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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작 뉴턴 세트

리처드 웨스트폴 저자(글) · 김한영 , 김희봉 번역 · 이무현 감수
알마 · 2016년 06월 01일
10.0 (1개의 리뷰)
집중돼요 (100%의 구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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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뉴턴의 진면목을 엿보다!
『아이작 뉴턴 세트』는 아이작 뉴턴의 전기로, 당대의 가장 뛰어난 뉴턴 학자로 평가받는 리처드 웨스트폴(1924~1996)의 대표작이다. 1983년에 과학사 부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어 과학사학회의 ‘파이저 상’을 받았었다. 근 20년의 세월 동안 난해한 뉴턴의 수리물리학을 소화하는 한편, 17ㆍ18세기 영어 문헌을 총망라해 뉴턴의 일대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뉴턴의 다양한 면모에 대해 ‘확실하고 견고한 사실’을 알려주며, 온갖 소문과 미신, 추측을 넘어서 뉴턴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17세기라는 사상의 격변기 아래 뉴턴의 삶과 사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원서의 가치를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과학 전문 번역가인 김한영이 주요 번역을 맡았고, 원서 4장 혹은 10장 같은 난해한 수학적ㆍ물리학적 부분을 소화하기 위해 물리학 전공 출신의 번역가인 김희봉이 함께 번역에 힘을 보탰다. 아울러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비롯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 《새로운 두 과학》 등의 한국어판을 번역한 수학자 이무현이 감수함으로써 정확성을 높였다.
수상내역
- 리오 거쇼이 상 수상
- 파이저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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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명 저자 출시일 쪽수 크기/중량 (mm/g)
아이작 뉴턴. 1 리처드 웨스트폴 2016. 06.01 301 150 * 233 * 0 mm / 632g
아이작 뉴턴. 2 리처드 웨스트폴 2016. 06.01 369 150 * 233 * 0 mm / 750g
아이작 뉴턴. 3 리처드 웨스트폴 2016. 06.01 381 150 * 233 * 0 mm / 770g
아이작 뉴턴. 4 리처드 웨스트폴 2016. 06.01 445 150 * 233 * 0 mm / 872g

작가정보

저자(글) 리처드 웨스트폴

저자 리처드 S. 웨스트폴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뉴턴 학자로서 인디애나대학교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사 교수였다. 1924년에 콜로라도 주 포트콜린스에서 태어나 1942년에 예일대학교에 들어갔다. 동 대학원에서 〈17세기 영국의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 in Seventeenth Century England〉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을 시작으로 그는 과학사 및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평생 연구했다.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와 영국 왕립문학협회의 펠로우로 선정되었고, 과학사학회가 수여하는 사턴 메달Sarton Medal을 받았다. 대표작 《아이작 뉴턴》(원제: Never at Rest)은 1983년에 과학사 부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어 과학사학회의 파이저 상을 받았고, 1982년에는 17세기와 18세기와 관련해 영어로 출간된 가장 우수한 책으로 선정되어 미국역사학회로부터 리오 거쇼이 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2년에는 《뉴턴 물리학에서의 힘》으로 과학사학회의 파이저 상을 수상했고, 1987년에는 논문 〈과학의 후원: 갈릴레오와 망원경Scientific and Patronage: Galileo and the Telescope〉으로 동 학회로부터 데릭 프라이스 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과학사 저서로 《근대 과학의 구조The Construction of Modern Science》(1971), 《뉴턴 물리학에서의 힘Force in Newton’s Physics》(1971), 《갈릴레오 재판에 대한 에세이Essays on the Trial of Galileo》(1989) 들이 있다.

역자 김한영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예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오랫동안 전업 번역가로 활동했으며 옮긴 책으로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본성과 양육》《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비롯해,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무엇이 예술인가》《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등이 있다. 제45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역자 김희봉은 연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과학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위대한 물리학자들》《사회적 원자》《천재성의 비밀》《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이 있다.

감수자 이무현은 서울대학교 자연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퍼듀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번역서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비롯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새로운 두 과학》 등이 있다. 《위대한 과학자들의 위대한 실수》를 집필하기도 했다.

목차

  • 1권
    추천 해제_뉴턴의 전기를 왜 읽어야 하는가
    초판 서문_“그에게는 한계가 없다”
    2판 서문_뉴턴이라는 경이로움, 그 끝없는 여정

    연대에 관하여
    각주에 사용된 약어

    1장 신세계를 발견하다
    2장 침착하고, 말이 없고, 사색적인 소년
    3장 고독한 학생
    4장 운동으로 문제를 풀다
    5장 경이로운 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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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권
    연대에 관하여
    각주에 사용된 약어

    6장 루카스 석좌교수
    7장 출판과 위기
    8장 반항
    9장 침묵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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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권
    연대에 관하여
    각주에 사용된 약어

    10장 프린키피아
    11장 혁명
    12장 조폐국

    찾아보기

    4권
    연대에 관하여
    각주에 사용된 약어

    13장 왕립학회장
    14장 우선권 논쟁
    15장 쇠락의 세월

    참고문헌에 대하여
    감사의 말
    역자 후기
    찾아보기

추천사

  • 1999년 말 이른바 새천년을 맞이하면서, 한 언론기관에서 학자들을 대상으로 지난 천 년(1000년~1999년) 사이에 인류 문명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설문 조사를 한 일이 있다. 그 결과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바로 아이작 뉴턴이었다. 이 결과에 대해 다소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현대 문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것은 바로 과학이며, 그 과학의 기틀을 확고하게 설립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 사람이 뉴턴이다. 우리는 지금 뉴턴을 과학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뉴턴 당시에는 ‘과학자’라는 말은 물론이고 ‘과학’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뉴턴이 있고 나서 과학이란 분야가 생기고 과학자란 말도 생겨났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연 천재가 있고 천재적 작업이 있다면 뉴턴과 그의 작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개인을 천재로 규정하고 그의 작업을 천재만이 할 수 있는 과제라 생각하는 순간, 그것들은 우리 손에 닿지 않는 딴 세상의 것처럼 멀어지게 된다. 그와 같은 생각은 전혀 사실이 아닐 뿐 아니라, 그의 창조적 작업에서 우리 스스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만히 살펴보면 천재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천재가 걸어간 길’이 있을 뿐이며, 이 길을 대부분 사람들이 찾아나가지 못할 뿐이다. 뉴턴의 전기를 한 번 진지하게 공부해봐야 할 이유가 바로 이 ‘길’을 살피는 데 있다. 제대로 된 뉴턴의 전기를 통해 천재로서의 ‘뉴턴의 길’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파악해낸다면, 이는 우리를 천재로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주변의 천재들을 길러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영웅 위인들에 관한 전설들이 그러하듯이 뉴턴에 관한 이야기들 또한 다분히 과장되거나 신비화되는 경향이 있다. 웨스트폴의 이 책이 지적하듯이 뉴턴의 조카사위이자 최초의 뉴턴 전기작가라고 할 만한 존 콘듀잇은 “뉴턴의 모든 통찰에 거의 예외 없이 과장된 수사로 거품을 씌웠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뉴턴을 우러러보게 하는 데는 효과가 있겠지만, 뉴턴을 배워가며 그 길을 따르려는 것에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 이 책 《아이작 뉴턴》은 방대한 자료들을 찾아내고 이를 세심히 검토해 사실 자체를 최대한 가감 없이 드러낸 뉴턴 전기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뛰어난 과학사 학자인 저자가 20여 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역작이기에, 진정 뉴턴의 길을 살피려 나서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좋은 책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너무도 방대하고 또 전문성을 갖춘 대작이어서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지 않고는 통독해내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뉴턴이 작업해나간 수학에 대해서 세세한 과정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런 부분들은 일반인들이 따라 읽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독자들은 자신이 주로 관심을 가지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선별적으로 읽어나가도 좋을 것이다.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특히 그의 지적 능력을 형성한 성장기 그리고 대학시절의 학습과정 등이 눈길을 끌 것이며, 이 부분이야말로 뉴턴의 길을 더듬어나가는 데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중략) 물론 이 책을 읽는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사고 안에서 ‘힘’의 개념이 어떻게 조성되고 변해왔는지를 살피는 것 역시 매우 유익하고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독자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뉴턴을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또다른 영감도 듬뿍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위대한 천재의 탄생은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경이이고 교훈이다.

책 속으로

1장 신세계를 발견하다
뉴턴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신세계를 발견했다. 1661년경 자연철학은 과학혁명이라는 이름하에 근본적인 재구성을 충분히 겪은 후였다. 철학자들은 자연의 익숙한 외관 뒤에 숨어 있는 새로운 세계를 실제로 발견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질적인 세계가 아닌 양적인 세계, 유기적인 세계가 아닌 기계론적인 세계, 유한한 세계가 아닌 무한 범위의 세계였다. 많은 이들을 두렵게 하는 이질적인 세계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에 대한 도전이 전율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케임브리지에서 뉴턴은 바로 이러한 세계를 발견했다._1권 34쪽

그럼에도 갈릴레오가 대담하게 예언한 역학의 재건은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 실제로 1661년에는 두 명의 주요 인물만이 관성의 법칙을 포용하고 있었다. 르네 데카르트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였다. 사실 관성 운동의 직선적 성격을 주장하면서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방식으로 관성의 법칙을 말한 사람은 갈릴레오가 아니라 데카르트였다._1권 48쪽

16세기와 17세기의 천문학, 역학, 광학에는 20세기의 눈을 즉시 사로잡는 공통의 맥락이 흐른다. 바로 각 분야의 업적들이 수학적 용어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그후 지금까지 자연과학을 점점 더 강하게 지배해온 패턴, 즉 자연을 수식화하는 방식의 확립과정이 보인다. 아마 1661년에는 그런 맥락이 관찰자의 눈에 그리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_1권 53쪽

연금술이 인간의 약을 올리는 영원한 은밀함을 지녔다면 그 대척점에는 수학이 있었다. 자신을 지식이란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수학의 바로 그 요구는 만인에게 공개된 증명들에 기초해 있었다. 전자가 암시와 상징성을 내세워 구불구불 돌아갔다면, 후자는 엄밀한 논리라는 차가운 빛에 의존해 똑바로 나아갔다. 아마 17세기의 지식 세계가 얼마나 다양했는지에 대해 말할 때, 그렇게 대조적인 두 분야의 연구가 둘 다 명백히 번성하는 상태로 공존했다는 사실보다 더 좋은 예는 없을 듯하다. 후세에 가서야 17세기의 연금술은 죽어가는 식물에서 핀 최후의 꽃이었고, 17세기의 수학은 강인한 다년생 식물에서 핀 최초의 꽃이었음이 밝혀질 터였다. 연금술의 상태가 어떠했든, 1661년에 수학은 누가 봐도 번창하는 사업이었다._ 1권 68쪽

