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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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생전에 데리다가 ‘용서’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세미나를 책으로 엮어 냈다. 데리다는 이 세미나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라는 아포리아에서 출발해 ‘용서’라는 행위가 내포한 다른 여러 아포리아를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나치가 저지른 반인류 범죄, 제국주의 일본이 식민지를 상대로 벌인 반인류 범죄에 관해 용서를 빌거나 용서를 빌지 않는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그것을 용서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지, 이 주제에 관한 칸트, 장켈레비치, 코이레, 아렌트 등 철학자의 주장을 소개하며 담론을 전개한다. 지난날 일본이 저지른 침략과 식민 지배, 반인류 범죄의 피해자였던 한국인에게, 특히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사죄를 거부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볼 때 매우 중요한 성찰을 제시한 책이다.
작가정보
1930년 알제리(Alg?rie)의 수도 알제(Alger)의 엘비아(El-biar)에서 불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프랑스 시민권자로 태어나 불어로 교육을 받으며 지역의 다른 언어에 둘러싸여 자랐다. 19살에 소위 메트로폴이라 불리던 프랑스, 즉 ‘식민 본국’으로 건너와 수험 준비를 시작해 1952년 고등사범학교(ENS)에 입학한 후 루이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를 만났다. 장 이폴리트( Jean Hyppolite)를 지도교수로 「후설철학에서 기원의 문제(Le Probl?me de la gen?se dans la philosophie de Husserl)」로 논문을 썼다(Paris, PUF, 1990). 1953년에서 1954년 쓰여진 데리다의 이 첫번째 글은 데리다의 초기연구의 기반으로 볼 수 있다. 데리다는 ‘기원(gen?se)’을 주제어로 삼아 현상학의 창시자 후설의 사유에서 시간, 변동, 역사에 대한 고려가 초월적 주체의 구성, 감각과 감각 대상- 특히 과학적 대상-의 의도적 생산에 불러온 수정과 복잡화를 분석한다. 이후 데리다는 후설의 사유에 관해 『기하학의 기원(Introduction ? L’origine de la g?om?trie)』(Paris, PUF, 1962)(후설의 원고 번역과 해설),『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nom?ne)』(Paris, PUF, 1967)을 썼다. 57년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하고 60년부터 64년까지 소르본에서 강의하며 바슐라르(G. Bachelard), 컹길렘 (G. Canguilhem), 리쾨르(P. Ricoeur), 장 발( J. Wahl)의 조교로 일했다. 이 무렵 「텔켈(Tel Quel)」에 글을 게재하고 교류하기도 했다. 1964년 고등사범학교의 철학 교사로 임명돼 1984년까지 일종의 조교수 자격으로 강의했다. 폴 드만(Paul de Man)과의 인연으로 예일(Yale)에서 정기적으로 강의를 시작한 후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국제 철학학교(Coll?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설립에 참여했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책임자로 있었다. 1984년부터 데리다의 마지막 세미나가 되는 ‘짐승과 주권(La b?te et le souverain)’(2001-2002, 2002- 2003)까지 사회과학고등연구원(L’?cole des hautes ?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강의했다.
번역 배지선
젠더학 박사로 『젠더와 역사 다시 쓰기. 증언, 언어, 다중 목소리의 자서전(Genre et r??criture de l’histoire. T?moignages, Langue, autobiographie ? plusieurs voix)』(Harmattan, 2016)의 저자이며, 『번역불가능, 번역의 굴곡(Intraduisible: les m?andres de la traduction)』(APU, 2019)의 공동 저자로 성차, 증언, 글쓰기에 대한 논문을 여러 편 썼다. 연구의 핵심 주제는 ‘글쓰기(?criture)’이며 현재, ‘동물 자서전(animal auto-bio-graphie, ani-maux/ mots)’이라는 주제어로 데리다의 글을 연구 중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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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여러 아포리아 중 하나만 예를 들어봅시다. 충분히 줄 수 없게, 충분히 환대할 수 없게, 제가 주는 현재와 제가 베푸는 이 대접에 제가 충분히 현존할 수 없게 하는 아포리아 때문에, 저는 주지 않아서, 결코 충분히 주지 않아서, 충분히 베풀거나 대접하지 않아서 항상 용서받을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기증에 관한 한 우리는 무언가 늘 잘못했고, 늘 용서받을 일이 있습니다. 주지 않아서, 충분히 주지 않아서 용서받을 일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일로 자신이 유죄라고 느낄 수 있고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뭔가를 줘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준 것 때문에 구하는 용서,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상대에게 호소하는 일, 다시 말해 일종의 독, 무기, 주권의 확인, 더 나아가 강력한 힘의 실력 행사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아포리아는 더 심각해집니다. 13쪽
유일한 잘못이나 범죄에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우리를 쉴 틈 없이 둘러쌀 수많은 아포리아 중 첫 번째 아포리아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된 여성이나 남성이 중재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해줄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용서의 장에서 오로지 두 당사자만이 마주해야 한다는 여건은 이름 없는 피해자 전체, 때로는 이미 죽은 익명의 피해자들이나 그들의 대표, 자손 혹은 생존자들에게 어떤 공동체, 교회, 기관, 조합의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구하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박탈하는 듯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용서의 두 당사자 간 절대적 고립성, 더 나아가 거의 용서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적 권리, 징벌과 형벌, 공공기관, 사법적 전략의 지배에서 용서의 경험을 기이한 경험으로 만듭니다. 20-21쪽
용서! 그런데 그들이 우리에게 용서를 빈 적이 있던가? 단지, 죄인의 낙담과 비탄만이 용서에 의미와 존재 이유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죄지은 자가 우적우적 잘 먹고, 잘 살고, ‘경제적 기적’으로 부유해진다면 용서는 한낱 불길한 농담일 뿐이다. 아니다, 용서는 돼지들과 그 돼지들의 암컷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 만약 피고가 우리에게 동정심을 일으킨다면… 엄밀한 의미의 분별력이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그 동정심이 발생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을 억누를 것이다. 31쪽
실제로 속죄 불가능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는 지점, 이로부터 장켈레비치가 용서는 불가능해지고 용서의 역사도 끝났다고 결론짓는 지점, 여기서 우리는 매우 역설적으로 용서의 가능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지점이 그 기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용서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곳, 불가능해 보이는 곳, 바로 용서의 역사와 용서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마지막에 다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용서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요?
