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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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겨레신문 > 2019년 5월 3주 선정
한국 근현대사의 遺事이자 파노라마!
권두에는 그의 글이 실린 『민성』, 『동광』, 『신천지』 등의 잡지 표지, 기사 등 16쪽의 화보가 실려 있다.
작가정보
[1909~1962(최종 생존확인)]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동아일보 배천지국 수습사원으로 사회 첫발을 내딛어, 1928년 동아일보 평양지국 사회부기자가 되었다. 평양과 신의주를 오가며 사회부 기자 활동을 하는 동안 형 오기만의 국내 활동을 지원하고, 부인과 함께, 차례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가족들의 옥바라지에 매진하였다. 일제 말엽에는 조선일보 특파원으로도 일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지 않고, 경제 재건을 위해 경성전기주식회사에 투신하였다. 1946년부터 다시 ‘신천지’를 비롯한 잡지 언론에 투고하고, 1947년 12월 『민족의 비원』을 시작으로 『자유조국을 위하여』, 『사슬이 풀린 뒤』, 『삼면불』(이상 1948년) 등의 단행본을 발간하였다. 1949년, 더해만 가는 좌우익 갈등 상황에서, 중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주의주장과 우익 계열인 부친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좌익 계열로 분류되는 형과 동생의 이력 등이 빌미가 되어, 결국 월북하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에서 활동한다. 50년대 말까지는 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신문에 간간이 기고하였으며, 1958년에는 언론계에 복귀하여 <조국전선> 주필이 된다. 현재 1962년(54세)에 과학원 연구사로 활동한 기록이 최종 확인된다.
목차
- 화보-미 군정기와 민족의 비원
해제 _김태우
투필(投筆)의 실패―자서(自序)에 대(代)하여
이성의 몰락―한 자유주의자의 항변
정치의 탄력성
언론과 정치
민요(民擾)와 민의(民意)―언론계에 보내는 충고
참괴(?愧)의 신 역사―해방 후 1년간의 정치계
시련과 자유―해방 1주년을 맞이하며 / 곡영우(哭迎又) 1년―민족의 지향을 찾자
도산(島山) 선생의 최후
오동진(吳東振) 선생을 추도함
좌우합작의 가능성―불합작(不合作) 구실의 축조적(逐條的) 검토 / 3당 합동(合同)의 생리(生理)
민족의 비원―하지 중장(中將)과 치스티아코프 중장을 통하여 미소 양 국민에 소(訴)함
속(續) 민족의 비원―경애하는 지도자와 인민에게 호소함
중앙인민위원회에―남북 양대 세력에게 주는 말 / 입법의원에 여(與)함―무엇이 가능하겠는가?
관료와 정치가
5원칙과 8원칙
신탁과 조선 현실 / 삼상 결정(三相決定)과 대응책 / 국제 정세와 공위(共委) 속개―우리의 운명을 냉정히 인식하자
미국의 대(對)조선 여론
민중
건국·정치·생산
생산하는 나라
예수와 조선―혁명 정신의 반동화를 계(戒)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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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 출신으로서 본인과 전 가족이 참가한 가족독립운동사요 민족사회의 독립운동사이기도 한 오기영 선생의 저술 『사슬이 풀린뒤』가 1948년에 간행됨으로써 필자와 같은 당시의 중학생들에게는 거의 유일한 독립운동사 교재가 되었다. (…) 민족 구성원 전체가 남쪽 편과 북쪽 편, 그리고 좌편과 우편으로 나누어지다시피 한 해방정국 상황에서 “너는 우도 아니요 좌도 아니요 대체 무엇이냐, … 혹은 중간파라, 심하게는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는 자유주의자로 자처한 한 지식인이 불행했던 일제강점기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해방정국을 산 생생한 체험기록들이야말로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전체 민족사회의 귀중한 교과서라 할 것이다.(…) 오기영 선생은 ‘네번째의 8·15를 지내고 닷새 뒤’ 그러니까 1948년 8월 20일 이승만정권이 성립된 5일 후에 쓴 저서 『사슬이 풀린 뒤』를 간행하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썼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런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그러고는 1949년 어느 때인가 오기영은 고향이 있는 북한으로 갔고, 그후 북녘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과학원 연구사 등을 역임했다. 그분이 남긴 저작물과 기고문을 통해서 민족사의 시련기였던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을 산 한 사람의 양심적 지식인이요 빼어난 언론인이 이 땅의 사람과 민족을 위해 무엇을 생각하며 또 어떻게 살았는가를 이제 찬찬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전 위원장) -
