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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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조선시대 대표적 문예인을 둘러싼 기존 미술사학 평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제3탄!
겸재가 조선회화사에 등장한 것은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집안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면서였고, 이때 제작된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은 그의 금강산 그림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후 겸재는 평생토록 장동 김씨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전폭적 후원 아래 화업을 이어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사가들은 겸재의 진경산수화에서 ‘진경’이란 말을 차용하여 조선후기 문화를 ‘진경문화’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겸재를 노론의 화가라 부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사가들 스스로 ‘진경문화는 조선중화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을 펼쳐왔고, 그 중심에 겸재를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겸재를 노론의 화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겸재 정선의 가장 큰 후원자가 장동 김씨들이었고, 장동 김씨들의 정치적 행보와 부침에 따라 겸재의 이력과 화업의 변화가 함께하였음은 수많은 자료들이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술사가들은 겸재와, 겸재를 점찍고 이끌었던 사천?川 이병연李秉淵 그리고 김창흡이 함께한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예인들끼리의 친교일 뿐, 정치적 만남이 아니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대과大科는커녕 초시조차 치른 적 없음에도 당상관까지 오른 겸재의 감투가 너무 무겁고, 예술가가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사회적 책무이기도 하니, 이를 예술의 순수성을 헤치는 것인 양 쉬쉬할 일은 아닌 듯하다. 겸재 정선이 아무리 빼어난 화가라 해도 조선후기 회화의 특성을 그의 작품을 통해 규정하는 것은 폭력과 다름없다. 조선후기 화가들이 모두 겸제와 같은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던 것도 아니고, 조선후기 문예계에 불어닥친 새로운 흐름이 회화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가정보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저자는 22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동아미술상 수상작가전을 비롯한 150여 회의 단체전 그리고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현역 화가이다.
30여 년간 작가이자 교육자로 활동하면서, 지나치게 문헌 연구 중심으로 경도된 미술 이론들을 접하며 많은 문제점과 병폐를 절감하였다. 이에 화석화된 미술사 연구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작품 중심의 연구 풍토를 환기시키고자, 정설로 자리매김된 기존 한국미술사에 화두를 던지고자 한다.
바른 미술사는 어떻게 정립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화가의 눈으로 확인한 추사의 모습과, 그에 뒤이어 겸재를 기록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 『추사코드』(2016 발간, 2017 세종우수교양도서), 『추사난화』(2018)가 있다.
목차
- 글을 시작하며
1부 진경眞境과 진경眞景 그리고 산수화山水畵
진경眞景과 진경眞境
산수화山水畵와 수묵풍경화水墨風景畵
2부 표암豹菴 ‘진경眞景’을 말하다
〈소의문외망도성昭義門外望都城〉
〈도화동망인왕산桃花洞望仁王山〉
겸옹최득의필謙翁最得意筆
〈피금정披襟亭〉
〈정자연亭子淵〉
3부 〈인왕제색仁王霽色〉도와 사도세자의 비극
인왕산에 비가 그치니…
옹천瓮遷
〈시화환상간詩?換相看〉
〈인왕제색仁王霽色〉
아! 〈인왕제색仁王霽色〉
청풍계淸風溪
4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설평기려雪坪騎驢〉
〈양천현아陽川縣衙〉
〈금성평사錦城平沙〉
〈종해평조宗海廳潮〉
〈목멱조돈木覓朝暾〉
〈소악후월小岳侯月〉
〈행호관어杏湖觀漁〉
글을 마치며
수록 도판 일람
책 속으로
‘진경眞景’이란 말은 오늘날 미술사가들이 조선후기 문예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니다.
