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보는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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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그 후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는 등 여러 신인 추천 관문을 통과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나온 문형렬 시인이자 소설가가 1990년 1월 도서출판 청하에서 펴냈던 첫 시집 『꿈에 보는 폭설』을 출간 30년 만에 재출간했다.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들고 나오는 경우라든지 혹은 그 역의 경우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지만, 그 두 작업을 같이 시작해서 꾸준히 이어가는 경우는 별로 흔하지 않다. 문형렬은 그 별로 흔하지 않은 경우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한 작가가 소설창작과 시창착을 병행한다고 할 때 우리가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그 두 작업의 상호 대립성이다. 풀어 말하면 소설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시로 쓰고 시로 표현할 수 없는 속내용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문형렬의 경우는 좀 특이하다. 그의 소설집 해설에서 성민엽이 “문형렬의 소설은 그것이 그 특유의 짙은 서정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 지적될 수 있다”라고 썼듯이, 그의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자아는 서사적 자아라기보다는 서정적 자아이다. 조금 과감하게 표현한다면 그의 소설쓰기는 시쓰기와 다른 작업이라기보다는 그 작업의 연장이다. 어느 한 곳을 꼬집어내기 어렵게 그의 시집 전체는 불안·비애의 내음을 짙게 풍긴다. 우리는 단지 그 비애가 삶에 대한 실존적 비애로부터 젊음의 방황으로 인한 고뇌, 시인이 겪는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고뇌로까지 폭넓은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얼핏 카뮈의 시시포스신화 혹은 부조리의 미학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문형렬의 시적 분위기를 이루고 있는 고통·허무의 노래들, 사랑·꿈의 노래들, 또한 그것들 간의 긴장들이 압축되어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고통·허무를 노래하되 그에 침잠하지 않으며, 사랑·꿈을 노래하되 그것의 찰나성·무기력함으로부터도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만큼 복합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애의 내용이나 무게 자체 아니라, 시인이 그 비애를 어떻게 살고 어떻게 견뎌내느냐이다. 문형렬의 시집에서라면 그 방향은 두 갈래이다. 그 중 하나는 삶의 비애 한가운데 속 깊은 그리움, 희망을 감추고, 혹은 그것을 드높이 내세우고 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희망을 간직했다는 은밀한 자부심으로 지탱되었던 자신을 허물고 그야말로 비애 자체를 사는 길이다.
문형렬의 시를 읽으면서, 서정적 자아라는 것은 서사적 자아로의 이동이 없이는 언제나 정태적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부단히 변모하는 역동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닫힘과 열림은 서정적이냐 서사적이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정적이든 서사적이든 자아 자체가 닫힌 상태에 칩거해 있느냐 부단한 역동성으로 변모하느냐의 사이에 있다.
작가정보
1955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영남대 사회학과 및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당선,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우리세대의문학』에 「실명기」를 발표하였고, 그 후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는 등 여러 신인 추천 관문을 통과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는 서정적이고 사유적인 독특한 문체로 꾸준히 작품활동을 펼쳐왔다. 그동안 소설창작집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슬픔의 마술사』, 장편소설 『바다로 가는 자전거』, 『아득한 사랑』(전3권), 『눈먼 사랑』, 『연적』, 『굿바이 아마레』, 『어느 이등병의 편지』 등과 시집 『꿈에 보는 폭설』, 『해가 지면 울고 싶다』 등을 상재했다. 2012년 현진건문학상을 받았다.
목차
- 自序 4
시인의 말 5
1부 꽃 폭풍 쏟아지는 벌판으로 오라
서시(序詩) · 13
이 세상은 가장 쓸쓸한 영혼 · 14
가는 봄날에 · 15
숨바꼭질 · 16
긴긴 추악의 시(詩) · 17
수반 · 18
빈 수반 · 20
그리운 4월에 · 22
봄 · 24
언제나 갈 수 있는 곳 · 25
신발 · 26
다시 겨울 · 27
꿈에 보는 폭설(暴雪) · 28
입동(立冬) · 31
눈물사위 · 34
꽃 폭풍 쏟아지는 벌판으로 오라 · 36
봄꿈 · 38
지상의 모든 것 · 39
가고 가는 봄날에 · 40
꽃잎 필 때 · 42
삽질 · 44
2부 그리운 앞날
첫눈 · 47
가을옷 · 48
편지 1 · 49
편지 2 · 50
편지 3 · 52
편지 4 · 53
편지 5 · 54
편지 6 · 55
편지 7 · 57
편지 8 · 58
편지 9 · 59
황야 · 60
편지 11 · 61
영광의 졸업식 · 62
수업 · 64
손톱 위에 저승길 · 65
날아라, 담요 · 66
춘한(春恨) · 68
늦가을, 이제, 강의실에서 · 70
11월이 오면 · 72
가을날 · 75
술잔 속의 집 · 76
감꽃 목걸이 · 77
다시 봄이 오면 · 78
계층론 수업 · 80
그리운 앞날 · 82
편지 14 · 84
3부 나의 노래
나의 노래 · 89
일기 · 90
눈물이 나면은 · 91
한 방울의 모든 것 · 92
사각형 · 93
근심을 보며 · 94
돌아가리, 물방울로 · 95
가을옷, 서른 살 · 96
옛날에는 금잔디 · 97
집 · 98
자진가(自盡歌) · 99
아버지, 나를 유혹에 빠지게 하시고 · 100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신은 · 101
만조(滿潮) · 102
그림 · 104
집을 옮기며 · 105
꽃이 없어도 · 106
낙화(落花) · 107
다시 버리는 시(詩) · 108
봄밤 · 110
불행을 버릴 때 · 111
해설 서정적 자아의 움직임 / 진형준 · 112
책 속으로
[표제시]
꿈에 보는 폭설(暴雪)
--
갑자기 코피가 옷섶을 적시고 우리는 눈 내리는 산을 오른다
쓰러지고 꺾어지고 산을 오르며 이 달겨드는 눈발로도 몸을 파묻지 못하거니
어느 불꽃인들 몸을 말릴 수 있는가?
