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사유의 전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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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에 묻힌 진주와 산호를 캐어 오는 잠수부처럼
망각에 빠질 행위 및 사건들을 우리에게 드러내는 이야기꾼처럼
‘정상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식적 파리아처럼
알려지지 않았던 한나 아렌트의 진면목을 만나다
세계에서 사람들이 다원성/복수성plurarity을 발현하는 한 방식인 이야기는 한나 아렌트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기억과 이야기, 의식적 파리아로서의 위치성 또한 아렌트 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한나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구성하는 이러한 점들은 국내에서 아직 많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그 의미만큼 진부해져 버린 악의 평범성에 관한 논의만이 대중들에게 소비되고 있을 뿐이다. 친숙한 강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도식화된 이해에서 벗어나 한나 아렌트 사유를 바탕으로 우리 시대 정치를 좀 더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데 많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한나 아렌트 사유의 전선들-기억과 이야기, 의식적 파리아의 정치》에서 저자는 한나 아렌트가 소위 민주시민의 덕목을 이야기하는 철학자일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이야기를 매개로 그 전통을 형성해 나가고 있는 투쟁 공간들 및 ‘소수자로서의 행위자들’의 정치 공간과 전적으로 무관하지 않은 철학자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철학이 억압받는 정체성을 가진 자들이 ‘이야기’를 통하여 자기 자신과 타자들, 자신이 처한 세계적 조건을 이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행위의 전통을 구성하는 데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기본 이해를 바탕으로 독자들은 사회에 자기 목소리를 들려주기 어려운 사람들, 장애인, 성소수자, 해고 노동자, 철거민, 빈민 등 주변부에 밀려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해서 이야기하는 ‘이야기꾼’들이 이들의 이야기로 건저 올린 망각되어 가는 이야기들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더불어 이야기로 드러나는 다원성/복수성이 어떻게 정치의 조건이 되는지도 함께 탐색하며, 한나 아렌트 사상의 폭넓은 가능성을 함께 발굴할 수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역사의 연속적 흐름을 깨고 출현한 사건들의 진귀한 의미를 캐 올리는 잠수부처럼, 이야기의 힘에 주목하면서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과 타자들, 자신이 처한 세계적 조건을 이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행위들을 배우며 스스로 살아가는 현장에서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 철학 강연록을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1~7강에 이르기까지 이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한나 아렌트의 삶을 함께 나누는 것에서 시작해, 그가 앞서 말한 사상들을 펼칠 수 있었던 맥락을 살펴보고, 기억과 이야기와 파리아론을 거쳐 인권의 역설, 권리들을 가질 권리, 악의 평범성, 전체주의 이해, 노동관, 세계 소외와 지구 소외 등 한나 아렌트의 핵심 문제들을 빠뜨리지 않고 다루게 된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텍스트를 충실하게 읽음과 동시에 우리 삶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러한 통찰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만날 수 있는지 탐색한다. 저자와 함께 독자들은 지루한 해설이 아닌 살아 있는 인문 강좌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6강은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활동적 삶Vita Activa’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다루며, 한나 아렌트 사상에 비판적인 여러 입장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을 노동, 작업, 행위로 구분하며, 근대 사회가 이것 중 노동의 활동에만 지나치게 주목하여 다른 활동들의 본 의미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아렌트의 설명은 애초부터 마르크스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구성된 것이기에 아렌트의 인간론은 여러 반대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설명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었다. 저자는 아렌트의 인간론이 근본적으로 마르크스의 노동 및 실천 개념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며, 또 그것을 나름대로 넘어서기 위한 치열한 사유의 결과물이라 말한다. 이에 대한 논의를 통해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인간론을 그저 자유주의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마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히려 아렌트의 철학이 오늘날 노동운동을 포함한 저항적 운동들에도 꽤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져 준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가 처한 현대의 다종다양한 문제들을 함께 다루고, 우리가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 책은 단순한 철학 해설서로써가 아니라 독자들이 삶 속에서 문제들과 씨름하며 고민할 때 작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책은 강의와 더불어 각 장마다 현장감 있는 질의응답도 포함하고 있다. 질의응답을 통해 나눈 여러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반영하면서 이 책에서 나눈 논의가 더욱 풍성해지도록 돕는다. 단순히 한나 아렌트 텍스트의 이해를 넘어서서 이를 통한 새로운 사유, 새로운 정치를 그려 볼 수 있다. 생전에 ‘우정의 천재’라 일컬어졌던 한나 아렌트의 친구로 함께 사유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길동무가 되어 줄 것이다.
