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은 노래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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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숲과 투명한 바다, 싱그러운 귤나무의 소식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작가정보
목차
- 초대
따뜻한 숨, 너그러운 마음
방학
실놀이
바람이 불어와야 할 땐 불어오기를
낮이 길어지다
평화
뿌리
여름의 문턱
초록
비치코밍
멧비둘기의 고향 집 1
더위에 쏘이다
이게 말이 되나?
축하합니다
꽃은 어디에 있을까
멧비둘기의 고향 집 2
인연의 열매
어느 무구한 하루
보은
북서풍을 타고 겨울이 왔다
소설
수확
무제
작가의 말
추천사
-
아마도 나는 이런 글을 기다려왔던 것 같다. 도시의 소란을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 나와 당신, 우리의 작은 개가 얼마나 고유한 꼭짓점들이며, 그렇게 이루어진 삼각형이 얼마나 단단한 세계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생명, 시, 음악, 순환, 섭리, 이해, 우정, 기도와 같은 단어들을 자전축으로 삼은 이 찬찬한 고백 앞에서 영혼의 눈과 귀가 씻기는 기분이었다. 갈피마다 빛이 일렁이는 사랑의 책이다.
-
아직 나에게는 낯선 24절기의 테두리가 자연을 만지고 살아가는 오하나 작가에게는 지극히 편안해 보인다.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단순한 순리를 따르며 그는 누구보다 먼 곳에, 누구보다 촘촘히 다녀오는 것 같다. 과거의 귤나무와 미래의 멧비둘기가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그의 동근 세계를 읽다 보면 슬그머니 나의 영혼도 곁에 같이 세워두고 싶다.
책 속으로
우리 집은 지은 지 20년이 넘었다. 제주의 북서쪽 바다를 면하고 있어서인지 창틀이나 외벽, 문손잡이 등이 나이보다 낡아서, 겨울이면 금 간 벽과 벌어진 창 틈새로 거칠고 찬 북서풍이 ‘휘유 휘유’ 휘파람을 불면서 드나든다. 카디건을 두르고 마루로 나가서 실내 온도를 확인하니 섭씨 15도. 시각은 5시 30분. 어제는 14도까지 내려갔다. 뜨거운 물로 보이차를 내려서 남편과 마주 앉아 음악을 듣는다. 어둑한 새벽에 잠에서 깨기 위해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이다. (18~19면)
역시 방학에는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내키는 대로 산책을 떠나고, 철새들을 만나고, 하루 세끼를 세심하게 차려 먹고, 요가나 근력 운동을 하고, 남는 시간에는 원 없이 음악을 듣고 부지런히 책을 읽고 또 만들어낸다. 반면 숙제 같은 집안일은 남편도 나도 최대한 미뤄서 집 안 바닥은 지푸라기, 풀씨, 먼지, 보현의 털로 적당히 지저분하다.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유리병과 종이 박스가 방 한편에 쌓여 있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집 안에서 우리 셋의 살내가 섞인 구수하고 쿰쿰한 냄새가 난다. 말끔한 실내를 좋아하지만 하고 싶은 걸 미루면서까지 집을 정돈하기엔 방학은 너무 짧다. (29면)
노루가 됐다가, 별이 됐다가. 물고기가 됐다가, 배가 되고. ㅁ이 됐다가, d가 되고 음표가 되는. 무한하게 이어지는 놀이가 결국에는 끝과 끝을 이은 한 가닥의 실로 귀결되는 실놀이를, 지구와 우리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해온 거라고. 방학을 마치면서 생각한다.
봄이 왔고 다시 나의 작은 농원 학교로 등교할 때가 되었다. 새 학기에는 또 누구와 손을 잡고 어떤 모양으로 변해가면서 생명의 끈을 엮어나갈 수 있을까. (41면)
여름의 문턱에서 귀를 기울이면, 갓난 것들이 마음 놓고 무럭무럭 자라는 순수한 기쁨의 노래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민들레 핀 보드라운 풀밭에서 망아지는 엄마 젖을 빨고, 동백나무, 참식나무, 보리수나무의 매끈하고 여린 새잎은 나날이 초록으로 짙어간다. 마을 길은 빨간 덩굴장미가 장식하고, 초당옥수수가 쭉쭉 뻗는 하늘 위를 제비들이 사인을 남기듯이 아름다운 곡선을 휘갈기고 떠난다. 하천에는 물총새가 찾아왔다. 등줄기를 흐르는 휘황한 에메랄드 빛이 여름의 바닷물을 흠뻑 발라놓은 것만 같다. 허공에서 물속으로 곧장 뛰어들어 물고기를 낚아서 배를 채운다. (82면)
그러던 어느 날, 황두가 우리에게 완전히 마음의 문을 연 일이 벌어졌다. 전날 밤에 보현과 가을 전어, 참치 회 파티를 벌이고서 참치 회 세 점을 남겼는데, 다음 날에는 조금 비려지기도 했고 어제 우리 셋만 먹어 미안하기도 해서, 무쇠 팬에 달달 휘릭 휘릭 볶아서 황두의 첫 특식으로 줬다.
