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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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종정순
저자 종정순은 인천 강화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강화에서 살고 있다.
2016년 계간 『시인동네』에 「뱀의 가족사」 외 1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아르코 문예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작가의 말
아픔 없는 것은 삶이 아니라면
최선을 다해서 아프겠다.
통증에서 꽃이 나오고
눈물에서 무지개가 뜨도록.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인삼과 나의 불편한 관계 13
강화요(江華窯) 14
꽃을 반성하지 않는다 16
뱀의 가족사 18
불경기 20
두멧골 22
순두부 23
현대방앗간 24
백수련 저수지 26
밥꽃 28
빨래 29
삼향(蔘香)이 배다 30
오리무늬 화문석 32
붉은 눈 34
제2부
저울 37
발과 눈을 맞추다 38
모과나무 40
부엌에서 내다보는 히말라야 42
태평농법은 바쁘다 44
전봇대 46
돌나물 48
나의 애마 포니 50
해빙기 52
메주 54
심 봤다 56
어머니 통장 58
그리마 60
달팽이 62
제3부
폭설 65
귀뚜라미 보일러 66
야광 68
흰 뿔 70
자동유리문 72
호밀 74
쇠비름 경전 75
흑거미 76
오빠 78
기러기 80
행복요양병원 81
땟물 82
아버지의 집 84
가을밤 86
제4부
가시를 쬐다 89
오디 따기 90
왕소금 수세미 92
시냇물 94
약쑥 95
묵흔(墨痕)이 될 수 있다면 96
입김 98
강화 냉이 99
삼(蔘)을 쬐다 100
꽃똥 102
이강리(梨江里)103
봄이 느리게 오는 이유 104
애인이 진통제다 106
소꿉놀이 108
후끈거리다 110
해설 시간으로 엮은 특화된 존재태 111
/진순애(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인동네 시인선〉 063. 2016년 계간『시인동네』에 「뱀의 가족사」 외 1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종정순 시인의 이번 첫 시집은, 늦깎이 시인으로 출발한 그의 시사(詩史)적 비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시간’으로 특화된 구조 속에서 종정순의 시세계를 만나는 일은 그를 만나는 일이자 민족의 초상을 만나는 일이며, 궁극에는 초월적인 서정의 세계에 이르는 일이다. 종정순의 시가 그리고 있는 진경들이 민족적일 뿐만 아니라 서정을 아우르는 초월적 풍경으로 특화된 까닭에 그러하다. 종정순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의 지평 속에서 시의 원형적 기준이자 초월 세계인 근원으로서의 과거를 그림으로써 불편한 현재를 성찰해 나간다. 현재의 삶이 비록 곤고하고 불편할지라도 과거라는 뿌리, 그 초월적인 기둥에 기대임으로써 견지해나갈 수 있음을 종정순의 시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다. 이는 ‘현재란 과거와 무관할 수 없다’는 무언의 언명 뒤에서 세상과의 불협화음을 ‘불편하게’ 성찰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세상에 대한 은밀한 질타로서의 불편한 성찰이며, 잃어버린 것들을 향한 그리움을 은폐한 언어 세계다. 불가능성을 초월적 그리움은 세상과의 불편한 관계 성찰을 통해 결국 근원에 이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시간으로 엮은 특화된 존재태
1. 특화된 시간구조
종정순 시의 시간구조는 과거와 현재가 주를 이루면서도 시간이 정지된 초월의 세계에서 만개한다. 종정순에게 초월은 온전한 초월이기도, 그리고 시간과의 교집합이 낳은 초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정지된 시간은 초월적 세계이기도, 과거의 어느 특정 시점이기도 하다. 때문에 양자는 정지된 시간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초월적 세계는 초월적이므로 시간이 정지된 세계이며 과거는 기억 속에 저장된 세계이므로 시간이 정지된 세계이다. 양자는 정지된 시간으로써 종정순 시의 원형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같다. 그러면서도 시적 주체와 직접적 시간으로 관계하느냐 간접적 시간으로 관계하느냐의 관계적 차이로써 다르다.
