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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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시인이 사유하고 눈길이 머무는 중요한 대상은 ‘일상’이다. 시선을 던지고 발 닫는 곳곳, 생각이 스쳐가는 관심영역 하나하나가 시 창작을 통하여 여러 단계 여과와 숙성 그리고 압축 과정을 거쳐 이 시집에 수록되었다. 그러므로 ‘일상’은 이 시집을 읽으면서 줄곧 상기할 만한 키워드이며 단서가 된다. 「빨래」, 「심야택시」, 「을씨년스럽다」, 「찬란한 하루」 같은 평범한 제목으로부터 「그림자의 관절에 관하여」, 「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라는 창의에 충만한 제목에 이르기까지 김태완 시인이 마주하는 현실의 여러 요소들은 각기 적절한 변형과 수사 과정을 거쳐 구상과 추상의 범위를 넘나들며 내면의 깊이와 넓이를 비춰준다.
김태완 시인은 시 창작에 있어 수사나 기교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 있다. 오래 숙고한 생각이나 감성의 단초를 정리하여 그 또한 상당 기간 갈고 다듬으며 여러 표현으로 대체와 위치전환을 모색하면서 공들여 고쳐나가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요컨대 여러 수사 장치나 문장 수식을 위한 기교와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정공법적인 시작에 몰두한다. 간혹 역설 같은 방법론을 원용하기도 하는데 시 「좋은 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독창적인 짜임새와 역설의 미학으로 삶의 정수를 18행 속에 압축하고 있다. 또 「찌그러진 냄비가 더 뜨겁다」 같은 작품도 역설과 반어법으로 작품 구조의 탄력과 긴장을 점증시키면서 흥미를 더하는 여러 성취의 사례로 꼽을 만하다.
김태완 시집에서 두드러진 미덕의 하나는 행간에서 온전히 배어나오는 관조의 깊은 공력이다. 관조의 조(照)는 글자 그대로 비춘다는 의미로 내공이 깃든 생각과 의식으로 대상을 밝게 비추는 경지인데 이 경우 시인의 의도와 의지, 주관은 배제되거나 최소한의 범위에서 작용할 수 있다.
전영관 시인은 뒤표지 추천사에 김태완의 시에 대해 “문장이 서늘한데 차갑지는 않다”고 정의했다. 이는 김태완 시인의 그간 시 창작 의지와 노력의 성숙 과정을 집약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서 “김태완 시인은 눈물과 후회를 보태어 연민이라는 꽃을 도두보이게 한다. 여기서 슬픔에 대처하는 성숙함이 드러나고 누추함을 다루는 가슴의 온도도 느끼게 된다. 그는 생의 낙차가 생길 때 호들갑떨지 않고 시적 순간으로 채집하는 감각을 지녔다”며 “그의 서정은 식물성에 가까워 정지한 듯 느리지만 오르막들을 듬쑥한 걸음걸이로 말없이 오른다. 몸부림을 춤으로, 울음을 노래로 변용하는 은유를 가졌으니 시인으로서는 일습을 갖춘 셈이다. 생활의 지스러기가 시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곤비(困憊)를 과장하지 않기에 문장의 접착력이 월등하다. 독자 누구라도 동태찌개 냄비 안에서 숟가락이 부딪는 것처럼 친근한 느낌의 그와 인연이 닿을 것이다. 시중의 시편들은 눈물이 많아 짜고 자만이 넘쳐서 느끼하지만 그의 문장은 구뜰한 국밥일 테다. 이마가 훤한 김태완 시인에게 뜨거운 육수를 보태주고 싶다.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도 빙그레 웃을 시인이다”라고 추천사를 끝맺음했다.