용서라는 것이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 속죄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해야 하고, 따라서 할 수 없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아포리아, 형식적으로 비어 있고 말라 있지만 집요하게 까다로워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아포리아를 ‘한 번 이상’ 검토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35
사법 개념인 ‘시효 없음’이 용서의 영역에 속하지도 않고 용서할 수 없음을 의미하지도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회복 불가능이 용서 불가능을 의미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용서할 수 없음’과 ‘시효 없음’을 구분하기 위해, 그리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 ‘회복 불가능, 소멸 불가능, 만회 불가능, 역전 불가능, 망각 불가능, 변경 불가능, 속죄 불가능’을 구별하기 위해 되도록 세밀하고 엄격하게 주의를 기울여 접근해야 합니다. 이 개념들을 서로 분리하는 결정적인 차이들에도 이 개념들은 어떤 부정성, ‘~아니다’와 어떤 때는 ‘할 수 없음’이나 ‘해서는 안 됨’을 뜻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두 가지를 모두 의미하는 불가능, 즉 ‘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와 ‘해서는 안 되기에 불가능하다’를 의미하는 불가능의 ‘아니다’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어떤 과거를 변경해도 안 되거나 그럴 수도 없습니다. 되돌려도 안 되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과거는 과거고, 사건은 일어났으며, 잘못은 저질러졌고, 이 과거의 기억은 환원 불가능한 것,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원칙적으로 과거와 관련 없는 기증과 다른 점 중 하나입니다. 39쪽
실제로 특별 사면권보다 더 부당한 것도 없습니다. 칸트는 여기서 매우 중대한 경고를 덧붙입니다. 즉 주권자의 특별 사면권에 내적 한계를 설정합니다. 주권자는 자신을 상대로 저지르지 않은 범죄의 사면에 동의할 권리가 없고, ‘어떤 경우에도 이런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되며’, 국민이 서로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 ―따라서 주권자에게는 제삼자인 국민 사이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특별 사면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처벌 면제는 피해 당사자에게 가장 부당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44쪽
용서 문제로 칸트의 사유를 확장하면, 이 중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가르침은 일반적으로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용서의 문제는 제삼자에 ‘의해’, 제삼자를 ‘위해’가 아니라,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 두 당사자 간에 혹은 둘의 대면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둘만이 대면하는 일, 이런 단독 대면이 가능할까요?
(...) 어떤 피해자가 근본적으로 용서의 장에 부재하는 경우, 예를 들어 그가 죽었다면, 우리는 이 피해자의 이름으로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피해자들이 죽은 범죄를 두고 살아 있는 자들, 생존자들에게 용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가해자들도 죽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공적인 분야에서 늘어나는 모든 광경, 공식적 참회나 사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에 대한 하나의 접근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겁니다. 45-46쪽
출판사 서평
‘용서’라는 아포리아
데리다는 ‘용서(pardon)'라는 단어의 음절(par-don)에 포함된 의미를 성찰하면서 용서 행위에 포함된 논리적 난점들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용서를 빌지 않는 자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부터 ’피해자 각자가 아니라 집단을 상대로 용서를 구할 수 있느냐, 그럴 권리가 있느냐, 그것이 과연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느냐‘는 문제,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피해자를 대신해서 제삼자나 국가가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느냐’는 문제, 유대인 학살처럼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을 때에도 용서가 가능하냐‘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윤리적으로 대답하기 까다로운 주제를 두고 심각한 성찰을 전개한다.
이는 종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정부가 나서서 피해 당사자의 의지를 거스르며 가해자 일본과 벌인 협상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데리다는 바로잡아 회복할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악행을 저지른 자와 그 악행의 피해자가 제삼자의 개입 없이 ‘일대일’로 대면한다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빌거나 용서할 수 있고,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요청을 들어주거나 거절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식의 대리 용서는 용서의 의미와 진정성을 훼손한다고 말한다.
기본정보
ISBN | 9791186921678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03월 01일 | ||
쪽수 | 104쪽 | ||
크기 |
130 * 191
* 16
mm
/ 138 g
|
||
총권수 | 1권 | ||
원서명/저자명 | Pardonner. L'Impardonnable Et L'Imprescriptible/Derrida, Jacques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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