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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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작가정보
작가의 말
동물원 문을 닫을 시간이야.
흩어지는 모래밭에 두 발을 묻은 토끼가
갑자기 일어서서 노을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다.
두 손을 맞잡은 토끼의 모습이
헤어진 인연을 끌어당기듯 따스하고 뭉클하다.
저렇게 작은 짐승이, 저렇게 작은 손으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우정과 사랑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아, 저렇게 희미한 소리로 우는 토끼가
신神의 침묵을 경청하고 있는 토끼가
낮은 울타리를 넘어
수천 번은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좁디좁은 모래땅을 떠난 적 없이
멀고도 높은 꿈의 슬픔에 몰입하고 있다.
밤하늘 살별이 긴 꼬리를 깜박이며
모습을 감출 때까지
달이 나와서 사라질 때까지
토끼 한 마리가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야간개장의 사랑
나도 잠들기 전 기도하는 버릇이 있어
회고록을 지어내기 위해 그림자를 늘어뜨린 토끼처럼
쏟아지는 외로움에 눈이 빨개지면서
나와 함께 흘러가줄 토끼를 찾고 있어.
우는 짐승과 기도하는 짐승에게서 사랑의 기척을 느끼며!
목차
- 1부 넌, 아직도 나 때문에 울고 있구나
거북이와 새
천국
미안해요
게
방해가 되었습니까?
흑백사랑
밤의 그림책
전당포
사과를 파는 국도
통영
달고기와 눈치
나뭇잎
밤의 외로움
신생아 발굴
오월의 여행
2부 하늘이 울음을 얼려 눈을 내리는 밤
의자 위의 돌 하나
당신의 방
세월 너머 멀리멀리
울음의 탄생
위로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거기
목련나무 빨랫줄
동경
아, 자정 조금 넘어가는 이런 밤에
혼혈 양은 슬픔
그림자가 시간을 옮기는 집
3부 몸 안의 은하수가 사라져버리면
토끼의 고백
고래를 말하듯
보리밭 놀이방
무중력 배아기의 슬픔
심해의 열 달
연인들
운명을 슬슬 쓰다듬어 보는 저녁이야
방언으로 속삭였다
중얼거리는 사내가 있다
노란 리본을 맨 목공소
흰 것들이 녹는 시간
달과 무
검고 파란 시간의 죽음 곁에서
바바마마
4부 당신의 심장에 불을 켜주고
공룡 발자국 화석
미혼모未婚母
거위의 죽음
돌꽃 1
돌꽃 2
돌꽃 3
황 목수의 작업실
뿌리의 방
능소화
남해 암수바위
가을날 매미
천 년 은행나무 슬하에서
구역
기다리는 사람
우리의 천국
해설
‘멀고도 높은 꿈’, 그 슬프고도 무서운 계시 / 김경복(문학평론가, 경남대 교수)
추천사
-
갑자기란 단어는 늘 불안을 내포한다. 미리 정해져 있지만 대비할 수 없는 ‘죽음’, 박서영이 그렇다. 그의 시어에는 ‘울음과 슬픔’ ‘앵두나무와 하얀 꽃과 구름과 무덤’이 가득하다. 이 시어가 주는 하강의 이미지들로 현실에 떠도는 기쁨과 슬픔을 뭉쳐 새하얀 ‘구름’으로 발화시켜 시편 곳곳에 흩뿌려 놓았다. 그는 언어를 빚은 게 아니라 그의 생을 빚었다. 그가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난 것은 그가 몸 안에 ‘천국’을 너무 많이 지니고 있어서 그 ‘천국’을 돌려주려 간 게 분명해 보인다. 그의 “슬픔은 작고 예뻤고” 그래서 우리는 가로수 길을 걷거나 “밥 먹다가(도) 문득 생각난다.” 그가 나눠준 것은 ‘천국’이었음을 그가 떠나고 알게 되었지만. “어떻게 그 수많은 순간들을 버릴 수 있겠는가. 시간이 약탈해 간 아름다운 별”에서 그는 구름처럼 “최선을 다해 증발하고 최선을 다해 사라지려고”한 걸까. 그는 여리고 순해 “인큐베이터 안에서(만) 웃는 연습을 하”고 소리 내어 울지 못해 눈동자가 빨개진 천국의 ‘토끼’였는지 모른다. 이 유고시집을 닫고 한참을 지나도 “성큼성큼 떠나버렸는데도 여전히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세월 너머 멀리멀리」). 이 유고시집은 故 박서영 시인의 ‘그림자가 흘려보내는 눈물의 고백서’다. 그가 남긴 울음 같은 시편들로 우리는 ‘천국의 진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서평
