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속의 새를 꺼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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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의 회복과 창조의 존재로 ‘여성’을 탐구해온 시력詩歷 50년의 눈부신 기념비
‘여성’을 주제로 가려 뽑은 66편의 시에, 문정희 시인과 반평생 우정을 나누어 온 재미화가 김원숙의 41점 아름다운 그림을 보탰다. 김원숙 화가 또한 ‘여성’의 내면 풍경과 ‘생명’에 대한 외경을 화폭에 담아온 작가로 국내외에 유명하다.
문정희 시인과 김원숙 화가는 오랜 시간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내밀한 세계를 엿보았으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제 여성성과 생명의식이, 시와 그림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이 독창적이고 매혹적인 시집을 ‘페미시집’이라 이름 붙여 세상에 내놓는다. 오래 여문 두 예술가의 우정만큼이나 빛나는 보석 같은 시집이라 하겠다.
문학과 미술, 서울과 뉴욕,
두 영역에서 ‘여성’에 천착해온
두 예술가의 교류와 성취!
한 시인과 한 화가가 만나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그저 사사롭고 개인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분야가 다른 두 예술가가 오랜 교류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다는 것, 지극한 마음으로 서로의 내면을 엿보고 좌절과 성취의 과정에 개입한다는 것, 서로 다른 형식의 작품으로 공유해온 세계를 드러낸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문화적 사건이다.
문정희 시인과 김원숙 화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서울과 뉴욕이라는 아득한 거리를 ‘개울물 첨벙거리듯’ 건너다녔다. 문정희 시인과 김원숙 화가의 작품세계는 다른 듯 닮아 있다. 특히 ‘여성성’과 ‘생명의식’은 공통의 화두라 할 만하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동안, 두 시인과 화가는 각각 문학과 미술의 영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 시집에는 두 예술가의 정신적 교류와 깊어진 세월 그리고 예술적 성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69년에 등단하여 올해로 시력 50년을 맞은 문정희 시인은 줄곧 ‘여성’을 화두로 삼아 시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폭과 깊이를 심화시켜왔다. 제도와 전통의 제약들로부터의 벗어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근원적인 신성과 생명의식을 회복함으로써 ‘여성적 생명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은 가부장적 관습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비애와 독립적 존재에 대한 각성, 마침내 신성을 회복하고 창조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여성적 생명의식을 담고 있다. 표면적으로 활달하고 당당한 시적 태도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 존재의 비극성과 외로움과 어른거리는 관능의 그림자와 화해의 손짓을 담고 있기도 하다. 여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발원한 이미지들이 담겨 있는 김원숙 화가의 그림들이 이 시편들과 어우러져, 미처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는 듯한 효과를 낳는다.
문정희 시인은, 많은 슬픔과 외로움이 있을 테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탁월하고 흔쾌하고 순수했으며, 자유와 고독은 생명의 힘이고 슬픔은 아름다움과 동의어임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문정희 시인에 대한 김원숙 화가의 말이라고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만큼 두 예술가의 세계는 다른 듯 닮아 있다. 시집 『내 몸속의 새를 꺼내주세요』가 아름다운 이유다.
김원숙 화가는 뉴욕 학스 출판사에서 낸 문정희 시인의 시집 『윈드플라워』을 비롯해 스페인에서 나온 시집 『카르마의 바다』, 인도네시아 그라메디아 출판그룹에서 나온 한국 시인 최초의 시집 『물을 만드는 여자』, 평역한 한국의 기녀 시집인 『기생시집』의 표지에도 그림을 그렸다. 김원숙 화가는 『윈드플라워』가 맨해튼의 인문 서점인 세인트마크 북샵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쇼윈도에도 내걸렸을 때, “우리는 점령군들처럼 환호작약했었”(156쪽)노라고 회고한다.
작가정보
독창적인 감각과 날카로운 통찰, 빼어난 언어 연금술로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일찍이 고교 재학 시절 백일장을 석권하며 주목을 받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시집 『꽃숨』을 발간했다.
