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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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1755년에 발생한 리스본 대지진 이후 대지, 이성, 토대를 뜻하는 ‘그룬트Grund’, 즉 ‘근거’가 흔들렸음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더럽혀진 대지에 다시 하나의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나아가 텍스트에 의한 혁명, 비판적 성찰을 근간으로 한 새로운 예술 창조, 진정한 민주제의 확립 등을 설파한다. 전작인 《제자리걸음을 멈추고》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강연, 기고, 대담, 철학적 에세이 등을 묶어 펴낸 것으로, 이번 책에서는 저자 자신에 관한 에피소드가 상당히 많이 담겼다는 차이점이 있어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작가정보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작가이자 철학자로 1973년 일본 아오모리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 사상문화학과 졸업 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인문사회연구계 기초문화연구를 전공해 종교학?종교사학 전문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문학박사). 호세이대학 비상근 강사를 거쳐 현재는 도쿄세이카대학 인문학부 준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적 저서 『야전과 영원?푸코·라캉·르장드르』를 비롯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 치열한 무력을』,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이 나날의 돌림노래』 등을 발표했으며, 소설작품으로 『구하 전야』, 『행복했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Back 2 Back』(이토 세이코와 공저), 『아키코 그대의 제 문제』, 『밤을 빨아들여서 밤보다 어두운』 등이 있다.
역자 김소운은 대학 졸업 후 20여 년간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옮긴 책으로는 사사키 아타루의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와 『제자리걸음을 멈추고』를 비롯해 『고흐가 되어 고흐의 길을 가다』, 『경제고전』, 『사고개혁의 심리학』, 『타로의 미궁』, 『서바이벌 미션』, 『사고력을 키우는 읽기 기술』 등이 있다.
목차
- 1부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 밝은 시력을 잃다
/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전야는 지금’의 기록
/ 굴욕이 아니라 치욕을: 혁명과 민주제에 관하여
/ ‘밤의 밑바닥에서 귀를 기울이다’
2부 반시대적인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 문학과 예술
/ 이것은 ‘문학’이 아니다: Absolute/『Self-Reference twin-Engine』
/ 반시대적인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 사상을 말하다
3부 내 책은 안이한 희망의 책이 아니다
/ ATARU SASAKI Philosopher, Novelist
/ 정치는 ‘논증’을 웅변하는 기예가 필요
/ 2010년 기노쿠니야 인문대상 수상 연설
/ 내 책은 안이한 희망의 책이 아니다
/ 쓰면서 생각하다
4부 그래도 ‘이유’를 질문하며 살다
/ 감동으로 말문이 막힐 따름인 저항과 투쟁의 계속
/ 그래도 ‘이유’를 질문하며 살다
/ <라임스타 우타마루의 위크엔드 셔플> 봄 추천도서 특집!
발문 277
출판사 서평
텍스트를 섬세하게 엮어가는 작업에서 지진피해를 거쳐
민주제와 혁명, 예술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통치의 ‘기술’을 둘러싼 깊고도 폭넓은 사고의 궤적이
열광과 유머 속에 펼쳐진다!