조선후기 문예계의 영수격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흔히 쓰던 ‘참 진眞’에 ‘지경 경境’자를 쓰는 ‘진경眞境’과 달리 ‘참 진眞’에 ‘빛 경景’자를 합한 ‘진경眞景’이란 말을 퍼트렸던 것인데… 오늘날과 달리 조선후기 문예인들에게 ‘진경眞景’이란 용어는 생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흔히 ‘풍경 경景’으로 읽는 경景자가 당시에는 주로 ‘빛 경景’으로 읽었던 탓에 당시 사람이 ‘진경眞景’이라 쓰인 글귀를 읽게 되었다면 십중팔구 ‘참된 빛’이란 의미를 떠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암은 여기에 한술 더 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하였으니, 당시 글줄깨나 읽은 선비들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게 뭐지?’ 하였을 것이다.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를 뜻하는 ‘진경眞境’이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선계처럼 빼어난 절경’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참된 빛의 산수화[眞景山水畵]’라 하였으니, 쉽게 개념이 잡히지 않는 신조어였던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많은 미술사가들은 대체로 ‘진경眞景’과 ‘진경眞境’을 같은 뜻으로 읽고 있는 탓에 진경眞景 개념을 왜 세워야 하는지 그 필요성조차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_7-8쪽 ‘글을 시작하며’
조선회화사에 겸재 정선만큼 큰 족적을 남긴 화가도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서인지 조선후기 문예의 특성을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통해 규정하고, 이를 ‘진경문화’ ‘진경시대’로 확산시키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조선후기 문화를 노론이 선도하였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겸재가 조선회화사에 등장한 것은 대표적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집안의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금강산 여행길에 동행하게 되면서였고, 이때 제작된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은 그의 금강산 그림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후 겸재는 평생토록 장동 김씨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전폭적 후원 아래 화업을 이어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술사가들은 겸재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서 ‘진경眞景’이란 말을 차용하여 조선후기 문화를 ‘진경문화眞景文化’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겸재를 노론의 화가라 부르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미술사가들 스스로 ‘진경문화는 조선중화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란 주장을 펼쳐왔고, 그 중심에 겸재를 두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겸재를 노론의 화가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냉정히 생각해볼 일이다. _15쪽 ‘글을 시작하며’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란 말은 당연히 진경산수화에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아니 진경산수화는 그림으로 엮어낸 문장이라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이 땅의 미술사가들은 진경산수화를 박물관에 모시는 일에 급급할 뿐, 그 대단한 진경산수화에 내포된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내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일엔 적극적으로 나서려 들지 않는다. 한마디로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 훈수 두던 학자들도 진경산수화를 읽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 탓에 큰맘 먹고 박물관을 찾은 관객들이 교과서에서 봤던 낯익은 진경산수화를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오늘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_47쪽 ‘산수화와 수묵풍경화’
겸재는 비에 젖어 어둡게 변한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후 ‘인왕제색仁王霽色’이라 써넣었다. 그런데… 문제는 비에 젖어 어둡게 변한 인왕산의 모습과 인왕제색仁王霽色이란 글귀가 하나로 겹쳐지지 않는 까닭에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인왕제색’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통상 ‘비 그칠 제霽’는 동사로 쓰이며, 제월霽月(비가 갠 맑은 하늘에 뜬 달), 제천霽天(맑게 갠 하늘) 등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명사 앞에 놓여 ‘일시적으로 가려져 있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함’이란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인왕제색仁王霽色’을 정확히 풀이하면 ‘인왕산에 비가 그쳐 인왕산 본연의 얼굴색을 회복함’이란 뜻이 되는데…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인왕산 본연의 희고 매끄러운 암벽이 아니라 어둡게 물든 인왕산이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이처럼 인왕제색의 의미와 〈인왕제색〉도의 모습이 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겸재가 그려낸 〈인왕제색〉도는 가까운 미래시제를 현재진행형으로 표현하는 문장 형식으로 이해하면 쉽게 설명이 된다.
약속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며 ‘어디야?’라고 전화하자 ‘미안! 미안! 가고 있어….’라고 하였다면, 이는 ‘가고 있다(현재진행형)’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고 있으니(현재진행형) 곧 도착할 것이다(가까운 미래시점).’라는 뜻이듯, 겸재는 비에 젖어 어둡게 물든 인왕산이 빠른 속도로 빗물을 배출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후(현재진행형) ‘인왕제색仁王霽色’이란 글귀를 써넣어 가까운 미래시점(물기가 마른 인왕산 본연의 흰 얼굴을 회복한 모습)을 표현하였던 셈이다.
〈인왕제색〉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어두운 암벽 군데군데 작은 폭포를 그려넣어 산이 머금고 있던 빗물이 빠른 속도로 배출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처럼 ‘비가 갠 직후의 인왕산의 모습’은 ‘제인왕霽仁王’이라 쓰면 충분하다. 그러나 겸재는 분명 ‘인왕제색仁王霽色’이라고 하였으니, 인왕仁王도 명사이고, 색色도 명사로 해석함이 마땅할 것이다.
