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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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작가의 말
어둡다는 건
바깥으로 기울어지는 일.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처럼
명랑을 배운다.
헤어진 꽃잎은
먼 곳에 나를 내려두고
벼랑으로 뛰어내린다.
절대로,
아프지 않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라흐마니노프가 온다 13
독작(獨酌) 14
화석(花席) 16
아름다운 환멸 18
불편한 연애 20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22
동백을 꺾다가 24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26
눈썹 27
맹신의 자세 28
서쪽 하늘 30
안개의 주소지 32
연인들 34
고요의 시원(始原) 36
학습된 무기력 38
시(詩)와 당신 40
손과 손톱으로 가늠하는 42
사육하는 문장 44
윤슬 46
그렇다고 치자나무 48
제2부
동굴의 역사(歷史) 51
이것은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52
수국수국 54
늦게 피는 꽃 56
내 구두 속 엉겅퀴 58
하염없는, 분홍 60
피해의식 61
꽃을 버린 저녁 62
분꽃 귀걸이를 단 소녀 64
꽃을 안치다 65
굿바이, 4월 66
유도화라 불렀다 68
습지의 기억 70
먼 옛날의 날개 71
멀구슬나무의 전생(轉生) 72
11월 74
채송화처럼 76
봄, 나쁜 년 77
명랑사발면 78
미로역 80
제3부
객관적인 세렝게티 83
하나님의 여자 84
다시, 풀밭 위의 식사 85
염소의 시간 86
레이스의 생각 88
한 평의 세계 89
골목의 오해 90
빛의 기원 92
겨울, 호근동 94
미끄러지는 무늬 96
너를 놓칠 때 97
아침에 쓴 시 98
불온한 바람 99
먹구슬 피던 집 100
블랙프라이데이 102
들어가지 마십시오 104
콩국이 끓는 시간 105
순한 세상 106
불화(不花) 107
섬 108
해설 빛 속에서만 가능한 일들 109
/장은정(문학평론가)
출판사 서평
〈시인동네 시인선〉 058. 2004년 계간 『리토피아』로 등단한 김효선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김효선 시인의 많은 시편이 정지되어 있는 것과 운동하는 것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세계를 읽어내는 것에 능숙하다. 그의 시에서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타자와 어떻게 윤리적으로 관계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고민하는 일이 자신에 대한 윤리적 응대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너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를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와 오롯이 겹쳐놓는다. 나의 통증과 타인의 통증에 집중한다면, 살아 있는 존재를 ‘정물’로서 대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통증이야말로 결코 고정되지 않는 활달한 운동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고통에 집중하는 일이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가장 정확한 인식이며, 존재를 고정된 것으로 얽매여 왔던 힘들에 저항하고 해방되는 계기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통을 부정적인 것으로만 여기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다. 우리가 눈물이라고 믿었던 흐리고 어두운 존재들의 내부에 있는 빛은 통증이면서 죄이기도 하고 우박처럼 쏟아지는 별, 눈물이기도 하다. 존재가 빛나는 순간을 고통 속에서 포착하려는 김효선 시가 아름다운 것은 실은 그것이 존재가 다른 존재로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함을 알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빛 속에서만 가능한 일들
1. 비(非)-정물
시를 읽는 동안만큼은 세계가 잠시 멈추는 것처럼 여겨지는 건 어째서일까. 물론 이때의 멈춤이라는 것은 도로 위를 질주하던 자동차들이 일제히 멈춰서는 것과 같은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그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여기는 동안에 허락되는 경험의 특이성이리라. 실내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바깥을 바라보는 일에 푹 빠진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이해되기 쉽지만, 사실은 그동안에도 분명히 존재했겠으나 이제야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세계와는 다르게 감각되는 경험 그 자체라 해야겠다. 시를 읽는 동안잠시 세계가 멈춘 것처럼 느끼는 일의 본질 역시 여기에 놓여 있다. 물론 우리가 시를 읽는다 한들 세계는 무관하게 계속 움직이고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잠시 알고 있던 세계가 아닌 알고 싶은 세계를 경험한다. 이 경험 속에서 진정으로 멈추는 것은 우리 자신의 앎이 아닐까.
세계의 멈춤을 경험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 것은 김효선 시인의 많은 시편이 정지되어 있는 것과 운동하는 것의 복합적인 관계 속에서 세계를 읽어내는 것에 능숙하기 때문이다.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와 같은 시편은 어떠한가. 제목에서부터 전면적으로 제시되어 있듯, 정물이란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정물이 “정물이 아닌 채로” 있는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 정지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이전의 앎이라면 사실 한순간도 정지해 있지 않았음을 새롭게 경험하는 순간이 핵심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지된 것의 내부에서 격렬히 운동하는 것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읽는 자가 우선 멈춰야 한다는 점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들의 매순간을 면밀히 잡아내기 위해서는 유리창에 코를 박은 채 완전히 멈춘 채로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읽자.