2장 침착하고, 말이 없고, 사색적인 소년
뉴턴이 어머니에 대해 애정 어린 회상을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띤다. 심지어 어머니의 죽음도 주목받지 못하고 넘어갔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뉴턴은 고통에 시달리는 인간이었고, 적어도 중년기에는 항상 신경쇠약의 문턱을 넘나든 극도로 신경질적인 인물이었다. 남을 잘 믿는 그의 성격을 확대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황하고 있었을 아이의 내면적인 고통에 어머니의 재혼과 떠남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확신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으리라_1권 111쪽

평범한 소년들은 그를 보고 당황했을 게 분명하다. 그는 펨브로크 백작에게 그의 첫 번째 실험은 크롬웰이 죽고 거대한 태풍이 영국을 강타하던 날에 한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을 등진 채 한 번, 바람을 안은 채 다시 한 번 점프를 한 뒤 잔잔한 날에 뛴 거리와 비교해서 “태풍의 힘”을 측정한 것이다. 그 태풍은 지금까지 그가 알고 있던 어느 태풍보다 1피트(약 30센티미터?옮긴이) 더 강하다는 말에 아이들이 놀라자, 뉴턴은 비약 거리를 표시한 흔적들을 보여주었다. 이 이야기의 한 판본에 따르면 그는 바람을 교묘히 이용해 멀리뛰기 시합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잘난 녀석의 교활한 술수로 여겨져 의심만 증폭시켰다._1권 125쪽

해시계는 지적 도전이었다. 뉴턴은 가난한 클라크의 집을 해시계로 가득 채웠는데, 자신의 방은 물론이고 다른 방들과 현관 등 해가 드는 곳은 어디에나 해시계를 만들어놓았다. 그는 이 벽 저 벽에 막대기를 박아 한 시간, 반 시간, 심지어 15분을 표시하게 했고, 그 막대기에 끈을 묶고 둥근 물체를 매달아 하루하루 그림자의 길이를 잴 수 있게 했다. 일종의 책력을 꾸준히 기록한 끝에 그는 태양의 주기들을 구분하게 되었고, 주야평분시(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그리고 심지어 그 달의 일수도 알아낼 수 있었다. 결국 하숙집의 가족은 물론이고 동네 이웃들도 “아이작의 해시계”를 보게 되었다. 이처럼 천체의 장엄함과 자연의 일정함이 그의 눈앞에 잊지 못할 모습으로 펼쳐졌다._1권 126쪽

출판사 서평

“뉴턴의 모든 측면을 현대적 관점에서 다룬 기념비적인 저작”_〈네이처〉
영미권 최고의 역사서/과학서에 수여하는 ‘리오 거쇼이 상’과 ‘파이저 상’ 수상

근대 물리학의 시작과 끝,
지난 천 년 동안의 “최고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
우리는 그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온전하게 알고 있는가?


“이 책 《아이작 뉴턴》은 방대한 자료들을 찾아내고 이를 세심히 검토해 사실 자체를 최대한 가감 없이 드러내려 한 뉴턴 전기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_장회익(서울대 자연과학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

최고의 책, 최고의 번역
스티븐 핑커, 리처드 파인만 등 기라성 같은 과학자의 저술을 번역해온 전문 번역가 김한영/김희봉 2인의 협업.
× 감수, 그 이상의 감수
《프린키피아》를 비롯해 유클리드, 갈릴레오 등 고전 과학서를 한국어로 번역한 수학자 이무현의 치밀한 감수.
+ “뉴턴은 과학입니다”
과학계의 존경받는 원로,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어판 추천 서문

┃책 소개
아이작 뉴턴에 관한 모든 것

수천 년 인류 문명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꼽히는 아이작 뉴턴. 오늘날 인류는 뉴턴이 이룩한 근대 과학혁명의 자장 안에서 살아간다. 뉴턴은 17, 18세기를 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학 분야에 결정적 개념과 이론, 통찰 등을 제공해왔다. 그로부터 과학은 철학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분과 학문으로 성립했으며, 그로부터 과학은 수학과 결합해 한 몸이 되었다. 그가 마련해놓은 《프린키피아》의 우주는 현대과학자들이 사유를 펼쳐나가는 근간이자 토대다. 뉴턴이 남긴 지적 유산은 결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며, 어쩌면 인류가 사라진 미래에도 그의 발견만은 영속할 것이다. 뉴턴의 삶과 사상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이 책은 아이작 뉴턴의 전기로서, 뉴턴의 다양한 면모를 방대한 자료에 입각해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 분야 최고 저자의 20년에 걸친 역작으로, 뉴턴 연구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한 명저다. 총 15장의 연대기적인 구성으로, 저자는 각 시기별로 뉴턴의 삶과 학문적 주제들이 어떻게 전개되어나갔는지를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각 시기를 엄격하게 나누어, 자료를 세세하게 제시하며 끈기 있게 서술하는 것이 특징이다. 글의 속도감보다는 정확성에 주안점을 둔, 뉴턴에 대한 ‘정본’이라 할 수 있다.
뉴턴은 만유인력을 수학적으로 규명한 불후의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미분법(유율법)을 라이프니츠보다 앞서 최초로 발명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또한 당대의 주요 학문이었던 연금술과 성서 연구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식견과 통찰을 보여주었다. 단지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영국 명예혁명에 기여한 공로로 의정활동을 했으며, 조폐국장으로 수십 년을 봉직하며 재정/통화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갔다. 저자 웨스트폴은 이런 뉴턴의 다양한 면모에 대해 ‘확실하고 견고한 사실’을 알려주며, 온갖 소문과 미신, 추측을 넘어서 뉴턴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독자들은 17, 18세기라는 사상의 격변기 아래 뉴턴의 삶과 사상이 가지는 의미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한국사회가 가지지 못했던 본격적인 뉴턴의 전기가 비로소 당도했다.

┃과학의 다른 이름, 뉴턴
아이작 뉴턴은 1642년에 태어나 1727년에 사망했다. 적게 잡아도, 약 300년 전의 인물이다. 이제 와서 그의 삶과 성취를 돌아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도 간략하게 축약된 서술이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을 아우르는 본격적인 책이 필요할까? 하지만 단지 대강의 삶의 이력과 보편중력 공식을 일별하는 것만으로 일축해버릴 수 없는 측면이 뉴턴에게 있다. 그의 삶을 묻는 것은 과학(혹은 물리학)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과연 어떤 영향 아래 어떤 과정을 거쳐 나왔을까? 이를 자세히 알면 알수록 과학에 대한 우리의 질문은 깊고 묵직해질 것이다.
이 책은 뉴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삶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면서 생애를 서술한다. 그 과정에서 각 시기마다 그가 이루었던 분야별 성취 및 업적들을 병렬적으로 보여준다. 수학, 광학부터 천체학, 역학, 연금술, 성서 연구, 정치 및 공직활동 등에 이르기까지 뉴턴의 다채로운 삶의 면모가 ‘빠짐없이’ 드러난다. 사실 한국사회에는 《프린키피아》로 대표되는 역학 분야의 업적 말고는 뉴턴의 다른 측면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얼마나 편향된 지식으로 ‘과학의 거인’ 뉴턴을 대해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뉴턴은 사실 광학과 수학에서도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광학의 경우, 빛이 불균질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험을 통해 입증했다. 당시 프리즘으로 빛을 분리해 빛줄기가 다원적이라는 점을 밝히고, 또 상식적인 생각과는 달리 빛이 혼합되면 ‘하얀 색’이 된다는 것을 입증했다. 뉴턴은 광학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유색의 원을 관찰하기 위해 “눈과 뼈 사이로 눈의 뒷면에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뜨개바늘을 밀어넣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광기 어린 열정이 광학에서 탁월한 업적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수학의 경우, 미분법(뉴턴의 용어로 ‘유율법’)을 최초로 발명했다. 현재는 라이프니츠의 기호 체계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사실 뉴턴이 그보다 10년은 앞서서 똑같은 방법을 고안했었다. 뉴턴 개인 삶의 맥락에서 보면,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할 무렵인 20대 초중반의 일이었다. 수학에 입문한 지 불과 몇 년 안 된 시점에서의 성취로서, 그의 천재성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다만 뉴턴은 ‘논쟁을 싫어하는 성격’ 탓에 논문 발표를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라이프니츠의 방법이 보편화되었다. 저자 웨스트폴은 미분법과 관련하여 수십 년에 걸친 우선권 논쟁을 이 책 여러 장에 걸쳐 상세하게 다룬다. 뉴턴이 유율법을 발견하게 된 과정을 그래프 및 수식과 함께 상세하게 제시하는 한편, 치열하고 때로는 험악하기마저 했던 논쟁의 양상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뉴턴의 가장 빛나는 업적인 역학 분야, 즉 《프린키피아》 관련해서는 별도의 장을 할애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 세밀한 과정을 요령 있게 전달한 것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 시대별로 성취의 한계를 명확히 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뉴턴은 보편중력 공식을 결코 단번에 이끌어낸 것이 아니다. 이른바 ‘경이로운 해’라고 불리는 1666년에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아이디어를 막연하게 떠올린 뒤, 20년이 넘는 연구 끝에 《프린키피아》에서 보편중력을 수식화해냈다. 그 과정에서 생각의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끈기 있게 매달린 끝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것이다.