◆ 자연인 사사키 아타루와 ‘시원시원한 성격의 육체노동자’ 사이
이번 책에서는 ‘사사키 아타루’ 하면 으레 따라다니는 ‘일본의 니체’라는 수식어 대신 자연인의 면모를 더 많이 접할 수 있다. 그는 어릴 때 시력이 3.5, 어쩌면 5.0 정도 되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괴로운 나날이 많았다. 20대에 벌써 급속히 노안이 와서 이제는 겨우 글을 쓸 수 있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아프리카 대평원이나 몽골 초원 같은 데가 아니면 하등 쓸모없는 능력을 가졌던 셈이다. 어쨌거나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반면에 ‘섬뜩한 아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원래 학교라는 걸 싫어해서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5년 동안 놀거나 일을 했다. 수학과 국어를 잘해 경제학부에 진학했지만 남이 시켜서 하는 공부는 질색이었기에 와세다대학의 음악 서클에 틀어박혀서 학교와는 담쌓고 지냈다. 경제학 자체는 정말 재미있었지만 애덤 스미스나 케인스와 마르크스 같은 사상을 꿈꿔서는 안 되는 곳임을 깨닫고 종교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정상적인 철학과에 들어갔다가는 대판 싸움이 날 테니 종교학이나 미학을 전공하라”는 조언 덕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야전과 영원』의 대성공 이후 딱히 할 일이 없어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소설 『구하 전야』를 썼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탈고한 뒤 형언하기 힘든 혐오감에 휩싸였다. “99.9퍼센트에 도달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문학은 살아남았다고 했던 주제에 살아남은 0.01퍼센트의 승리한 작자가 하는 이야기만 했다”는 자괴감이 들어서. 그런 그는 자신을 “‘뭐든 알고 있다’라는 지식인의 만능주의를 굳이 피하다가 글을 쓰게 된 인간”이라고 소개한다. 나아가 자신의 문장과 힙합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문장에 관해서는 아무런 계산도 없습니다. 철학과 문학에서는 이렇게 태어난 이상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다는 듯이 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 외의 다른 근거를 찾는다면 출세제일주의careerism, 권력이지요. 대박 나길 바라거나 인기가 많길 바라기 때문에 권력과 돈에 오염되고 맙니다. 권력을 원하거나 돈을 벌고 싶으면 문학이나 사상을 관둬야죠. 비효율적이니까.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존경하는 베케트의 말대로 달리 재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완벽한 대답이 또 있을까요.” (220쪽)
“힙합은 중요한 문화입니다. 힙합이 탄생한 장소는 새로운 형태의 게토ghetto(유대인의 강제 지정 거주구역)이므로 완벽하게 도시 설계를 해서 (주민에게) 자유를 줍니다. 마약 거래와 서로 죽일 수 있는 자유, 우리 속의 자유를. 그런데 계략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놀라운 글로벌 문화가 탄생했으니까요.” (221쪽)
그를 인터뷰한 가네코 요시노리에 따르면 “자기 신격화는 철저히 증오한다. 기개 있는 재능의 신선함에 비평 관계자들은 2010년대를 상징하는 재인才人이라는 열띤 찬사를 보내지만 본인은 지극히 냉정하다. ‘후배에게 보내는 가벼운 격려로 받아들였으나 내 시대라는 말은 단호히 거부하고 싶습니다. 내 시대를 가진 순간 그 길로 끝이기 때문입니다. 10년, 20년 만에 쇠퇴하는 사상은 사상이 아니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50년은 글을 쓰겠습니다’”라는 포부를 밝혔다.
사사키 아타루에 대한 가네코의 한 줄 평이 매우 인상적이다.
“시치미를 떼고 장르의 벽에 우회도로를 내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육체노동자’”
사사키 아타루의 향후 작업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 미증유의 재해 속에서
요즘 들어 부쩍 지진 관련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며,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 중지냐 계속이냐의 논란 때문에 지진에 대해 더욱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통상 우리보다 지진피해가 훨씬 잦은 일본에서는 2011년에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고,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이 책은 그 재해 직후 사사키 아타루가 작심하고 발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강연과 대담, 기고 등을 묶은 것이다. 몇 년 전에 발표된 내용이고 형식과 주제 또한 다양하지만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 많은 책이다. 원전문제뿐 아니라 일각에서는 핵병기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앵글로색슨족이 살고 있는 지역만 지진 발생 빈도가 드물 뿐 거의 전 세계가 지진에 대해 안심할 수 없는 형편이다. 게다가 원전문제 또한 심각하다. 그뿐인가. 일본에서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원전과 핵문제는 결코 우리 당대만의, 어느 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다. 그런데 저자의 지적대로 우리는 너무 안이한 사고방식에 젖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핵잠수함 사고도 몇 년에 한 번꼴로 발생합니다. 자료를 읽으면 ‘미소 핵잠수함 충돌사고, 상세불명, 침몰한 것으로 추정’이라는 한 줄로 끝납니다. 하지만 핵탄두든 원자로든 적재하고 있지요. 그럼 침몰한 그 핵잠수함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원래 구닥다리가 된 핵잠수함용 원자로는 바다에 버리거든요. 육상의 핵병기 사고도 군사기밀이어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여러 번 있었습니다. 동해[일본해]에 버린 것도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에서 골백번이나 실시했던 핵실험으로 피폭한 희생자도 세계 각국에 있습니다. (72~73쪽)
