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아무 일 없이 평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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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곽구영
작가의 말
내 귀가 되어버린
귀가 되어 내 귀를 먹어버린
두 번째 발자국을 남긴다.
두렵고 초조한, 죄업 같은,
나는 여전히 외롭고
발목은 시리다.
2020년 12월
곽구영
목차
- 제1부
응 ㆍ 13
봉강다방 W.C에서 할머니를 만나다 ㆍ 14
칼라꽃에 울다 ㆍ 16
자꾸 불었네 ㆍ 18
깐치밥 ㆍ 19
경남 양산시 원동면 장선리 542 박 아무개 씨 ㆍ 20
멍멍 멍 멍에 ㆍ 22
혼자 먹는 것도 안씨럽는데 ㆍ 24
어서 잡숴! ㆍ 25
배롱나무 꽃 피었다 ㆍ 26
유채꽃밭에서 ㆍ 28
가을밤은 죄가 없대요 ㆍ 30
시시끙끙 ㆍ 31
탐정 놀이 ㆍ 32
시오시 시오시 부재이 오시 ㆍ 34
제2부
점심(點心) ㆍ 37
새파랗게 붉은 봄바람은, ㆍ 38
하, 시절 ㆍ 40
아침깜짝물결무늬 풍뎅이 ㆍ 42
고주박잠 ㆍ 43
나키 세 번 ㆍ 44
한산면 추봉도 김규일 씨 ㆍ 46
마지막 보시 ㆍ 48
자이로드롭 ㆍ 49
떽! ㆍ 50
우포 발바리 ㆍ 52
동리(凍梨) ㆍ 53
나도승마 ㆍ 54
붉은 휘파람 ㆍ 56
아그배나무 사랑 ㆍ 57
하얀 민들레 부근 ㆍ 58
제3부
허무의 변증법 ㆍ 61
떼까마귀는 피를 토하고 ㆍ 62
박쥐 ㆍ 64
공사 중 ㆍ 65
독감論 ㆍ 66
고리 ㆍ 68
어이 ㆍ 69
신용불량자, 지구 ㆍ 70
죄 ㆍ 72
목련나무가 있는 풍경 ㆍ 73
지구 헬스장 ㆍ 74
어떤 인생 ㆍ 76
동방예의지궁 ㆍ 77
38˚C ㆍ 78
먼지 ㆍ 80
제4부
천적 ㆍ 83
하동(河童)의 전성시대 ㆍ 84
바랭이 풀에 대하여 ㆍ 85
새벽에 돌아가신 장모를 만나다 ㆍ 86
어머니의 끗발 ㆍ 88
이[齒]의 사랑학 ㆍ 89
아내의 집 ㆍ 90
귀성전쟁 ㆍ 92
환한 고백 ㆍ 93
은주의 까치발 ㆍ 94
돌고 돌아, 그리움 ㆍ 96
난달래 향기 ㆍ 97
연분홍 ㆍ 98
다섯 아버지와 다섯 남편 이야기 ㆍ 100
아나 무시뿌리 ㆍ 101
반성 ㆍ 102
해설
생명성의 소환 혹은 직관의 황홀한 힘 ㆍ 103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책 속으로
맨 처음 감싸보는 브라자
어린 염소 새까망 브라자
친구 김 아무개는
목화꽃 하양 브라자
열여섯 이팔청춘, 신발공장 첫 봉투
부모 내복과 함께 산 첫 브라자
얼마나 신났으면
신불산 구름 위를 날았을까
얼마나 젖고 싶어
오밤중 파래소에 들었을까
어느 저녁,
아무개 처녀 둘이 브라자를 말리는데
자작 바지랑대에 까망 하양 가슴 걸어
속닥숙덕 살금슬금 말리는데
누고오!
아부지 헛기침, 벼락닫이 여는 소리
아이고 아이고야
염소 브라자 목화 브라자
소죽 솥 아궁이로 사라지네
톳톳톳톳
숯불 속에 사라진
두 사슴의 첫 꿈, 같은
- 「경남 양산시 원동면 장선리 542 박 아무개 씨」 전문
부슬부슬 비 내려 벚꽃 젖는
4월 19일, 오후 4시
달동 ○○백화점 뒷골목
〈기사님 돼지국밥〉
낡은 TV엔 밀고 당기는 드라마 재방 중인데
늙수그레한 택시 기사 서넛
멀뚱멀뚱 무료한 식탁에 앉았다
언제나 그 자리인 소금그릇 양념장 종지 후춧가루 통
깍두기 한 접시와 양파 몇 조각, 풋고추 세 개
막 나온 뚝배기에서
건성처럼 김이 오른다
희멀건 국 속의 비계 몇 점이
허연 배를 깔고 누웠다
육십 년 전 오늘의 붉은 피꽃 대신
얼굴에 검은 꽃 피운 사람들의 늦은 점심
네 시 십구 분
돼지국밥이 눈 흘기며 하는 말,
어서 잡숴!
- 「어서 잡숴!」 전문
탐욕에 탐닉한다 탐닉이 탐욕한다 내가 탐욕을 건네니 그도 탐닉을 보낸다
나는 빨리 늙어버렸어 내가 탐욕을 버리니 그는 탐닉의 꼭지를 세우고 너를 위해
갯벌을 펼친다 갯벌은 탐욕과 탐닉을 담는다 내 젊은 날 갯벌에 옥수수 씨앗을 뿌렸지만
나의 가을은 늘 빈손이었다 탐욕과 탐닉과 내가 만드는 허무의 변증법,
헤겔의 변증법은 틀렸다, 나는 더 이상 진화되지 않는다
- 「허무의 변증법」 전문
지구가 너무 뜨겁군!