이제껏 잘 몰랐던 뉴턴이 온다
사실 뉴턴은 청년기 한때를 제외하고는 수학과 광학 등을 ‘마지못해’ 연구한 것처럼 보이기마저 한다. 그는 연금술과 성서 연구에서 더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뉴턴은 연금술이 그 불합리성으로 인해 오히려 더 심오하다고 느끼고서, 센디보기우스, 데스파네, 필라레테스 등 정평 난 연금술사를 열심히 연구했다. 심지어 은밀한 연금술사 클럽에 가입해 관련 자료들을 받기도 했다. 또한 수은 등 위험천만한 물질들에 상시 노출되며 실험을 이어나갔다. 그가 이처럼 연금술에 몰두한 까닭은 그것이 기계론 철학의 불완전한 전망을 보충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입자만이 물리적 사실을 구성한다’는 기계론 철학이 자연의 실체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는 그의 역학에도 영향을 미쳐 ‘힘’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지속적인 역할을 한다.
뉴턴은 성서 연구에도 관심을 쏟았다. 특히 그는 당시로서는 이단 신앙인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며, 그리스도가 신이 아닌 인간(혹은 중보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4세기에 아타나시우스의 영향으로 삼위일체설이라는 ‘사악한’ 견해가 정설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견해였기에 뉴턴은 이를 철저히 숨긴다. 저자 웨스트폴은 이것이 논쟁을 회피하는 뉴턴의 성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본다.
이처럼 여러 분야에 걸쳐 학적인 탐구를 왕성하게 하던 그였지만, 거기에도 끝은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뉴턴의 창조적 활동은 1693년에 끝났다. 1693년은 뉴턴이 극도의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며 로크 등에게 비상식적인 서신을 보낸 해다. 그가 미쳤다는 소문이 학계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후 그는 다시 정신의 균형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더이상 창조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뉴턴이 새롭게 찾은 역할은 조직 관리자였다. 명예혁명과 관련한 공로로, 뉴턴은 1696년에 조폐국 감독관으로 들어간다. 당시 영국은 전쟁으로 재정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이었고, 민간에서 은화를 손괴해 사사로이 이득을 취하는 일이 빈번했다. 뉴턴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주화개혁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위폐범을 쫓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찌나 이 일을 집요하게 했던지 위조범들은 그에게 이를 갈았다. “감옥에 같이 있던 휫필드가 조폐국 감독관은 깡패라고 맞장구치면서 만일 제임스 왕이 돌아온다면 그를 총으로 쏴죽이겠다고 했습니다.”(3권 284쪽) 훗날 뉴턴은 국장의 자리까지 올라 조폐국을 합리적으로 운영해나간다. 비슷한 시기인 1703년에는 왕립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전까지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선출된 왕립학회장들이 제 역할을 못 하면서 왕립학회는 침체된 상황이었다. 뉴턴은 특유의 관리 능력을 발휘해 분위기를 바꿔나간다. 실험을 활성화하고, 진지한 논문의 발표와 토론을 장려하고, 재정을 안정시켰다. 때로 독단적인 태도가 문제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뉴턴은 관리자로서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뉴턴에 관한 단 하나의 책
이 책 《아이작 뉴턴》(원제: Never at Rest)은 당대의 가장 뛰어난 뉴턴 학자로 평가받는 리처드 웨스트폴(1924~1996)의 대표작이다. 1983년에 과학사 부문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어 과학사학회의 ‘파이저 상’을 받았고 1982년에는 17세기와 18세기와 관련해 영어로 출간된 가장 우수한 책으로 선정되어 미국역사학회로부터 ‘리오 거쇼이 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아이들이 세계를 인지할 무렵 전기에 착수해 그들이 학업을 마치고 세상에 첫발을 디딜 때쯤” 저술을 마쳤다. 근 20년의 세월 동안 난해한 뉴턴의 수리물리학을 소화하는 한편, 17 18세기 영어 문헌을 총망라해 뉴턴의 일대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뉴턴은 엄청난 메모광인 데다 서신 교환도 적지 않게 했다. 저자는 각종 박물관과 도서관, 컬렉션 등에 흩어져 있는 막대한 양의 문헌을 최대한 놓치지 않으면서, 엄격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서술을 이어나간다. 이 방대한 작업에 〈네이처〉〈사이언스〉 등 세계 유수의 언론은 출간 당시(1980년) 찬사를 쏟아냈다.

“막대한 양의 문헌을 섭렵한 끝에 탄생한 엄밀하고 상세한 과학 평전” _〈사이언스〉
“뉴턴이 뿌듯해 할 책이다.” _〈이코노미스트〉

그 밖에 저자는 1972년에는 《뉴턴 물리학에서의 힘》으로 과학사학회의 파이저 상을 수상했고, 1987년에는 논문 〈과학의 후원: 갈릴레오와 망원경〉으로 동 학회로부터 데릭 프라이스 상을 수상했다. 이런 전문적이고 치밀한 연구 성과 덕분에 과학자들은 뉴턴에 관해 단 하나의 책으로 이 책 《아이작 뉴턴》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뉴턴의 전기는 수십 가지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 웨스트폴이 쓴 이 책이 가장 최고, 최상, 최종, 결론적 전기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_이무현(한국어판《프린키피아》 번역자)

이 책은 원서의 가치를 한국어로 고스란히 옮기기 위해 최고의 팀을 구성했다. 먼저 주요 번역은 과학 전문 번역가인 김한영이 맡았다. 그는 2004년 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을 수상했으며, 스티븐 핑커의 한국어판 도서를 다수 번역한 경력이 있다. 원서 4장 혹은 10장 같은 난해한 수학적 물리학적 부분을 소화하기 위해 물리학 전공 출신의 번역가인 김희봉이 함께 번역에 힘을 보탰다. 아울러 더욱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이들 내용을 수학자 이무현이 세밀하게 감수했다. 그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비롯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새로운 두 과학》 등의 한국어판을 번역한 고전 과학 분야의 실력자다. 이렇게 치밀하게 번역된 한국어판을 읽고 국내 물리학계의 원로인 장회익(서울대 자연과학대 명예교수, 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이 서문을 써 책에 공신력을 더했다.

┃옮긴이의 말

번역을 오래 하다 보니 난해한 책을 받아드는 경우가 늘어간다. 9월에 시작해서 9월에 끝냈다. 그 사이 해가 두 번 바뀌었다. 세월을 잊고 사는 번역자에게 딱 맞는 책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저자인 웨스트폴도 10년을 예상하고 시작했는데 완성하고 보니 20년이 흘렀다 한다. 번역을 마무리할 즈음에 그 말에 담긴 의미가 이해되었다. 또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이 뉴턴에 비해 유한한 분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분모가 무한대인 분수이더라 한다. 나의 고백도 그와 같다. 하지만 이 말에는 유비 관계가 있다. 저자는 자신과 뉴턴의 능력을 비교했지만 나는 감히 그럴 수 없고, 다만 저자와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전기작가는 내게 특별한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이전에 번역한 두 평전은 《체사레 보르자》와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이었다. 전기는 놀라운 추리력과 상상력으로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단서들로부터 뼈대를 세우고 살을 붙여 한 인간의 역사와 위대한 업적의 탄생과정을 눈앞에 빚어낸다. 이 책의 저자를 놓고 봤을 때 훌륭한 전기작가는 조각가다. 미켈란젤로다.
12장에 묘사된 런던탑처럼 이중의 벽이 진군을 가로막았다. 외성벽은 까다로운 본문이었다. 방대하고 난삽한 증거들을 촘촘히 짜맞춰 절묘하게 압축시킨 저자의 필력은 종종 역자의 능력을 시험했다. 저자의 상상력과 풍부한 역사적 지식도 고스란히 역자의 노동으로 돌아왔다. 곳곳에 잠복해 있는 은밀한 수사와 풍자는 생전 써본 적이 없는 표현을 요구했다(특히 뉴턴이 격한 감정을 토로한 편지!).
그러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인터넷이라는 도구를 부려가면서 로마군이 성을 공략하듯 첫 번째 난관을 돌파해나갔다(로마군은 장기전을 벌일 때 성 주위에 성벽만큼 높은 둔덕을 쌓아 성을 공략했다). 그 공성에서 단연 최고의 장수는 ‘구글’이었다. 적절히 명령만 내리면 17세기에 옥스퍼드에서 출간한 희귀본도 포획해왔다. 덕분에 왜 윔블던에서 우승한 선수가 접시 모양의 트로피를 드는지, 장례 반지라는 게 무엇인지, 왜 17~18세기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시험을 망치면 “동전을 잃었다”고 말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간신히 외벽을 돌파하는가 싶을 즈음에 내벽이 나타났다. 3장에서부터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17~18세기의 인용문들은 방향감각을 앗아가는 미로 같았다. 현대 영어와 비교할 때 그 시대의 영어는 이 책의 인용문들로 보자면 무엇보다 절과 문장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구두점이 거의 없고 대문자 표시가 변덕스러운 데다, 한번 시작한 문장은 끝을 모른다. 또한 뉴턴이 자의적으로 만들어 쓴 실험 기호와 연금술의 기호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표기법도 지연에 큰 몫을 했다. 연금술 문헌에는 ‘비술’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신기한 기호들이 등장하는데, 하나의 기호가 천문학, 고대신화, 화학의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묘사도 대단히 시적이라 은유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느낌이었다.
이 책은 뉴턴의 출판물이 아니라 뉴턴을 비롯한 당대의 사람들이 공책과 종이에 직접 쓴 원고를 바탕으로 뉴턴 과학의 발전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한다. 따라서 본문 속의 수많은 인용문들은 대부분 일기나 비망록 속에 있는 메모 및 편지의 초고 형태라 해독의 어려움이 컸다. 단어의 의미도 지금과 다르고, 심심찮게 등장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바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떻게 보편중력을 발견했느냐는 질문에 뉴턴은 “끊임없이 생각해서”라고 대답했고, 웨스트폴도 그의 천재성보다는 쉼 없는 노력에 무게를 두고 싶어 원서의 제목을 《Never at Rest》(결코 멈추지 않는다)로 정한 듯하다. 하지만 나는 이중의 벽에 가로막혀 중간에 몇 달 동안 책을 덮고 말았다. 긴 좌절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다시 힘을 낸 건 알마 출판사의 격려와 재촉 때문이었다. 출판사는 험난한 출간과정 속에서도 최고의 능력과 인내심을 발휘해주었으며, 공역자 섭외에도 한몫했다. 깊이 감사드린다.
믿을 만한 공역자가 생긴 후로 과학적인 내용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김희봉 선생님은 수년 전에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Einstein in Love》을 공역한 적이 있고, 특히 물리학의 좋은 책들을 번역하신 경력이 있다. 우리는 역할을 분담해 광학, 천문학, 역학은 김 선생님이, 연금술, 신학, 수학, 그리고 과학 이외의 번역은 내가 맡았다.
이무현 선생님 같은 학식이 깊은 분이 감수를 맡아주신 것은 큰 행운이었다. 《프린키피아》 원서와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직접 번역하기도 한 감수자께서는 유율법의 탄생과정을 그린 4장과 《프린키피아》의 완성과정을 그린 10장은 물론이고 여러 장에 산재해 있는 수학적 내용을 검토하고 수정해주셨다. 두 공역자는 번역이 끝난 후에는 서로의 번역을 교차 검토했고, 이 과정을 통해 용어와 문체를 통일했다. 사실 용어 문제는 수시로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상의했다. 대개 과학 용어였으므로, 상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문의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신촌, 연신내 등에서 두 공역자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격려와 위로를 나누었던 추억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중략)
이 책의 특징은 다양한 분야에서 뉴턴이 이룬 업적의 형성과정을 정밀하게 파헤친 데 있다. 일평생 근대 과학을 연구한 과학사가의 대표작답게, 뉴턴 과학이 탄생한 과정에서부터 마지막 완성 형태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모든 이야기를 다룬다(공역자 김 선생님이 “집단 지성이 필요한 책”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무한히 공감했다). 또한 뉴턴의 천재적인 면들과 함께 인간적 결함도 가감 없이 드러내 전기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평전 특유의 맛을 한껏 돋우어준다.
개인적으로는 신학에 관한 저자의 초기 연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삼위일체설을 거부하고 이단 신앙을 갖게 된 과정 그리고 그 대가로 짊어진 단죄와 사회적 추방에 대한 두려움은 뉴턴의 의식과 소심한 성격에 낙인이 되어 평생토록 크고 작은 신경증을 유발했다. 《젊은 아인슈타인의 초상》에서 만난 아인슈타인에 이어, 다시 한 번 천재의 삶은 화려하고도 고단하다는 걸 느꼈다. 그런 천재와 2년 동안 동거한 역자는, 고단했다.

