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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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뒤안에서 분투하던 여성 삼대의 수난과 극복의 역사
1996년 제정된 한겨레문학상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심윤경,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박민규,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의 최진영, 《누운 배》의 이혁진, 《다른 사람》의 강화길, 《체공녀 강주룡》의 박서련 등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린 많은 작가들을 배출해왔다. 박정애의 《물의 말》은 2001년 본심에 오른 4편 가운데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폭넓은 시야와 이념적 지양을 서두르지 않는 박정애만의 여성주의적 방향에 이끌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예심은 소설가 은희경, 김남일, 문학평론가 권성우, 백지연, 본심은 소설가 현기영, 문학평론가 황광수, 황현산이 맡았다.
- 제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작가정보
1970년 경북 청도군 매전면 두곡리 중똘마을에서 태어났다. 1998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했고, 장편소설 《물의 말》로 2001년 제6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에덴의 서쪽》, 《춤에 부치는 노래》, 《죽죽선녀를 만나다》, 《강빈》, 《덴동어미전》 등이 있고, 청소년 소설로 《환절기》, 《첫날밤 이야기》, 《용의 고기를 먹은 소녀》, 《벽란도의 새끼 호랑이》, 동화책으로 《친구가 필요해》, 《사람 빌려주는 도서관》 등이 있다. 물과 숲이 어우러진 소도시 춘천에 살며 강원대학교 영상문화학과에서 서사창작을 가르친다.
작가의 말
《물의 말》은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썼다. 어린애 둘을 키우며 박사과정까지 밟던 중이어서 엄청 피곤하고 힘들 때였는데, 어떻게든 시간을 여퉈내어 쓰고 또 썼다. 남이 억지로 시켰다면 못 썼으리라. 내가 쓰고 싶어서, 안 쓰고는 못 배기겠어서 썼더랬다.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아침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는 틈틈이 물기도 마르지 않은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던 기억.
(…) 나는 20년 만에 내 소설 《물의 말》을 남의 소설처럼 읽으며 더러 울었고 더러 심장을 떨었고 더러 킥킥거렸다. 어떤 인물의 목소리는 생생한 음성지원까지 되었다. 내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목소리들이 도란도란 수런수런 깨어났다. 나를 이 얕아빠진 일상에서 건져내어 더 풍요롭고 더 깊이 살게 하는 목소리들이…….
《물의 말》은 시쳇말로 내 취향을 저격했다. 독자 여러분께도 일독을 권한다.
목차
- 1부
여신의 알몸 · 17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 · 38
우리 시대의 현모양처 · 48
명징한 정체성 · 59
혼몽(昏?) · 68
노각 · 74
사금파리 · 86
명백한 현실도피 · 106
유대의 의미 · 114
2부
바람의 신 · 128
존재의 크레바스 · 133
매미 허물 · 141
생은, 참으로 끔찍한 반복 · 150
님아 님아 줄 조심해라 · 159
달밭골의 세 여자 · 171
물귀신 · 177
무당개구리 · 185
두려움의 정체 · 193
국수방망이에 밀린 반죽 · 198
선택 · 213
유수(流水…) · 222
팔자타령 · 231
좁쌀만치만 보고 갈게 · 246
개떡 같은 정 · 255
고추 · 263
매미 허물 같은 · 271
성공의 뒤안 · 278
오 자유여 · 292
3부
회개와 용서 · 317
죄 · 322
삶과 죽음의 충동 · 332
별들의 대화 · 338
귀환 · 350
물의 말 · 362
작가의 말 · 367
개정판 작가의 말 · 370
추천사
-
이 소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늘 타자로서 배제되어온 여성의 가치를 생경한 공격적 언어가 아닌 치밀한 예술적 전략으로 옹호하고 있다. 주인공 님이를 중심에 두고 삼대에 걸친 한 집안의 여러 여자들이 펼치는 이 드라마는 ‘조선 딸들의 애사’라고 불림직도 한데, 일제, 전쟁, 산업화, 민주화운동 등 역사의 세찬 격랑 속에서 그들이 어떻게 죽고,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기구한 운명을 실감나게 형상화해내고 있다. 님이를 중심으로 촘촘히 혈연의 그물을 엮어내는 그 구성력은 예사로운 능력이 아니다.
