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락사스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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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목차
- 아브락사스의 정원
작가의 말
책 속으로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마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나는 여자가 이렇듯 특별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그동안 여자 친구를 여러 명 사귀었지만 이렇듯 설레지는 않았었다. 나는 마리에게서 빛이 나는 걸 느꼈고, 한 번씩 가슴이 벅차올라 심호흡을 해야 했다. 특히 그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 빨려들 것 같아 시선을 돌려야 했다. 나는 눈매가 야무지다고 표현했지만 장의 말이 더 옳았다. 매력적인 눈이었다. (68쪽)
“그러니까 저 설산이 데미안에 나오는 아브락사스인 거지?”
그러나 마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거하고는 다른 얘기야.”
뭐가 다르다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가 다시 말했다.
“이 마그리트의 설산은 희망을 얘기하지만, 데미안의 아브락사스는 천사와 악마를 공유하면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불완전한 신을 뜻하거든. 그래서 나는 데미안을 다섯 번쯤 읽어본 결과 이런 생각을 했어. 싫든, 좋든 아브락사스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게 인간의 운명이고, 아브락사스의 정원을 거니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84~85쪽)
“그래도 다이애나가 낫다는 건, 그녀가 진심이 있어서야. 그녀는 아무나 안 키워. 자신이 첫눈에 반해서 실제로 사랑에 빠져야 움직여. 그런데 스타제조기라는 새끼들은 다 너희를 소모품 정도로 여기거든. 장난감이지, 가지고 놀다가 귀찮아지면 아예 망가트려서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지. 말을 안 듣는 애들은 그냥 이 판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만들고. 그렇게 사라진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마리도 그게 싫어서 꿈을 접은 거 아냐.” (122~123쪽)
게다가 우려했던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마리와 다이애나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리도 필요했고, 다이애나도 필요했다. 결국, 마리에겐 다이애나를, 다이애나에겐 마리를 거짓으로 둘러댔다. 마리에겐 다이애나가 철저하게 일로만 맺어진 관계처럼, 다이애나에겐 마리가 그저 그런 사이였는데 이젠 그마저 흐지부지 헤어진 것처럼. 두 사람 다에게 못할 짓이었지만 나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 마리는 내 말을 믿어주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달랐다. (137쪽)
나는 점점 더 불면에 시달렸고, 어쩌다 수면제를 먹고 겨우 잠이 들면 휴대폰 벨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와 고통스러웠다. 잠결에서도 다이애나에게 전화가 온 것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래서 화들짝 일어나 휴대폰을 받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화가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확인했으면서도 나는 마구 뛰는 심장 부위를 손바닥으로 누르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런데 그때에도 휴대폰 벨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왔다. 열다섯 번을 울리다 끊기면 잠시 뒤 또 열다섯 번을 울리고, 또 끊기면 또 울리고, 또다시 끊기면 또다시 울리고. 나는 미칠 것 같았다. 단지 환청일 뿐인데도 실제 다이애나가 옆에 있으면 목을 졸라 죽여버릴 것 같았다. 멀쩡한 사람이 순식간에 돌아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75~176쪽)
앞쪽 창가에 세 개의 하얀 알이 담겨 있는 새둥지와, 창문 밖 저 멀리 독수리 같은 새와 결합된 웅장한 설산이 눈앞에 그려졌다. 나는 새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러자 그곳에서 더 이상 마리를 힘들게 하지 마! 하는 비난의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더욱 심한 자책에 사로잡혔다. 어느 순간, 현기를 느끼며 이성이 지배할 수 없는 세계로 빠져들었다. 눈이 시렸다. 그림 속 설산의 찬 기운이 내 눈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는 눈알이 얼어붙을 것 같은 섬뜩한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한순간 감정이 무너지며 발작을 하듯 컥컥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216~217쪽)
출판사 서평
천사와 악마를 공유하며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불완전한 신, 아브락사스
싫든 좋든 아브락사스의 정원을 거니는 게 인간의 운명일까?
고품격 로맨스 소설 시리즈 로망컬렉션의 열 번째 작품
나무옆의자에서 펴내는 로맨스 소설 시리즈 ‘로망컬렉션’ 열 번째 작품으로 중견 소설가 이평재의 『아브락사스의 정원』이 출간되었다. 인간의 욕망, 사랑과 죽음 등의 문제를 신화적 환상과 탐미적 문체로 탐구해온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로, 작가가 데뷔 초인 15년 전에 쓰고 마음에 들지 않아 덮어두었던 초고를 오늘의 완숙한 시선으로 전면 수정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아름다운 만큼 추하고 내주는 만큼 빼앗아가는 비정한 세상의 양면적 풍속도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안간힘 쓰는 한 청년의 초상을 헤세의 『데미안』에 등장하는 알을 깨고 나오려 하는 새와 아브락사스 신에 빗대어 풀어내고 있다. 작가 특유의 신화적 상상력과 환상이 여전히 배면에 어른거리고, 더함도 모자람도 없는 문장은 탄력이 넘친다. 천사와 악마,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휘청거리는 인간의 운명과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삶의 의지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는 불완전한 세상의 비정한 풍속도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안간힘 쓰는 한 청년의 초상
여름이면 하얀 아사면 셔츠에 남색 슬랙스를 즐겨 입는 기연은 톱스타다. 그러나 그에게도 너무 버거워 편린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이 있다. 그는 이제 주술에 걸린 듯 그 편린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한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고 버둥거린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기연에게 지난 2년은 온갖 고통을 겪으며 버텨온 끔찍한 시간이었다. 스스로도 왜 그런 고통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의아할 만큼. 그 모든 일은 장이 운영하는 카페 데미안에서 시작되었다.