┃아트디렉터의 말 _안지미
“영미권 최고의 역사서, 뉴턴의 모든 측면을 다룬 기념비적인 저작, 번역에만 꼬박 3년!” 이런 찬사에 전혀 손색없는 대작을 만나는 건 아트디렉터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특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 책의 작가 리처드 웨스트폴은 책을 완성하는 데 무려 20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런 대작에 걸맞은 북 디자인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나의 대부분의 작업 과정이 그러하듯, 한동안은 세상에서 보고 느끼는 모든 감각과 이성이 아이작 뉴턴과 연결되는 경험을 했다. 이는 말하자면 끊임없이 모든 감각을 스캔하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시각화하기 위한 과정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불리는 뉴턴이 이룩해놓은 수많은 개념과 이론 등을 이미지로 치환하는 작업은 자칫 정보의 과부에 빠져 발상의 오류를 일으키기 쉽다. 세부적인 시각화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먼저 이 책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개념 정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에센시아(esencia, 본질, 정수)라는 작업 개념어를 설정하고, 종이책만이 가질 수 있는 물성을 극대화해 소장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한정판 제작을 결정했다.
시각적인 요소는 최대한 단순하게 ‘색, 면, 기호’ 세 가지 요소로만 변형 반복해서 사용하기로 하고, 인쇄는 판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실크스크린’ 인쇄를 채택했다(일반적인 오프셋 인쇄 방식에 비해 잉크가 많이 묻고 색상이 강하고 단순 명쾌하기 때문에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디자인적인 요소와 활자는 동판을 조각해 열로써 눌러 찍는 ‘박’으로 표현했다. 물성의 단단함과 단순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책배, 책머리 등 모든 면을 표지종이 색과 동일하게 칠하는 작업도 거쳤다.
보이는 요소가 단순할수록 작은 오차라도 오히려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제작 공정은 더 까다롭고 어려웠다. 독자들의 감각에까지 그 섬세한 노력이 온전히 닿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지난한 과정은 오로지 작업자의 몫으로만 남을 것이다. 300년 전의 인물인 아이작 뉴턴의 삶을 웨스트폴이 20년의 노력 끝에 완성한 것이 1982년이다. 그리고 2016년 6월, 그들의 놀랍도록 위대한 업적에 작은 점 하나를 보탠다. 〈이코노미스트〉의 서평처럼 “뉴턴이 뿌듯해 할” 또 하나의 책으로 남길 바라며….

┃장별 줄거리

* 이 책은 자료가 세세하고, 각 장별 분량이 방대해 자칫 논의의 흐름을 놓치기 쉽다. 여기서는 각 장별로 간략한 줄거리를 제시해 이해의 편의를 높이고자 한다.


1장 1661년 뉴턴은 케임브리지대학의 입학생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다. 저자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조명하고, 그 당시 학계가 처해 있던 상황을 각 분야별로 제시한다. 천체학, 역학, 광학, 기계론, 화학(연금술), 수학 등 여러 분야가 격변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천문학의 경우 태양 중심설이 강한 설득력으로 기존 체계를 흔들고 있었고, 역학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역학이 의심을 받고 데카르트 역학이 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광학과 관련해서 학자들은 이전의 ‘시각의 문제’가 아닌 ‘빛의 성질’(입자냐, 파동이냐)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아울러 ‘유기체’가 아닌 ‘기계’를 빌려 유추하는 새로운 철학이 들어섰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간직한 연금술 역시 정점을 찍고 있었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각 분야의 업적을 수학 용어로 표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이와 함께 수학도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수학은 지금까지의 경계 너머로 부글부글 흘러넘치고 있었다.”

2장 뉴턴의 조상인 존 뉴턴 대부터 시작해 그의 가족적 배경이 설명된다. 뉴턴 가문은 성공한 자작농 집안으로 그 지역 일대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그러다가 명문 에이스커 가문과의 결혼이 이루어진다. 바로 아이작 뉴턴의 부친 아이작 뉴턴(동명)과 해나 에이스커가 결혼한 것이다. 뉴턴은 유복자로 태어나(1642/1643년) 에이스커 가문에서 자라게 되는데, 이때 지위 상승과 학문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어머니가 재혼을 하면서 뉴턴은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된다. 이후 그랜섬 문법학교에 진학하는데,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 외로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기계와 공작 등에 큰 관심을 보인다. 한편 이 시절, 하숙집 딸 스토러 양과 뉴턴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약간의 로맨스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어머니 해나 스미스(재혼하여 성이 바뀜)는 뉴턴에게 공부가 아닌 재산 관리의 역할을 기대하고 그를 다시 울즈소프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뉴턴은 농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문법학교 교장 스톡스와 삼촌인 윌리엄 에이스커 목사가 뉴턴의 어머니를 설득하여, 열일곱 살의 뉴턴을 다시 학교로 보낸다.

3장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진학한 뉴턴은 여전히 외로웠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공간은 인간관계의 삐걱거림을 상쇄해주었다. 사실 당시 대학은 성직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와도 같아서, 진지한 학문적 연구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또한 학문 내적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강하게 의심을 받고 수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기존 교과가 무너지는 가운데 뉴턴은 엄청난 학구열을 보인다. 특히 광학 실험에 무서울 정도로 몰두한다. 태양을 너무 바라봐 눈이 상할 뻔하는가 하면, 유색의 원을 관찰하기 위해 “눈과 뼈 사이로 눈의 뒷면에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뜨개바늘을 밀어넣기도 한다. 당시 어머니가 학비를 인색하게 지원해 뉴턴은 급비생으로서 자비생들의 시중을 드는 수모 속에서 학교를 다닌다. 1664년, 뉴턴은 이 해에 특대생으로 선정되지 못할 경우 대학을 떠나야만 했다. 다행히 그는 하숙집 주인인 약제사 클라크 씨 부인의 형제인 험프리 배빙턴의 후원으로 특대생이 될 수 있었다.

4장 1664~1666년에 뉴턴은 고전기하학에 대한 특별한 배경 없이 곧바로 해석기하학의 세계로 돌진했다. 그리고 짧은 기간 안에 데카르트 월리스 등 당대 최고 수학자들의 성과를 넘어섰다. 뉴턴은 항상 일회성의 ‘계산’이 아닌 일반적인 ‘방법’에 매료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대수 방정식을 통해 패턴을 발견하는 것에 열중했다. 그 과정에서 뉴턴은 월리스의 불가분량 개념을 발전시켜 유율학, 즉 미적분학을 최초로 발명하게 된다. 또한 그는 새로운 수학적 방법에 의해 사인표를 55자리까지 계산하는가 하면, 데카르트보다 훨씬 다양한 자취와 수학의 기본 요소들에 대한 탐구한다. 그는 1666년 10월에 한 소논문을 쓴 다음, 돌연 수학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다.

5장 수학적 발견이 폭발하던 시기에 뉴턴은 역학과 광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생각들을 발전시킨다. 역학의 경우, 충돌과 원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한편 보편중력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또한 백색광이 오히려 여러 색의 빛줄기가 혼합된 것이라는 발견을 했다. 놀라운 통찰들이 연속되던 1666년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해’였다. 저자는 이를 조명하는 한편 그것의 한계 역시 아울러 살펴본다. 즉 당시 뉴턴의 역학과 광학은 결코 완성형이 아니었다. 뉴턴의 역학은 ‘내재적 힘’과 ‘관성의 법칙’ 사이에서 이후 수십 년간 갈등했으며, 광학에서의 발견 역시 정량화와 실험적 토대를 완전하게 마련할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보편중력을 이끌어냈다는 이른바 ‘사과 이야기’는 천재 신화를 위한 속된 일화에 지나지 않는다. ‘경이로운 해’에 뉴턴이 쌓은 포괄적 기초는 분명 대단한 것이었지만, “하나의 영리한 생각은 과학적 전통을 형성해내지 못한다.”

6장 뉴턴은 마침내 1667년 대학 평의원의 자격을 얻는다. 이제 트리니티칼리지라는 보금자리에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왕정복고 아래의 대학은 무척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개인의 학문적 업적과 성취가 대단하더라도, 대학에 먼저 입학한 사람이 무조건 더 나은 대우를 받았고(연공서열제), 또한 왕의 눈에 들면 좋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임명제). 뉴턴은 이런 환경에서 인간관계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한다. 1669년에 원뿔곡선에 대한 논문을 써 해석기하학 연구를 새로운 일반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무한급수의 해석에 관하여〉를 작성해 무한급수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받는다. 광학에서는 1666년의 통찰을 발견시켜 1669년~1670년에 분광 현상에 대한 중요한 실험을 한다. 뉴턴은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을 극도로 꺼렸지만(그래서 논문들도 발표하지 않고 서랍에 넣어두곤 했다), 반사망원경의 발명으로 1671년에 일약 유명 인사가 된다.

