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연필(큰글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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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 깎은 연필처럼 우아하고 예리하게 빛나는 이야기
작가정보
목차
- 프롤로그
1부 연필
연필의 지리학
검색창에 연필을 입력하세요
다이아몬드와 같은 이름
P. P. P.
『아무튼, 코끼리』가 될 뻔한
마녀의 빗자루
그래파이트 타투
스페인 프리힐리아나의 실비아 씨
연필 장례식
2부 연필들
버지니아 울프의 연필
다와다 요코의 연필
최윤의 연필
밀레나 예젠스카의 연필
도로시 파커의 연필
조이스 캐롤 오츠의 연필
조앤 디디온의 연필
넬리 블라이의 연필
루이자 메이 올컷의 연필
부록 - 슬기로운 연필 생활
책 속으로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은 왜 아버지가 남동생에게 선물한 만년필을 갖고 싶어 했을까. 그런 욕망에도 긴 역사가 있다. 연필과 만년필, 임시적 존재에서 영구적 존재로의 욕망은 새로운 게 아니다. 툭하면 지워지고 대리되고 삭제되는 존재들에게 중첩되는 상처, 그러니까 그 영화는 그런 비가시적 존재들에게 몸을 빌려주고 상처에 대해 말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_「검색창에 연필을 입력하세요」
사람이 잘 부서지는 존재이고, 의아할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안다’고 말하기보다 ‘모를 수가 없다’고 해야 한다. 삶이 환기시키는 건 그런 거다. 우리는 그냥 알기보다 대체로 모를 수가 없는 경험으로 자란다. 상담가가 내려놓은 연필 끝이 뭉툭해져 있었다. 흑연은 잘 부서졌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흑연도 강하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흑연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사람이었다. 부서지고 무너지고 더 약해질 수 있는 존재가 나이기도 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하고 산 것일지도. _「다이아몬드와 같은 이름」
발단은 연필 커뮤니티에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돌아오는 “이 점 나만 있나요?” 타임이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고양이처럼 나만 없네 또. 의학적으로는 ‘외상성 문신’, 정확히는 흑연 같은 이물질이 상처 속에 침착되어 점처럼 보이는 거였다. 그 점이 있는 사람은 적지 않았는데 정작 그것을 부르는 합의된 단어가 없었다. 연필에 찔리는게 한국 사람뿐이겠나 싶어 영어권 표현을 찾다가 발견한 게 그래파이트 타투(Graphite Tattoo). ‘흑연 문신’이라고 번역하면 어감이 달라지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나는 앞으로 그래파이트 타투라고 부르기로 했다. _「그래파이트 타투」
연필의 나무가 연필을 구성할 때는 심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외부 충격으로부터 심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해요. 하지만 연필에서 깎여나갈 때 나무는 칼날과 결을 맞춰 부드럽게 움직이고 저항이 덜해야 합니다. 언뜻 모순처럼 느껴지는 이 이상적 조건을 한 나무에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몇 세기에 걸쳐 이어졌지요. 그들 덕분에 나는 강하면서 결이 고운 또는, 단단하게 사라지는 무언가가 세상에 있다는 걸 압니다. 늙음과 사라짐이 쇠약함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당신의 손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_「스페인 프리힐리아나의 실비아 씨」
‘연필을 아낀다’를 연필 쓰는 사람의 언어로 번역하면 ‘연필을 즐겁게 자주 쓴다’이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몽당연필이 되기까지 이 세상에서의 소멸을 돕는 방식으로의 아낌이다. 연필들은 천천히 사라진다. 그들을 아끼는 사람들의 손에서. _「연필 장례식」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거리 출몰하기: 런던 모험」은 “연필 한 자루를 향한 열정을 느껴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확신으로 시작한다. 글의 첫 문장부터 ‘저기, 이의 있습니다!’ 하기도 쉽지 않은데 울프의 에세이가 딱 그랬다. 1927년이라면, 특히 여성 사이에서라면 저 확신은 수월하게 공감을 얻었겠지만 지금 저 문장을 내가 아는 몇몇 연필 커뮤니티에 던져놓으면 순식간에 고양이 앞의 츄르가 될 것이다. _「버지니아 울프의 연필」
연애는 끝났고, 어떤 언어들은 마음처럼 하릴없이 부서졌다. 내가 나를 견디며 살아가듯 부서진 언어들도 나비나 물고기가 되어 세계를 견디고 있다. 춤을 추면서. 그것들을 두 손으로 그러모아 조심조심 종이 위에 놓아주면 시가 될지도. _「다와다 요코의 연필」
나는 그냥 알 수 있었다. 쓰고 기록하는 여성들에게 연필은 그랬다.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수감된 여기자들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기록을 이어가고 중요한 정보를 신문사로 유출할 수 있었던 건 어떤 교도관이 몰래 넣어준 몽당연필 덕분이었다는 회고록 속 연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몽당연필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표류하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쓰다가 남은 것과 같이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길이였다고 했다. _「최윤의 연필」
손의 압력으로 부서진 연필심이 종이 섬유질 사이에 한번 자국을 남기면 압력과 부서짐이 더해지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지우고 다시 쓴다는 건 흐려진 자국 위에 덮어 쓴다는 말이고, 덮어 쓰면서 세계를 여러 번 다시 진행시킨다는 의미다. 한 번은 어둠 뒤에서, 한 번은 어둠과 나란히, 그러다가 어둠을 따돌리고. 한 편의 여성 서사가 완성되는 과정이 그럴 거라고 상상한다. 처음에는 연필로, 지우고 다시 흔적 위에 연필로, 지우고 더 진하게 연필로. _「조이스 캐롤 오츠의 연필」
조앤이 남편을 잃고 쓴 『상실』 속 그 표정을 조앤이 쓰던 연필과 같은 시대의 나무, 흑연으로 만들어진 몽골 482를 손에 쥐고 내가 짓고 있다. 궁금하다. 조앤도 그런 표정으로 서 있는 자기가 여럿 나오는 꿈을 꾼 적 있을까. 내가 상실 전후의 나‘들’을 어떻게 봉합해야 하는지 난감한 채로 간혹 꾸는 꿈은 조앤의 글을 지형 삼아 진행되곤 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사람들이 꾸는 꿈은 어딘가 닮았다. 내 꿈에서 먼저 떠나는 사람은 늘 나였다. _「조앤 디디온의 연필」
파버 드로잉 연필의 탄생과 소멸 그 중간쯤이 될 1868년 소설 속 에이미가 원하던 연필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 먼 시공간에서 빌려온 듯한 연필 한 자루의 용도는 간단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그리고 그리워할 수 있었다. 쓰고 쓰라릴 수도 있었다. 갖고 싶은 연필을 포기한다는 건 그 모든 순간의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말일 텐데. 왜 아직 시간 여행이 불가능한 걸까. 1868년 에이미 손에 이 연필 좀요! _「루이자 메이 올컷의 연필」
기본정보
ISBN | 9791188343447 |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5월 28일 | ||
쪽수 | 220쪽 | ||
크기 |
176 * 285
mm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아무튼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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