작가정보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로 활동하며, 투쟁하는 장애인의 활동지원 노동을 하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판단 이론 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박사 수료 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유한대학교에서 철학 및 윤리학을 강의했다. 현재는 한나 아렌트의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장애학을 연구하며 소수자 운동들과 계급 해방 운동 간의 만남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저서로 『지식의 역사와 그 지형도』(공저)가 있으며, 「권력 분립과 인민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 몽테스키외, 맑스주의, 아렌트를 중심으로」, 「마오주의, 인민 해방 이론인가? 전체주의적 기획인가?」 등의 논문을 썼다.
목차
- 들어가며 5
1 한나 아렌트의 삶을 ‘이야기하기’, 그리고 의식적 파리아Pariah의 정치 23
2 기억과 이야기의 정치학 75
3 인권의 역설: 아렌트의 자연권 비판과 ‘권리들을 가질 권리’에 대하여 125
4 역사 자연 법칙과 인간의 자유: 아렌트의 이데올로기론과 전체주의 이해 161
5 공무원처럼 말하기, 소크라테스처럼 말하기: ‘악의 평범성’에 관하여 215
6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넘어서? 한나 아렌트의 정치적 인간 존재론: 노동, 작업, 행위에 관하여 255
7 한나 아렌트의 근대 과학 및 자본주의 사회 비판: 지구 소외와 세계 소외에 관하여 307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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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지침을 주는 학자가 아니라 우리의 참여를 유도하는 정치적 공간의 이름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문제들이 신기하게도 아렌트라는 공간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다. 이는 아렌트를 끌어들이면서 아렌트를 쟁점화하는 저자의 뛰어난 역량 덕분이다. 현장에서 공부하는 이 드문 연구자 덕분에 우리는 아렌트를 통해 우리가 겪은 사건들을 읽으며 또한 우리가 겪은 사건들 속에서 아렌트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파리아를 정치적 공간으로 끌어들이려는 저자의 노력에서 소위 정상성의 정치와 아렌트에 대한 통상적 해석을 깨뜨릴 수 있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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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억압받는 이들의 경험과 이야기에 입각하여 한나 아렌트를 독창적으로 변용하려는 흥미로운 작업이다. 복수성, 탄생성, 권리들을 가질 권리, 세계 소외 같은 아렌트의 개념들이 파리아들의 관점에서 생생한 구체성을 얻고 있다. 자신의 삶과 문제의식에 따라 과거 사상가들을 변용하는 것이 곧 사상이라면, 이 책은 충분히 사상-되기의 시도라고 불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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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를 줍는 마음’으로 주류 사회에서 하찮고 사소하게 여겨져 온 것들을 야학 교실에서, 거리에서 발굴하여 세계로 드러내는 책이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 투쟁하는 자들의 관계와 실천이 응축된 공간들이 정치의 근본 조건인 다원성/복수성plurality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고민하게끔 만든다.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며 ‘지침 없이’ 혁명을 준비하는 ‘우정의 천재’를 나는 이 책의 저자를 통해 만난다.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책 속으로
아렌트에 따르면 마침 20세기라는 역사적 조건은 벤야민과 같은 작업을 수행하기에 참 좋은 조건이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양차 세계대전과 파시즘,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인하여 20세기는 과거와 현재를 읽어 내는 기존의 모든 전통을 붕괴시켰거든요. 온갖 재앙들과 종말론적 이미지들의 출현 속에서 진보적 역사관의 전통에 대해서조차 의심이 확장될 수밖에 없었고요. 전통이나 신뢰를 받을 만한 역사관이 남아 있다면, 과거의 사건들은 정해진 방향으로 해석되고 현재와 미래를 위해 활용될 것입니다. 마치 유서가 유산의 향방을 결정해 주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붕괴된 전통, 신뢰를 잃은 전통은 이 유산을 후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할 것인지를 더 이상 말해 주지 않습니다. 20세기 중반의 인간들에게 유산은 이제 ‘유서 없이’ 남겨진 것입니다.