이 소설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자재로운 언어구사 능력에 있을 것이다. 전통사회에는 토속어를, 도시사회에는 지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어느 경우에도 성공적이어서 농촌(과거)과 도시(현재)의 대비가 선명하다. 전통사회를 복원하는 토속어의 능란한 구사를 특히 주목할 만한데, 글 속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이만큼 풍요롭고 구수한 맛을 내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
우리 소설에서 여성 두 세대를 갈라놓은 시공간이 옹글게 포착된 예는 매우 드물다. 차이와 갈등이 도드라지면서 오히려 망각의 늪에 묻혀버릴 때가 많았다. 두 시간대를 무리하게 박음질하지 않고, 섬세한 언어적 파동과 웅숭깊은 지혜의 눈으로 맥맥한 흐름을 보여준다. 이 물줄기가 제도의 경계를 벗어나 관계의 미궁으로 흘러들 무렵, ‘님이’는 사랑하는 딸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녀의 눈에 새로운 적이 잡힌 듯하다.
-
여성들의 삶을 한편에서는 역사의 시간 축에서 파악하고 한편에서는 동시대의 생활 현장에서 살피는 이 소설의 얼개는 매우 지적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더 감동적인 것은 다른 데 있다. 필경 궁핍한 생활에서만 가능할 자연과의 깊고 뼈저린 교감이 그것이다. 지적인 것과 시적인 것이 이 자연을 통해 결합함으로써,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여성주의적 내용은 그 진실성과 구체성을 얻는다.
책 속으로
희생이란, 보이지 않는 족쇄를 그 희생의 수혜자에게 채우는 것이다. 그 희생이 고귀한 것이었기에 그 족쇄는 천국의 빛으로 반짝인다. 그러나 족쇄는 어쨌거나 족쇄인 것이다. 보육원 원장의 희생은 오늘의 윤아를 만들었지만 윤아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거해버렸다. 족쇄를 한 윤아는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의학을 공부하여 먼 야만의 땅에서 선교사가 되라고, 원장은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간절하게 말했었다.
_41쪽
시어미에게 종교가 있음을 안 순간부터 미현은 10여 년 애써온 전도를 포기했었다. 시어미의 종교는 가족이었다. 그 신앙의 교리는 사랑과 정성과 희생이었다.
_111쪽
님이와 그녀의 두 딸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형성되어왔고 앞으로도 형성될 유대는, 죽은 권개동과 그의 네 아들들 사이에서의 유대보다 질적으로 월등히 견고했다. 이 두 가지의 유대가 가부장제 사회의 의미 체계에서 가지는 중요성의 정도는 물론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후자가 대를 잇는 유대 관계인 반면 전자는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를 잇는다는 것의 의미는, 혹은 대를 이음으로써 한 사람이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자신의 윗대와 아랫대를 분명히 함으로써 너무나 짧고 허무하고 불확실한 이승의 삶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는 의미일까. 그래서 씨받이도 하고 씨내리도 하고, 뼈다귀를 따지고 관향(貫鄕)을 따지고 적서(嫡庶)를 따지는 것일까.
_117쪽
꿈속에서 나는 내 얼굴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있었어. 내 두개골 앞면에 밀착되어 있던 그 얼굴들은 체리 술같이 고운 빛깔의 핏방울을 흩뿌리며 떨어졌단다. 나는 창턱에다 체리 술에 담갔다 꺼내놓은 것 같은, 그 젖은 얼굴들을 늘어놓고는 멀찍이 서서 바라보았지. 그 얼굴에서 나는 할머니들을 느끼고 어머니들을 느끼고 ‘나’들을 느꼈어. 내가 꿈속에서 본 그 얼굴들을, 너희 딸들과 아들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면.
_125쪽
어느 때인가는 잠자는 이복동생의 기저귀를 벗겨 그 자그마한 고추에 자신의 음부를 갖다 대어보기도 했다. 필남은 자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그것을 원하는지 알았다. 그러나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것을 가질 수는 없음도 알았다. 그래서 아홉 살 필남은 엎드려 오래도록 울었다. 울면서 똥개에게 고추를 물어뜯긴 병식도 생각하고, 한 번도 자신을 안아주지 않은 약방의 잘생긴 아버지도 생각하였다. 그 사념의 귀결은 언제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엎드려 울고 있는 필남 자신의 모습이었다.
