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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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다른 사람,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고 싶었던 헤르만 헤세의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소설 속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의 대화도 심리치료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철저히 싱클레어의 자기 고백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극적인 사건을 갖지 않는다. 오직 내면의 충동과 발생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가 유동적인 소설이다.
작가정보
1877년 7월 2일 독일 남부 칼브에서 태어나 경건하고 인문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1890년 괴핑엔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신학교 시험을 준비하고 뷔르템베르크 국가시험에 합격했다. 1892년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에 입학했지만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인이 되고자 도망쳤다. 이후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견습 사원으로 일했고, 열다섯에는 자살을 시도하는 등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1899년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해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와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을 출간했다. 1904년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를 펴내고,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다. 1919년 스위스 몬타뇰라로 이주하며 삶과 작품 세계에 전환점을 맞이했고, 1923년에는 아내와 이혼하고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수레바퀴 아래서』(1906) 『크눌프』(1915) 『데미안』(1919)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1920) 『싯다르타』(1922) 『황야의 이리』(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동방순례』(1931) 등을 통해 방랑, 자아의 추구, 예술가의 삶이라는 대주제를 탐구했다.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과 괴테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1962년 8월 9일 몬타뇰라에서 뇌출혈로 눈을 감았다.
소설가이자 번역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소설과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했다. 2003년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으로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독학자』로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 『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뱀과 물』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등과 산문집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 프란츠 카프카의 『꿈』,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등이 있다. 『뱀과 물』로 제42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목차
- 두 세계 11
카인 37
예수 옆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 65
베아트리체 91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120
야곱의 싸움 144
에바 부인 174
종말의 시작 208
옮긴이의 말 222
책 속으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그러기 위해서 이제 아주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훨씬 더 멀리, 내 어린 시절이 시작되는 가장 최초의 날로, 아니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 나라는 존재의 기원인 아득한 태초로까지 돌아가고 싶다.
모든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시도하는 길이고, 암시하는 샛길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떤 자는 어슴푸레하게, 어떤 자는 더 명료하게,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우리 모두는 출생의 찌꺼기를 달고 산다. 태초의 점액과 알껍질을 죽는 날까지 끌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로 머물거나, 도마뱀으로 머물거나, 개미로 머문다. 어떤 이들은 상반신은 인간, 하반신은 물고기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어머니라는 한 자연으로 부터 나온 자식들인 것은 동일하다. 모두의 기원은, 모두의 어머니는 하나이다. 우리는 다 동일한 구멍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저마다 각자의 목적을 향해서 질주한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누구나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뿐이다.