물론 누구나 그러하듯 우리가 시간의 존재이므로, 종정순 또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의 지평 속에서 시적 지평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종정순에게 과거는 현재를 반추하게 하는 근원으로 작용하는, 곧 초월의 세계와 다르지 않은 과거로써 원형적 기준이라는 점에서 남다르다. 불편한 현재를 성찰하는 잣대로서 과거라는 점에서 과거의 풍경은 민족적이면서도 종정순만의 개인적 과거로 특화된다.
2. 불편한 관계의 현재
인삼을 판매하거나 손님이 주문한 택배 인삼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잴 때면 슬며시 사람 인(人)자 삼들의 눈치를 본다 강화 인삼시장 한 귀퉁이 주인을 빙 둘러싼 인삼주 병들, 저울 눈금이 정확한지 짓무른 삼은 섞이지 않았는지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 술병 속에 좌선하듯 틀어박혀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하는 인삼들, 오늘도 돈 벌기는 다 글렀고 내친김에 장사하는 척 道나 닦아볼까 어느 첩첩 산골 수십 년 근 산삼처럼 독하게 콱 틀어박혀 눈치 보는 마음 인삼주처럼 맑아질 때까지 가게 발효나 시켜볼까
마음을 닦듯 술병에 앉은 먼지를 닦으며
人자 삼과 부릅, 맞장을 뜬다.
-「인삼과 나의 불편한 관계」 전문
인삼을 판매하는 일은 종정순의 현존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므로, 종정순은 ‘人자 삼과 부릅, 맞장을 떠야 하는’ 일에 직면한다. 비록 ‘맞장을 떠야 하는 일’의 목적이 인삼 판매에 있지 않고 ‘눈치 보는 마음 인삼주처럼 맑아질 때까지’라고 언명했을지라도 양자는 다르지 않다. 종정순이 인삼 판매로 무리한 폭리를 취할 것은 아닌 까닭에 양자를 오가는 종정순이 인삼과 불편한 관계에 처해야 함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삼이 종정순의 현존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이므로 종정순은 인삼에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나, 오히려 인삼과 ‘부릅, 맞장을 뜨는 것’은 ‘사람 인(人)자의 삼’인 까닭에 있다고 불편하게 성찰한다.
때문에 종정순은 ‘인삼을 판매하거나 손님이 주문한 택배 인삼을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잴 때면 슬며시 사람 인(人)자 삼들의 눈치를 보기도’ 하며, ‘강화 인삼시장 한 귀퉁이 주인을 빙 둘러싼 인삼주 병들, 저울 눈금이 정확한지 짓무른 삼은 섞이지 않았는지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술병 속에 좌선하듯 틀어박혀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독하는 인삼들’ 때문에 궁극에는 ‘오늘도 돈 벌기는 다 글렀고 내친김에 장사하는 척 道나 닦아볼까’라고, ‘道 닦기’에 이르게 하는 인삼의 유인력이 종정순을 불편한 성찰로 유인하는 근원이다.
인삼뿐만이 아니다. “내가 여태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전자저울 때문”(「저울」 부분)이라는 지적처럼 접시저울의 시대를 소멸시키고 등장한 전자저울은 ‘0.0001그램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불편한 매개체이다. ‘0.0001그램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전자저울이 종정순에게 편리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불편한 관계를 맺게 한다’는 역설이 역설적이게도 성찰을 유인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가격대로 정량을 주자니/너무 야박하다 싶어 한 뿌리 올리고/없는 이문에/다시 내리고/양심은 내려갈까 올라갈까 매번 떨리고 손도 떨리게” 하는 전자저울이라는 것이다. 궁극에는 “고객들이 양심보다 더 신뢰하는 전자저울 모르게 슬쩍”,“복 짓는 데는 손저울이 최고/에라, 덤”으로라고 손저울의 유인력으로 귀결 짓는다. 이렇듯 현재와는 불편하게 관계할 뿐이므로 현재와의 불협화음에 종정순이 대응하는 방법은 과거로의 귀환에 있다.