그런데 글쎄 깊어가는 밤에 부엌 창 너머로 늑대 울음같이 긴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야옹, 냐아~~~옹, 냐아아아~~~~~옹.”
이건 틀림없이 환희의 노래다! 너무 맛있었나? 어쩜, 별일 아닌데 괜히 나까지 기쁘네. 종종 해줘야지. (172~173면)
요즘 우리 농원은 새하얀 귤꽃이 만개할 때만큼이나 아름답다. 주황빛으로 무르익은 동근 귤이 가지가지마다 매달려서 주변의 황량한 겨울 풍경에 따스한 빛을 던진다.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다. 농원에 도착하면 가시 돋친 제주진득찰을 피해서 안으로 한 걸음씩 떼며 귤들과 눈ㅇ르 맞추고 반갑게 인사한다.
“오늘은 조금 더 예쁘게 익으셨네요!” (190면)
오두막 위로 화목 난로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친구들은 한 사람씩 한 그루의 나무 안으로 들어가서 가위로 귤을 딴다. 광주리에 귤들이 툭, 툭, 떨어지는 소리와 무거운 귤을 떨군 가지가 가뿐하게 몸을 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귤을 따다가 문득 올려다보는 파란 하늘, 나뭇가지를 헤치다가 발견하는 새의 둥지나 매미 허물은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쁘고, 광주리에 가득 담겨 온 귤들과 쉬는 시간에 바지와 털모자에 고슴도치처럼 풀씨를 묻히고 나타나는 친구들의 모습은 수확기에만 만날 수 있는 진풍경이라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좋아하고 또 애틋하게 여기게 됐다. (203면)
출판사 서평
반려견 보현, 노래 만드는 남편, 고양이 자두와 황두, 멧비둘기 바비와 루시…
제주 북서쪽 바닷가에, 지은 지 20년이 넘은 소박한 집에 깃든 소중한 생명들
모든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고, 자연의 속도에 맞춰 호흡하고 감사하는 삶에 대하여
★ 시인 안희연, 뮤지션 요조 추천 ★
“나와 당신, 우리의 작은 개가 얼마나 고유한 꼭짓점들이며, 그렇게 이루어진 삼각형이 얼마나 단단한 세계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 갈피마다 빛이 일렁이는 사랑의 책이다.” - 안희연(시인)
“과거의 귤나무와 미래의 멧비둘기가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는 그의 동근 세계를 읽다 보면 슬그머니 나의 영혼도 곁에 같이 세워두고 싶다.” - 요조(뮤지션, 작가)
12월이 되면 제주의 농원 곳곳은 크리스마스트리에 매달린 따스한 전구처럼 귤이 주렁주렁 달린다. 귤 수확기에는 일손을 돕는 친구들과 함께 작업복을 입고 손때 묻은 장갑을 낀 채 한 그루씩 맡아 가위로 열매를 딴다. 광주리에 귤들이 툭, 툭, 떨어지는 소리는 차곡차곡 쌓아온 한 해 농사의 결실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노랫소리 같다. 귤나무를 돌보며 살아 있는 것들을 보듬고 기록하는 시인 오하나가 계절의 변화에 맞춰 제주 생활을 기록한 에세이 『계절은 노래하듯이』를 미디어창비에서 출간했다.
눈 내린 삼나무숲을 거닐며 다가올 일 년을 어떻게 채울지 궁리하는 소한(小寒)을 시작으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立春), 여름의 문턱에서 순백색의 귤꽃이 만개해 농원이 하얗게 빛나는 입하(立夏), 초록 행성같이 동그란 풋귤이 나무에 대롱대롱 맺히는 처서(處暑) 그리고 모든 수확을 마치고 맞이한 겨울밤 이야기를 품은 동지(冬至)까지… 오하나가 알알이 골라 기록한 제주의 하루하루는 잿빛 건물 속에서 바깥의 날씨도 잊은 채 가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잊고 있던 자연의 빛깔과 내음, 눈부신 풍경으로 초대한다. 계절의 순간을 포착해 세밀화를 그리듯 세심히 관찰해온 오하나는 다음 변화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자연의 속도에 맞춰 순리대로 살아보는 삶을 넌지시 건넨다. 오하나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쫓기듯 살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게 된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며 일으키는 계절과 바람의 리듬에 맞춰서 세세하게 움직이는 만물의 순간을 포착하며 제가 얻은 건 밝은 마음이었습니다. 이유는 자연이 늘 환하고 다정해서가 아니라 때론 매섭고 생명을 앗아갈 만큼 가차 없더라도 모든 순간이 진실한 데 있는 듯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계절은 노래하듯이』를 통해 태어났다가 죽고, 긴 숨결이 되었다가 구름이 되고, 빗방울이 되어 대지 위로 떨어지는 생명의 순리를 받아들이고 마음 깊이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천천히 음미해보자.
