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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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기 시인의 시편들은 자연과 인간이 조응하는 삶의 풍경에 주목한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한 몸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그의 시가 쉽게 읽히면서 크게 독자와 교감, 공감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쓸모없는
구절들만 모아
그 구절들로만 이루어진
백 편 천 편의 시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곧 시다
꼭 쓸모만큼
잎 돋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가진 거 다 버리고는
깊은 동안거에 들어간
겨울나무가 곧 한 편의 시다
-「시」 전문
구재기 시인의 시는 자연을 인간 주체와 분리된 이질적 대상이나 타자성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에 대한 열망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현실적 삶의 가변성과 파편성, 근원 세계의 상실과 혼돈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일종의 시적 고투이다. 따라서 “쓸모없는/구절들”로 이루어진 “백 편 천 편의 시”보다 “한 그루의 나무”, “가진 거 다 버리고//깊은 동안거”의 “겨울나무가 곧 한 편의 시”라는 시인의 담백한 고백이 구재기 시인의 시가 어떠한지 말해준다. 최근 시들은 난해하고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구재기 시인의 솔직하고 가감한 고백처럼 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불필요한 구절들을 다 버려야 한다. 그래야 교감, 공감이 된다.
백합이
하얗게 피었다
향기가 너무 좋았다
본래부터
하얀 꽃이
향기가 좋다고 한다
상복 입은
옛 애인의 모습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적이 있다
-「백합」 전문
구재기 시인은 자연 속, 일상 속에 숨어 있던 생활의 철학을 발견할 줄 아는 시인이다. 시인은 ‘슬플 때, 아픔일 때’ 시가 나온다고 한다. 또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지칠 때 시가 나온다고 한다. 일상에서 마주친 백합 한 송이 “하얀 꽃”의 “향기”는 “상복 입은/옛 애인의 모습”으로,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적을 그린다. 또한 “올해도 보리수나무에/보리수가 잔뜩 열렸다/가지가 찢어지도록 열렸다/아무도 찾아주지 않아/제 홀로 붉게 익어갔다/누군가 찾아주겠지/기다리다 못해/보리수는 볼이 터지도록”익었지만 “개 한 마리 짖지 않는/조용한 마을,/거대한 일이”(「거대한 일」)라는 삶의 깨침을 잔잔하게 읊고 있다.
이번 시집은 자연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시집 속엔 언어의 미학적 차원을 넘어 인생론적 진실이 담겨 있다. 시인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과의 우정 어린 관계 속에서 사람살이의 참된 도리와 이치를 터득하고 독자에게 다가간다.
작가정보
작가의 말
■ 시인의 말
마주치는 바람이
나를 찾게 해준다
막힘없이 가쁜 숨결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넌다
한참을 걷다 보니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바람 어느 곳에도
나는 없다
또다시 느릿느릿, 걷기로 한다
조금도 머뭇머뭇, 않기로 한다
2022년 1월
산애재(蒜艾齋)에서
구재기
목차
- 시인의 말·05
제1부 빛의 무리
강물·13
꽃밭 소묘(素描)·14
붕어빵 집 앞에서·16
나무가 숨 쉴 때·18
갈래길·20
교목(喬木) 아래·21
민들레 꽃씨·22
바닷가 모래밭에서·24
일락(日落)·26
새의 발자국·28
모래밭에서·30
빛의 무리·31
제비꽃·32
잔디 블록·34
호박 넝쿨을 바라보며·36
시골 첫 버스·37
국밥집에서·38
잔칫날·40
제2부 이상한 일
어음정(御飮井)에서·45
낮달·46
바이없이·48
부처는·50
촛불·51
정해진 길·52
현자(賢者)·54
에밀레·55
내 발은·56
반가사유상의 발·58
이슬·60
여기·61
맑은 물·62
이상한 일·64
입맛·66
눈·68
자화상·70
거대한 물결·72
거대한 일·74
제3부 가을나무처럼
툭·77
꽃 속의 노래·78
봄빛·80
봄·81
산·82
낙엽·83
가을 산녘·84
길 위의 낙엽·86
가을 무렵·88
겨울 산길에서·90
거울 속의 날씨는 흐림·92
가을나무처럼·94
폭설(暴雪) 전에·95
눈을 맞으며·96
시란 무엇인가·98
시 쓰기·100
시의 수확·102
시·104
제4부 노을 앞에서
화안한 길·107
꽃·108
웃음의 눈물·110
눈물 사이·112
노을 앞에서·114
동행·116
백합·117
겨울 달밤에·118
모과 향·120
황혼에서 아침으로·122
허공의 나무들·124
별과 함께·126
별리(別離)·128
별을 기다리며·129
꿈속에 들어·130
어둠 속처럼·132
동굴(洞窟)에 들어·134
한 소식·136
시인의 산문·137
추천사
-
“겨울나무가 곧 한 편의 시다” 시인이 고백한 이 한마디가 구재기 시인의 시를 말해주는 게 아닌가. 언뜻 구재기 시인의 시는 자연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데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거기엔 언어의 미학적 차원을 넘어선 어떤 인생론적 진실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요즘 우리 시단을 휩쓸고 있는 유행 풍조처럼 난해하고 난삽하지는 않다. 누구나 쉽게 이해, 교감, 공감이 되는 시들이다. 삶에 대한 겸허한 성찰, 자연을 바라보는 외경의 정신, 타고난 미적 감수성 등이 한가지로 어울린 그의 진솔한 언어, 한마디로 구재기 시인은 우리의 시단에서는 드물게 자연 속에서 생활의 철학을 발견할 줄 아는 시인이다.
-
“백 편 천 편의 시보다/한 그루의 나무가 곧 시다”“나를 다루기가/하루하루 어려운”시기를 지나 “나를 잘 다룰 때”의 나이에 이른 구재기 시인의 신작시집은 우주 안에 편재하는 온갖 사물에 대한 조응 속에서 궁극에 닿은 깨달음으로 넘쳐나고 있다. 시인은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과의 우정 어린 관계 속에서 사람살이의 참된 도리와 이치를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처처(處處)에서 자재(自在)로 살아가는 정신이요, “분별해오던 것들도/아예 놓아버리고 난 자리”에 생겨난 여여(如如)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일체의 인위에서 벗어나 ‘홀로 붉게 읽어가는 보리수가 홀로 지는 것’을 ‘거대한 일’로 여기는 일과 무관치 않다.
책 속으로
■ 시집 속의 시 한 편
겨울 산길에
어떤 주인이 따로 있을까요
소나무도 참나무도 아카시아도
낙엽으로 길을 덮고 있는데
짐짓 바깥세상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놓아버리고
혼자서 걷는다고, 혼자서
가만히 차지하는 것, 아니지요
칡덩굴이
큰 나무를 휘감으며
제 살아갈 구실을 찾다가
스스로 파멸하고 있는 지금
잔뜩 찌푸린 하늘이
싸래기눈 하얗게 뿌려주는
겨울 산길은 시방
얻기 힘든 주인을 만난 것이지요
된바람 한 줄기도 짐짓
겨울 산길의 주인 몫을 하고 있거든요
-「겨울 산길에서」 전문
기본정보
ISBN | 9791191914146 |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2월 15일 | ||
쪽수 | 160쪽 | ||
크기 |
127 * 206
* 17
mm
/ 24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에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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