이는 결국 ‘인왕제색仁王霽色’은 인왕제仁王霽(현재진행형)과 색色(가까운 미래시점)으로 나눠 의미체계를 잡아주어야 하며, ‘제색霽色’의 색色은 ‘인왕산 본연의 얼굴빛(색)’, 다시 말해 흰 바위산으로 풀이할 수밖에 없게 된다. _205-206쪽 ‘인왕산에 비가 그치니…’
이 지점에서 겸재의 〈옹천〉이 실제 ‘옹천’의 모습을 얼마나 충실히 담아낸 것인지 묻게 된다. 왜냐하면 겸재가 주목했던 ‘옹천’ 지역을 그려낸 단원 김홍도의 〈옹천〉이란 작품이 전해오는데… 그 모습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조선회화사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같은 장소를 그렸건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른 모습일 수 있을까? 작품에 병기되어 있는 ‘옹천甕遷’이란 지명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곳을 그린 것임을 몰랐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겸재의 〈옹천〉과 단원의 〈옹천〉 중 어느 것이 실제 ‘옹천’의 모습에 가까운 것일까? 묘사의 정도를 감안해볼 때 아무래도 단원 쪽일 것이다. 필자가 겸재와 단원의 〈옹천〉을 비교하며 누구 작품이 실제 ‘옹천’의 모습에 가까운지 따져보는 것은 겸재의 작품이 실제 풍경과 다름을 지적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간 미술사가들이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의 차이를 언급하며 항상 주장해왔던 ‘실제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대상에서 느낀 감흥을 실감나게 담아내고자 화가가 실제 풍경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낸…’, 다시 말해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의 경계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기준을 찾은 것 같아서이다. _218-219쪽 ‘옹천’
출판사 서평
우리가 알아왔던 ‘진경산수화’가 진짜 ‘眞景山水畵’일까?
오늘날 미술사가들로부터 주입된 ‘진경眞景’ 개념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정작 진경산수화의 입을 틀어막는 재갈로 쓰이고 있다.
‘진경眞景’이란 말은 미술사가들이 조선후기 문예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신조어가 아니다. 조선후기 문예계의 영수격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흔히 쓰던 ‘참 진眞’에 ‘지경 경境’자를 쓰는 ‘진경眞境’과 달리 ‘참 진眞’에 ‘빛 경景’자를 합한 ‘진경眞景’이란 말을 퍼트렸던 것인데, 오늘날과 달리 조선후기 문예인들에게 ‘진경眞景’이란 용어는 생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흔히 ‘풍경 경景’으로 읽는 경景자가 당시에는 주로 ‘빛 경景’으로 읽었기에 당시 사람이 ‘진경眞景’이라 쓰인 글귀를 읽게 되었다면 십중팔구 ‘참된 빛’이란 의미를 떠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암은 여기에 한술 더 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하였으니, 당시 글줄깨나 읽은 선비들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게 뭐지?’ 하였을 것이다. ‘신선이 살고 있는 선계’를 뜻하는 ‘진경眞境’이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선계처럼 빼어난 절경’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참된 빛의 산수화[眞景山水畵]’라 하였으니, 쉽게 개념이 잡히지 않는 신조어였던 셈이다.
표암이 골라낸 ‘진경眞景’이란 말은 동아시아 정교론과 연결된 정치적 용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늘의 법리를 헤아리고 따르는 일련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많은 미술사가들은 대체로 ‘진경眞景’과 ‘진경眞境’을 같은 뜻으로 읽고, 때로는 ‘진경眞境’을 ‘진경眞景’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바꿔 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술사가들이 조선후기 문예에 나타나는 특성을 진경眞景이라 규정하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 문화를 설명해왔다는 것 자체가 진경 개념을 이미 사회학 용어로 전용시켜 사용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진경 개념을 사회학적 개념을 통해 읽으면 무슨 말이 될까? ‘참된 (실제를 바탕으로 한) 풍경’이라 해석해온 진경眞景은 ‘관념을 벗어나 사실을 추구하는 사회 풍조’라는 의미로 바뀌게 된다. 이는 결국 ‘세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라는 의미가 되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변하면 가치관과 행동양식의 변화가 뒤따르기 마련이니, 비로소 ‘진경문화’ ‘진경시대’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진경문화’ ‘진경시대’와 마주하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관념으로 유지되던 조선 사회에 현실적 질문을 던지고 실제적 답을 구하는 새로운 사회풍조의 도래到來이다. 이는 곧 진경시대 문예의 특성은 조선후기 문예인들이 이전 시대와 달리 조선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석되어야 할 부분 아닐까?