오기영이 말하고 또 말하고 거듭 말하는 것이 있다. 자주성이 그것이다. 김규식은 친미반소도 반미친소도 민족적 통일 단결을 파괴하는 노선이며, 친미친소만이 자주성을 견지해 통일 독립에 이르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오기영은 미국도 소련도 한국이 따라야 할 모범국가가 절대로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분단정부가 들어서는 1948년에 약소민족의 자주권, 생존권이 냉전의 도구로 희생되고 있으며 남북 조선이 미소의 전초기지로 화해 골육상잔의 참극이 연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서 남북협상을 열렬히 성원하면서, 김규식이 “흥해도 우리 손으로 흥하고, 망해도 우리 손으로 망하자”고 절규하며 “남북협상은 독립운동의 막다른 골목이다”는 비절(悲絶)한 심정을 토로하자, 그것은 전민족의 심정이요, 자신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피력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오늘날, 당신이 그토록 원했던 ‘자유주의자’ 오기영이 남긴 글들을 알알이 엮어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시대에 마음껏 감격하고 싶습니다. 이 책들이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알곡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아, 『동전 오기영 전집』을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
머니 영전에 고이 바치며, 이 지난한 작업에 공감하고 동참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우리 가족을 대표하여 허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가족회고, 70년 만에 글로 적어보는 회고―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_동전의 막내딸)
책 속으로
■ 간행사 :『동전 오기영 전집』 간행에 부쳐 (요지)
동전 오기영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 집필한 글들을 엮어서 전집을 만들었다. 그의 문필활동의 기록이자, 시대의 증언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가 기자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1920년대 후반 이래 그의 기사와 칼럼은 때로는 사건에 대한 요령 있고 정밀한 기록으로, 때로는 사태의 추이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역사적 투시와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때로는 현실에 대한 시의적절한 풍자와 건설적 대안으로 당대인의 사랑을 받았고, 후대인에게는 당대사를 증언하는 중요한 사료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후배 기자들에게는 본받아야 할 선배였고, 기자 사회 전체적으로 ‘신문계의 일재’(逸才)라는 평가가 늘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의 글이 가진 중요성이 다시 현대인의 주목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분단이 빚어낸 역사적 맹목성으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는 극소수의 전문 연구자만이 그의 글을 우연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의 글이 다시 학계와 독서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데에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지구적 차원의 냉전 해체라는 역사적 변화가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그간 역사학계와 문학계의 학문적 온축도 한몫 했다. 한국 근·현대 역사와 문학에 대한 연구가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심화하면서 연구자들의 자료 탐사 범위와 해독의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동전의 글이 가진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동전의 글을 매개로 한 학계의 연구와 조부의 족적을 찾으려는 외손녀의 노력이 시기적으로 겹쳤고, 그것들이 합쳐져서 해방 직후 출간된 그의 책들이 2002년에 복간될 수 있었다. (….)
