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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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당신의 이름을 호명하는 일
이번 시집에서 임수현 시인은 특유의 다정한 어법으로 ‘우리’로 명명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나의 기침이/너의 안부가 되지 않기를//한밤중에 일어나/창밖을 내다보는 일이/우리의 안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시인의 말처럼, 임수현은 누군가 머물렀다 떠난 자리에 대해 절망하지 않고 기꺼이 그 공백을 기억한다. 이는 안녕을 건네는 방식으로 다가올 내일을 기약하는 시인의 결심이자 성장이다. 서윤후 시인은 해설을 통해 “시인이 보내는 작별은 우리에게 다가올 다음을 위한 가장 투명하고 건강한 인사”라고 말한다. ‘투명하고 건강한 인사’란 불가항력의 이별이 아닌 스스로 용기를 낸 작별의 주소지이다.
임수현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난 시인들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안부를 묻기도 한다. “자기야 내가 꿈을 꿨어 낭독회를 하는데 김희준 시인과 내가 낭독자래 김희준 시인은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예전하고 똑같더라”(「얼룩덜룩」), “진흙 더미를 넘어 25번 게이트로 갔을 때, 허수경 시인 아니세요? 고고학을 연구한다고 들었어요. 그나저나 얼마 전에 부고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그러니까 나이지리아」) 같은 대목이나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그의 부재를 호명하는 「요가 강습」등이 그렇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 불가분의 영역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행위는 독자로 하여금 묘한 기시감을 시적 화자와 함께 경험하게끔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꿈의 풍경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무의식 너머에 잠재된 상상력을 환기시킨다. 임수현 시인에게 꿈이란 “나를 떠날 생각만 하”는 “어지러운”(「어디로 갈지 몰라 달팽이에 길을 물었어요」) 존재임과 동시에 ‘내’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 “밤을 배회”(「밤에게」)하는 존재이다. 이는 떠난 자들의 자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기꺼이 작별 인사를 건네는 시인의 태도와 크게 맞닿아 있다. “그곳을 멀리 떠나왔는데/잠결에/“응응 그래서?” 물으면/다른 사람 꿈을 따라 꾸는 것 같”(「돌멩이가 되기로 했다」)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네가 이 꿈에서 나가기 전까지 아무도 못”(「흰」) 나가는 세계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시인은 실재하는 풍경을 직시하게 된다. 그 시선을 통해 투시되는 세계의 양면성 속에서 시인은 혼자인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너와 내가 ‘우리’로 명명될 수 있음을 말한다.
「영원이다 싶지만 꼭 그런 건 아니라서」일까, 「좋은 곳에서 만나면 더 좋은 얼굴이 되겠지」라고 말하며 다가올 내일을 위해 「작별 인사는 짧게」 건네는 시인의 태도는 슬픔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만남을 기약하게 하는 따뜻함이고 동시에 주변을 헤아리는 사려 깊은 보폭이다. 한 권의 시집을 만나 페이지를 펼치고, 끝끝내 완독하여 책장을 덮는 일 또한 ‘우리’의 ‘안녕’이 아닐까.