나를 고통에서 구원해준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왔다. 그와 동시에 뭔가 새로운 것 또한 내 삶으로 들어왔으며, 그것이 지금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얼마 전 라틴어 학교에 새로 온 전학생이 있었다. 그는 이 도시로 이사 온 부유한 과부의 아들로, 옷소매에 검은 상장喪章을 달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많았고 학년도 하나 위였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나도 그에게 시선이 갔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그 학생은 보기보다 훨씬 성숙한 것 같아서, 누구에게도 아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어린 소년들인 우리 사이에서 그는 마치 어른처럼, 아니 거의 신사처럼 이질적이고도 의젓하게 돌아다녔다. 인기 있는 학생은 아니었다. 놀이에도 끼지 않았고, 싸움질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다. 단지 선생들을 대할 때 그의 자신감 넘치는 결연한 태도가 학생들 마음을 끄는 것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데미안은 대담한 자와 비겁한 자에 대해서 얼마나 독특한 말을 했는가! 카인의 이마에 새겨진 표식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보기 드문 해석을 내렸던가! 그의 눈, 이상하게도 어른 같은 그의 눈은 묘한 광채로 빛났지! 그러자 문득 어떤 막연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데미안이 바로, 카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닐까? 자신을 카인과 비슷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왜 카인을 옹호하는 걸까? 왜 그의 눈빛에는 그런 힘이 있는 걸까? 왜 그는 ‘다른’ 사람들, 겁은 많지만 신의 마음에 합당한 경건한 사람들을 마치 비웃듯이 묘사하는 걸까? 내 생각은 하염없이 이어지면서 멈출 줄을 몰랐다. 고요한 우물에 돌이 하나 던져졌다. 우물은 내 젊은 영혼이었다. 그날 이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카인, 살인, 그리고 표식의 문제는 인식과 회의, 비판을 향한 내 모든 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나는 악마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지만 내 힘과 능력으로 그렇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길 위를 걷고 싶었으나 내게 그 길은 너무 미끄러웠다. 그래서 어느 친절한 손이 나를 구원해주자마자, 나는 한눈팔지 않고 곧장 어머니의 품으로, 감싸 안고 돌봐주는 경건한 어린 시절로 달아났다. 나는 원래의 자신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아이처럼 굴었다. 혼자 설 수 없었던 나는, 크로머에게 종속되던 상태를 새로운 종속으로 교체해야만 했다. 그래서 맹목적으로 어머니 아버지에게 매달렸고, 좋아하던 환한 세계에 속하는 편을 택했다. 그것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데미안에게 의존하여 모든 것을 털어놓았으리라. 나는 데미안을 선택하지 않았는데, 당시에는 그의 사상이 수상쩍으므로 믿을 수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부모님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훨씬 더 많은 것을 내게 요구했을 테니까. 충동하고 경고하고 조롱하고 비꼬면서, 나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만들려 했을 테니까. 이제 나는 분명히 배웠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만큼 내키지 않는 길은 없다는 것을!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를 감싸던 어린 시절이 무너져내렸다. 부모님은 나를 보며 당혹스러워했다. 누이들은 아주 낯설어졌다. 각성이 내 일상의 느낌과 기쁨을 퇴락시키고 색이 바래게 했다. 정원은 향기를 잃었고, 숲도 나를 유혹하지 못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철 지난 물건의 판매대처럼 맥이 빠지고 지루해졌다. 책은 종이에 불과했고 음악은 소음이었다. 가을 나무에서 잎이 떨어져 내리지만, 나무는 느끼지 못한다. 빗물이 나무를 타고 흐르고, 혹은 햇빛이 쏟아지고, 혹은 서리가 내린다. 그사이 나무의 내부에서는 생명이 가장 좁고 가장 내밀한 구석으로 퇴각한다. 나무는 죽지 않는다. 기다릴 뿐이다. 방학이 끝나면 나는 다른 학교로 진학하기로, 처음으로 집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간혹 어머니는 내게 유난히 다정하게 다가왔고, 예기된 작별을 미리 안타까워하며, 사랑과 향수, 그리고 영원한 기억을 내 마음에 새겨놓으려고 애썼다. 데미안은 여행을 떠나버렸다. 나는 혼자였다.
나는 쪽지를 무심코 만지작거리다가 무심히 펼쳤는데, 거기에는 몇 개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별생각 없이 흘낏 쳐다보던 나는 한 글자에 그대로 시선이 고정되었고, 놀란 가슴으로 그것을 읽어나갔다. 기이한 운명 앞에서 내 심장은 얼어붙는 듯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쪽지는 의심의 여지없는 데미안의 답변이었다. 그 새를 아는 사람은 나와 데미안뿐이었다. 그는 내가 보낸 그림을 받았다. 그는 이해했고, 나를 도와 그림을 해석했다. 그런데 이 모두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그리고, 이것이 가장 힘든 문제인데, 도대체 아브락사스는 무엇인가?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도 읽은 적도 없었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우리, 표식을 지닌 자들은 이 세상의 눈에는 이상하고, 심지어는 미쳤거나 위험하게 보일 수도 있었다. 우리는 깨어난 자, 혹은 깨어나고 있는 자였다. 우리가 오직 완전한 각성을 위해 노력하는 반면에, 타인들은 자신의 의견, 이상과 의무, 삶과 행복을 점점 더 무리의 그것과 일치시키려고 애썼고 거기서 행복을 찾았다. 그들도 노력을 하고, 그들에게도 힘과 위대함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표식을 지닌 우리는 새로움과 개별성, 미래를 향한 자연의 의지를 제시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의지로 살았다. 그들은 인류를 ?그들도 우리처럼 인간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같았으나? 이미 완성된 것으로, 그래서 보존하고 유지해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인류는 머나먼 미래였다. 우리 모두 그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아무도 미래 모습을 알지 못한다. 미래의 법칙은 그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출판사 서평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지난 세기 동안 가장 널리 읽힌 헤세의 대표작,