작가정보
목차
- 1부 지극한 손
검색어 · 13
뾰족하다는 것 · 14
슬플 때 추는 춤 · 16
텅 빈 돼지우리의 돼지 · 17
어른은 맛이 없다 · 18
그림자의 관절에 대하여 · 20
꿀, 벌 · 22
지극한 손 1 · 23
지극한 손 2 · 24
지극한 손 3 · 25
지극한 손 4 · 26
육필, 육화로 피어 · 27
나무발자국 1 · 28
나무발자국 2 · 29
싱겁다 · 30
몸 밖에서 놀다 · 32
2부 슬픔을 사과처럼 먹었다
달빛을 먹다 · 35
슬픔을 반으로 잘라 사과처럼 먹었다 · 36
슬픔이 익어갈 때 좋은 냄새가 나 · 38
낡은 신발이 남긴 긴 발자국 · 40
빨래 · 41
짝짝이면 어때 · 42
물고기 호흡법 · 44
나비는 춤을 못 춰요 · 46
온다 · 48
날개옷을 입은 난장이 · 50
집 밖에서 집을 보다가 · 52
반사경 · 53
순간포착 · 54
심야택시 · 55
나는 쉽게 읽히는 문장이었다 · 56
이마 · 58
3부 마음 번역
지나가는 사람 · 61
마음 번역 · 62
잎들 · 67
찌그러진 냄비가 더 뜨겁다 · 68
부채 · 70
이름을 주고받았다 · 71
을씨년스럽다 · 72
고양이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 · 73
정리의 정석 · 74
사실은, 아프다 · 76
찬란한 하루 · 81
죽은 씨앗들 · 82
묘수 · 84
분꽃 · 85
뜨거운 포옹 · 86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 88
4부 자연스럽게
먼저 그리움 · 93
자연스럽게 · 94
요리사 n씨의 레시피 · 96
손 없는 날 · 97
눈물이 나오는 순서 · 98
삼원신발상회 · 100
꽃말을 지어주세요 · 101
돋보기 쓰던 날 · 102
바위 몸 · 103
목 · 104
소금꽃 · 105
나지막이 부드럽게 · 106
기억은 식물성에 가깝다 · 108
뜨거운 국밥 · 109
봄비 · 110
좋은 그림 · 111
해설 일상에서 마주하는 관조(觀照)의 깊이와 넓이/ 이규식 · 112
책 속으로
[표제시]
슬플 때 추는 춤
--
어느 개업집 앞 키다리 풍선이 춤을 춘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벽에 붙은 전단지가 너풀거리며
춤을 춘다.
장날 바닥에 널려진 고추며 호박이며 오이가 옹기종기 모여
햇살 가격만큼 몸을 굴리며 춤을 춘다.
병마에 지쳐 의사의 눈빛에 매달리는 간절함이 춤을 춘다.
그렇게 못 추는 춤을 춘다.
칼바람 무쇠바람 눈물바람, 바람 먹은 나무들이
고요히 내뱉는 슬픔이 하늘거리는 승무 같다.
같은 노선에 탑승해 행선지를 나누는 빼곡한 사람들이
덜컹거릴 때마다 칼군무로 들썩일 때
꿈을 잃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음표를 움켜쥐고
묵직한 발자국을 새기며 내일로 끌려간다.
끌려온 행적들이 박자 없는 악보가 되어
오선지 밖으로 튀어오르는 춤을 출 테니
-
아무 눈물이나 틀어줘
-
손끝에는 희망이, 시선은 간절하게
발끝 스텝은 뜨겁게
뚝뚝 눈물 끊어지게
--
[대표시]
좋은 그림
--
좋은 그림 하나 갖고 있지요
아직 그려지지 않은 그림 하나 갖고 있지요
한 획을 그었다 다시 지우고
꽃을 그리다가 바람에 흩어지고
그대를 그리는데 아련히 지워지고
분명 좋은 그림이 내게 있는데
보이지도 찾을 수도 없지요
어느 날에는 선명하게 보이다가
희미한 밑그림이 보이다가
더러는 위작처럼 상처받다가
눈을 감고 마음을 누르면
반가운 그 그림이 내게 오지요
누구나 좋은 그림 하나 갖고 있지요
색을 입히고 섞고 문지르고
지극하고 정성스런 귀한 그림 한 점
마주앉아 바라보면
정숙한 눈물로 여백을 채운
좋은 그림 하나 품고 살지요.
--
자연스럽게
--
피었다 지는 꽃처럼
왔구나 싶을 때 떠나는 계절처럼
익숙한 너무나 익숙한 기쁨들 슬픔들
어색하지 않도록
있는 듯 없는 듯 흘러가는 저녁 강
다 보듬고 모두 내려놓은 성자의 눈빛
바람이 부는 것같이
저녁 노을 붉게 물든 구름같이
거침없이 떨어지는 가을 잎같이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들같이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그리운 것들 간절히 기다리는 일
길고 오래된 그 순한 시간이
때로는 눈물이 되어
우리를 다독이기도 한다는 걸
알지 못하듯 느끼지 못하듯
사람의 눈이 세상에서 가장 슬퍼
보이는 것들 모조리 보아야 하는
사람의 눈, 그 슬픔을 깜박이듯 자연스럽게
그렇게 순하게, 아프게
부디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한 세상 자연스럽게
기본정보
ISBN | 9791165121266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12월 15일 | ||
쪽수 | 136쪽 | ||
크기 |
129 * 211
* 13
mm
/ 209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현대시세계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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