1969년 등단 이후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목월문학상, 청마문학상을 수상했고, 마케도니아 테토보 세계문학 포럼에서 작품 「분수」로 올해의 시인상, 스웨덴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헤리 마르틴손 재단이 주는 시카다상을 수상했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 국제 창작프로그램(IWP), 버클리 대학, 이탈리아 베니스 대학,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 프랑스 시인들의 봄 및 세계도서전, 쿠바 아바나 북페어 등 다양한 국제행사에 초청되었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웨덴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알바니아어 9개국의 언어로 11권의 번역시집이 출판되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문정희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카르마의 바다』 『지금 장미를 따라』 『사랑의 기쁨』 『응』 『작가의 사랑』 외에 장시집 『아우내의 새』, 시극집 『구운몽』 등 다수의 산문집을 포함하여 50여 권의 저서가 있다.
1953년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를 다니던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리노이 주립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뉴욕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76년 일리노이 주립대 비주얼아트센터와 명동화랑에서 각각 첫 개인전을 가진 후 국내외에서 수십 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했다. 1978년 ‘미국의 여성작가’에 선정되었으며, 1995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계유엔후원자연맹(WFUNA)이 선정한 ‘올해의 후원 미술인’이 되었다. 저서로 그림에세이집 『그림 선물』과 『삶은, 그림』이 있다.
일기처럼 숨김없는 고백체의 그림을 그려온 김원숙은 모든 그림이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말한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낸 소박하고 정감 어린 그림은 한 개인의 내면 풍경에 머물지 않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다가와 가슴을 울리며 따뜻한 위안을 준다. 그것은 시인 문정희가 말했듯 그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천부의 예술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목차
- 1. 슬픈 벼랑
유령 / 손톱 / 할미꽃 / 베개 / 작은 부엌 노래 / 중년 여자의 노래 / 딸기를 깎으며
/ 할머니와 어머니 / 테라스의 여자 / 찬밥 / 거웃 / 집 이야기 / 탯줄 / 비극 배우처럼
/ 어머니의 시 / 암소 / 오십 세 / 우리 순임이
2.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보석의 노래 / 터키석 반지 / 간통 / 키 큰 남자를 보면 / 유방 / 평화로운 풍경 / 콧수염 달린 남자가 / 다시 알몸에게 / 남편 / 거짓말 / 군인을 위한 노래 / 치마 / “응” /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 부부
3. 신과의 키스
새에게 쫓기는 소녀 / 첫 만남 / 딸아, 미안하다 / 지금 장미를 따라 / 강 / 불을 만지고 노는 여자 / 늑대 여자 / 마리안느의 속치마 / 퇴근 시간 / 첫 불새 / 아줌마 / 문신이 있는 연인 / 공항의 요로나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딸아 / 천재들의 아내
4. 여자들에게 가을이 왔다
곡비哭婢 / 식기를 닦으며 / 처용 아내의 노래 / 남자를 위하여 / 다시 남자를 위하여 / 선글라스를 끼고 / 늙은 여자 / 머플러 / 물을 만드는 여자 / 공항에서 쓸 편지 / 화장을 하며 / 꽃의 선언 / 독수리의 시 / 여시인 / 나의 펜 / 결혼한 독신녀 / 나의 도서관
책 속으로
작은 부엌 노래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 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움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른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22~23쪽
암소
정육점 붉은 진열장 안
쇠갈고리에 앙상한 뼈째로
걸려 있는 암소
살은 부위별로
벌써 다 저며 내고
이제 끓는 물에
뼈를 우릴 차례
어머니!
나도 몰래
그 이름을 부른다
-46쪽
딸아
따라* 따라 내 딸아
눈물에서 태어난 보석아
-
지난해 서울을 떠난 갈색 머리 제인은
연극을 하고, 영어를 가르치던 이방의 딸
초여름 한밤, 성폭행 당한 뒤
크리넥스에 증거를 닦아 들고
파출소로 뛰어간 여자
파출소에서 증거물 기계적으로 접수하는 사이
속으로 “옷차림이 야했던 거 아냐?”
“너도 좋았으면서 뭘” 하는 표정으로
골치 아픈 일 생겼다는 듯이
영어 서툰 척 시간을 끌자
증거물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지고
다음날로 서울을 떠나 버린 여자
서울의 쓰레기통에는
피와 눈물을 닦아 남몰래 버린
따라들의 비명이 아직도 들려
-
따라 따라 내 딸아
눈물에서 태어난 보석아
따라(Tara, 多羅觀音): 범어(梵語). 우리말 ‘딸’의 어원.
-114~115쪽
기본정보
ISBN | 9791190052665 |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4월 20일 | ||
쪽수 | 160쪽 | ||
크기 |
130 * 224
mm
|
||
총권수 | 1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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