배수아의 새 번역으로 만나는 새로운 『데미안』
사람들은 말한다. 헤르만 헤세는 평생에 걸쳐 읽어야 하는 작가라고. 신기하게도 삶의 순간순간, 삶의 대목마다 우리는 헤세를 찾는다. 사춘기, 입시 지옥을 관통할 때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청년기,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길을 잃을 때는 『데미안』을, 특별한 재능이 없어 자기를 부정할 때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게 된다. 입시, 정체성의 혼란, 예술적 고민, 존재론적 회의와 맞서 싸울 때마다 우리 곁에는 늘 헤세라는 ‘영혼의 안식처’가 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 어느덧 ‘고전’의 반열에 오른 그의 전작을 소설가 배수아의 ‘새 번역’으로 자신 있게 내놓는다. 두 번째 이야기 『데미안』. 소년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어두운 무의식의 세계를 깨닫고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는 성장 이야기.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건넨다.
『데미안』은 소설이 아니라 차라리 하나의 거울이다.
― 장석주(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
『데미안』은 두 세계의 이야기다. 『데미안』은 매혹적이면서 신비한 두 세계를 묘사한다. 헤세의 이원적 세계관은 낯설지 않다. 극단으로 대조적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서로 보완하는 존재인 싯다르타와 고빈다(『싯다르타』)가 떠오른다. 그건 『데미안』도 마찬가지여서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싱클레어를 통해 집과 외부라는 두 세계의 경계를 형성한다. 헤세는 현실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라는 ‘이상’을 등장시킨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정신세계의 양극화는 헤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헤세는 선교사 출신의 부모 아래서 정직과 겸손을 교육받았다. 헤세의 집에는 늘 기도와 성서가 함께했다.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헤세는 부모의 경건한 삶에 반항심과 그로 인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기숙학교에 들어갔지만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심지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집을 나와 직업 훈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 어느 날, 가방에 니체의 책을 챙겨 넣은 그는 스위스 바젤로 떠나 서점에서 일자리를 구한다. 그리고 첫 번째 소설을 완성한다. 『페터 카멘친트』(1904)였다.
『페터 카멘친트』와 『수레바퀴 아래서』(1906)로 헤세는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결혼을 하고 세 아들을 두고, 호숫가에 집을 얻어 물질문명과 도시 생활을 멀리하는 삶을 실천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고, 집은 감옥처럼 다가왔다. 그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부모가 선교사로 일했던 인도로 떠났다. 처음 마주한 동양 앞에서 그는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선과 악, 역겨움과 환희, 부담스러운 짐과 사랑은 결국 하나임을 알게 된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함께 목적지로 흘러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단단한 자아, 자신의 길을 걷는 개인의 발견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헤세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다. 헤세는 전쟁에 자원했으나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고, 외국에 수용된 독일 전쟁 포로들에게 책을 보내는 일을 맡는다. 1914년 11월 스위스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에 민족주의적 논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글을 발표한 그에게 독일 언론과 문단은 비판을 가한다. 항의 편지가 쇄도했고 친구들도 등을 돌렸다.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아버지가 사망하고, 세 살 난 막내아들은 뇌막염에 걸린다. 신경쇠약을 겪던 헤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정신분석과의 만남! 헤세는 자신을 찾는 여정을 위한 새로운 표현법을 발견한다. 삶의 위기가 새 출발을 도운 것이다.
『데미안』은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인 이 무렵에 탄생했다. 소설 속 싱클레어와 피스토리우스의 대화도 심리치료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데미안』은 전쟁이 끝난 1919년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헤세는 다른 사람,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 사람이고 싶었다.