_268~269쪽
그때부터도 술 잘 마시고 놀기 좋아하던 남편을 통하여 자신이 이브의 후예이자 타락의 원흉임을 알고 어리둥절했었다. 남편에게 데이트강간을 당했을 때는 너무 예쁘고 매력적인 예지의 육체가 그를 죄짓게 했다는 남편의 말에 어리둥절했었다. 결혼 생활은 그러한 뒤바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가령, 남편은 임신한 그녀가 약국 일까지 보느라 피곤하여 섹스 따위는 안중에 없을 때에도 자신의 욕구를 절제한 적이 없었다. 그녀를 안으면서 그가 늘 하는 말은, “네가 젤 좋아하는 것 하자”였다. 나중에는 예지 스스로도 자신이 섹스의 노예이며 섹스로써 남편에게 얽매여 있다고 착각하게 될 정도로 그 전도(顚倒)는 집요했다. 섹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상 자체의 의미가 그렇게 남편의 언명에 의해 너무나 쉽사리 뒤바뀌어지곤 했다. 술 상무를 하다 자기 건강이 나빠진 것은 아내가 살뜰하게 챙겨주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바람을 피운 것은 아내가 바깥일에 너무 바쁜 탓이었다.
_320쪽
그래, 언니. 나도 이제는 어떤 다른 존재의 빛살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발하는 빛이 어느 존재에게 가닿아서는 그 존재에게서 여물 만큼 여문 나의 빛이 저절로 또 다른 존재의 고독을 쓰다듬는 꿈을 가져도 좋을지도 몰라. 그래, 내가 받았던 빛을 돌려주어야 할 땐가 봐, 이제. 삶이 어차피 두려운 거라면 그 두려움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땐가 봐, 이제. 웃으면서.
_349쪽
출판사 서평
서로에게 빛이 되어준 여성들의 애사(愛史)이자
혈연 중심의 가부장제를 초월하는 맥맥한 연대의 계보
《물의 말》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늘 타자로서 배제되어온 여성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온다. 정신대에 팔려 갈 뻔하거나 자신을 강간한 사내와 혼인을 강제당하던 과거의 여성들과, 슈퍼우먼으로서 살아가며 스스로를 혹사하거나 반대로 연애 감정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현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식민지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한국 여성의 삶을 빼닮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인물의 연결고리가 되는 ‘님이’는 세대와 혈연을 넘어 여성적 생명력이라는 물줄기를 사방으로 뻗는다. 님이의 사랑은 딸들에게로 계승되어 맥맥한 연대의 계보를 만들어낸다.
소설은 가부장제 사회가 주는 안락에 잠겨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남성들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인다. 이러한 적극적인 포용을 통해 작가는 다층적으로 사랑의 역사를 형언한다. 이는 90년대 여성주의 소설이 보여주었던 급진적인 여성성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물의 말》에서 또한 주목할 점은 자재로운 언어 구사이다. 경상북도 청도와 서울을 오가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옛 경상도 사투리의 자연 친화적인 구수함과 도시 공간의 지적인 현장성을 모두 만난다. 동시대의 생활 언어를 능란하고 세밀하게 사용함으로써 작가는 독자들에게 섬세한 언어적 파동을 전달한다.
한겨레문학상 수상 당시, 작가는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진보를 꾀하는 것은 자신의 여성주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어머니 세대의 저력을 계승하고 그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확장해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문학적 목표임을 밝힌 것이다. 여성의 실존을 위한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한 《물의 말》의 여성주의는 출간 수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쉼 없이 독자들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저의 페미니즘은 어머니 세대와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저력을 계승하는 데서 옵니다. 어머니 세대의 희생과 헌신이 가족주의의 틀 안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향해 열릴 때 페미니즘의 소중한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_ 박정애, 한겨레문학상 수상소감 중에서
기본정보
ISBN | 9791160404227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12월 04일 |
쪽수 | 372쪽 |
크기 |
150 * 210
* 26
mm
/ 498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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