이 전집에 실린 동전의 글을 시간 순으로 늘어놓고 보니 그의 첫 번째 글은 공교롭게도 한 편의 시다. 그가 열다섯 살 나던 해에 지어서 동아일보에 실은 「꽃 잃은 나비」라는 시는 나라 빼앗긴 한 소년의 절절한 조국애를 드러낸다. 학력도 변변치 않은데 약관의 나이에 동아일보 정식 기자로 평양에 부임하여 기자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위로부터 남다른 취재 능력과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
동전이 사회부 기자로서 식민지기를 증언했다면 해방 이후에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해방’과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이 가져온 조국의 현실을 증언했다. 그가 경전(京電)에서 일한 것이 단순히 생활의 방편을 쫓아서 그리 한 것은 아닐 테고, 해방된 조국의 현실에 대한 그 나름의 대응이자 고민 끝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
당시 발간된 그의 책 네 권 (…) 해방 직후의 급박한 정세 변화를 기자의 짧고 가파른 호흡이 아니라 평론가의 냉철한 눈과 긴 호흡으로 되짚으면서 나름의 대안을 모색한 셈이다. 현장 취재로부터 한 발 물러나자 정세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긴 안목으로 난마와 같이 얽힌 현실 정치를 전망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식민지기의 글들이 평양이라는 지역사회에 응축된 민족의 현실을 위주로 했다면, 해방 이후 쓴 평론들은 당시 한국 사회가 당면한 각종 현안 외에 외군 점령에 반영된 국제정세의 변화까지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한편 한편의 글마다 그의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적 안목, 사안의 심층을 깊숙이 파고드는 직관과 치밀한 탐구 과정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인데 그렇게 많은 혁명가들이 일제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 또는 그들에 대한 당대인의 기록이 흔치 않다. 동전이 1946년 3월부터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서 출간한 『사슬이 풀린 뒤』는 항일 혁명가로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헌신하다 옥살이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의 형 오기만, 그리고 그와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다. 형과 형이 가는 길을 응원하며 보살폈던 그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부치는 헌사이자 그들에 대한 필자의 회억(回憶)의 글이다.
흥미 있게도 동전은 그의 행적과 사회적 관심사는 물론 그의 주변사와 개인적 관심에 대한 소회나 그가 그린 행적이 가진 개인사적 의미, 또는 그의 사색의 편린들을 책이나 칼럼의 형식으로 여러 군데에 남겨 놓았다. (…)
시간 순으로 이 전집에 실린 동전의 마지막 칼럼은 「미소 인민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다. 상징적이게도 나라의 독립을 희원하는 열다섯 살 소년의 각오를 형상화한 시로부터 시작된 전집이 이제 그 소년이 갓 불혹을 넘긴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두 쪽이 된 조국과 민족을 어떡하든지 이어보기 위해 외국의 인민에게 보내는 절절한 호소로 끝을 맺는 셈이다. 이 전집은 동전이 살아생전 썼던 모든 글을 집대성한 ‘전집’을 목표로 하였으나 그 목표를 미처 이루지 못한 채 그의 북행 이전의 글들을 집대성하는 데 그쳤다. (…) 그가 북행 이후 쓴 글들도 모두 모아서 전집을 마무리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
2019년 4월 12일 편찬위원장 정용욱 배
■ 본문 중에서
나는 흥사단 사건(興士團事件)*으로 나의 천직이라 믿었던 신문기자의 직업에서 추방될 때에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警務局長)이던 미하시(三橋)로부터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조선이 독립하면 다시 한 번 신문기자를 하리라.”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미하시는 경무국장다운 금도(襟度)를 보이느라고 나의 대답을 탓하지는 않고 다만 연민의 웃음을 띠
며 “아마 꿈일 것이라.” 하였다. 그 꿈같은 독립을 누릴 기회를 얻었고, 동시에 이것은 나의 염원이던 신문인으로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염원을 보류하고 일 회사(一會社)의 병졸(兵卒)로 나섰다. 해방 직후 일인(日人)의 손에 파괴되어 황폐해진 생산 부문의 재건을 위하여 일졸오(一卒伍)로서 정신(挺身)해 볼 의욕에 불탔던 것이다. (19~20쪽)
남조선에서 미운 사람을 치는 가장 간단하고 용이하며 또 즉효를 내는 방법이 ‘아무개는 빨갱이’라는 일언(一言)으로써 족하게끔 되어 있다. 빨갱이면, 적어도 빨갱이 비슷한 자면 권력도 이를 미워하고 폭력도 이를 뚜드리려고 든다. 이것이 정말 빨갱이만을 가려서 그러할 때에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별도의 정치적 입각점(立脚點)에서 비판할 여지가 있거니와 우에 대하여 충고적 비판을 보내는 사람까지도 좌의 비(非)를 비라고 하는 것은 좋으나 우의 비를 비라고 하면 빨갱이와 동률(同律)로 취급하려 드는 것은 이 땅에서 자유주의의 양심까지를 탄압 배격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41쪽)
출판사 서평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1945년 해방이 된 다음날. 오기영은 망우리 가족 묘지를 찾아갔다. 무덤 위에 태극기를 덮어 놓고 그 앞에 서서, 오기영은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곳에는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오기만, 그리고 오기만의 후원자이자 그의 아내인 명복이 안장되어 있었다.