모델지망생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부도와 새어머니의 잠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장’이 운영하는 카페 데미안에서 매니저로 일하며 데뷔와 성공을 꿈꿨다. 그러던 중 같이 일하던 카페 직원 마리를 사랑하게 되고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충일한 행복을 느낀다. 마리와의 사랑이 깊어지고 카페 일이 잘 풀릴수록 데뷔와 성공에 대한 그의 갈망은 더 커져간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찾아온다. 카페 데미안에서 유명 인사들의 비밀스러운 모임이 있던 밤, 그는 장의 주선으로 최고의 패션디자이너 다이애나에게 발탁되어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러나 꿈꾸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그의 삶은 그가 원했던 것과 점점 멀어진다. 다이애나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그의 삶을 조종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고 옭아맸다. 당연히 마리와 관계를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마리의 품을 그리워하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지만 그렇다고 다이애나를 떠날 수도 없었다. 이제야 그토록 원하는 무대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는데 다이애나를 거역하면 그 모든 게 허사였다.
다이애나의 눈을 속이며 위태롭게 마리를 만나오던 그는 생애에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다. 비서실 실세로 국장이라 불리는 자의 별장에 불려가 해시시에 취해 흐느적거리다 꼼짝없이 국장의 변태적 성욕의 대상물이 된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불면에 시달리다 고통을 잊지 위해 약을 찾고, 약의 후유증으로 무시무시한 환청과 환각에 사로잡힌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활동을 시작한 후에도 또다시 다이애나를 속이고 마리를 만난다. 이제 다이애나는 신화 속 여신 아르테미스처럼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잔혹한 형벌을 내리려 하고 있다. 그는 카페 데미안에서 다아애나의 연락을 기다리며 생각한다. 왜 하필이면 지금, 그 끔찍했던 장면들이 떠올라 퍼즐처럼 맞춰지는 걸까. 이제는 정말로 마리와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버리고 마리에게 가든지.
아브락사스의 정원을 거니는 게 인간의 운명일지라도
설산의 새처럼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의 삶
소설은 권력과 연예산업의 거래, “가지고 놀다가 귀찮아지면 아예 망가뜨려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스타제조기라 불리는 연예기획자들의 횡포,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기라면 기고, 누우라면 눕고, 빨라면 빨고”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하는 이 세상의 생리를 되풀이해 환기한다. 국장이라는 자에게 포커 게임을 가장해 거액을 상납하는 장이나, 기연을 보고 한눈에 반해 캐스팅한 다이애나 모두 그런 거래관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기연은 다이애나를 통해 자신도 그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을 때 얻으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결국 그 생각은 현실이 된다. 그는 떠오르는 별이 됐지만 그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고,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마리를 잃었다.
기연은 마리와 첫 섹스를 하던 날 그녀가 걸어준 그림 액자가 사라진 것을 보고 마리가 영영 떠나버렸음을 실감하고 눈물을 쏟는다. 그는 액자 속 그림을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앞쪽 창가에 세 개의 하얀 알이 담긴 새 둥지가 있고, 창문 밖 저 멀리 독수리 같은 새와 결합된 웅장한 설산이 있는 그림. 그리고 『데미안』을 다섯 번이나 읽었다는 마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아브락사스는 천사와 악마를 공유하면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불완전한 신의 이름이라는. 그러니 싫든 좋든 아브락사스의 정원을 거니는 게 인간의 운명이라는.
기연은 이제껏 자신이 마리의 그 말을 방패 삼아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고 관대하게 용서하며 죄책감 없이 지내온 게 아닌지 되돌아본다. 그는 비로소 설산의 함의를 이해할 것 같다. 아브락사스의 정원을 거니는 게 인간의 운명일지라도, 설산의 새처럼 희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게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인간의 삶은 너무 슬프지 않냐고. 기연의 이런 자각은 그림에 대해 마리가 한 말과도 정확히 연결된다.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이 그림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곤 해. 내가 이 앞의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알이라고 생각하고, 저 뒤 배경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두렵지 않거든. 이제 곧 알에서 깨어나 독수리가 되어 설산을 향해 힘차게 날아갈 테니까.”
작가는 설산 그림을 통해 운명에 잠식당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와 희망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기연은 그 희망을 품고 세상을 향해 다시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을까?
소설 속에서 마리가 『데미안』을 다섯 번 읽고 자기 해석을 내놓았듯이, 이평재 작가 역시 『데미안』을 다섯 번 읽었을 때 소설가가 되었고, 몇 년 후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후기에서 밝혔다. 15년 전 첫 장편으로 쓴 초고가 이제야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나 독자를 만난다.
기본정보
ISBN | 9791186748916 | ||
---|---|---|---|
발행(출시)일자 | 2017년 03월 10일 | ||
쪽수 | 224쪽 | ||
크기 |
129 * 195
* 20
mm
/ 27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Roman Collec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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