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나다운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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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괴물의 얼굴을 닦아 줄 배수연 시인의 청소년시집
- 2019 올해의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작가정보
열다섯 살, 점토 인형이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열아홉이 될 때까지 클레이 애니메이터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무엇이 되는가’ 외에 ‘어떻게 사는가’는 생각하지 못했죠. 첫 시집 『조이와의 키스』가 나온 후, 많은 사람들이 저의 정체성을 궁금해합니다. 중학교 미술 교사인가, 시인인가, 시각 예술가인가? 무엇도 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우리에겐 계속되는 어떤 삶이 있습니다. 저는 제 삶을 ‘오늘을 꿈꾸는 삶’이라 부르겠습니다. 클레이 애니메이터가 되지는 않았지만 「월레스와 그로밋」, 「크리스마스 악몽」의 등장인물처럼, 토스트를 굽고 발명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친구를 사귀는 삶. 그 이야기를 쓰고 그립니다.
작가의 말
십 대의 나. 실오라기의 거짓도 못 가진 왕거지. 친구들이 놀리면 받아치지 못하고 질질 운 다음, 더 놀림을 받지. 우르르 쾅쾅 눈물이 흐르려 할 땐, 눈에 콱 힘을 주고 천장을 보며 “하느님, 제발 울지 않게 해 주세요.” 빌었지만 이상하지, 그것만은 단 한 번도 들어주신 적이 없어. 부모님이 다툰 밤 울다 잠들면, 틀림없이 눈꺼풀이 세 배는 부풀고 붕어눈으로 펼친 교과서 귀퉁이 삽화 속엔 내가 있었어. 어딘가 아둔한 미소의 모범생, 진실의 성실한 협조자.
나는 클레이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었어. 「월레스와 그로밋」, 「크리스마스 악몽」, 「치킨 런」, 「곡스」, 「핑구」……. 작은 인형에 표정을 지어 주고, 그가 바라볼 창문과 달을 걸어 침대 옆엔 초록 램프, 그 램프를 딸깍 켜고 딸깍 끄는 손과 프릴 달린 소매, 램프가 비추는 홀과 홀, 그 깊은 구멍과 드넓은 무도장……. 긴 구멍에 눈을 맞추는 기분으로 넓은 무도장에 푸른 구두코를 대어 보는 마음으로 이 시들을 그때의 나에게 보낼게. 이젠 나를 용서해 줄래?
목차
- 제1부 슈우웅 슈우웅
태풍
계주
생리대가 왜
청소
포털
시상식
달걀 요리사
화장
발명가들
소풍
혼이 난다는 건
3월
조퇴
외모 전성기
열아홉 살
제2부 우르르 우르르
집
책임질 거야?
버킷 리스트
지난밤
잉어
세계 시민
찝찝해
아침~시!땅!
가족
나쁜 꿈
녹색 유배지
엄마 마중
병아리 단상
집에 가는 길
제3부 휴 하고 우 하는
비밀 노트
드래곤
파우치 털기
벌새
안녕, 호키 포키
주홍 이야기
어떤 꽃
안전한 공
잠 안 오는 밤
Diving Moon
해 질 녘
테이블
파브르 관찰기
비밀 책
브래지어의 숲
제4부 온통 요구르트 냄새
해 본 아이
거짓말
연준이
연습
걷다가
변명
9교시
천재
Where are you from?
외투
명찰 바꾸기
파란 공
괄호
눈빛
연재에게
발문_임승훈, 「이상한 쾌활함, 이상한 우울」
에필로그
책 속으로
지난밤
우리 집을 지나간 바람 속에는
이빨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상어 떼의
각진 이빨
달빛에 번쩍이는 지느러미가
우리 집의 허리를 베었다
모르는 척
골목들이 고요했고
나와 동생의 뼈는 산호처럼 굽었다
― 「지난밤」 전문
나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조금 얼어 있으면 될까
잠드는 건 싫고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잠자는 모습 전혀
무섭지 않으니까
나 조금 죽으면 안 될까
조금 멎을 수 있을까
기절하는 건 싫고
갈비뼈를 너무 심하게 누르진 말아 줘
모두들 놀라 눈이 커지겠지
나 무서워 보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거짓말처럼 보일 수 있을까
곰이라고 거짓말하는 곰 인형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 「비밀 노트」 전문
보여 줄 거짓말이 많아서
모양이 잘빠진 기타를 샀다
친구들은 내가 음악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하마터면 나도 그럴 뻔했어
보여 줄 거짓말이 많아서
포샵을 연마했다
수십, 수백 명의
친구들이 이어진다
운동회의 만국기처럼
성탄절의 색전구처럼
아직도 보여 줄 거짓말이 많고
그럴수록 유리하다 모든 것이
가장 새로운 거짓말이 되고 싶어
니가 그렇고 그렇다고?
너무 완벽해서 엄마가 믿지 않는, 아빠가 믿지 않는
거실의 거울은 절대 볼 수 없는
나는 가장 나다운 거짓말이 된다
― 「거짓말」 전문
출판사 서평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 배수연 시인의 청소년시집
배수연 시인은 시인이면서 또 중학교 미술 교사이다. 하지만 시집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 사실을 눈치 채기 어려울 것이다. 시인은 마치 자신이 청소년과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여전히 청소년으로 사는 것 같은 시들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 시집 속 청소년들의 모습은 분명 익숙한데도 새롭고 낯설다. 고정관념처럼 떠올리는 반항적인 청소년들,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모습과는 또 다른 청소년들이 살아 등장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이 시집을 읽으며 숨겨 두었던 비밀 노트를 펼친 것처럼 반가울 테고, 어른들은 그 시절의 내 마음이 ‘이것’이었구나 싶어 아찔할 것이다.