숨겨진 메시지의 퍼즐조각들을 찾아 그림 속을 거닐다
저자는 겸재의 작품에 담긴 화의?意와 화제?題의 속뜻을 고전을 인용하여 해석해내면서, 사화士禍와 환국換局으로 조정의 권력축이 극심하게 요동치던 시절, 표면에 드러낼 수 없던 정파의 권력 목표가 그림 속에 어떻게 담겨져 있는지를 드러내 보인다. 겸재의 한 작품을 겸재의 다른 작품과, 또는 다른 문예인의 동일한 소재의 작품과 비교하여 해당 작품의 요소들이 어떤 의중으로 쓰이고 있는지 증명한다.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는 3부 ‘〈인왕제색仁王霽色〉도와 사도세자의 비극’을 보노라면 기왕의 해설에 견주어 당혹감과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다. 비가 그친 뒤의 인왕산 풍경을 그린 국보 216호 〈인왕제색〉은 그동안 겸재와 사천 이병연의 아름다운 인연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돼왔다. 즉, 임종을 앞둔 사천의 쾌유를 빌며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흔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오주석 선생이 처음으로 해석해낸 것이다. 오주석 선생은 사천이 세상을 떠날 즈음 인왕산에 큰비가 내렸다는 기록을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해석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일흔다섯 상늙은이가 된 겸재가 사천의 쾌유를 빌며 그렸다면, 무려 여섯 자나 동원하여 ‘신미윤유월하완’이란 구체적인 제작일자를 병기하면서도 사천을 지칭하는 글자는 단 한 자도 써넣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사천의 나이 여든한 살로 노환으로 죽는 것인데, 그 역시 노년인 겸재가 사천이 임종하기 불과 나흘 전, 그것도 저녁 무렵 인왕산에 비가 그치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평생의 은인이자 친구인 사천의 쾌유를 빌며 붓을 들 생각을 했을까?
겸재는 비에 젖어 어둡게 변한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후 ‘인왕제색仁王霽色’이라 써넣었다. 문제는 비에 젖어 어둡게 변한 인왕산의 모습과 인왕제색이란 글귀가 하나로 겹쳐지지 않는 까닭에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인왕제색’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상 ‘비 그칠 제霽’는 동사로 쓰이며, 제월霽月(비가 갠 맑은 하늘에 뜬 달), 제천霽天(맑게 갠 하늘) 등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듯 명사 앞에 놓여 ‘일시적으로 가려져 있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함’이란 의미로 쓰이기 때문이다.
‘인왕제색’을 정확히 풀이하면 ‘인왕산에 비가 그쳐 인왕산 본연의 얼굴색을 회복함’이란 뜻이 되는데,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인왕산 본연의 희고 매끄러운 암벽이 아니라 어둡게 물든 인왕산이 버티고 서 있지 않은가? 이처럼 인왕제색의 의미와 〈인왕제색〉도의 모습이 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겸재가 그려낸 〈인왕제색〉도는 가까운 미래시제를 현재진행형으로 표현하는 문장 형식으로 이해하면 쉽게 설명이 된다. 약속 시간이 지났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며 ‘어디야?’라고 전화하자 ‘미안! 미안! 가고 있어….’라고 하였다면, 이는 ‘가고 있다(현재진행형)’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고 있으니(현재진행형) 곧 도착할 것이다(가까운 미래시점).’라는 뜻이듯, 겸재는 비에 젖어 어둡게 물든 인왕산이 빠른 속도로 빗물을 배출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후(현재진행형) ‘인왕제색’이란 글귀를 써넣어 가까운 미래시점(물기가 마른 인왕산 본연의 흰 얼굴을 회복한 모습)을 표현했던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인왕제색〉도에 함께 들어가 거닐어보길 권한다.
산봉우리, 그리로 오르는 길, 폭포들, 두 군데의 집들, 그 중간에 난 사잇길 등등을 하나하나 가리키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로 그려지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인왕제색〉도를 겸재와 사천의 관계에 국한시키지 말고 장동 김씨 집안과 하나로 묶어보면 당시의 정치 기상도가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를 정황 증거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입증하려면 〈인왕제색〉도를 통해 당시 정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인왕제색〉도에 대하여 언급한 제시題詩 한 줄 찾을 수 없다. 이는 당시 조선에서 〈인왕제색〉도를 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 오늘날과 같이 전시장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닌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가까운 지인들끼리 함께하며 서화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고, 이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제사題辭나 제시題詩였음을 감안할 때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자타공인 조선후기 화단의 영수이자 최고의 감식안 강세황 선생이 남긴 『표암유고豹菴遺稿』에조차 〈인왕제색〉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 역시 이상하다. 겸재의 그림들에 적지 않은 평을 남긴 표암이 〈인왕제색〉도를 본 적이 있었다면 『표암유고』에 감상평 한 줄 남기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인왕제색〉도가 그려질 당시 표암은 사십 문턱을 바라보며 왕성히 활동하던 문예인이었고, 이후 40년 동안 조선 문예계의 한 축을 맡아온 화가이자 비평가였다. 그런 표암조차 〈인왕제색〉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면 당시 조선 문예계에서 〈인왕제색〉도를 본 사람이 있기나 하였던 것일까?