우리도 더럽혀졌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이런 상태였던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의 책도 출간되었습니다. 자료도 있었습니다. 숨기려고 해도 미처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포함한 우리는 손가락 물고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문벌귀족이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기는 했지만 그냥 방관했습니다. 아닌가요. 우리는 이러한 체제를 용납하고 묵인했습니다. 얼마나 큰 치욕인가요. 이 치욕을 자초한 우리는 속죄해야만 합니다. (85쪽)
그러면 지진에 관해서는 어떨까. 저자의 조사에 따르면 ‘매그니튜드’라는 단위가 생긴 것이 1935년이고, 보급되기까지 약간 시간이 걸렸을 테니 엄밀하게 측정한 수치라고 하기는 무리일 수도 있지만, 20세기 일본에서는 M 7 이상의 지진이 예순한 번 이상 발생했다고 한다. 19세기에는 스물아홉 번, 18세기에는 일곱 번, 17세기에는 여덟 번. 대지진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을 뿐이다. 1976년 세계 최대의 피해자를 낸 것은 중국의 탕산 대지진唐山大地震이다. M 7.8로 60만 명이 사망했다. 2008년에는 쓰촨 대지진四川大地震으로 8,70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2001년의 수마트라 해상 지진은 M 9.3으로 22만 7,900명이, 1990년의 이란 지진에서는 3만 7,000명, 1999년의 터키 대지진에서는 1만 6,000명, 2005년 파키스탄 지진에서는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2010년 M 7.0의 아이티 지진에서는 3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단 한 번의 재해로 무려 30만 명, 60만 명의 사망자가 나오다니,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한다. 우리나라도 기원후 2년부터 1904년까지 역사서에 기록된 전체 지진기록이 약 2,000여 회라고 하며, 작년 9월에 경주에서 발생한 M 5.8의 강진을 떠올리면 더욱 오싹한 느낌이 든다. 지진은 언제든 발생한다. 원전사고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미증유의 재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 민주제와 혁명, 굴욕이 아니라 치욕을
종교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현대사상에 정통한 인물답게 사사키 아타루의 논의에는 ‘혁명’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간 발표한 다수의 책에서 꾸준히 텍스트에 기반을 둔 혁명이야말로 진정한 혁명임을 강조한 데 비해 이번 책에서는 현실 속의 민중혁명을 깊이 있게 다뤄 눈길을 끈다. 특히 2010년부터 2011년에 걸쳐 튀니지에서 독재정권에 반대해 민중이 봉기한 혁명을 두고 서구의 언론매체가 일방적으로 ‘재스민 혁명’이라고 명명한 것에 대해 ‘온건하고 길들여진 인상을 주려’는 시도라고 비판한다. 더불어 민주제는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그리스인이 인류에게 던진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로서 ‘블랙 아테나’가 창조한 것이기에 서구인이 특별한 소유권을 주장할 처지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서구의 언론매체가 전하는 ‘아랍의 민주화’, ‘이집트의 민주화’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표현인지를 지적한다. 비서구권에 속하는 사람들이 정치에 관해 사고할 때 왕왕 범하는 심각한 오류가 있는데, 민주주의나 인권의 옹호라고 하면 곧바로 ‘유럽적 가치관이며 본래 우리와는 무관한, 서구에서 강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태도다. 그러한 서구 대 자신들이라는 단순한 대립도식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자유와 평등을 행사할 때 서구인에게 빚진 느낌에 쫓길 필요는 없다고 피력한다. 그들이 이 도식에 따라서 비서구인을 차별할 근거는 일체 없으며, 우리 비서구인이 이 도식에 따라서 서구적인 것에 반발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혁명에 관해서는 ‘치욕honte’과 ‘굴욕humiliation’이라는 두 가지 정치철학적인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치욕은 개인적이거나 심리적인 혹은 내면적인 개념이 아니며, 자신의 삶 자체의 변혁을 내포하는 감정이다. 저자는 피터 벤슬라마의 표현을 빌려 “남자(인간)인 것의 부끄러움, 여기에 혁명하는 최고의 이유가 있지는 않을까”라고 말한다. 원전사고를 일으키고도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는 행태야말로 치욕이라고. 그리고 혁명은 대단히 구체적인 일로 촉발되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치욕으로 느끼느냐 마느냐가 관건이라고.