3. 근원적으로 슬픈 과거
오리궁둥이 아버지, 절반의 뼈는 왕골이었다
앉아서 매만져 잘게 쪼개야
일어서는 가계의 뼈
오리 한 마리가 연못 위로 고개를 쳐들고
식구들이 목이 마를 때 오리 한 마리 또 늘었다
처마 끝 함석 오리가 목을 쭉 내뽑던 지붕
비가 오는 날이면
방 안은 양동이들이 찰방거리는 못으로 바뀌기도 하였는데
열 손가락 지문을 지우고
갈퀴 손끝에서 태어나던 물갈퀴
고드랫돌 딸그락 딸그락
색오리들이 물놀이를 하였다
왕골이 못 박인 손
소용돌이 지문을 연못으로
쪼갠 왕골 뼈 물결로
사라진 아버지의 지문이
화문석에 만개했다
그 연못 위에
설핏 잠들었던 얼굴에 박힌 날개 자국,
딸그락딸그락 바람 속으로 왕골 뼈를 세운다
-「오리무늬 화문석」 전문
오리무늬 화문석은 ‘아버지의 오리궁둥이 뼈요, 아버지의 열 손가락의 지문이요, 왕골이 못 박인 아버지의 손이요, 가계의 뼈요, 궁극에는 아버지의 일생’이다. 아버지의 지문이 만개한 화문석 위에서 ‘설핏 잠들었던 얼굴에 박힌 날개 자국’으로 각인된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끌어내는 일은 근원적으로 슬픈 과거를 되새김하는 일이다. 근원적으로 슬픈 과거란 종정순만의 슬픈 과거가 아니므로 근원적이다.
슬픈 과거는 종정순의 개인적 과거이기도 하고, 왕골의 화문석으로 가계를 이어가던 강화도민의 과거이기도 하며, “오리 한 마리가 연못 위로 고개를 쳐들고/식구들이 목이 마를 때 오리 한 마리 또 늘었다/처마 끝 함석 오리가 목을 쭉 내뽑던 지붕/비가 오는 날이면/방 안은 양동이들이 찰방거리는 못으로 바뀌기도 하였던” 풍경으로 대변되는 우리 민족의 가난한 과거상이기도 하다. 가난은 민족적 슬픔으로 특화된 과거의 풍경인 까닭에 근원적이다.
“화문석 바닥에 매화 난초 목단 소나무 대나무를 심어 꽃피우고/학 오리 봉황 까치 사슴을 키우며”(「아버지의 집」 부분), 밤이 이슥하도록 화문석을 짜느라 늘 잠이 모자랐던 아버지는 이제 ‘댓돌 위 신발도 방 안으로 들여놓고 단잠이 깊다. ’마침내 아버지는“붓꽃 원추리꽃 양지꽃 벌 나비에/방목하는 꾀꼬리 종달새 참새 토끼 뻐꾸기 꿩 콩새에/치우지 않아 마른 채 쌓인 산짐승 똥에/다시는 이사 가지 않을 집을 지으셨던 것”이다. ‘낮은 잔디 지붕으로 봉한 토굴집’ 속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잠이 모자랄 일이 없으리라’는 역설 속에 슬픈 과거를 근원적으로 되새김하는 성찰이 내재한다.
하늘이 땅으로 실뿌리라도 뻗듯 가랑비 내린 밭둑이다
노랑나비보다 먼저 꽃다지보다 먼저 피어난 꽃,
희끗희끗 동해 입은 양날 톱니 잎사귀
겨우내 머리를 치던 눈발에
땅과 바위를 뚫는 뿌리는 깊고 날카로워진다
달이 차오른 배를 안고 저녁 끼니거리 절구에 보리방아 찧고 방 문턱 넘다가
아기를 낳기도 했다는 섬
굽은 등처럼 엎드린 섬 하나가 바다를 물고 놓지 않는다
머리채를 잡아채는 해풍에
대못이 뿌리를 내린다
-「강화 냉이」 전문
‘달이 차오른 배를 안고 저녁 끼니거리 절구에 보리방아 찧고 방 문턱 넘다가 아기를 낳기도 했다’는 강화섬에 자생하는 강화 냉이를 ‘머리채를 잡아채는 해풍에 대못이 뿌리를 내린다’는 비유가 근원적으로 슬픈 혹은 비극적인 과거를 되새김하고 있다. 그 비극은 단지 강화도민만의 그것이 아니라 민족의 전체적인 비극이자 슬픔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이다. ‘굽은 등처럼 엎드린 섬 하나가 바다를 물고 놓지 않는다’는 강화도의 형상도 단지 강화도만의 섬 모양이 아닐 터이듯 그것은 질기고 또 질긴 삶의 끈을 놓지 못해 혹은 놓을 수 없었던 우리의 민족적 끈과 다르지 않으므로, 강화도의 형상을 넘어설 수밖에 없다.