7장 왕립학회는 반사망원경의 발명에 찬사를 보내며, 뉴턴에게 그 이론적 기반이 되는 색채론에 관한 논문을 요구했다. 이에 뉴턴은 1672년, 그때까지의 광학 연구 성과를 정리해 왕립학회에 보낸다. 이 논문은 처음에는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에게 호평을 받았지만, 차츰 뉴턴에게 고뇌의 원천이 되었다. 수많은 반론 편지가 뉴턴에게 쇄도했다. 뉴턴 자신에게는 여러 실험적 결과를 거쳐서 너무도 명백했지만,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특히 로버트 훅은 뉴턴이 자신의 이론을 표절했다며 여러 차례 주장했고, 하위헌스도 뉴턴의 색 체계에 의문을 표했다. 리누스 등도 여러 차례 뉴턴에게 편지를 보내 설명을 요구했다. 뉴턴은 거의 절망적인 심정이 된다. 다른 한편 1676년 뉴턴은 유율법과 관련해 라이프니츠와 서신을 교환했다. 뉴턴은 이른바 〈전서〉와 〈후서〉로 불리는 편지들에서 자신이 1664~1666년에 발견한 유율법에 대해 라이프니츠에게 설명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신 교환 1년 전인 1675년에 라이프니츠도 유율법과 기호만 다른 미분법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터였다. 유명한 ‘우선권 논쟁’의 서막이 이렇게 잠재적으로 배태되었다.

8장 연금술과 성서 연구는 뉴턴이 각별히 관심을 쏟은 주제였다. 뉴턴은 연금술이 그 불합리성으로 인해 오히려 더 심오하다고 느끼고서, 센디보기우스, 데스파네, 필라레테스 등 정평 난 연금술사를 열심히 연구했다. 심지어 은밀한 연금술사 클럽에 가입해 관련 자료들을 받기도 했다. 그가 연금술에 몰두한 까닭은 그것이 기계론 철학의 불완전한 전망을 보충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뉴턴은 ‘입자만이 물리적 사실을 구성한다’는 기계론 철학이 자연의 실체를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는 그의 역학에도 영향을 미쳐 ‘힘’의 개념을 정립하는 데 지속적인 역할을 한다. 뉴턴은 성서 연구에도 관심을 쏟았다. 특히 그는 당시로서는 이단 신앙인 아리우스주의를 옹호하며, 그리스도가 신이 아닌 인간(혹은 중보자)임을 분명히 했다. 4세기 아타나시우스의 영향으로 ‘삼위일체설’이라는 사악한 견해가 정설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견해였기에 뉴턴은 이를 철저히 숨긴다. 저자 웨스트폴은 이것이 논쟁을 회피하는 뉴턴의 성향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본다.

9장 1676년 말부터 1680년대 초까지 뉴턴은 이른바 ‘침묵의 세월’을 보낸다. 1672년 왕립학회에 보낸 색채론 논문이 야기한 반론 편지들에 극도로 지친 탓이다. 그는 1676년 말부터 과학계와 사실상 관계를 단절하고 개인 연구에 몰두한다. 더욱이 1679년에 어머니가 사망해 침묵의 기간은 더 길어졌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개인적인 관심사인 신학과 연금술 연구를 진행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설에 대한 비판을 더욱 매섭게 가다듬고, 수도원 제도를 공격하는가 하면, 이단적인 아리우스주의 논문에서는 여러 민족들의 신이 실은 하나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한 로버트 보일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수많은 연금술 실험을 한다. 이때 여러 화학물질을 맛보고 중금속에 상시 노출되는 등 중독사의 위험마저 무릅쓴다.

10장 1684년에 핼리가 뉴턴에게 찾아와 천체의 운동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대작 《프린키피아》의 집필이 닻을 올린다. 뉴턴은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거대한 동역학 체계를 세우는 것에 몰두한다. 사실 이전까지 뉴턴의 연구는 “미완성의 수학 논문들로 어수선”할 뿐이었다. 재능 넘치는 아이디어 수준에 그쳤을 뿐, 완결성 있는 지성적 작업은 아니었다. 뉴턴은 지난 10년 이상 그의 삶을 지배했던 신학과 연금술 연구를 밀쳐두고, 보편중력을 규명하는 데 열중한다. 그 과정에서 역제곱의 인력이 일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비운동성의 운동성’, 즉 관성력 또한 받아들인다. 뉴턴은 이제까지의 연구를 모두 종합해 《프린키피아》에서 새로운 과학의 이상을 제시한다.

11장 《프린키피아》 집필에 한창 열중하고 있을 때인 1685~1687년, 뉴턴은 정치적인 격변에 휘말리게 된다. 새로 즉위한 제임스 2세가 가톨릭화를 강화하고자 앨번 프랜시스 신부를 무리하게 케임브리지에 임명하려 했는데, 다른 교수들이 몸을 사리는 가운데 뉴턴이 나서서 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고된 시련이 예상되었지만, 1688년 윌리엄이 영국에 상륙해 정치적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뉴턴은 용기를 인정받아 보상을 약속받은 한편, 케임브리지 평의원회를 대표해 임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프린키피아》 그리고 정치적 공로, 이 두 가지가 어우러져 뉴턴은 영국의 유력한 지식인으로 올라선다. 1690년대 초에는 로버트 훅이 제기한 《프린키피아》 표절 의혹을 방어하는 가운데, 다시 광학으로 돌아와 미진한 부분에 대한 연구들을 보강한다. 1693년, 뉴턴은 중대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인다. 깊은 우울증으로 편집증적인 태도를 보이며 로크 등에게 상례에 어긋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후 그의 정신은 다시 균형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이때 이후로 더이상 뉴턴은 창조적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12장 뉴턴은 1696년에 조폐국 감독관으로 들어간다. 명예혁명의 성공에 대한 보상 성격의 자리였다. 그는 막연하게 감독관이 최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이를 받아들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별로 하는 일도 없는 조폐국장이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일도 대충 하는 법이 없는 뉴턴은, 자신의 자리에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한다. 당시 영국은 재정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이었고, 민간에서 은화를 손괴해 사사로이 이득을 취하는 일이 빈번했다. 뉴턴은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주화개혁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위폐범을 쫓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699년에 조폐국장 토머스 닐이 세상을 떠나자, 뉴턴은 국장의 자리에 올라 조폐국을 합리적으로 운영해나간다.

13장 뉴턴은 1703년 연차 총회에서 왕립학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전까지 정치적인 고려에 의해 선출된 왕립학회장들이 제 역할을 못 하면서 왕립학회는 침체된 상황이었다. 뉴턴은 특유의 관리 능력을 발휘하여 분위기를 바꿔나간다. 실험을 활성화하고, 진지한 논문을 발표?토론하고, 재정 안정을 위해 힘쓰기 시작했다. 이는 소정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른 측면에서 뉴턴의 독단적인 운영방식이 문제 되기도 했다. 특히 그리니치 천문대장인 플램스티드와의 갈등에서 그 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뉴턴은 자신의 달 운동론을 완성하기 위해 플램스티드에게 무리하게 관측 결과를 요구했고,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왕립학회장 지위를 이용해 불합리한 처사를 했다. 1712년 플램스티드의 《천문학사》가 출간되면서, 결과적으로 뉴턴은 자신이 원하던 바도 얻지 못하고 그의 독재적인 태도에 관해 나쁜 인상만 심어주게 되었다.

14장 1709년에 뉴턴은 《프린키피아》 2판을 내기 위해 책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코츠는 책 출간을 준비하면서 뉴턴과 진지한 과학적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는 2판이 더욱 완벽해지는 데에 일조한다. 한편 이 시기에 미적분 우선권 논쟁이 서서히 불붙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1676년에 씨앗이 뿌려진 미적분 우선권 논쟁이 불붙는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1676년 서신들에 대한 언급은 쏙 빼놓은 채, 1684년에 미분학을 발표했다. 뉴턴은 1676년의 편지에서 미분학과 동일한 유율학에 대한 견해를 라이프니츠에게 개진한 적이 있었다. 각자가 독자적으로 미분 혹은 유율을 발명한 것이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았다. 1699년에 월리스의 《저작집》에 뉴턴이 1676년의 편지를 게재함으로써 논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각자의 우군들을 동원해 줄기차게 지상논쟁을 전개한다. 1716년 라이프니츠가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둘은 결코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15장 라이프니츠 사후에도 향후 6년간은 우선권 논쟁이 그 대리인들을 통해 계속되었다. 라이프니츠 측이었던 수학자 베르누이는 뉴턴 측과 논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뉴턴은 점차 환멸을 느끼고 논쟁을 봉합하고자 시도한다. 이후 뉴턴은 더이상의 또다른 논쟁을 막기 위함인지, 자신의 책들을 신판으로 내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1717년에 《광학》 신판이, 1724~1725년에 《프린키피아》 3판이 꾸준한 속도로 진행되었다. 한편 뉴턴은 조폐국에서 75세라는 고령에 ‘동전 주조’라는 임무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수행했다. 노년의 뉴턴은 친척 및 지인에게 관대하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전에도 그는 친척들을 살뜰히 보살펴주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렇게 주변을 정리하던 뉴턴은 1726년 3월 23일, 장대했던 삶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생활인 뉴턴의 모습들

어떤 사람들은 뉴턴이 초상화가 앞에 앉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마조히스트였다. 뉴턴의 나이에 그보다 더 많이 초상화가 앞에 앉은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노년에는 물론이고 런던에 거주한 기간 내내 뉴턴은 넬러의 1702년작(이미 넬러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을 그린 뒤 4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초상화가 앞에 앉을 정도로 끊임없이 초상화를 그렸다. 생의 마지막 10년 동안 초상화 그리기는 거의 강박충동이 된 것처럼 보인다._4권 372쪽

자선에 관한 한 뉴턴은 일가친척에 국한하지 않았다. 그의 문서 중에는 도움을 간청하는 편지들이 여럿 있다. 그 수 자체로도 그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자비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뉴턴은 대개 무언가를 베풀었다. 뉴턴을 거론한 모든 사람은 그를 천연자원으로 여겼다_4권 379쪽

뉴턴은 필사에 집착했다. 홀스는 뉴턴이 펜을 쥐고 있지 않으면 글을 주의 깊게 읽지 못했음을 암시한 바 있다. 조폐국 논문은 홀스의 암시를 뒷받침한다. 창조적인 사고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자료에서도 이러한 습관이 확인되는 것이다. 뉴턴은 수하에 필생들을 두고서 1675년의 주조 상태에 관한 보고서를 필사했고, 그후 같은 보고서를 한 번 더 필사했다. 그는 1659년부터 1691년까지 해마다 금화와 은화 주조량에 대한 무게별 기록과 액수별 기록을 필사했고, 그런 뒤 같은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더 필사했다. 그런 필사의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가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확신에 있었다_3권 276쪽

