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K의 미필적 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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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10년 만에 출간한 이춘길 첫 소설집 『형사 K의 미필적 고의』
이춘길의 소설들은 지루할 틈이 없다. 인간 이면에 숨어 있는 악의와 가면의 안팎을 넘나드는 모순들을 집요하게 파헤치되, 질척거리지 않는다. 작품의 소재들은 길바닥에서 주워 온 듯한데 살펴보면 흔하지 않다.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동시대의 시공간에서 저마다의 재료로 살고 있는 군상들의 이야기이되, 소설가 이춘길은 억지스럽게 전개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작가의 시선이 평범하지 않은 데다 서사 전개가 상투적이지 않은 것은 이춘길만이 지닌 필력이라 가능한 것이다.
책에 실린 작품들은 처음 읽었을 때와 두세 번 읽었을 때의 맛이 확연히 다르다. 한 번 읽었을 때 살짝 핏기가 도는 맛이라면 거푸 읽을수록 오감을 자극시키며 계속 먹고 싶게 만든다. 소설집은 수사가 화려하지도 구구절절 친절하지도 명확한 결말도 없다. 그러나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구성은 뻔한 이야기를 뒤집어 그로테스크한 상상을 촉발한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는 이 소설집에서 단연 으뜸이다. 마치 투견장에 서 있듯 생생하게 표현되어 하드보일드 매력을 듬뿍 뽐내는 작품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거나 버려지는 사회의 축소판인 투견장의 비극은 섬뜩하면서 기괴스러운 느낌마저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날카롭게 자란 송곳니”로 사냥감을 찾고 있는 ‘나’는 누구인지,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미필적 고의에서 중요한 건 ‘고의’의 유무이다. 고의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 사건의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그러므로 ‘고의’성을 가려내기란 대단히 까다로운 일이며 이는 얽히고설킨 관계성을 함축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해 방현석 소설가는 “그의 서사는 단선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단층적이지도 않다. 나의 삶이 수많은 ‘미필적 고의’에 휘둘리 것 이상으로 나의 ‘미필적 고의’가 타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한다는 진실을 그는 외면하지 않는다”고 헌사하고 있다. 이 점은 표제작인 「형사 K의 미필적 고의」를 비롯해 각 작품마다 다양한 군상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윤재민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간결한 호흡의 문장에서 이따금씩 터져 나오는 변수들이 결코 이어지지 않을 법한 상황을 끝끝내 하나의 플롯으로 직조해 내고야 만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보다 갸웃한 순간이 압도적인 이 소설적 경험이야말로 이춘길 소설 제일의 미덕이자 에센스”라고 강조했다.
책에 실린 일곱 작품의 발표 연도를 보면 10년 만에 출간한 첫 소설집치곤 과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발표 횟수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형사 K의 미필적 고의』는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으며, 이춘길만의 독특한 개성이 충분히 녹아 있는 데다 묵직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춘길
1971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2011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작가의 말
첫 소설집을 엮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 발짝 떨어져서 내 삶과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래서 출판되어 세상에 나갈 작품들을 한 편씩 읽는 일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 작품집이 소설가로서 내 삶에 변명이 될 수 있을까.
등단 후 지금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삭발도 했고, 작업실을 몇 번 옮겼고, 많은 작품을 구상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시간이었다. 게으른 자신을 탓하게 된다.
삶에 큰 변화가 생길 때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먼저 떠오른다.
묵묵히 응원해 준 가족들의 얼굴 또한 하나둘 떠오른다.
이 작품집이 작가로서의 삶에 변곡점이 되길 바란다.
작품집을 엮으면서 주변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고맙고 미안하다.