헤세의 소설은 모든 인간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영혼의 체험을 특유의 힘 있는 문장으로 묘사한다. 세상에는 따스한 부모의 품이 아닌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최초의 경험, 그 경험이 암시하는 불길함, 악을 저지르면서 겪는 죄책감, 거짓말, 아버지에 대한 경멸…… 모두가 겪지만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청춘의 예민함을 헤세는 써내려갔다. 헤세가 몰두한 세계는 두렵고 음험하지만 동시에 매혹적이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밝고 환한 세계에 속한 걸 알고 있지만, 어둠의 세계에 더 끌리는 것을 알게 된다. 악의 화신 크로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신과 천국을 걸고” 거짓을 말하고, 그 결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바로 그때,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난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독특한 인상, 선생들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학생, 호감과 수상쩍은 소문이 함께 따라다니는 존재. 친구이자 동료이자 스승 같은 존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나르치스를 떠올리게 하는 데미안은 질투심 때문에 동생을 때려죽이고 신으로부터 표식을 받은 성서 속 카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데미안이 새로이 정의한 카인은 ‘개인’을 상징한다. 단단한 자아를 가진,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걷는 존재. 데미안이 이미 도달한 경지이자 싱클레어가 앞으로 걸어야 할 길. 물론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인도자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싱클레어는 밝고 환한 부모님의 세계로 달아나버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비슷한 무리의 영웅이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순간, 베아트리체가 나타난다. 베아트리체 덕분에 싱클레어는 무의미한 세계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길을 찾는다. 그는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그린다. 그녀의 초상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얼굴과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베아트리체로 인해 싱클레어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만의 길을 찾게 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서 아브락사스를 알게 된다.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 아브락사스는 마법이나 주문에서 강력한 영을 지칭한다. 그 무렵, 싱클레어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명장 니클라우스처럼,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아브락사스를 알려준다. 싱클레어는 깨닫는다. 누구나 자신만의 본분을 타고나며, 그것은 불변한다는 것을. 이를 깨달은 인간의 의무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내면으로 온전히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싱클레어의 운명은 데미안을 넘어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에게로 향한다. 에바 부인은 남성이자 여성이며, 모성애와 엄격함을 동시에 지녔고, 아름답고 유혹적이며, 어머니이자 연인인 존재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그리고 에바 부인은 유럽의 몰락과 새 시대의 탄생을 기다린다. 하지만 에바 부인을 향한 싱클레어의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한다. 세 사람이 고대하던 변혁,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헤어져서 각자의 운명을 따른다. 그들에게 전쟁은 구세계의 붕괴와 새로운 인류의 탄생에 필요한 것이었다. 헤세에게 제1차 세계 대전은 내적 해방을 위한 계기로, 운명의 행위였다.
이렇듯 『데미안』은 한 편의 내면의 드라마다. 『데미안』은 극적인 사건을 갖지 않는다. 소설은 철저히 싱클레어의 자기 고백으로 이어진다. 주인공과 외부 세계가 갈등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주인공의 자아와 또 다른 자아가 분리되어 투쟁할 뿐이다. 오직 내면의 충동과 발생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가 유동적인 소설, 그것이 『데미안』이다. 『데미안』에서 죽음과 탄생은 결국 하나다. 병사 에밀 싱클레어는 죽어가지만, 그것은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싱클레어는 죽어가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알을 깨고 비상한다. 싱클레어가 폭격으로 부상을 입고 야전 병원에 누워 있을 때, 데미안이 마지막으로 그를 찾는다. 데미안은 에바 부인이 전달해 달라는 것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입맞춤이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입맞춤을 주고 떠난다. 이제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데미안은 그의 일부가 되었고, 데미안을 부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되었다. 그렇게 그는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
기본정보
ISBN | 9791187928232 |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11월 15일 | ||
쪽수 | 240쪽 | ||
크기 |
138 * 196
* 27
mm
/ 39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헤르만 헤세 컬렉션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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