신이 형광등을 비춰
잠든 지구를 살펴보고 있다
신의 중성자 비파괴 검사 결과는
지구의 체온이 너무 높다는 것
지구를 원이 아니라 삼각형이나
사각형으로 만들었다면 좋았을 걸, 하고
잠시 생각했다
신은 지구의 꿈을 읽을 수가 없다
시간은 새우 프라이를 꿈꾸고
새우 프라이는 노트북을 꿈꾸고
노트북은 자동차 바퀴를 꿈꾸고
자동차 바퀴는 빨간 토마토를 꿈꾸는
지구의 꿈, 꿈, 꿈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
휴대폰이 말을 해도 지구는 받을 수 없다
지구는 지금 신용불량자
지구는 더 이상 지불할 은행 잔고가 없다
- 「신용불량자, 지구」 전문
■ 시인의 산문
칠순(七旬)의 세월은
다리를 절며 온다
술잔조차도 점점 깊어져 간다
쿨럭쿨럭 마시고
쿨럭쿨럭 운다
병(甁)을 든
병(病)이여,
하현(下弦)에 먹을 놓는 서리 기러기여!
출판사 서평
살아있는 것들은 ‘약동’을 느끼게 한다. 물질로서의 언어, 기호(sign) 혹은 형이상학이나 지성이 압도한 문학 안에서 ‘생명성’이 설 자리는 빈약하다. 그것은 세계를 분석하거나 재구성하지만, 그렇게 해서 분절된 대상들은 죽은 사물이 된다. 분절된 것들은 지속성이 없으므로 중단된 현재이고, 생성이 사라진 물건이다. 곽구영 시의 힘은 생성을 멈추게 하는 지성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직관적 포획에서 나온다. 그의 언어는 생명을 소환하면서 물질성에서 벗어난다. 그가 불러낸 생명의 활기는 물질화된 언어조차 살아 움직이게 한다. 생명은 변화무쌍하고 예측 불가능한 ‘도약’의 상태에 있다. 베르그송(H. Bergson)은 이렇게 변화와 생성을 향해 있는 생명의 ‘시간’을 ‘지속(duration)’이라 부른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성’은 “생명에 대한 부동적이고 단편적인 투시일 뿐”이며, 반면에 “생명은 진행하고 지속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성’은 대상을 토막 내고 분절하여 “실재를 축소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직관’은 “대상을 반영할 수 있고 무한히 확대할 수 있는 본능”이다. 본능 안에 직관이 있고, 직관 안에 본능이 있다. 지성이 대상을 조각내고 범주화한다면, 본능과 직관은 대상을 통째로 읽어내며, ‘흐름’과 ‘지속’으로서의 생명을 그 자체로 포착한다. 곽구영의 시들은 이런 점에서 지성보다는 생명과 본능, 그리고 직관에 훨씬 더 가까이 가 있다.
종일 눈이 내려서
종일 입을 쉬지 않고 먹다가
봉강다방 W.C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져간 신문 다 읽고, 누가 놓고 간
구겨진 신문 쫙쫙 펴서 읽는데
우연히 내려다본 저 아래
오, 이런
변기통 고인 물에
내 입이 둥둥 떠 중얼거리고 있다
식탐은 나의 원죄
아침마다 오랜 시간
변소를 차지한 어린 나에게
이눔아 웃입이 편해야
아랫입도 편한 거여
치아 다 빠져
약과 닮은 입술 하나로
오물오물 야단치시던
할머니의 입
내 아래로 찾아와 딱 붙었다
하루 종일 오물오물 말하는 입
볼일도 못 보게 하는 입
내 아래의 입
- 「봉강다방 W.C에서 할머니를 만나다」 전문
이 시의 힘은 추상과 관념을 다 덜어내고 생명 그 자체에 집중하는 데에서 나온다. 간단히 말해, ‘먹고 싸는 일’이 이 시의 주제이다. 이 시의 배경도 “봉강다방 W.C”로 매우 구체적이다. 그런데도 이 시에 은유와 사유의 숭고한 효과가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이 시는 소화-기계와 배변-기계를 “웃입”과 “이랫입”의 ‘입’으로 동일시하고 있다. 먹는 일과 싸는 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생명과 본능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본능 안에서 가장 깨끗한 것과 가장 더러운 것은 동일한 것의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 둘째, 이 시는 “할머니의 입”을 끌어들여 성찰(“식탐은 나의 원죄”)을 더욱 퐁요롭게 만든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지속이란 과거가 미래를 갉아먹고 부풀어 나가면서 전진하는 연속적인 진전이다. 과거가 끊임없는 부풀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과거는 또한 한없이 보존된다.” 할머니의 담론을 호출함으로써 ‘과거’는 현재 안에서 ‘보존’되고 ‘지속’되며 미래를 부풀린다. 할머니의 입담에 의해 현재는 이중의 의미로 증폭되고, 과거는 사라지지 않으며 현재의 생성 안으로 이어진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기본정보
ISBN | 9791158964948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11월 27일 | ||
쪽수 | 120쪽 | ||
크기 |
125 * 205
* 12
mm
/ 180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인동네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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