물론 아렌트가 말했듯, 이러한 전통 내지 세계관의 붕괴는 어두운 시대의 도래를 동반합니다. 아무리 억압적인 형태일지라도, 아무리 기만적인 형태일지라도, 사람들이 믿고 의지할 권위, 즉 한 시대 나름의 ‘진리의 기둥’의 소멸은 필시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겪게 만들거든요. 심지어 이러한 조건은 전통의 붕괴 속에서 공식 역사를 부정하고자 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상당수의 독일 지식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허위로 가득 찬 나치의 새로운 역사 신화에 열광하게끔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한편으로 수집가 내지 이야기꾼이 전통을 파괴할 과업의 부담을 덜어 주기도 합니다. 그는 이제 전통에 속박받지 않은 채로 자유로운 사유의 이동을 통하여 부단히 과거를 살펴보고, 거기에서 진귀한 보물들을 집어들어서 현재로 인용해 오기만 하면 되니까요. 즉 그에게 유서 없이 유산으로 주어진 과거의 파편들은 그로 하여금 그 유산들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를 속박하던 모든 것들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pp. 101~102)
그러나 아렌트는 도리어 눈앞에 보이는 바로 그 명백한 사실 자체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아무리 악마적인 결과를 낳는 행동을 수행하는 이일지라도, 그는 악마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폭로합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아주 가끔씩 스스로가 매력적인 악을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발언을 내놓았을 뿐, 실은 지극히 하찮은 인간일 뿐이었다는 것이지요. 아렌트는 이와 연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악마로 묘사한다면 우린 스스로를 흥미로운 존재로 보이게끔 만들 뿐 아니라, 남들은 갖지 못한 깊이를 우리 자신에게 몰래 부여할 수 있어요. 그러지 못하는 이들은 지나치게 얄팍한 사람들이라서 가스실에서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지 못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결코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코 매력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나폴레옹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도 아니었으며, 루시퍼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출세하고자 했던, 심지어 자신이 속한 ‘국가의 법률’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자기 업무에서 비교적 탁월한 모습을 보였던 이, 즉 딱히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범죄 동기나, 그것을 넘어선 초월적인 범죄 동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이였습니다. 숱한 이들의 열광과 공분을 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은 그렇게 우리 앞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pp. 229~230)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수없이 논의한 것처럼 아렌트가 보기에 인간사의 영역은 애초부터 과학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영역이 근대적 정신과 함께, ‘현실’과 도리어 멀어진 채로 과학적으로 인식된 필연성의 법칙에 의해 장악되기 시작했으니, 아렌트의 걱정이 상당 부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제 “모든 현실 관계들은 인간이 만든 상징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로 환원되어”5) 버렸으니까요. 그리고 이것이 극단화되면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유사-과학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출현할 것입니다. 심지어 조건만 맞는다면 그 이데올로기는 나치 독일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실제 현실의 영역에서도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테고요. 즉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현실적 영역을 넘어서서 작동하는 필연적 법칙’이 인간사의 모든 영역에 대한 판단을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나 과학 법칙이 타당성을 가진다고 여겨지는 시대 상황 속에서 인간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존재자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너무나도 강렬하고 생생하게 지각되는 정치적 공간의 의미,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서 기적처럼 출현하는 ‘혁명의 새로움’조차도 이제는 ‘법칙적 과정’의 ‘당연한 한 단계’를 차지할 뿐입니다. 아렌트 입장에서 이러한 시각은 인간을 객관적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behavior’하는 존재자로 전락시켜 버린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시각의 출현과 함께 정치 영역은 오직 그 과학적 법칙을 알고 있는 이데올로그나 전문가 혹은 그들의 추론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직업 정치가들의 활동 영역으로 제한되어 버릴 수도 있고요. (p.324)
기본정보
ISBN | 9791196096069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11월 28일 |
쪽수 | 352쪽 |
크기 |
150 * 211
* 27
mm
/ 580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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