민족이란 전자시대 이전의 공동체를 대변하는 기호이자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삶이다.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형상을 찾아서 아스라이 사라지는 풍광을 움켜쥔 시인의 초상 또한 비극적이다. 시인의 초상도 비극적이고 민족의 초상도 비극적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은 이제 슬픔의 시간으로 아스라이 자리할 뿐이다. 그럼에도 종정순 시의 견인력으로 작용하는 원형이자 민족의 뿌리라는 점에서 돌아갈 수없는 과거는 현재를 통찰하게 하는 그리움의 샘이다.
4. 초월적으로 정지된 시간
장닭 긴 목청이 능금 속에 있다, 터진다
별립산 그림자 저수지에 닿자 퍼들쩍 물새 몇이 물낯을 때리며 날아오른다
저 파문을 따라 산 능선 몇 자락도 흘러내리는 한때
날개 끝에는 뿌리치지 못한 저수지의 물들이 매달려 있다
뒤꼍 감나무 위 전깃줄은 현악을 타는 줄이다
뻐꾸기 까치가 튕기다 날아가면 꾀꼬리가 울고
방앗간 지붕에 앉아 있던 개개비 무리도 통통 끼어든다
전봇대 타고 오른 칡넝쿨을 도돌이표로 삼아도 좋겠다
창문 앞 텃밭에는 토마토가 한상이다 콕콕,
이슬을 쪼는 아침 햇살처럼
토마토 볼엔 콩새들의 부리가 달짝지근하게 찍혀 있다
복실이가 혓바닥으로 연신 빈 밥그릇을 닦고 있는 마당귀
담장 호박덩굴엔 줄줄이 노란 스피커,
이장님 목소리 따라 벌들이 붕붕 아침 방송 볼륨을 높인다
상추포기 속 달팽이도 느릿느릿 촉수를 내미는 시간
알람시계 대신에 집안으로 두멧골을 들인다
무너진 돌담장, 아직 수리하지 못한 아침
?「두멧골」 전문
두멧골의 시간은 ‘상추포기 속 달팽이가 느릿느릿 촉수를 내미는 시간’으로 흐른다. ‘장닭의 긴 목청은 능금 속에서 터지고, 별립산 그림자 저수지에 닿은 물새 몇 마리는 퍼들쩍 물낯을 때리며 날아오르고, 저수지의 파문을 따라 산 능선 몇 자락도 흘러내리는 두멧골의 한때’는 이제 초월적으로 정지된 시간이 되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상추포기와 달팽이가 조응하고, 장닭이 능금과 조우하며, 별립산이 저수지와 조응한다.
때문에 ‘뒤꼍 감나무 위의 전깃줄’은 초월적으로 정지된 시간을 방해한다. ‘담장 호박덩굴엔 줄줄이 노란 스피커’도, ‘이장님 목소리 따라 벌들이 붕붕 아침 방송 볼륨을 높이는 풍경’도 방해꾼이다. 그럼에도 ‘전봇대 타고 오른 칡넝쿨이’, ‘뻐꾸기 까치가 튕기다 날아가면 우는 꾀꼬리가’, ‘방앗간지붕에 앉아 있던 개개비 무리가’, ‘창문 앞 텃밭의 토마토가’, ‘토마토 볼을 쪼는 콩새들의 부리가’문명의 방해꾼을 밀어내며 두멧골과 초월적으로 조응한다. 정지된 두멧골에서 불편한 문명의 시간을 질타하는 종정순의 초월적 그리움이 서정적으로 조응한다.