그는 광범위하게 고리대금을 운용했고 그 대상은 대부분 급비생들이었지만, 헨리 저민, 바넘 올리버, 프랜시스 윌퍼드 등 몇몇 자비생에게도 대부를 했다._1권 149쪽

런던으로 이사한 후에도 뉴턴의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대도시 런던이 제공하는 오락거리들을 심지어 맛도 보지 않았다. 콘듀잇에 따르면 하다못해 음악이나 미술로 기분을 전환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한다. “전혀”는 너무 강한 말이었다. 뉴턴은 오페라 공연에 한 번 가봤다고 스터클리에게 말했다. 그에게 오페라는 만찬석상의 포만감처럼 좋은 것이 너무 과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1막은 즐겁게 들었고, 2막은 참고 들었으나, 3막에서는 뛰쳐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미술로 말하자면 펨브로크 백작의 유명한 조각상 컬렉션에 대해 생각해낸 유일한 말이, 펨브로크가 “돌 인형을 좋아하더라”는 것이었다._3권 302쪽

스터클리는 또한 뉴턴의 절제된 생활 방식을 기억했다. 그는 아침식사로 단지 버터 바른 빵에, 약간의 오렌지 껍질을 끓인 후 설탕을 가미한 차를 곁들여 먹었다. 만찬 때는 와인을 양껏 마셨지만, 대체로 물만 마셨다. 휘스턴은 뉴턴이 토끼 고기를 목을 조여 죽인다는 이유로 먹지 않고, 피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블랙푸딩(우리의 순대와 비슷한 소시지 옮긴이)을 먹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캐서린 콘듀잇은 남편에게, 이는 미각보다는 윤리의 문제라고 말했다. 즉, 뉴턴이 교살이란 동물을 죽이는 잔인한 방법이고 피를 먹으면 남자가 야수처럼 흥분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분명 그는 동물에게 잔인한 짓을 하지 않는 것을, 이웃 사랑과 거의 동등한 도덕적 명령으로 간주했을 것이다._4권 365쪽

《천문학사》의 출판은 뉴턴의 생애에 가장 불쾌한 삽화로 남았다. 그 사건은 뉴턴의 성격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미친 동시에, 그로 인해 수면 위로 드러난 그와 영국 과학계의 관계에도 타격을 입혔다. 성격으로 말하자면, 젊었을 때 반대를 참지 못하고 훅 같은 기성의 권위자들에게 함부로 도전하던 성마름이 노년에 들어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독재적인 태도로 발전했다. 이는 누가 봐도 추한 모습이다_4권 122쪽

* 책속으로 추가
뉴턴을 이상하고 불가사의하게 여긴 집단은 그랜섬의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울즈소프의 하인들에게도 뉴턴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주의력이 형편없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끼니를 건너뛰기까지 했으니 그들 눈에는 멍청하고 게으른 소년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그가 떠난다고 하자 매우 기뻐하면서, 그 아이는 ‘핵교’가 아니면 딱히 맞을 데가 없을 거라 단언했다._1권 131쪽

3장 고독한 학생
뉴턴은 이미 그랜섬에서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만일 그가 그들에게서 벗어나 케임브리지에서 보다 나은 학생들과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산이었다.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소년들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들의 빵과 맥주를 매점에서 가져오고 요강을 비워주는, 그들의 하인이었다._1권 146쪽

그는 태양만이 아니라 환시도 시신경 내의 혼령들을 흥분시킬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또한 눈이 망가질 뻔하기도 했고, 며칠 동안 어두운 곳에서 지낸 후에야 색의 환시를 없앨 수 있었다. 그후 뉴턴은 태양은 내버려두었지만 자신의 눈은 그러지 않았다. 약 1년 후 그는 뜨개바늘을 자신의 “눈과 뼈 사이로 눈의 뒷면에 최대한 가까운 곳까지” 밀어넣었는데, 망막의 곡면을 변화시켜 바늘을 누르고 있을 때 나타나는 유색의 원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장님이 안 되었을까? 발견에 사로잡힌 뉴턴은 더이상 비용을 셈하지 못했다._1권 176쪽

뉴턴은 일단 어떤 문제에 사로잡히면 결코 제시간에 잠을 잘 줄 몰랐다. 심지어 노년에도 하인들은 저녁식사를 차리기 30분 전에 미리 그를 불러야 했고, 식당에 내려와서도 책이나 논문이 눈에 띄면 음식을 몇 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다. 그는 저녁식사로 요리했던 식은 계란에 오트밀이나 우유를 곁들여 아침식사를 했다. 콘듀잇은 창의적인 전성기를 보낸 이후의 뉴턴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그의 정신은 1664년과 그 이후의 몇 년 동안 탐구의 긴장으로 소모되었고, 이는 그가 울즈소프에서부터 지녀온 모든 신경증을 극한까지 몰고 갔다. 그는 두 차례 이상 “큰 심신의 장애”를 겪었고, 그 원인은 혜성 관찰만이 아니었다._1권 191쪽

4장 운동으로 문제를 풀다
유명 인사가 된 후 뉴턴은 보편중력을 어떻게 발견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끊임없이 생각해서”였다. 모험의 중심이 행동보다 사유의 세계에 있었던 인간의 삶을 묘사할 때는 물론이고 그 연구 방식을 묘사할 때에도, 그의 특징을 이보다 더 훌륭히 규정할 수는 없다._1권 193쪽

뉴턴의 장대한 모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의 모험은 균일한 덩어리라기보다 이질적인 부분들의 혼합체임을 알게 된다. 그의 이력은 삽화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사로잡은 대상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는 오로지, 혹은 거의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1664년에 사실상 다른 모든 것을 몰아내고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수학이었다._1권 194쪽

모든 점을 고려할 때, 뉴턴이 1666년 10월에 운동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쓴 이 소논문은 걸작이었다. 알려만 졌다면 유럽의 수학자들에게 숨 막힐 정도의 감탄, 부러움, 경외를 자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 배로를 제외하고 유럽의 어느 수학자도 뉴턴이란 사람의 존재를 몰랐다. 배로마저도 1666년에 뉴턴이 이룬 이 성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무명이라는 사실은, 스물네 살이 채 안 된 젊은이가 공식 교육에 의존하지 않고서 이미 유럽의 주요한 수학자가 되었다는 나머지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단 한 사람인 뉴턴 본인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대가들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넘지 못한 한계를 알았다. 뉴턴은 그들을 모두 앞지르고, 훨씬 더 멀리 나아갔다._1권 239쪽

1665년에 이룬 수학의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은 뉴턴은 분명 그 천재성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른다고 느낀 듯하다. 이때 이후로는 문법학교와 학부생 시절에 간간이 보인 것처럼 또래들의 환심을 사려는 쓸데없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다. 룸메이트인 위킨스와의 친밀한 관계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서, 항상 품고 있던 소망에 따라 진리의 오만한 요구에 자신을 내맡겼다._1권 241쪽

5장 경이로운 해들
뉴턴은 중도에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는 1년 반 동안 수학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 끝에, 자신의 출발점이자 과거의 수학자들이 그를 위해 마련해준 최초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새로운 방법에 도달했다._1권 250쪽

뉴턴의 메모와 더불어 사과 이야기는, 뉴턴이 1666년의 어느 순간에 보편중력을 통찰했고 그런 뒤 《프린키피아》를 핼리가 억지로 쥐어짜내 세상에 퍼뜨릴 때까지 20년 동안 기본적으로 완전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대중적인 생각에 기여해왔다. 그러나 완전한 형태로 오래 존재했다는 이야기는 뉴턴이 남긴 초기의 역학 연구와 대조해보면 곧 신빙성을 잃어버린다. 사과 이야기는 보편중력을 하나의 영리한 생각으로 취급해서 그 개념을 속되게 만든다. 하나의 영리한 생각은 과학적 전통을 형성해내지 못한다._1권 266쪽

보편중력은 한 번의 도끼질로 뉴턴에게 넘어오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고 비틀거렸으며, 압도적인 복잡성 때문에 순간순간 좌절했는데, 그 복잡성은 역학 한 분야에서만도 충분히 컸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일곱 배로 불어났다._1권 266쪽

1666년이 저물 때 뉴턴은 수학에서도, 역학에서도, 광학에서도 불후의 명성을 안겨줄 연구 결과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세 분야에서 한 일은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더 포괄적인 기초를 쌓은 것이었다. 그 위에 그는 자신 있게 구조물을 올릴 수 있었지만, 1666년 말에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 대부분은 완성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런 평가는 뉴턴의 능력을 축소하기는커녕 더욱 높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업적을 신의 계시 이야기가 아니라 고난과 투쟁의 휴먼드라마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_1권 293쪽

6장 루카스 석좌교수
뉴턴은 거의 자신의 방을 나서지 않았고, 방에서 혼자 식사하기를 더 좋아했다. 식당에서 식사할 때에는 동석자들에게 상냥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없이 앉아 있었고,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마치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었다. 잔디밭 볼링장에서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 그를 방문한 사람 중에 트리니티의 동료는 없었다. 세 사람 중 뉴턴은 나중에 비가니와 관계를 끊었다. 그가 “수녀에 대해 점잖지 못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_2권 37쪽

전체적으로 원뿔곡선에 대한 뉴턴의 논문들은 해석기하학 연구를 새로운 일반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유율법과 마찬가지로 이 연구도 책상 안에 쑤셔넣었으며, 25년이 지난 후에 먼지를 떨어내고도 10년을 더 끈 후에야 출판에 착수했다._2권 49쪽

다시 한 번 케임브리지의 이름 없는 젊은이가 유럽 물리학계의 지도자인 하위헌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 실험에서 보여준 뉴턴의 능력은 그랜섬 시절에 갈고닦은 것으로 처음부터 하위헌스를 압도했고, 더 정교해진 1670년 실험은 순진한 경쟁자를 한없이 초라해 보이게 만들었다. 뉴턴이 측정에 쏟은 정성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컴퍼스와 육안뿐이었지만 그는 측정값의 정확도를 0.01인치(약 0.25밀리미터)까지 기대했다._2권 72쪽

뉴턴은 “내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좋습니다. 행여 공식적인 존경을 얻고 유지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무엇 때문에 바람직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친분이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걸 줄이기 위해 주로 연구를 합니다.”_2권 84쪽