2018년 2월 작고한 고故 박서영 시인의 유고시집이 걷는사람 시인선을 통해 출간됐다.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박서영 시인은 생전에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좋은 구름』을 냈고, 작고 후 세 번째 시집이 묶이게 된 것이다. 김재근 시인은 추천사를 통해 “이 유고시집은 고故 박서영 시인의 ‘그림자가 흘려보내는 눈물의 고백서’다.” “그가 남긴 울음 같은 시편들로 우리는 ‘천국의 진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며 그를 애도했다. 박서영 시인의 부고를 듣고 많은 지인들이 놀라 안타까워했다. 모든 죽음이 갑작스럽지만 박서영 시인은 큰 병을 견디며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경복 교수는 해설을 통해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픔 속에서 더 큰 감상(感傷)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실존적 삶을 쳐다보는 자세는 독자에게 더 큰 슬픔을 환기한다.”라며 “태도는 단정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죽음이 깃들어 있거늘 어찌 그 들끓는 슬픔을 떨칠 수 있었을까. 슬픔이 정제되고 상징화되어 가끔 시인의 처지를 잊게 만들기도 하지만 쓸쓸해져 가는 시의 이미지 앞에서 그 사정을 아는 사람은 목이 막힌다.”라고 했다. 또한 <시인의 말>의 “동물원 문을 닫을 시간이야./ 흩어지는 모래밭에 두 발을 묻은 토끼가/ 갑자기 일어서서 노을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다.”라는 구절은 담담한 목소리와 이미지로 자신의 현존을 우회적으로 알리고 있는 것이지만, “그 내막을 아는 사람에게는 극통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다.”라며 가슴 아파했다.
누추한 속옷 내걸린 목련나무 빨랫줄
꽃이 어느 시간 속을 이동해 사라지는 것처럼
축축해진 옷을 입은 사람의 시간도 말라 간다
빨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받아먹는
야생 고양이 한 마리의 시간도.
-「목련나무 빨랫줄」 전문
이어 김경복 교수는 위의 시편도 같은 의미의 맥락을 형성한다며, “이 시의 놀랍고 아픈 이미지는 ‘사람의 시간도 말라 간다’는 것이다. 담담한 시선으로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듯하지만 그 안의 쓸쓸하고 절박한 감정을 어떻게 감출 수 있을까? 말라 간다는 표현은 빨래의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그것이 물이 아니라 시간으로 전이되어 사람의 목숨이 곧 다해 간다는 의미로 변주될 때 이 발견은 놀랍다 못해 처연하기 짝이 없다.”라고 말하며 시집 전반에 깔려 있는 쓸쓸하고 담담한 이미지들에 집중했다.
나의 눈동자는 색을 바꿀 줄 안다
앵두나무가 보이는 여관집 방문을 열고 앉아
일렁이는 가로등빛 그늘을 본다
하늘이 울음을 얼려 눈을 내리는 밤이다
족발에 소주 한 병 앞에 놓고
슬픔을 애도하는 밤이다
앵두 한 알 매달지 않았는데도
저 나무는 무겁고 힘들어
눈 쌓인 앵두나무 발목이 젖어 축축해
나는 무릎을 세우고 쭈그려 앉았는데
몸에 울긋불긋 지렁이가 피었다
밖이 어둡지도 않는데 밤이라고 하지 말아요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생각이 깊어 슬픔이 탯줄처럼 길어지는 사이
순천의 한 여관방에서
분홍색 목젖에 울음이 매달려 흔들린다
한 호흡만 더 건너가자, 생이여
추운 앵두나무를 몸 안에 밀어 넣고 있는
환한 가로등처럼
눈이 녹아내려 드러난 앵두나무 뿌리가
족발처럼 자꾸 보여,
물어뜯고 싶어지게,
쭈그리고 앉아
발가락 열 개를 꾸욱꾸욱 눌러 본다
-「울음의 탄생」 전문
기본정보
ISBN | 9791189128265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02월 03일 | ||
쪽수 | 136쪽 | ||
크기 |
128 * 201
* 12
mm
/ 169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걷는사람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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