걷는사람 편집부에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0 겨울
이춘길
목차
- 형사 K의 미필적 고의
동파
관리인
잡식동물의 딜레마
실종
카라반
피터의 편지
해설
카운터─팩트체크
윤재민(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추천사
-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 야구라면 끝나도 끝나지 않는 것이 소설이란 사실을 보여주는 독특한 솜씨를 지닌 작가가 이춘길이다. 그의 소설은 예측불허일 뿐만 아니라 복기 불가이기도 하다. 그의 서사는 단선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단층적이지도 않다. 나의 삶이 수많은 ‘미필적 고의’에 휘둘리는 것 이상으로 나의 ‘미필적 고의’가 타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기도 한다는 진실을 그는 외면하지 않는다. 형사 K와 나와 형, 꼬리를 문 이들의 미필적 고의를 끝까지 쫓아가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파괴된 고정관념이다. 우리는 소설책을 덮고 나서야 적확하고 정교한 문장과 문장으로 직조된 그의 소설이 우리를 끝까지 긴장시키는 힘은 상투적 시선을 용인하지 않는 강인한 산문정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
이춘길의 인물들은 대개 행정 처분을 기다리거나 기다렸거나, 계약에 얽혀 있다. 즉 법리적 문장들이 욕망에 선행해 있다. 때로 그들은 이런 사회적 문장에 떠밀리기 전까지 스스로를 모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언제나 서식화가 발생하는 순간이란, 세계에 사건들이 누적될 대로 누적된 이후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문장들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말이다. 늦다니. 늦어 버린 자들의 서글픔. 많은 예술가들은 이 서글픔을 서술하고 싶어 하지만 또 그게 쉽지만은 않다. 눅눅해지거나 상투적 레토릭이 되기 때문이다. 그걸 피하려다 보면 치기 어린 냉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이춘길은 건조하게 그렇지만 냉소적이지 않게, 그러면서도 ‘뿜’ 하고 ‘빰’ 하게 그려냈다. 무슨 말이냐고? 그러니까 연탄불 뺀 자리 같은 기억도 이춘길이 쓰면 꽉 조여진 세련된 문장이 된다는 말이다.
책 속으로
진실이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입증과 증거만이 중요하다. 허위 신고가 허위이건 자백이 허위이건 진실처럼 보이면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이다.
─「형사 K의 미필적 고의」, 27쪽
겨우내 얼어 가는 콘크리트 온도는 영하 10도 이하이지. 그 속의 수도 배관도 흐르지 않으면 금방 영하로 떨어져서 얼어 버리지. 미세한 충격이나 작은 온도 변화에도 금세 얼어 버리는 게야. 아무도 모르게 동파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지.
이미 얼어 버린 수도를 녹이려면 배관뿐 아니라 주변의 콘크리트까지 녹여야 한다는 말이었다. 노인은 직사각형의 잿빛 콘크리트 덩어리를 아득히 바라보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 모습이 얼음창고를 지키는 창고지기처럼 어쩐지 을씨년스럽게 보여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동파」, 52~53쪽
관사 옥상에 원장 아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양팔을 벌리고 괴성을 지르는 사내의 아우성은 폭우 소리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K가 내려오라고 소리쳤지만 그 소리도 빗소리에 사그라졌다. K는 차양 밑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구조 요청을 하듯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간호사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 101~102쪽
마스터 김은 폭력 없이 얻은 것은 진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리고 피를 보면 주머니가 열린다는 갱스터들의 격언을 영원불변의 잠언으로 여겼다. 유저를 모으기 위해서는 투견장이 피범벅 되는 이벤트가 필요한 것이다.
─「잡식동물의 딜레마」, 118쪽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런데 어딘가 미치도록 가렵다. 손을 더듬어 가려운 곳을 찾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날카롭게 자란 송곳니가 잡힌다. 조련용 곤봉을 들고 투견장으로 달려간다. 누구를 향해 곤봉을 휘두르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마른 나무 위에서 하이에나 떼로 뛰어드는 늑대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잠시 떠올랐을 뿐이다.
─「잡식동물의 딜레마」, 141쪽
그녀는 행복이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맞은편의 부자가 행복해 보인다고 말했다.
노년에 카라반을 몰고 두루 여행 다니는 삶도 괜찮겠어.
남편은 달려드는 연기를 피하면서 실없는 말을 던졌다. 남편은 만약 여윳돈이 생기더라도 카라반을 사는 무모한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카라반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는 여느 유형자산과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허세가 싫지 않았다. 미란의 말처럼 그들이 불을 끄고 눕기 전까지는 번잡하지 않고 편안한 바캉스였다.
─「카라반」, 188쪽
왕성한 소화를 끝낸 내장처럼 기계 속은 뜨거웠다. 강은 덜 익은 소화액 같은 매캐한 매연 냄새를 맡으며 깊숙한 곳을 향해 한 발씩 내딛었다. 스산한 기분이 들어 뒤돌아보았을 때 사위는 어둠뿐이었다.
강은 2인치의 점검창에 플래시를 비췄다. 누군가의 눈동자가 보였다. 플래시 불빛이 반사되었는데 주저하는 눈치 없이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는 눈동자. 강의 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피터의 편지」, 224~225쪽
기본정보
ISBN | 9791191262100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1월 06일 |
쪽수 | 268쪽 |
크기 |
130 * 200
* 24
mm
/ 306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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