7장 출판과 위기
훅은 재능이 뛰어났지만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말주변이 좋았다. 모든 주제에 관한 아이디어가 있었고, 주저 없이 그것을 출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와 반대로 뉴턴은 엄밀함이라는 이상에 집착했고 자신의 어떤 생각도 출판할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훅은 훗날 뉴턴의 논문에 관한 평을 서너 시간 만에 작성했다고 고백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뉴턴은 답장을 보내는 데 3개월이 걸렸다. 훅이 폐병을 심하게 앓아 그해 후반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_2권 113쪽

절박한 재정적 궁핍도 라이프니츠의 활동을 제약했다. 생계수단이 없었기에 그는 뛰어난 지력에 의존해야 했다. 그것은 하찮은 자산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인츠의 후원자가 그를 사실상 궁지에 몰아넣고 사망했을 때 현실적인 사정은 더욱 절박해졌다. 그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임명되거나 학문의 중심에 남을 수 있게 해줄 어떤 다른 자리에 채용되기를 절실히 원했다._2권 139쪽

1676년에 라이프니츠는 그의 미적분학을 출판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 뉴턴의 자유롭고 솔직한 편지는 그에게 과분함을 넘어 잔인한 딜레마를 안겨줬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전에, 그는 다른 수학자가 먼저 실질적으로 똑같은 방법을 발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신들은 올덴부르크를 거쳐 교환되었기 때문에, 그것도 공개적으로 알게 된 셈이었다. 결과가 어떨지는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고, 두 사람 모두에게 최종적으로 일어난 일보다 덜 불명예스러운 상황이 벌어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_2권 149쪽

훅은 원래 쉽게 발끈하는 성격이고, 뉴턴에게 피해의식을 가질 이유도 있었다. 〈빛의 가설〉이 그의 상처에 부은 것은 진통제가 아닌 독한 위스키였다. 그 상처 때문에 훅은 더 쓰디쓴 증오를 느꼈다. 훅의 빛에 대한 가설은 데카르트의 가설을 윤색한 것일 뿐이라고 뉴턴은 주장했다. 그 자신의 가설은 완전히 달라서 훅은 아마 그런 실험을 난생 처음 보았을 것이며, 뉴턴이 박막을 취급할 때 기초로 삼았던 실험은 해당 주제에 대한 훅의 모든 말을 의심케 한다고 했다. 글을 쓸수록 흥분의 지수는 올라갔다._2권 160쪽

8장 반항
그는 화학을 우연히 만나 그 불합리를 발견하고 나서도, 진지하고 “합리적인” 화학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아니, 출발은 진지한 화학이었지만 연금술이 더 심오하다고 느끼고 상당히 일찍 화학을 포기했다_2권 180쪽

그가 연금술이라는 공상적인 세계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을 문밖에 놓아두지 않았다. 사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수학에서 물려받은 엄밀한 지적 기준을 가지고 와서 실험법에 적용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 위력을 보았다. 뉴턴은 자연은 수량적이라는 기계론 철학자의 직감을 적용했다. 그래서 당시에나 그후에나 뉴턴의 연금술 실험법은 그가 읽은 수많은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량적인 측정에 우선적인 관심이 있음을 드러낸다._2권 193쪽

엄격한 신념을 가진 기계론 철학자들은 운동하는 물질의 입자‘만’이 물리적 사실을 구성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뉴턴은 일찌감치 그런 범주가 너무 제한적이라 자연의 실체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의 지적 오디세이에서 연금술은 중요하다. 그로 인해 더 넓은 전망이 펼쳐졌고, 좁은 기계론적 전망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새 범주들이 더해졌다. 뉴턴의 지속적인 명성은 그의 앞에 펼쳐진 그런 가능성들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_2권 204쪽

1675년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뉴턴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아리우스파가 되어 있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의 중보자이고, 그를 창조하신 아버지에게 종속된 자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겸허히 낮춰 죽음을 받아들여 (비록 성부에게 걸맞은 숭배는 아닐지라도) 숭배받을 권리를 획득했다. 뉴턴에게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였다._2권 227쪽

9장 침묵의 세월
이런 맥락에서 예루살렘 신전의 정확한 형태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뉴턴은 그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에 착수했다. 사실 뉴턴의 해석에서 신전 자체는 결코 두드러지게 부각된 적이 없지만,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 문제가 되어, 모든 문제가 그렇듯 한동안 뉴턴을 지배했다. 그는 신전의 설계와 치수에 집착했다._2권 275쪽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한 암묵적인 경시였다. 이는 아리우스주의자라면 아주 쉽게 넘어설 수 있는 단계였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섭리의 대행자라기보다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고, 신을 원래처럼 참되게 숭배할 것을 인류에게 깨우치기 위해 파견된 예언자였다._2권 289쪽

뉴턴이 화학물질에 일반적으로 적용한 시험법 중 하나는 맛이었다. 얼얼한 맛은 살 암모니악이 있음을 가리켰다. 과거에 주저함 없이 눈으로 끔찍한 실험을 했던 것처럼, 이제는 중금속과 기타 독성 물질들이 함유된 다양한 화학물질들의 스펙트럼을 맛보았다. 또한 정원에 있는 비좁은 실험실에서 다량의 안티몬과 수은을 포함한 여러 위험 물질들을 증발시켰다. 최근에 뉴턴의 머리카락 샘플에 함유된 중금속과 기타 화학물질의 농도를 최신 기술로 시험한 적이 있다. 그 머리카락은 활발한 실험을 끝낸 후로부터 30년이 지난 노년의 샘플이었다. 따라서 그의 몸에 축적된 문제의 물질들은 자연적 감소를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테스트한 거의 모든 물질이 20세기의 평균치보다 몇 배나 높았다._2권 304쪽

10장 프린키피아
“1684년에 핼리 박사가 케임브리지로 그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한동안 함께 머물렀다. 박사는 그에게 태양을 향한 인력이 그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가정하면 행성들이 어떤 곡선을 그릴 거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아이작 경은 즉시 타원일 거라고 대답했다. 기쁨과 놀라움에 사로잡힌 박사가 경에게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경은 자신이 계산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핼리 박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 계산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작 경은 논문들을 뒤적이며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계산을 해서 그에게 보내주기로 약속했다.”_3권 13쪽

《프린키피아》는 뉴턴의 기념비적인 업적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현존하는 문서상으로 그는 여러 분야에서 비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도 알고 있듯이 완성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684년까지 그의 연구는 미완성의 수학 논문들로 어수선했다. 그는 자신의 유망한 통찰력을 역학에는 발휘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연금술 연구는 정리되지 않은 메모와 쓰다 만 에세이가 뒤섞인 혼돈 그 자체였다. 만일 뉴턴이 1684년에 죽고 그의 논문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졌다면, 우리는 그 논문들로부터 어떤 천재가 살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현대의 지성을 빚어낸 인물로 찬양하는 대신 기껏해야 그의 실패를 탄식하는 짧은 언급만 남기고 지나갈 것이다._3권 19쪽

뉴턴은 험프리를 케임브리지 곳곳에 보내 지인들과 칼리지 학장들에게 증정본 스무 권을 돌렸다. 그중에 어떤 사람(특히 트리니티의 배빙턴 박사)은 “이 책에서 하나라도 이해하려면 7년은 연구에 전념해야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결정적인 말은 한 학생의 입에서 나왔다. 뉴턴이 그 학생을 거리에서 지나칠 때, 그는 왕정복고 시대에 케임브리지에 은신해 있는 이 천재가 바랄 만한 궁극의 ‘축사’를 건넸다. “저기 가는 사람이 남들은 물론이고 자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쓴 사람이래.”_3권 114쪽

11장 혁명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잇따라 나오는 동안 에드먼드 핼리는 감탄을 연발했다. 출판과 거의 동시에, 그 핵심 개념인 원격 운동을 부정한 사람들조차 《프린키피아》가 신기원을 여는 책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는 20년 동안 방치해두었던 연구를 마침내 완성한 뉴턴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고, 《프린키피아》 역시 자연철학에 전환점이 되었다. 뉴턴의 삶이 예전으로 돌아가기란 불가능했다. 뉴턴의 책은 영국을 강타했고, 출간되자마자 지배적인 정통 이론이 되었다. 유럽대륙에서의 승리는 보다 오래 걸렸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프린키피아》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_3권 120쪽

뉴턴은 대다수의 동포들이 그가 가진 견해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점잖은 사람들의 코로 들어가는 공기를 오염시키는 배설물인 양 질색을 했다. 뉴턴은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지난 15년 동안 숨죽이고 살았다. 의회에서 논쟁을 하든, 어떤 조항이 진지한 반론과 논쟁을 일으키지 않고 통과되든, 그는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겼을 것이다._3권 143쪽

훅은 귀가 얇은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표절 논란을 퍼뜨렸기 때문에 이 시기에 뉴턴은 《프린키피아》와 관련해 세세한 주의를 기울였다. 1694년 그레고리가 찾아왔을 때 그는 1669년 이전에 쓴 한 원고를 잊지 않고 보여주었다. “그 원고에는 그의 철학의 모든 기초, 즉 달이 지구에 미치는 중력, 행성들이 태양에 미치는 중력이 담겨 있고, 사실 이미 당시에 모든 것에 대해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 훅에 대해 뉴턴은 단지 경멸을 표했다._3권 185쪽

1693년은 《프린키피아》 이후 긴장된 지적 노력이 절정에 도달한 해였으며, 만일 뉴턴이 1693년 이후에 일관된 정신을 온전히 유지했다 해도, 그가 중요한 연구를 새로 시작하지 않은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그는 더이상 젊은이가 아니었다. 1693년의 위기로 그의 창조적 활동은 마침표를 찍었다. 자연철학과 수학뿐 아니라 신학에서도 그는 34년이라는 남은 생애 동안, 관직 활동을 피난처로 삼아 공무에 시간을 뺏기지 않는 한에서 이전의 성과를 고치고 손질하는 일에 몰두했다._234쪽