살아서, 무덤에 조문하는 이들도 죽음의 상처로 얼룩진 이력의 소유자들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을 하다 수감 중에 해방과 함께 서대문감옥에서 놓여나온 동생 오기옥과 조카 오장석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된 적이 있는 여동생 오탐열,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병으로 친정오빠를 잃은 오기옥의 부인, 독립운동으로 수감 중에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한 남편을 둔 누님이 함께 하였다.
그 자리에서 오기영은 소리친다. “이제부터는 노예의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의 탄성이면서, 심장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통곡이었다.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가족사
일제강점기에서부터 시작된 ‘적폐청산’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과거의 문제에 발목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를 향해, 구김 없이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그리고 통일 조국의 평화세계을 위하여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적폐의 역사에 짓눌리고 가려져 묻혀 있는 정의로운 역사를 발굴하여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 역사의 진면목으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는 일이다. 적폐의 청산과 미래의 건설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민족사의 구성원들이 마땅히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고, 받아야 할 기림을 받도록 하고, 얻어야 할 명예를 누리며, 기억되어야 할 뜻과 정신이 온전히 기억되도록 하는 데서만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 돌아간 영웅들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를 기억하며 살아갈 후손들이 스스로 자랑스럽고 행복하고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기본이며 근본이 되는 일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이러한 민족사 복원의 염원과 움직임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두드러진다.
그런 가운데 선을 보이는 『동전 오기영 전집』(전6권)은 우리가 소중히 모시고자 애쓰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고난에 지지 않고 억압게 굴하지는 삶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국 현대사의 ‘유사(遺事)’이다. 진즉에 발굴되고 널리 선양되었어야 할 이 귀중한 기록이 2002년에 일차로 소개된 데 이어 이번에 다시 증보되어 전6권으로 발간됨으로써, 우리는 민족사의 귀중한 서사시(敍事詩)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오기영의 가족은 어떤 가족인가?
1944년 12월, 오기영의 동생 오기옥은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오기영은 “형님이 잡혀 다니고 내가 잡혀 다닐 때에는 그다지 괴로운 줄도 몰랐더니만 손아래 아우가 잡혀간 뒤에 처음으로 나는 마음의 아픔을 느꼈다. 비로소 과거에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를 알았다.”며 마음 아파하지만, 그러나 정작 백방으로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누이와 자신은 일제 경찰에 빌 수도 없고 동생에게 전향을 권유할 수도 없다며 오히려 누이를 나무라기까지 한다. 한편으로 결혼 일주일 만에 생과부가 된 계수(제수)를 위로하며 오기영은 되뇐다.
“어지간히 거친 운명에 시달리는 사람들끼리 모였다.”
오기영 가족의 거룩한 삶의 내력은 1948년 손수 지어 간행한 『사슬이 풀린 뒤』라는 자서전(自敍傳)에 오롯이 실려 있다. “우리가 같이 체험한 / 피묻은 이 기록을 / 순국의 혁명가 / 선형(先兄) 오기만과 / 그의 동지요 / 나의 사랑하던 아내 / 이미 추억의 세계로 / 돌아간 김명복의 / 두 영(靈) 앞에 / 울며 바치노라.”라는 헌사가 담겨 있는 『사슬이 풀린 뒤』는 3·1운동 당시 부친(오세형)이 배천읍 만세시위를 주동한 뒤 투옥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기영 또한 3·1운동으로 투옥된 교장 선생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그해 12월 친구들과 모의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11살의 나이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한 경험이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기영 일가족의 민족운동사-고난사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 밖에도 그의 가족들은 그야말로 민족운동 전선에서 한결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을 거듭하였다. 투옥되어 혹은 죽고, 혹은 병고에 시달렸다. 그 가족의 수난사를 간략히 보면 다음과 같다.