둘러보아도 산마루마다 번쩍이는 눈보라는
살아 있는 것들의 핏줄을 한 가닥씩 비우고
하룻밤의 평화를 위하여
자작나무 껍질 한 짐과 참나무 등걸을 지고 돌아와
젖은 나무에 불을 지피는 우리는
한 마리씩의 쓸쓸한 딱정벌레,
불꽃은 젖어서 손바닥 껍질을 한 겹씩 벗기고
어딘가 이 겨울밤을 타오르는 넋들이 그리워
젖어서 우리는 불꽃 속으로 떠난다.
-
눈이 내린다, 불꽃 속으로 창자를 긁어내는 오늘 밤의 눈보라는
꿈꾸는 속눈썹에 방울방울 쉼 없이 솟아오른다
젖어라 나무들이여, 딱정벌레 몸뚱이여
천지사방(天地四方) 우리는 외로워서 온몸에 불꽃을 달고
그 불꽃 갈피 없이 눈보라 속으로 흩날리어,
어딘가, 그리운 넋들의 사랑은
젖은 어깨 가득히 적막(寂寞)의 불꽃은 갈기갈기 쓰러지고
아아 우리는 눈사람이 되어 숨죽이며
스물다섯 해 자란 등뼈를 깎는다
눈길을 간다, 천둥을 치면서
얼마나 많은 가뭄이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가
서로의 가슴에 벼락을 때리면서
눈 내리는 산에 불을 지른다
지치도록 눈보라는 온 산을 헤매고
한 삽의 그리움도 쳐내지 못한 채 우리는 퍼질러 앉아
다시 터져 흐르는 코피를 훔치면
목놓아 아른거리는 꽃잎의 불꽃,
-
보이나니, 눈보라 속에
저 퍼붓는 그리움 속에 서럽고 싱싱하게
산등성이마다 살아오르는 넋들의 불꽃이 보이나니,
더욱 기승을 부리는 눈보라의 살갗이여
말없어라, 말없어라
우리의 살갗은 아프지 않구나
우리의 두 눈, 우리의 두 귀, 우리의 어깨뼈,
말없는 스물다섯 살, 푸르디푸른 등뼈 조각조각이
이 밤 저리도 흐느끼는 눈발로 퍼붓나니,
산등성이마다 불을 켜는 넋들아
우리는 하나씩 도깨비불이 되어,
눈물 흘리는 도깨비가 되어,
꿈결에 지는 폭설(暴雪)의 화살, 목 메이는 불꽃으로 온 산을 헤매다가
이제는 통곡의 산등성이에 이르러
꽃잎같이 타올라 넋이 되는구나
--
[대표시]
가는 봄날에
--
외로운 사람은 귀가 밝아져 가네
푸른 날 언덕에 가만히 엎드리면
세상은 크고 어둠은 깊어라
오늘도 당신은 아니 오시고
천지에는 휘날리는 그리움
아,
봄날은 하늘처럼 높아서 가슴마다 무너지네
나는 물을 따라 한없이 걸어가네
당신은 오늘도 아니 오시고
외로운 사람은 눈이 멀어져 가네
-
외로운 사람은 귀가 밝아져 가네
푸른 날 언덕에 말없이 엎드리면
어둠은 크고 세상은 깊어라
오늘도 당신은 아니 오시고
천지에는 울부짖는 그리움
아,
세월은 별처럼 떠올라 가슴마다 부서지네
나는 물을 따라 한없이 걸어가네
당신은 오늘도 아니 오시고
외로운 사람은 눈이 멀어져 가네
--
그리운 4월에
--
너는 무덤 하나 남기지 않는데
이 신명나는 삶을 나는 감출 길 없어
가루만 남은 네 몸을 봄바다에 던진다
팔힘이 돋을수록 햇빛은 화안하고
별똥마저 파랗게 쏟아지누나
보아라 헤어지기에는 너무 어려운 날씨지만
사는 데 지나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헛되이 목청만 봄바다로 날아서 눈앞에 터져
흩날리는 것들이 죄다 꽃잎으로 흐드러짐은
아직 눈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들 나이 탓일까?
쪽빛 고운 봄바다에 웃음기 많은 네 마음이
어른거린다 어른거린다
잘가라 잘가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스물하나 봄안개
서럽고 풋풋한 나이야
하늘나라에서도 싱싱하지 않으랴……
이 땅 어디에서도 네 꿈은 버릴 수 없어
주인 없는 봄바다로 너를
파묻듯 내다버리는 손끝은 얼음같이 벅차올라
부지런히 살겠다, 부지런히 살겠다
돌아서 지껄이는 이 끝없이 뻔뻔스런 말들이
네가 가는 하늘나라의 말로 할 수 있을까
네 몸 하나 마련할 땅은 없으나,
돌아서는 가슴으로 힘껏 매달리는
갯바위, 푸른 하늘, 부신 햇빛 속에
네 목소리는 쩡쩡 울리고 있으니
작별마저 부질없으리
이제는 죽음도 삶의 한 조각인가 보다
--
기본정보
ISBN | 9791165121099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1월 30일 | ||
쪽수 | 128쪽 | ||
크기 |
129 * 211
* 13
mm
/ 205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현대시세계 시인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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