길이 감긴다, 친친
해안가 뚝방길 따라 오르는 길
도공의 손에 들러붙은 흙처럼 신발에 젖은 황톳길이 들러붙는다
월곶리(月串里) 달 물레,
개펄을 끊임없이 주물럭주물럭 석기시대 토기 같은
섬 하나를 빚어놓은 바다
항아리 안에 숨어서 술래가 찾아오길 기다리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던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염하강 너머 소식이 궁금해서 키를 우뚝 세우고 있는 오동나무
외이가 넓은 잎사귀마다 해풍 펄럭이는데
나이테가 감기듯 조여드는 길
섬 하나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반죽을 이긴다
-「강화요(江華窯)」 전문
‘섬 하나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반죽을 이기며 강화요’를 빚는 도공의 시간은 서정적으로 초월한 시간이다. 도공의 시간이 서정적으로 초월한 시간이듯 ‘항아리 안에 숨어서 술래가 찾아오길 기다리며 잠에 빠져들던 아이’가 있던 시간도 이제 정지된 초월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비록 과거와 교집합적으로 초월한 시간일지라도 그것은 근원적인 과거의 슬픔조차 초월하게 한 시간이므로, 도공의 시간처럼 우리를 서정적 미의 세계에 이르게 한 초월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개펄을 끊임없이 주물럭주물럭 석기시대 토기 같은//섬 하나를 빚어놓은 바다”나, “염하강 너머 소식이 궁금해서 키를 우뚝 세우고 있는 오동나무”가 있는 풍경도 서정적으로 작용하는 정지된 초월의 세계이다. ‘항아리 안에 숨어 있던 아이도’, ‘석기시대 토기 같은 섬 하나를 빚어놓은 바다도’, ‘염하강 너머 소식을 궁금해 하는 오동나무도’, 모두 강화요를 빚는 도공의 시간의 출처인 까닭에 강화도의 풍경이 초월적인 서정의 근원이라는 종정순의 메시지다.
옥수수 이파리가 철썩철썩 마을을 핥는다
모래 위 소라껍데기를 쓰다듬는 바닷물처럼
젊은이와 아이들이 빠져나간 집을 쓰다듬는 이파리들
수위가 높아진 물결 위에 구름이 쉬고 새들이 날아다닌다
눈만 뜨면 엎드려 풀을 뽑는 사람들이다
몸에 풀냄새 배고
풀물은 닳은 손톱으로 들어가 까매진다
샛길마다 불어나는 푸른 물줄기,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이곳에서 얼마나 먼가
스적이는 초록 속으로 낡은 지붕들이 잠긴다
-「이강리(梨江里)」 전문
‘옥수수 이파리가 철썩철썩 마을을 핥으며 모래 위 소라껍데기를 쓰다듬는 바닷물처럼 젊은이와 아이들이 빠져나간 집을 쓰다듬는 이강리’의 풍경이 초월적으로 정지되어 서정적 세계로 새롭게 탄생한다. 더욱이 ‘스적이는 초록 속으로 낡은 지붕들이 잠기면서 수위가 높아진 물결 위에 구름이 쉬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풍경도 ‘이강리’를 서정적으로 초월하게 한다. ‘샛길마다 불어나는 푸른 물줄기의 마을’, ‘수위가 높아진 초록 물결 위에 구름이 쉬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마을’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이곳에서 얼마나 먼가”가 역설임을 방증한다. 초월적으로 정지된 ‘이강리’는 더 이상 이강리가 아니다.
초월적으로 정지된 풍경에 이르러 불편하게 성찰하던 현재도 근원적으로 슬픈 과거도 완성적으로 특화된다. 현재의 풍경도 과거의 풍경도 정지된 초월의 풍경도 시간으로 엮은 존재태이면서도 궁극에는 정지된 시간 속에서 서정적으로 초월하고 있어서, 여기에 종정순 시의 시간구조가 남다른 특장이 있다.
기본정보
ISBN | 9791158962715 | ||
---|---|---|---|
발행(출시)일자 | 2016년 08월 16일 | ||
쪽수 | 126쪽 | ||
크기 |
125 * 205
* 10
mm
/ 185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인동네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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