언제 어떤 계기로 〈인왕제색〉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다수 조선후기 문예인들은 작품을 보기는커녕 작품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왕제색〉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누가 소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인왕제색〉도를 처음 소장하고 있던 사람은 분명 작품 공개를 극도로 꺼려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서화를 즐기는 일반적인 소장자였다면 적어도 가까운 몇몇 지인들에게라도 작품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절로 〈인왕제색〉도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닌 걸작이기 때문이다. 이는 필경 어떤 특별한 이유에서 〈인왕제색〉도가 탄생한 순간부터 적어도 조선후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작품의 존재를 철저히 감춰왔다는 반증 아닐까?
그림과 화제?題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읽지 않을 때 진경산수화의 전모가 보인다.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란 말은 당연히 진경산수화에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아니 진경산수화는 그림으로 엮어낸 문장이라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미술사가들은 진경산수화를 박물관에 모시는 일에 급급할 뿐, 진경산수화에 내포된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내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일엔 적극적으로 나서려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 훈수를 두던 학자들도 정작 진경산수화를 읽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큰맘 먹고 박물관을 찾은 관객들이 교과서에서 봤던 낯익은 진경산수화를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오늘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
조선후기 화가들이 어떤 생각과 의도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학문의 영역에서 다루고자 하면 어떤 자료보다 작품 속에 쓰인 화제를 우선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만만치 않은 것이, 그림에 쓰인 화제가 대부분 한시 형식을 빌리고 있고, 문장으로 쓰인 경우에도 제한된 공간에 고도로 함축된 화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미술사가들은 한학자漢學者들에게 번역을 맡기고 해석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비켜선다. 학설의 기초가 되는 자료를 해석할 능력도 없고, 남이 해석해준 자료조차 이를 검증해보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어떻게 논지를 세울 수 있으며, 이를 정설이라 대못을 박아대고 있는지 한국 미술사학의 현주소가 암담하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음이 핑계가 될 수도 없지만, 최소한 원문과 한학자들이 해석해준 것을 비교 검토만 해봐도 드문드문 해석에서 빠진 글자와, 원문과 달리 쓰인 글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묻지도 않고 자기 책임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설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문헌 연구에만 매달릴 뿐 정작 작품을 세심히 살피지도 않으니, 눈앞에 보이는 특이점도 놓치고 있다.
제발 작품부터 꼼꼼히 살펴보는 학문적 풍토가 조성되어, 일반 감상자들이 우리 작품을 보는 눈이 더욱 깊어지게 되기를 바란다.
[책 속으로 이어서]
앞서 필자는 〈인왕제색〉도를 겸재와 사천의 관계에 국한시키지 말고 장동 김씨 집안과 하나로 묶어보면 당시의 정치 기상도가 보인다는 주장 끝에 〈인왕제색〉도는 신미년(1751) 5월 영조께서 서둘러 왕세손을 책봉한 일과 관련된 작품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를 정황 증거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입증하려면 〈인왕제색〉도를 통해 당시 정치 상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인왕제색〉도에 대하여 언급한 제시題詩 한 줄 찾을 수 없다. 이 땅의 미술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영조 치세治世를 조선의 문예부흥기라느니 조선의 르네상스시대 심지어 진경시대眞景時代라 부르건만, 정작 영조 치세를 대표하는 화가 겸재가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노년의 역작 〈인왕제색〉도에 어떻게 흔하디흔한 제시 한 줄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이는 당시 조선에서 〈인왕제색〉도를 본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물론 이것이 당시 조선 사회에 오늘날과 같이 전시장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닌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가까운 지인들끼리 함께하며 서화를 즐기는 문화가 있었고, 이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제사題辭나 제시題詩였음을 감안할 때 쉽게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러한 현상을 세월이 오래 경과된 탓으로 돌려야 할까? 그러나 자타공인 조선후기 화단의 영수이자 최고의 감식안 표암 강세황 선생이 남긴 『표암유고豹菴遺稿』에조차 〈인왕제색〉도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문제이다.