작가정보
작가의 말
시인의 말
나의 기침이
너의 안부가 되지 않기를
한밤중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우리의 안부가 되지 않기를
2021년 7월
임수현
목차
- 1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주지는 않아요
긴 목을 늘어뜨리고
초복
얼룩덜룩
한 다발
요가 강습
죽자고 달려드는 바람에
이브
왼쪽으로 돌아누워 자면 섬이 나와요
영원이다 싶지만 꼭 그런 건 아니라서
돌멩이가 되기로 했다
타인의 삶
작별 인사는 짧게
겨울 호수
텐트
아는 구관조
유리병 유희
열 개의 심장
2부 후 불면 꺼질 것처럼 환한
하나를 알면 둘이 잊혀서
호흡법
알로하 아로마
조경
알
울고 싶을 때는 고양이 가면을 써
피어라 새소리
가벼운
파도의 기분
스탠드를 밤새 켜 놓고
한밤의 미술관
개를 훔치는 유일한 방법
너무도 한가한 송추 계곡의 추억
그러니까 나이지리아
망원
3부 축축한 웃음 괜찮습니다
조용한 세계
자전적 소설을 읽는 밤
싹수가 노랗다는 말
나는 회색입니다
다음 호
축축한 웃음 괜찮습니다
오늘 모임
밤에게
각자의 식빵
어디로 갈지 몰라 달팽이에 길을 물었어요
오늘 밤에는 새가 사람보다 많네
무지
호밀빵 굽는 시간
가지들
4부 말을 아끼면 비밀도 많아진다
천사
티백을 우리며
황새와 나
예천
영주
흰
레몬 나무
좋은 곳에서 만나면 더 좋은 얼굴이 되겠지
야생장미 이야기
은하철도의 밤
필사적인 밤
절반의 사과
잡목
저녁에는 바깥으로 나가야지
사과와 칼
해설
공손한 작별의 시
-서윤후(시인)
추천사
-
저기 회색 고양이가 절뚝이며 걷습니다. 어깨를 부여잡은 고양이는 사람 같군요. 장미는 가시를 키우며 울었죠. 가장 아름다워지기 위해 참혹을 배워야 한다며 누구는 아무렇지 않게 장미를 꺾어 버리네요. 아파 본 사람이라 이 모든 것이 더 아픈 사람은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주고 있습니다. 에베레스트 셰르파들이 짐을 운반할 때 그들 무거운 어깨에 천사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풀어놓은 문장이 착한 눈을 가져서 어떻게 사람에게 가닿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잘 아는 사람은 천생 시인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런 것에 과학적 지식이나 철학적 사상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따뜻한 마음 하나면 충분히 시의 징후가 되는 것을요. 그러므로 우리 좋은 얼굴을 하고 안녕이라 말하면 됩니다. 힘껏 착한 사람이 되어 사람의 등을 쓸어안으면 됩니다. 이 서러운 활자를 다 읽으면 고단한 생의 뿌리를 다독일 수 있을 겁니다. 사람 속에 자라나는 사람도 모를 비명을 무의식으로 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시의 마음이 곁이 되고 울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될 때 마지막 문장으로 누워 있을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마침내 사람에 대한 깊고 아름다운 갈증에 시달릴 준비를 하는 겁니다. 한 권의 사람 읽기에 다름 아닌 시집을 읽으며 죽음과 삶을 껴안아 봅니다. 오늘은 울고 내일은 웃을 거라는 기도를 해 봅니다. 매력적인 시인이 마지막 문장처럼 누울 세상이 부디 험하지 않기를요.
책 속으로
언니가 죽었어
요새는 뼈가 타는 걸 보여 주더라
마흔다섯이 십 분밖에 안 걸려
너는 입에서 날개뼈를 발라내며 말한다
너는 국물에
소금을 많이 넣는 것 같다
어떤 나라에서는
화약 속에 유골 가루를 넣어 폭죽놀이를 한다지
풍등에 유골 가루를 넣어 날려 보내는 곳도 있어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닭을 먹으며 닭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잡지와 문학과 세간에 떠도는 불행에 대해
더 넣으면 짜
너는 내게 소금 통을 당겨 준다
파리가 젓가락에 붙었다 날아간다
무슨 영혼이라는 듯이
서로 내겠다고 신발을 접어 신고
계산대로 달려가지 않았지만
우리 곁에 잠시
녹는 것 같다 밍밍해서
뭔가 더 넣고 싶어지는 것들과
-「초복」전문
오후에는 구름의 인상을 살피며 걸었다
준비된 비가 구름을 찢고 떨어질 때
두 손밖에 없다면
누군가의 우산 속으로 뛰어드는 상상은
용기와 비슷해 조금 웃을 수 있다
내가 이렇게 즐거운 상상으로
기뻐할 때
블라우스 단추가 떨어졌다 언제부터
제 몸을 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게 글쓰기를 배우는 학생은
알약을 모았다고 했다
누가 연습으로 손목을 그어요
내게 줄 그은 손목을 보여 줬다
조금 더 견디지 그랬니?