“나무는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니까, 우리도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푸른 바다를 면한 낡은 집에서 새벽마다 따뜻한 보이차를 앞에 두고 남편과 마주 앉아 음악을 듣고, 매일 반려견 보현과 산책하고, 해변에서 친구들과 바다 쓰레기를 줍는 오하나는 한때 대학원에서 식물을 연구한 적 있는 시인이다. 멸종 위기 동식물을 연구하며 지구의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을 붙잡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들어간 실험실에서 막상 야생화에 인공조명을 쬐고 농약을 치는 현실에 자괴감을 느꼈던 지난날은 먼 과거가 되었고, 지금은 사랑하는 자연과 한데 뒤섞여 살고 있다.
9년 전 서울의 북촌에서 남편과 보현을 만난 뒤, 함께 제주로 내려와 보금자리를 꾸려왔다. 오두막을 짓고 귤밭을 돌보는 동안 모진 날씨와 초보 농사꾼의 실수 때문에 나무가 병들고 말라 죽는 경험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거듭 겪으면서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 노력했지만 안 되는 건 담담히 받아들이고 앞을 보는 연습을 했다. 나무는 멈춰 있지 않고 움직이는 중이니까 우리도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더욱이 나무 선생님은 서툰 학생에게 뭐라 하지 않고, 기회를 다시 주시기까지 하니까.”
(「바람이 불어와야 할 땐 불어오기를」 중에서)
그 와중에 나무를 뒤덮은 노박덩굴 아래 쌍살벌이 집을 짓고, 나무 아래 까투리가 찾아와 알을 품고, 풀숲 주변으로 신이 난 방아깨비들이 뛰어 다니는 등 많은 생명이 농원을 찾아와 더 많은 생명을 낳으며 세대를 이어갔다. 귤나무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상처를 회복하고 인간이 준 것보다 더 큰 선물로 깊은 맛의 열매를 내어놓았다. 자연이 탄생과 죽음, 아픔과 치유를 되풀이하며 본연의 생을 사는 것처럼 오하나도 고된 노동 현장에서 이름 모를 벌레, 억센 풀을 온몸으로 부딪치다 보면 어느새 훌쩍 크고 짙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절은 노래하듯이』에서는 친환경으로 짓는 농사가 결코 동화 속 예쁜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인간과 온갖 곤충, 미생물이 다 함께 힘을 합쳐 알차고 건강한 귤이 맺힐 수 있도록 나무를 돕는 이야기는 바로 여기, 지금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생생한 아름다움이다. 받은 만큼 내어놓는, 힘들고 괴로운 만큼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는 자연은 말한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메울 수 없는 빈틈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모자람을 채워주는 존재들 덕분에 삶이 유연하고 단단하게 지탱되고 있다고.
이곳에서 우리가 할 일이란
곁에 있는 존재에 기대어 마음을 회복하기
작가의 집 앞마당에 자리한 소나무 위에는 솔잎을 깔아 만든 집이 있다. 처음에는 멧비둘기 페이, 티엔이 그곳에 둥지를 틀었고, 메이와 쥰이 태어났다. 어느 초가을에는 장미와 바비가 태어났고, 다음 해에 바비가 데리고 온 멧비둘기에게 루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뿐 아니다. 검은 고양이 자두와 노란 줄무늬 고양이 황두가 마당과 담을 자유롭게 넘나들었고, 4월 첫날 전후로는 긴 비행을 마치고 바다 마을을 찾은 제비인 제돌이와 제순이가 현관 벽에 진흙 덩이로 집을 짓기도 했다.
오하나와 남편과 보현이 사는 집은 목적지까지 먼 길을 가야 하는 철새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중요한 기착지이자 길 위에 사는 고양이에게 안전하게 비를 피하고 먹이를 구하며 느긋하게 잠들 수 있는 안식처다. 자연에서는 생김새가 달라도 서로에게 얼마든지 곁을 내어줄 수 있고, 그렇게 안심하며 쉴 수 있는 공간에는 다양한 친구들이 언제든지 시끌벅적하게 모여든다. 그렇게 모인 우리는 매일 자라고, 꽃피우고, 사랑을 나눌 것이다. 자연이 그러하듯이. 곧 봄이 온다.
“한없이 한없이 밀려오는 안도감과 감사함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다. 귤을 전부 무사히 떠나보냈다. 나무들이 올해도 꿋꿋하게 버티며 힘을 내주었다. 너무 많은 일을 했으나 정작 내가 한 건 한 가지도 없는 것 같은, 다시 ‘0’으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다.”
(「수확」 중에서)
기본정보
ISBN | 9791191248579 |
---|---|
발행(출시)일자 | 2022년 04월 20일 |
쪽수 | 220쪽 |
크기 |
130 * 194
* 19
mm
/ 399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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