 개념을 부각시키는데, 리오타르가 현대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해석하는 개념으로서 제시했던 이 개념을 고대의 ‘존재미학’과 현대의 ‘생태미학’까지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시킨다. 그에게 “‘숭고’란 그저 미를 추구하던 고전주의 예술을 해체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위대함으로 끌어올리는 존재미학의 원리이자, 나와 이질적인 존재로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생태미학의 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오래된 미래’다. 세상에 선보인 지 13년이 지났지만,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전혀 색이 바래지 않았다. 특히 “들뜬 희망을 참담한 좌절감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1980년대 우리들의 슬픈 경험을 처리”하려 한 마지막 10장은 오늘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울림을 전해줄 것이다. 야만의 역사에 대한 저항이 장밋빛 미래를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베냐민이 알았던 것처럼, 10년이 훌쩍 넘은 세월에도 현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그림 속의 ‘앙겔루스 노부스’처럼 폐허를 앞두고도 날개를 펼친 채 헛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저항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다.
*각 장의 내용
1장 ‘미와 에로스’에서는 플라톤의 미학을 ‘존재미학’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다.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미의 이데아’는 근대미학에서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측면에서 이해되면서 그것이 존재의 해석학이 아니라 존재의 미학에 속한다는 사실은 쉽게 잊혔다. 플라톤의 시대에 아름다움이란 세속적인 것과 천상의 것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 문명을 거치며 육체에 대한 경멸이 깊이 각인되어 세속적인 아름다움은 억압되고 말았다. 실은 플라톤의 시대에 이 세속적인 미(사랑)는 절제를 통해 분별 있게 추구된다면 이를 통해 천상의 미로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그것이 플라톤이 말한 ‘미의 이데아’였다. 『향연』은 이데아의 인식론이 아니라, 무엇보다 존재의 미학을 말한다. 삶을 예술로 만들도록, 자기의 육체와 영혼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창조의 미학을 말한다.
2장 ‘피그말리온의 꿈’에서는 예술의 진리에 대한 근대미학의 관점을 전복하려 한다. 근대미학에서 예술은 ‘모방’으로, 예술적 진리는 ‘재현의 진리’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원래 그리스어 ‘미메시스’는 그저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진중권은 ‘미메시스’의 본래 의미를 되살리려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화가는 원상(이데아)의 모상을 다시 모방함으로써, 예술은 그림자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메시스’의 원뜻을 되살림으로써 예술은 이런 이중의 ‘거짓말’에서 구원될 수 있다. 원래 그리스어에서 ‘미메시스’란 존재하는 대상의 단순한 ‘모방’을 넘어 일체의 ‘감각적 대상화’, 즉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했다. 예컨대 피그말리온이 ‘이상적 여인’을 만들어냈을 때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여자의 모상을 만든 것이 아니었고 제욱시스가 헬레나를 그렸을 때처럼 여러 여자를 조합하여 한 명의 미인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는 현실에 없는 새로운 존재를 ‘감각적으로 대상화’한 것이었다. 이게 바로 미메시스의 원뜻이다. 이런 가상의 창조는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그로써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 삶의 태도를 바꾸어 놓는다. 이게 새로운 사회적 현실의 창조로 이어지면, 이때 예술적 가상은 정말 현실이 된다.” 그리고 가상을 현실로 전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술로써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예술은 구원이 된다.
3장 ‘헤라클레스의 돌’은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을 중심으로 예술의 ‘영감론’을 되살린다. 플라톤에게 시는 신적 영감의 산물이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는 테크네, 즉 합리적 규칙에 따른 제작물로 여겨지고 이는 고전주의 미학의 토대가 된다. 여기서 진중권은 니체를 따라 오랫동안 잊혔던 예술의 디오니소스적 특성을 부각시키려 한다. 예술이 일으키는 공감, 이성의 이해를 넘어선 ‘신적인 힘’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물건을 끌어당기는 헤라클레스 같은 자석의 힘, 즉 ‘헤라클레스의 돌’로 비유된다. 이는 이성의 통제를 넘어섰기에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었으나 플라톤은 그것이 ‘신적’인 것이었기에 두려워하는 동시에 매혹되었다. 근대문명의 한계를 지적하는 ‘포스트모던’은 이성에 억눌린 디오니소스적 열망을 다시 불러낸다. “합리성이 지워버린 신적인 힘, 차가운 이성에 억눌린 디오니소스적 열망, 계산과 관찰의 건조함에 밀려난 신적 영감, 한갓 재현의 진리가 아닌 신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계시의 진리. 포스트모던은 그리스작 시의 정신, 디오니소스의 부활이다.”
4장 ‘말의 힘’은 위(僞)롱기누스의 ‘숭고론’을 다룬다. 이는 ‘숭고’에 관해 쓰인 최초의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는 “위대함은 청중을 설득시키지 않는다. 그들을 도취시킨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플라톤은 ‘말의 힘’을 합리적 논증에 묶어두려 했으나 롱기누스는 그와 상이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이성을 넘어선 위대한 말, 설득하지 않고 도취시키고 흥분시키고 열광하는 말의 힘을 지지하며, 그것을 ‘숭고’라 칭한다. 그리스어에서 ‘숭고’란 원래 운문과 산문 속의 ‘위대한 것’ ‘놀라운 것’ ‘압도적인 것’ ‘격정적인 것’을 의미했고 문체론 밖에서는 위대한 자연 현상, 신의 역사, 그리고 인간 내부의 강렬한 파토스를 가리켰다(이는 본래적 의미의 미메시스와도 연결된다). 포스트모던은 숭고의 미학이다.