12장 조폐국
조폐국 내부는 모든 활동이 광란을 방불케 했다. 런던탑 경비대장인 루카스 경은 아침 5시에도 성문을 열기에 이르다고 생각했다. 재무부는 4시에 성문을 열라고 명령했다. 일은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헤인스에 따르면 거의 300명의 직공이 비좁은 조폐국 공간에서 밀치락달치락하며 일했고, 말 50마리가 열 대의 기계를 돌렸다고 한다. 말에 밟혀 죽은 사람도 있었다. 아홉 대의 커다란 프레스가 뉴턴의 계산을 빌리자면 분당 50~55회의 속도로 엄청난 소음을 내며 주화를 찍어냈다. 초인적인 노력으로 조폐국은 1696년의 하절기 동안에 주당 10만 파운드까지 생산량을 끌어올렸고, 연말까지 총 250만 파운드를 주조했다._3권 269쪽

버닛 주교는 그가 뉴턴을 존경하는 것은 “그의 모든 자연철학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어떤 것 때문이며, 그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순백한’ 영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더도 말고 단지 그가 훅과 플램스티드를 어떻게 대했는지 들여다볼 때, 지금까지 가장 순백해 보였던 영혼에 약간의 검은 흔적들이 묻어 있음을 알게 된다. 성적 행위를 다른 도덕적 행동과 구분지어야 할 이유는 없다. 뉴턴의 역사적 역할은 학문적인 것이었지, 도덕적 리더십이 아니었다._3권 336쪽

주화 공급의 관리에 대한 뉴턴의 강조는 시대를 앞섰는지는 몰라도, 이 논문이나 다른 논문들을 근거로 그를 주요한 경제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으려 해서는 안 된다. 1690년대에는 전쟁이 유발시킨 재정 위기의 압력하에서 경제 정책에 관한 소책자가 다수 출판되었는데, 역사가들은 이것을 경제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기원으로 간주해왔다. 뉴턴은 분명 이 문헌들, 특히 로크가 쓴 글들을 읽었을 것이다. 대체로 뉴턴의 관점은 다들 인정하고 있는 견해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그쳤다._3권 362쪽

13장 왕립학회장
뉴턴이 런던 생활을 시작한 초기에 학회의 상황은 열악했다. 1670년대에 처음 몇 년간 200여 명에 달하던 회원 수는 이제 그 절반을 간신히 넘겼고, 매주 회의에 참석하는 회원도 거의 없었다. 회의 내용을 적은 의사록에 비추어볼 때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계획도 체계도 없는 회의는 대부분 진지한 과학적 주제에서 벗어난 의미 없는 잡담으로 끝났고, 40년 전에 과학자들을 하나로 불러모은 흥미로운 주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었다._4권 11쪽

뉴턴이 왕립학회장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그 모임이 갑자기 철학적 효소가 끓어오르는 심오한 토론으로 바뀐 것처럼 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기괴함에 대한 학회의 욕구는 만족을 몰랐다. 해부를 하던 기간 중에 더글러스 박사는 “약 10일 전에 입 없이 태어났지만 충분히 자란 강아지”를 보여주었고 일주일 후에는 그 두개골을 가져왔다. 1709년에는 “암퇘지가 죽은 후 배에서 꺼내어져 얼마간 저희들끼리 자란 돼지 네 마리를 공개했다._4권 22쪽

《광학》의 내부 사정은 수학 논문들의 사정과 어느 정도 동일했다. 뉴턴의 과학적 사고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한에서 《광학》에는 새로운 내용이 전혀 없었다. 단지 아주 작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30여 년 전에 완성했던 그대로이며, 그 예외들도 16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유율법과는 달리 《광학》은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와 겹치지 않았다. 1704년에, 뉴턴이 1672년에 발표한 논문의 의미를 소화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광학》의 충격파는 《프린키피아》에 버금갔다. 어쩌면 《프린키피아》를 능가했을지 모른다._4권 31쪽

14장 우선권 논쟁
지난 석 달간의 서신 교환은 뉴턴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코츠에게 진지한 과학적 대화를 주도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는 훗날 코츠와 주고받은 토론을 제외하고는 그의 서신 전체를 통틀어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처음에 그의 편지들은 무뚝뚝하고 차가웠으며 심지어 말을 퉁명스럽게 자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6월 무렵에는 어느덧 그와의 토론을 즐기고 있었다._4권 138쪽

그러는 사이 라이프니츠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 내포된 의미를 곱씹어보던 뉴턴은 급기야 다른 모든 주제가 그의 생각에서 거의 지워질 정도로 그 편지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후 몇 년 동안 모든 종류의 문서는 라이프니츠를 향한 분노의 글로 중단되었고, 뉴턴은 특유의 방식으로 신중함에 무한한 신중함을 더해 분노의 문장들을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갈았다._4권 148쪽

한편 라이프니츠는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생계 수단인 지적 자산을 쌓고 지키겠다는 욕구에 이끌려 1684년에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1676년의 서신들을 언급하지 않고서 그 엄청난 발명품의 명예를 독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뉴턴에게 이는 신의 자비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라이프니츠의 원죄였다._4권 159쪽

뉴턴 역시 익명의 방패 뒤에 숨거나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이야기했다. 미묘한 암시는 존 케일의 어법이 아니었다. 노골적이고 거친 그의 어투는 학계에서 뉴턴의 대의에 큰 손해가 되었고 곧 지식인들의 경멸을 불러일으켰다. 베르누이는 인쇄물에서 그를 “뉴턴의 오늘”이자 고용된 펜이라 묘사하고,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매번 “어떤 스코틀랜드족 사람”이라 칭했다._4권 163쪽

15장 쇠락의 세월
왕립학회장일 뿐 아니라 나날이 명성이 치솟고 있는 유럽 최고의 유명 과학자로서 뉴턴은 본의 아니게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런던을 여행하는 지식인들이 가능하면 만나보고 싶어 하는 인기 관광 상품이 되었다. 콘듀잇이 들은 바에 따르면, 교황의 비서실장인 브란키니 예하는 뉴턴을 보겠다는 특별한 목적으로 런던까지 먼 거리를 여행했고, 마르실리 백작도 그랬으며, 드 로피탈 후작(유명한 수학자였다)도 같은 것을 바랐지만 그 전에 눈을 감았다고 한다._4권 339쪽

캐서린의 말대로 거품이 붕괴했을 때 뉴턴이 2만 파운드를 잃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 남해회사에 큰돈을 투자했으니 손해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후에 스펜스는 래드너 경의 회고를 인용했다. 투기 열풍이 한창일 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던 남해회사의 주가에 대해 뉴턴이 이렇게 평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었다네.”_4권 385쪽

기본정보

상품정보
ISBN 9791159920073
발행(출시)일자 2016년 06월 01일
쪽수 1504쪽
크기
150 * 233 mm / 3078 g
총권수 4권
원서명/저자명 Never at rest : a biography of Isaac Newton/Westfall, Richard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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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점,강남점,대구점,영등포점,잠실점은 [직접 찾아 바로드림존 가기], [바로드림존에서 받기] 로 주문시 음반 코너에서 수령확인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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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드림은 전국 교보문고 매장 및 교내서점에서 이용 가능합니다.
  • 잡지 및 일부 도서는 바로드림 이용이 불가합니다.
  • 각 매장 운영시간에 따라 바로드림 이용 시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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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내되는 재고수량은 서비스 운영 목적에 따라 상이할 수 있으므로 해당 매장에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 바로드림 주문 후 재고가 실시간 변동되어, 수령 예상시간에 수령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취소/교환/반품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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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환/반품은 수령하신 매장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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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로드림 서비스는 일부 1+1 도서, 경품, 사은품 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음반/DVD 바로드림시 유의사항

  • 음반/DVD 상품은 바로드림 주문 후 수령점 변경이 불가합니다. 주문 전 수령점을 꼭 확인해주세요.
  • 사은품(포스터,엽서 등)은 증정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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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점,강남점,대구점,영등포점,잠실점은 [직접 찾아 바로드림존 가기], [바로드림존에서 받기] 로 주문시 음반코너에서 수령확인이 가능합니다.
  1. STEP 01
    픽업박스에서 찾기 주문
  2. STEP 02
    도서준비완료 후 휴대폰으로 인증번호 전송
  3. STEP 03
    매장 방문하여 픽업박스에서 인증번호 입력 후 도서 픽업
  • 바로드림은 전국 교보문고 매장 및 교내서점에서 이용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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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 매장 운영시간에 따라 바로드림 이용 시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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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DVD 바로드림시 유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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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득공제 안내

  • 도서 소득공제란?

    • 2018년 7월 1일 부터 근로소득자가 신용카드 등으로 도서구입 및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사용한 금액이 추가 공제됩니다. (추가 공제한도 100만원까지 인정)
      • 총 급여 7,000만 원 이하 근로소득자 중 신용카드, 직불카드 등 사용액이 총급여의 25%가 넘는 사람에게 적용
      • 현재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의 소득 공제한도는 300만 원이고 신용카드사용액의 공제율은 15%이지만, 도서·공연 사용분은 추가로 100만 원의 소득 공제한도가 인정되고 공제율은 30%로 적용
      • 시행시기 이후 도서·공연 사용액에 대해서는 “2018년 귀속 근로소득 연말 정산”시기(19.1.15~)에 국세청 홈택스 연말정산간소화 서비스 제공
  • 도서 소득공제 대상

    • 도서(내서,외서,해외주문도서), eBook(구매)
    • 도서 소득공제 대상 상품에 수반되는 국내 배송비 (해외 배송비 제외)
      • 제외상품 : 잡지 등 정기 간행물, 음반, DVD, 기프트, eBook(대여,학술논문), 사은품, 선물포장, 책 그리고 꽃
      • 상품정보의 “소득공제” 표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도서 소득공제 가능 결제수단

    • 카드결제 : 신용카드(개인카드에 한함)
    • 현금결제 : 예치금, 교보e캐시(충전에한함), 해피머니상품권, 컬쳐캐쉬, 기프트 카드, 실시간계좌이체, 온라인입금
    • 간편결제 : 교보페이, 네이버페이, 삼성페이, 카카오페이, PAYCO, 토스, CHAI
      • 현금결제는 현금영수증을 개인소득공제용으로 신청 시에만 도서 소득공제 됩니다.
      • 교보e캐시 도서 소득공제 금액은 교보eBook > e캐시 > 충전/사용내역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 SKpay, 휴대폰 결제, 교보캐시는 도서 소득공제 불가
  • 부분 취소 안내

    • 대상상품+제외상품을 주문하여 신용카드 "2회 결제하기"를 선택 한 경우, 부분취소/반품 시 예치금으로 환원됩니다.

      신용카드 결제 후 예치금으로 환원 된 경우 승인취소 되지 않습니다.

  • 도서 소득공제 불가 안내

    • 법인카드로 결제 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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