반면 굴욕이란 무엇인가. 자신은 무슬림인데 서구적인 가치관에 침해당하고 있다거나, 헌법 제9조는 미국의 강요로 만들어졌으니 재군비해서 일본 남아의 긍지를 회복하라는 그런 감정을 말한다. 굴욕은 자신이 남자인, 이 사회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남자라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그 굴욕은 남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고 고통과 고난으로 자신을 변용시킬 생각은 하지도 않는 감정이다. 그러므로 굴욕이 아니라 치욕을 통해 우리의 민주제를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데모스의 지배를, 데모스에 의한 데모스의 통치기예를 우리는 아직 발명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민주제를 새롭게 창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자기 자신뿐이라고 실감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의 이 제도 아래에서 실감 못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민주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민주제를 도출해야만 합니다. (……) 무려 몇천 년 전에 그리스인이 했던 말입니다. 어떻게 우리만이 우리를 통치하는 상황을 고안하는가. 무엇이 데모스에 의한 데모스의 지배인가. 몇천 년간 이어져온 이 문제는 미해결상태로 우리 눈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떠맡은 당사자는 항상 우리입니다. 우리를 통치하고, 오로지 우리만이 우리를 통치하도록 용납하는, 우리의 문제입니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까마득히 먼 훗날 도래할 ‘우리’를 불러 모으기 위해. 그 우리를 통치하는 것은 우리 이외의 그 누구도 아닌 그런 세상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서 우리가 아닌 남의 잘못으로 돌리는 굴욕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미 이해하시죠. 우리의 손만 더럽혀졌다는 치욕만이 지금 여기에는 없는 민주제로 가는 혁명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89~90쪽)
◆ 예술과 철학, 문학에 관하여
사사키 아타루는 종교와 철학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예술과 문학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그만큼 각 주제에 관해 풀어놓을 말이 많은 셈이다. 『바스러진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에서는 예술과 철학, 문학을 대하는 그만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관점이 다양하게 녹아 있다. 그중 핵심적인 부분의 일부만 살펴보자.
유럽 예술은 다른 문화의 예술에 비해 시각이 편협하다(예를 들면 당초부터 정밀하기 그지없는 사실적 묘사를 으뜸으로 쳤던 유럽 회화의 역사를 이슬람의 장식적인 회화문화의 역사와 비교하라). 웬일인지 다른 일신교에서는 (성전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은 있을지언정) 원칙적으로 무한자無限者, the infinite인 신은 유한자有限者, the finite인 인간의 유한한 일개 기관인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신인 동시에 인간이라고 여긴다. (93쪽)
근원적인 아르스,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예술 혹은 창조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대지나 ‘영토성’과 관련된다. 살 수 있는 장소를, 시공을 확보하지 않고는 예술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필시 그 시공의 확보는 예술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것 자체가 바로 예술이다.
(94~95쪽)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자. 구조, 곧 대지의 건립?영토 취득?법의 주춧돌을 놓는 건축의 생성에서 음악이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물론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근거인 대지Grund의 복합모순Problematique도 재고해야만 한다. 근거는 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 과정의 모든 국면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은 반드시 수태의, 번식의 예술이다. 역사마저 초월해 영속하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는 한순간이고, 일개 겨자씨만도 못하지만 우연한 순간에 태어난 아이가 또 아이를 낳을 수 있으려면 이 대지에 하나의 장소를 요구한다. 그것이 예술의 목적이며 또한 예술 그 자체다. (97쪽)
글 쓰는 작업은 자신이 쓴 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배욕으로 쓰면 결과물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엄연히 써야만 하는 부분은 있습니다. 또한 미친 듯이 쓰고 또 쓰다가 빠져나온 순간 그 작품에게 버림당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파면당하고, 해임당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보고 ‘대체 누가 쓴 글이야, 이건’ 하고 눈을 부라리는 순간이 없으면 예술작품이 아닙니다. 실은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각종 자료를 섭렵하고, 공부한 내 머릿속에서 이런 허접한 논문이 나왔을 리 없어, 애초의 의도와는 딴판이잖아’라는 말이 나와야 정상입니다. 내가 아닌, 자신을 초월한 글이 등장해서 별안간 생소해집니다. 그래서 ‘고치고 싶지만 소설이 거부한다’라고 하신 겁니다. (128~129쪽)
사실 소설은 삶에 대한 딱지도 무엇도 아닌, 언어와 언어의 밖이라는 구별이 생기기 전의 뭔가가 박동치는 순수한 운동성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사물의 본성에서 말하면 끝을, 나아가서는 ‘시작’을 거절하는 것이겠지요. 아마도 문학과 소설의 공덕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 합니다.