왜냐하면 겸재의 그림들에 적지 않은 평을 남긴 표암이 〈인왕제색〉도를 본 적이 있었다면 『표암유고』에 감상평 한 줄 남기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인왕제색〉도가 그려질 당시 표암은 사십 문턱을 바라보며 왕성히 활동하던 문예인이었고, 이후 40년 동안 조선 문예계의 한 축을 맡아온 화가이자 비평가였다. 그런 표암조차 〈인왕제색〉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면 당시 조선 문예계에서 〈인왕제색〉도를 본 사람이 있기나 하였던 것일까? 언제 어떤 계기로 〈인왕제색〉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대다수 조선후기 문예인들은 작품을 보기는커녕 작품의 존재 자체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왕제색〉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누가 소장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인왕제색〉도를 처음 소장하고 있던 사람은 분명 작품 공개를 극도로 꺼려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서화를 즐기는 일반적인 소장자였다면 적어도 가까운 몇몇 지인들에게라도 작품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절로 〈인왕제색〉도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닌 걸작이기 때문이다. 이는 필경 어떤 특별한 이유에서 〈인왕제색〉도가 탄생한 순간부터 적어도 조선후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작품의 존재를 철저히 감춰왔다는 반증 아닐까? _252-253쪽 ‘아! 〈인왕제색〉’
표현이 진실하려면 깊이 느낄 줄 알아야 하고, 경험을 통해 뜻이 확고해지면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마련이며, 적극적으로 일에 매진하는 사람은 희생도 감내할 수 있는 법이니, 이는 함께 일을 도모할 사람을 선택할 때 가장 눈여겨봐야 할 덕목이다. 이런 관점에서 겸재의 〈청풍계〉에 세 개의 연못과 함께 항상 등장하는 커다란 회나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략)
대표적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들이 마련해둔 ‘청풍계’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서원이나 성균관에서 배우는 일반적 유학이 아니라 노론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학문으로, 이를 통해 언젠가 노론 일색의 조정을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이야기이다.
혹자는 이 지점에서 놀라운 이야기이기는 하나, 이는 오늘날 모든 정당이 정권 창출을 목표로 함을 감안할 때 어찌 보면 정치의 당연한 생리라 하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위해선 먼저 바위 골짜기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술통을 조정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조정이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에게 제주祭酒를 올리는 일, 다시 말해 장동 김씨 조상들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일에 함께 노력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岩壑留樽久 雲巒與席移]. 한마디로 벼슬자리를 걸어놓고[城中塵萬斛 一點不能隨] 희생정신을 요구하며[入門由獨檜 淸宅以三池] 노론 세력을 장동 김씨들의 사조직으로 재편하고자 ‘청풍계’를 운영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것이 ‘청풍계’ 입구에 서 있던 커다란 회나무였고, 이것이 겸재가 그린 〈청풍계〉에 항상 커다란 회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라 하겠다. _290-292쪽 ‘청풍계’
이는 조선후기 화가들이 어떤 생각과 의도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학문의 영역에서 다루고자 하면 어떤 자료보다 작품 속에 쓰인 화제를 우선시하여야 한다는 뜻인데… 문제는 이것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림에 쓰인 화제가 대부분 한시漢詩 형식을 빌리고 있고, 문장으로 쓰인 경우에도 제한된 공간에 고도로 함축된 화의?意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미술사가들은 한학자漢學者들에게 번역을 맡기고 해석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곤 한다.
어이없는 일이다.
학설의 기초가 되는 자료를 해석할 능력도 없고, 남이 해석해준 자료조차 이를 검증해보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어떻게 논지를 세울 수 있으며, 이를 정설이라 대못을 박아대고 있는지 한국 미술사학의 현주소가 암담할 뿐이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음이 핑계가 될 수도 없지만, 최소한 원문과 한학자들이 해석해준 것을 비교 검토만 해봐도 드문드문 해석에서 빠진 글자와, 원문과 달리 쓰인 글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묻지도 않고 자기 책임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설 수 있는 것인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문헌 연구에만 매달릴 뿐 정작 작품을 세심히 살피지도 않으니, 눈앞에 보이는 특이점도 놓치고 있다. 제발 작품부터 꼼꼼히 살펴보시길 바란다. _429쪽 ‘글을 마치며’
기본정보
ISBN | 9791159255274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04월 10일 |
쪽수 | 440쪽 |
크기 |
163 * 226
* 29
mm
/ 799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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