모르고 한 말이었다
끝까지 갈 데까지 간 거
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다짐
서로가 결심을 유보하며
일단 걷는 데까지 걸어 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잠시 우리가 마주 봤다면
한동안 거기 있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이마를 짚으며
서로 겹치지 않게 나란할 수 있었다
후두둑 비가 떨어지면 편의점 주인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파라솔을 접는다
그 안에 진실이 있다는 듯이
-「하나를 알면 둘이 잊혀서」전문
내가 좋아하는 건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다고 한 사람들은
가족사진을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사람과
피자를 처음 먹어 봤다며 피자집에서 우는 사람뿐이었다
아파트 화단에 심은 꽃나무들이 죽으면
3년까지는 새로 심어 준대
친구는 조경하는 애인한테 들었다고 한다
좋든 싫든
죽을 각오로 사는 거
유효 기간을 지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 내는 거
바질은 허리가 큰 바지를 입은 것처럼 커진 화분에 담겨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물을 받아 먹는다
-「조경」부분
고기잡이배들이 해안선을 그렸다가 지운다
해변에 오면 사람들은 신발을 벗어 들 준비가 되어 있다 벗어 둔 신발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신발을 생각하지 않는다
(……)
모래처럼 부서진 기분을 뭉쳐 파도에게 주었다
웅크린 몸을 펴
벗어 둔 신발을 집어 들면
맞잡은 두 손에도 계절감 같은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대로 괜찮다
바다에서 돌아와 바짓단을 펴면
아는 낱말의 수만큼 밤이 되겠지
파도가 내게 모래를 한 움큼 넣어 주었다
-「파도의 기분」부분
언니, 아침이면 여긴 새소리가 피어나
가지마다 날개가 피어나
나뭇가지에 앉은 새 떼가 잠을 다 깨운다지만
시끄럽지 않다면 꽃을 피우지 못하겠지
죽자 살자 피어나는
아침을 누가 막을까
뜬눈으로 밤을 새운 사람은 수도꼭지에 떨어지는 물소리로도
눈이 파여
일제히 궐기하듯 피어나는 새소리
숨을 참기는 힘들 거야
언니, 저 새들도
무릎을 굽히고 심장을 쓸어내릴까
난간에 매달린
새의 발목을 끌어안고 떨어지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
아침 공기는 더 팽팽해지고
미래는 불투명 유리처럼 반짝이겠지
누가 한쪽에서 놓으면 탕-
우르르 쏟아지는 양떼구름
언니, 새들이 피어나는 가지를 꺾어
푸른 잎 돋아나면 안부라 여길게
지지 않고 지치지 않고
피어나고 피어나
여긴 모두 괜찮아
-「피어라 새소리」전문
겨울이면 철새는 철새의 판타지를 향해 이동한다
나는 내 시의 판타지가 있고 교회는 구원의 판타지가 있다
조금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누군가는 회개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 기대감이라는 말이 가깝게 느껴진다
가짜 얼굴 가짜 웃음을 들고 거리를 배회하면
웃으면 안 되는 곳에서 웃음이 난다
투명한 볼에 든 숫자 공
손을 집어넣어 꺼내 보면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외로워 누구의 손을
먼저 잡아 줘야 할지 모르겠다
깨진 것이 투명한 볼이든
혹은 심장이든
손을 휘저으면 엉킨 손들이
깨진 유리 조각을 잡아 피를 철철 흘린다
철새 도래지에 남겨진 엄마는
성경책을 부적처럼 꼭 끌어안고 교회로 향한다
구원은
집단과 개인 향락과 질서
현재와 미래가 어디로 갈지 몰라 대열에서
뿔뿔이 흩어진 뒤
새해 복 많이 받아
인사나 다짐만으로
더 좋은 곳으로 이끄는
우리의 판타지는 보이는 것보다
가깝거나 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신이 없어서
우리는 서로를 잠시 믿을 수 있다
-「좋은 곳에서 만나면 더 좋은 얼굴이 되겠지」전문
기본정보
ISBN | 9791191262445 |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7월 13일 | ||
쪽수 | 158쪽 | ||
크기 |
125 * 201
* 12
mm
/ 176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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