5장 ‘메갈로프쉬키아’에서는 ‘숭고’라는 존재미학을 오늘날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일종의 대답을 전한다. 그것은 바로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디오게네스를 롱기누스가 말한 ‘위대한 영혼’의 예로 제시한다. 디오니소스는 플라톤을 뿌리로 발달한 서구 철학사에서 이단과 같았다. 플라톤주의 전통을 전복하려 한 탈근대 철학에서 디오게네스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다. 보편자보다 개별자를, 필연성보다 우연성을, 학적 논증보다 예술적 농담을 선호했던 ‘미친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는 탈근대 철학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진중권은 이 장의 말미에서 오늘날의 대중민주주의 시대에서 소크라테스 식의 비장한 숭고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지만 디오게네스의 골계미가 결합된 가벼운 숭고가 적절한 전략일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지은이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 취하고 있는 태도라는 점이 이 텍스트를 더욱 흥미롭게 한다.
6장 ‘죽어가는 것들’은 데카르트의 『정념론』을 통해 근대의 정신주의 철학이 신체를 억압해온 방식을 분석하고 신체의 부활을 꿈꾼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는 해부학이 열풍이라고 표현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고 렘브란트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이런 해부학 열풍은 당시의 시대정신, 즉 고전주의적 ‘에피스테메’와 연관이 있었다. 당시에 해부학은 ‘자기에 대한 인식’을 얻기 위한 전제조건, 즉 근대 인간중심주의 철학의 실현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 자기 존재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었고, 정신의 밖에 존재하는 자연(즉 육체)은 통제되고 지배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해부학은 육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정념’을 통제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이었다는 얘기이고, 이로써 인간의 생명과 신체는 실용적 목적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정념을 다스리려는 이 생체공학의 결과 현대인은 자본주의적 인간, 즉 이익을 위해 모든 생명활동을 억제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모”한다.
7장 ‘옛것과 새것’에서는 해부학이 인기를 끌고 육체에 대한 이성의 우위가 당연시되었던 17세기에 예술이 이성의 독재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를 살펴본다. 예술에서 데카르트의 정신을 대표했던 부알로는 감각을 배제하고 상상력을 의심하고 다양한 예술취향을 단 하나의 보편적 규준으로 재단해버리는 등 예술을 이성의 지배하에 묶어두려 했다. 부알로에 따르면 윤곽선이 명확하지 않고 화려한 색채 효과로 가득 찬 바로크 회화는 이성의 세계를 위협하는 위험한 어둠의 힘이었다. 그리하여 바로크 취향은 ‘기괴한 것’으로 치부되어 추방될 위기에 몰렸다. ‘고전주의 시대’는 곧 ‘바로크 시대’이기도 한데, 지은이는 하나의 시대에 이처럼 상반된 이름이 붙은 것은 고전주의 시대에도 예술만큼은 이성의 독재에 저항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짐작한다.
8장 ‘물, 불, 공기, 흑’에서는 롱기누스에서 에드먼드 버크를 거쳐 칸트로 이어지는 ‘숭고’ 개념을 살핀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합리주의 예술론에 배치되는 모든 경향을 담을 개념적 그릇으로 ‘숭고’를 사용했는데, 그림에서는 인간의 힘을 넘어선 압도적 자연을 묘사한 ‘파국의 그림’을 뒷받침하는 개념이었다. 이로써 데카르트에게 그저 정복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영국 경험론자들에게 와서는 신성한 존재, 살아 있는 거대한 생명체가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자연은 인간을 위협하는 것으로서 인간에게 적대적인 어떤 것으로 파악된다. 칸트의 초월론적 숭고론에서는 자연을 ‘닮음’으로써 인간이 위대한 차원으로 끌어올려질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지만 여기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위에 있다. 포스트모던 미학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진정으로 존재론적 닮기를 하는 세상”을 가능케 하는 숭고의 부활을 꿈꾼다. 즉, 생태론적 미학의 탄생이다.
9장 ‘자연의 결함?’에서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헤겔은 자연미에는 결함이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예술미가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자연미에 대한 인공미의 우위를 주장한다. 지은이는 여기서 근대 개발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표현을 본다. 여기서는 8장에 이어 근대의 폭력적인 자연 지배의 강박에 맞서 자연의 이질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생태미학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정작 우리가 정복해야 할 것은 자연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 우리가 정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10장 ‘앙겔루스 노부스’에서는 미학 이론이 아닌 한 장의 그림을 다룬다. 바로 이 책의 제목을 따온 파울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이다. ‘신천사(新天使)’라는 뜻의 이 그림은 한때 발터 베냐민이 소장했던 그림으로서, 그는 「역사철학테제」에서 이 그림을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의 엠블럼으로 사용한 바 있다. 진중권은 여기서 베냐민을 길게 인용하면서, “역사주의가 붕괴한 시대에 역사를 대하는 개인적인 다짐”을 피력한다. 바로 지은이 자신의 ‘존재미학’을 말하는 것이다. 헛된 저항일지라도, 저항함으로써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 해도,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인지하고 있다고 해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는 것, 날개를 접지 않는 것. 현실을 직시하되 포기해버리지 않는 것, 거기에 존재의 구원이 있다는 것이 결국 지은이의 결론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61961448 | ||
---|---|---|---|
발행(출시)일자 | 2013년 08월 26일 | ||
쪽수 | 272쪽 | ||
크기 |
153 * 224
* 20
mm
/ 512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진중권 미학 에세이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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