* 오세형 - 부친, 고향, 배천의 3·1운동 주동자로 투옥되다
* 윤인의 - 모친, 자녀들이 독립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역사를 온몸으로 감당하다
* 오기만 - 형. 신간회 사회주의 운동 등. 수감 중 얻은 폐결핵으로 사망 (1905-1937) (건국헌장 애국장)
* 오기영 - 3·1운동으로 투옥(11세), 사상범 투옥, 수양동우회 투옥 등 총4회 투옥
* 오기옥 - 남동생.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 중 해방을 맞아 석방 (1919-1950?)
* 김명복 - 부인. 오기만의 동지. 여섯째 아이를 낳던 중 간독으로 병사
* 오장석 - 조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1922-?)
* 오탐열 - 오기영의 누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감
* 강기보 - 오탐열의 남편, 수감중 얻은 폐결핵으로 순국(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가족사이면서 민족사, 민족사이면서 서사시
누구보다도 오기영 자신이, 직접 기록하는 그 가족의 수난사 『사슬이 풀린 뒤』의 민족사적 가치와 의의를 자각하고 있었다. 『사슬이 풀린 뒤』의 서문 격으로 책 서두에 배치된 「어머니에게 드리는 편지」는 “어머니. 쇠사슬에서 풀린 기쁨은 쇠사슬에 얽혔던 사람 보다 더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어머니는 노예의 어머니가 아니요, 나는 노예의 아들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 오기영은 다음과 같이 의의를 밝힌다; “우리는 이 모든 아픈 과거를 잊지 말아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당대(當代)뿐이 아니라 길이 자손에게까지 이 피 묻은 기록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자유를 침략하였던 야만에 대하여 두고두고 적개심을 가져야 하며 그 적개심을 자손에게 상속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으로써 우리의 자손이 그들의 자유를 영원히 지켜 나가는 노력의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이것이 우리 가족만이 겪은 일이라 하면 아무런 문제될 가치가 없습니다마는 형님의 말과 같이 이러한 일을 당한 조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기록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42-43쪽)”
한마디로 이 기록은 한 가족의 투쟁-고난사이면서, 그 가족이 깊숙이 간여했던 독립운동사의 내밀한 증언록이다. 오기영은 『사슬이 풀린 뒤』에서 그 가족의 고난사뿐 아니라, 그들이 간여하면서 만난 김형선 형제들, 박헌영을 위시하여 3·1운동 당시의 운동 과정, 하다못해 일제강점기 말기의 ‘한글 사용 금지’ 풍경까지를,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이 생생한 모습으로 증언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하나하나가 고난과 눈물과 죽음으로 점철되었으되, 결코 패배의 기록이 아닌, 투쟁과 승리의 서사시로 오롯이 살려 내고 있다는 데 이 책의 성취가 있다.
『사슬이 풀린 뒤』를 비롯한 오기영 전집의 역사적 가치
『사슬이 풀린 뒤』는 처음에 해방공간에서의 최고의 잡지라고 할 <신천지>에 4회에 걸쳐 초고가 연재되었다. 이 기사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어 내서, 일부 학교에서는 이 부분을 복사하여 교재로 썼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를 증보하여 단행본 출간을 하려고 출판사에 맡긴 뒤 2년이 되도록 출간이 미루어졌다. 그러는 동안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좌우익 투쟁의 혼란으로 접어들었고,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하여 오기영은 처음에 쓴 서문에 이렇게 덧붙이기에 이른다; “3년 전 해방의 감격은 벌써 하나의 묵은 기억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도 기쁘더니, 그렇게도 감격스럽더니, 이제 우리의 가슴속에는 이 기쁨과 감격 대신에 새로운 슬픔과 환멸이 자리를 바꾸어 들어찼다. 이제 제2해방이 있어야 할 것은 누구나 아는 바요 그것을 기다리는 마음도 누구나 초조하다. 그런지라, 3년 전의 해방을 정말 해방으로 알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엮은 이 책을 읽을 때에 누구나 달라진 세월에 부대끼며 다시금 슬픔을 아니 느낄 수 없이 되었다. 무엇이 달라진 세월인가? 똑바로 따지면 다르기는, 1945년 8·15 이후 잠깐일 것이다. 도로아미타불이라면 심한 말일까? 전날에 내 형을, 내 매부를 죽게 하였고, 내 아버지를, 나를, 내 아우를, 내 조카를 매달고 치고, 물 먹이고 하던 그 사람들에게 여전히 그러한 권리가 있는 세상이다. 잘 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이 따로 있고 인민은 여전히 호령 밑에서 불행과 무지와 빈곤에 울어야 한다면 이것은 인민의 처지에서 볼 때 권력 잡은 지배 세력이 바뀐 것뿐이지 인민 전체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 뒷날에 정말 해방이 오거든 또 한 번 『사슬이 풀린 뒤』를 써야 할 까닭이 있다.”