이 시집에는 배수연 시인의 오랜 친구인 임승훈 소설가가 쓴 발문이 있다. 시인 배수연에서 출발해 그가 쓴 시를 차례로 만나는 발문은 마치 짧은 소설을 읽는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을 선물해 줄 것이다. 또한 배수연 시인이 쓴 에필로그 역시 또 다른 시 한 편을 읽는 것 같은 재미를 준다. 한편, 이 시집은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이다.
그래서 수연이는 이런 문장을 쓴 걸까? 시인의 시가 온전히 시인은 아니지만, 나는 종종 어떤 구절들에서 시인을 느끼곤 한다. 아니 느끼는 게 아니라 이런 문장 앞에선 시인과 시를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건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그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 해당 시와 시인을 분리할 수 없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발문 「이상한 쾌활함, 이상한 우울」(임승훈)에서
“나는 가장 나다운 거짓말이 된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서 나를 지키는 법, 거짓말
이 시집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무서워하고 불안해한다. 욕과 비명이 휘날리고, 1등이 되지 못하면 목이 푹 꺾이든 말든 ‘돌메달’을 걸어 주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면 얼굴이 없는 사물로 태어나고 싶을 만큼 두렵지만 잘 지내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그대로 내보일 수 없다.
나 무서워 보일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안 하면서
거짓말처럼 보일 수 있을까
곰이라고 거짓말하는 곰 인형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
―「비밀 노트」 부분(50~51쪽)
가장 새로운 거짓말이 되고 싶어
니가 그렇고 그렇다고?
너무 완벽해서 엄마가 믿지 않는, 아빠가 믿지 않는
거실의 거울은 절대 볼 수 없는
나는 가장 나다운 거짓말이 된다
―「거짓말」 부분(78~79쪽)
가만히 있으면 ‘나는 돌’이거나 ‘똥’이 되고 말기(「시상식」, 16쪽)에 화자들은 ‘거짓말’을 선택한다. 시인은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괜찮은 척하고 센 척하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거짓말’이란 말로 표현한다. 상처받기 쉬운 속마음을 감추고 보여 주고 싶은 모습으로 자신을 보이는 ‘거짓말’은 청소년들이 자기를 지키는 한 방법인 셈이다.
“이상하게 내가 끔찍하게 싫었다”
내 안에 숨은 괴물을 마주하다
강한 척, 괜찮은 척 ‘거짓말’을 잘 하면, 그래서 거짓말이 진짜가 되면 어떨까? 우리는 정말 잘 지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 시집의 화자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자꾸만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에는 나만 아는 내 모습이, 감추고 싶은 내 모습이 괴물처럼 서 있다.
잊지 않지
매일 거울 속 괴물을 닦는 일
푹 삶아 부드럽게 헐어 버린 수건
따뜻한 김을 쐬어
괴물의 얼굴을 닦는 일
―「드래곤」 부분(52~53쪽)
연준이 동생은 병이 있었다
병명은 너무 크고 새하얘서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른이 되는 기분이었다
연준이를 정말 좋아했는데
학년이 바뀌면서
인사도 어색해지고
졸업식에선 모른 척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저 애 동생이 백혈병이라고 속삭이면서
이상하게 내가
끔찍하게 싫었다
―「연준이」 부분(80~81쪽)
이 시집이 청소년들의 ‘거짓말’을 다루면서도 투명할 만큼 솔직한 이유는 모두에게 둘러댄 거짓말을 독자와는 숨김없이 공유하기 때문이다. 마치 비밀 노트를 읽는 것처럼 거짓말 속에 감춰 두었던 ‘나’의 끔찍한 모습, 약한 모습, 두려움 섞인 목소리가 가림막 하나 없이 곧바로 읽는 이들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가장 나다운 거짓말』을 읽는 동안 우리는 슬펐다가도 재미있어지고, 우울했다가도 결국은 왠지 모를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푹 파묻힌 몸에선 온통 요구르트 냄새”
감각적인 이미지로 그려 내는 청소년들의 이야기
이 시집에는 배수연 시인만의 독특한 문체와 색깔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학교생활이나 친구, 가족 등의 소재를 다루면서도 지금까지의 청소년시들과는 조금 다른 색깔과 분위기를 낸다. 색깔, 소리, 냄새, 감촉 등 오감과 연결되는 감각적인 시어들이 이 시집만의 개성을 더하기 때문이다.
3월이 오면
너랑 산책하고 싶어
바람이 얼굴과 목을 간질이고
우리는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미소를 짓고
발이 닿을 때마다 세상은 자꾸자꾸 넓어져
해국이 쿡쿡 웃는 겨울 화단을 지나
나무 끝에 앉은 빈 둥지도 지나
바람이 풀어지는 곳으로 무릎을 옮기면
얼음의 헐거움 속으로 너와 내가 흘러들고
겨드랑이의 체온을 훔쳐 서로의 손을 데울 거야
푹 파묻힌 몸에선 온통
요구르트 냄새
―「연재에게」 전문(98~99쪽)
시집을 읽다 보면 화자가 대체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화자의 감정이나 기분 역시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을 때도 많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 듯 모를 듯한 그 마음을 느끼고, 나아가 내 마음인 것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유는 배수연 시인만의 독특한 문체와 색깔 때문일 것이다. “무엇도 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우리에겐 계속되는 어떤 삶이 있습니다.”라는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 무엇도 되지 않은 순간에도 ‘계속되는 어떤 삶’을 사는 중인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89228613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10월 10일 | ||
쪽수 | 124쪽 | ||
크기 |
145 * 211
* 12
mm
/ 207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창비청소년시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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