(157쪽)
하지만 번역으로 문체를 단련할 수 있다는 말은 역시 사실입니다. 오에 씨도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을 테고, 제가 오에 씨와 나란히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로 생각하는 후루이 요시키치 씨도 젊은 시절 심혈을 기울여 번역을 하셨으니까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이 대단하다는 시시한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글자와 말에 관한 모종의 이질감이 중요합니다.
일사천리로 쓰고 마는 게 아니라 자신이 쓰는 글에서 근근한 이질감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 실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번역을 하다보면 아리고 근질근질한 느낌을 사무치게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글쓰기 작업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164~165쪽)
읽고 쓰기 수월한 글만 선호해서 읽으며, 쓰기 난해한 글은 거들떠보지도 쓰려고도 않는, 또한 몇만 부 팔린, 무슨 상을 받은 작자는 무슨 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학은 절대 그렇게 편협하고 시시하지 않습니다. 문학이란 읽기, 바꿔 읽기, 쓰기, 바꿔 쓰기입니다. 무엇을? 우리의 신체와 무의식과 욕망을, 욕동의 흐름을, 법을, 사회를, 제도를 그리고 세계를 말입니다. 팔루스에서 가장 멀리 동떨어지고, 순수하고 날카로운 첨필尖筆[인쇄용 철필] 끝으로 가르고, 봉합하는 수술 같은 행위로서 인간의 삶을 갱신해가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문학입니다. 그렇다면 정신분석도 문학운동의 하나지요. (188쪽)
현재 철학의 문체가 딱딱해진 것은 어림잡아서 일러봤자 18세기, 늦게는 20세기쯤이라고 말했습니다. 최근이지요. 『정신현상학』이라는 헤겔의 책에는 각주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습니다. 라이프니츠와 볼테르는 편지에서 썼지요. 플라톤은 대화편이므로 연극적이고요. 새로운 철학이란 새로운 문체를 창출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189쪽)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것과의 새로운 관계’는 환상입니다. 유아적으로 새로운 것을 좇는 사람들이 말하는 새로움은 기껏해야 지난 반년부터 어제까지 신문과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가까운 과거지요. 따라서 환상입니다. ‘옛것과의 오래된 관계’ 역시 불가능합니다. 이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옛것’이 실은 더 새로운 시대로 날조되었을지 모른다는 비평적인 관점이 결여되었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옛것과의 새로운 관계’를 짜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정치에서나 예술에서나 옛것을 직시하고, 임의의 방식으로 접근해서 거리를 두며, 비평적 관점을 확보하고 연구해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짜서 창조하는 자가 항상 ‘다음 세대’를 창조해왔습니다. (204쪽)
객관적이고 투명하며 정보화되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문장은 환상입니다. 문장은 사람의 생리를 바탕으로 하므로 철학자도 저마다 자신의 생리에 뿌리내린 필연적인 방식을 고안해서 글을 씁니다. (210쪽)
사토 / 그런데 문체는 어떻게 만들어가십니까?
사사키 /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도 좋은 문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예능은 뭐든 그러하지만 거듭 단련해서 자신을 죽이는 경지까지 가야 비로소 진짜 자신이 드러납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가기 전에는 그 사람 고유의 본성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가지 않은 책은 시시해요. 철저히 포기할수록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213쪽)
사사키 / 질 들뢰즈는 “예술가가 자신의 창의력을 발휘할 때 철학은 필요 없다”라고 합니다. 철학자와 사상가는 오만한 태도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가르치지 않아요. 그런데도 철학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철학 자체가 개념을 이용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215쪽)
사사키 / 연극이 몸과 말을 이용한 표현이라면 철학은 개념을 이용한 표현입니다. ‘개념’은 라틴어로 ‘잉태된 것, 임신된 것’이라는 의미이므로 철학과 사상에는 ‘미래를 향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걸려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철학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216쪽)
기본정보
ISBN | 9791187700173 | ||
---|---|---|---|
발행(출시)일자 | 2017년 10월 23일 | ||
쪽수 | 280쪽 | ||
크기 |
147 * 216
* 20
mm
/ 391 g
|
||
총권수 | 1권 | ||
원서명/저자명 | アナレクタ 3/佐#木中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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