빛나는 역사의식, 미래를 투사하는 시선
오기영이 1948년 12월에 쓴 회고록 『사슬이 풀린 뒤』에서, 해방되던 날의 감격을 회상하며 쓴 대목은, 전집을 통틀어 백미라고 해도 좋을 혜안을 담고 있다. 그것은 1945년 8월 15일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통일독립/독립통일의 그날을 예견하는 시선이요, 그래서 염원이자 예언이며, 비원이자 선언이다; “생각하면 우리는 이제 일본의 압박으로부터서만 해방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시 봉건시대로 돌아갈 리가 없고, 몇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사회제도가 생길 리 없으니, 우리는 실로 4천 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모두 이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오늘 이 기쁨에 참예하지 못하고 거리에 나와 보지 못하는 사람이야, 어저께까지 동포의 이름을 팔아서 압박자에게 아첨하던 무리요, 거기서 조각 권력을 얻어 가지고 동족을 치던 무리뿐일 것이다. 지금까지 겪은 고초가 끔찍하나 나는 오늘 쥐구멍에 숨어야 할 무리에 들지 않고 이렇게 거리에 나서서 민족의 기쁨 속에 섞일 수 있음을 생각할 때에 또다시 가슴은 감격에 벅차다.”
8·15 해방은 우리 민족 최초의 해방이라는 것이다. ‘4천년 역사를 통하여 처음으로 해방되는 백성’이란 ‘하늘백성(天民)’이던 바로 그 순간의 회복이며, 4천년 동안의 고난적덕(苦難積德)으로써 도달한 ‘하늘백성’의 시대가 비로소 시작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기영의 시선은 어쩌면 당대에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시선이며, 오늘의 우리가 분단을 극복하는 날에야 비로소 체감하게 될 시선의 높이이기도 하다.
동전 오기영 전집 전6권은 해방공간에서 그러했듯이, 우리가 민족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역사를 써나갈 앞으로의 시대에 남과 북 모두에 ‘민족교과서’로 두고두고 읽혀야만 유감이 없을 것이다.
■ 전집(전6권)의 구성과 내용
제1권 『사슬이 풀린 뒤』 : 오기영이 자신과 가족들의 투쟁-수난사를 엮은 회고기
제2권 『민족의 비원』 : 1945년 12월부터 1947년 5월까지 잡지와 신문 등에 기고한 23편의 정치·사회평론을 모은 평론집.
제3권 『자유조국을 위하여』 : 1947년 5월부터 1948년 6월까지 잡지, 신문 등에 투고한 28편의 정치·사회평론을 모은 평론집.권두에는 1946년 발행된 『자유조국을 위하여』 초판본 표지를 비롯, 『새한민보』, 『신천지』 등에 실린 그의 기사 사진이 8쪽의 화보로 실렸다.
제4권 『삼면불』 : 1946년 7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집필한 41편의 짧은 글을 모은 시사수필집.
제5권 『3면 기자의 취재-일제강점기 기사』 : 1928년부터 시작된 오기영의 기자 생활 시기에 취재 보도한 각종 취재 기사 모음집.
제6권 『류경 8년-일제강점기 칼럼』 : 1928년부터 시작된 오기영의 기자 생활 시기에 작성한 칼럼 모음집.
기본정보
ISBN | 9791188765416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05월 18일 | ||
쪽수 | 280쪽 | ||
크기 |
158 * 233
* 26
mm
/ 578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동전 오기영 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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