비 오는 날
애인보다 차를 생각하며
가슴 철렁이게 될 줄은 몰랐다
잠을 자다 빗소리를 들었을 때
문득,
엔진에 묻은 물기들이 일제히 내 안으로
척척 들어서는 것이었다
큰비가 내리는 날에는
심장이 녹슨다거나
발바닥까지 뚝뚝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을 수 없어 아침이 올 때까지
비를 맞았다
그림자가 생기는 쪽으로 사과는 굴러갔지만
우리가 그리는 그림엔 붉은 과즙이 없다
이별을 할 때 누가 나를 바라보는지
그 경계는 어디서 오는지
시간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물은 정물인 채로
누구에게도 젖어야 할 때가 온다
생각을 허공에 두고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ㅡ「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전문
비가 쏟아지는 밤, 실내에서 곤히 잠들었던 화자는 빗소리에 잠이 깬다. 밖에 세워둔 차를 걱정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걱정과 동시에 화자 자신이 자동차가 된 것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다음의 구절을 읽고 있으면 마치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차가 스스로 화자가 되어 말한다는 느낌이 든다. “엔진에 묻은 물기들이 일제히 내 안으로/척척 들어서는 것이었다/큰비가 내리는 날에는/심장이 녹슨다거나/발바닥까지 뚝뚝 흘러내리는 물기를/닦을 수 없어 아침이 올 때까지/비를 맞았다” 물론 이 시에서 화자와 자동차는 선명하게 분리된 채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만, 화자가 어떤 대상을 걱정하는 마음은 화자를 잠시 그 대상의 심정이 되도록 변화시킨다. 그 과정 속에서 가만히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그 대상의 외부에서 거리감을 갖고 판단했을 때의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가만히 드러난다.
이러한 시적 사유 덕분에 2연이 가능해진다. 정지한 채로 제자리에 놓여 있는 사과를 캔버스에 그대로 옮기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옮기는 과정 속에서 사과의 본질이 드러나야 한다면, 화자는 겉으로 보이지 않기에 그릴 수 없는 것이야말로 사과의 본질이라 여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는 그림엔 붉은 과즙이 없다”는 구절에서의 “붉은 과즙”이란 단순히 사과의 내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과에 피가 도는 것처럼 지금의 사과가 붉게 익어가도록 만들었을 그 모든 활동성을 뜻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과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사과가 이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대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도 세계를 이루는 한 대상이며 타인에 의해 정지된 사물로서 규정될 수 있다. “이별을 할 때 누가 나를 바라보는지/그 경계는 어디서 오는지/시간은 멀어지고 가까워지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정물은 정물인 채로”와 같은 구절은 이별의 상태에서 ‘나’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는 고정된 사물로 여겨진다는 점을 자각하는 부분에 핵심이 있다. “그 경계는 어디서 오는”가.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일과 그러나 끊임없이 활동하며 한순간도 정지하지 않은 채로 있는 일의 경계는 오로지 대상을 대하는 타자의 태도에 의해 규정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젖어야 할 때”라는 것은, 나 자신도 타자에 의해 전혀 상반되는 두 존재로 이해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가진 대상으로서,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의 내부를 상상함으로써 스스로 그 활동성 자체가 되어보는 일이라 해야겠다. “정물은 정물인 채로” 이해받는 존재가 다른 대상을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 이해하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은, 타인이 나를 ‘정지된 존재’로 규정짓는 일에게서 스스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 규정된 채로 제한되어 살아가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도 다른 대상에게는 타자이기에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것의 그 활발한 운동성을 포착하는 일은, 단순히 대상을 가두고 있던 제한된 시선에 저항하는 것뿐 아니라 나 자신을 가두는 제한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2. 앓는 생동
시에 있어서 시적 주체가 대상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윤리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것은 타자를 어떻게 호명하느냐에 따라 대상의 본질이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호명이 타자의 존엄을 억압하는 폭력으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우려하는 일은 그렇기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김효선의 시에서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타자와 어떻게 윤리적으로 관계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고민하는 일이 자신에 대한 윤리적 응대로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너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를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와 오롯이 겹쳐놓는다. 사실상 대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골몰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오로지 주체의 방향에서만 모색하는 일이며, 주체 역시 대상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임을 암묵적으로 은폐하게 된다. 그런데 앞서 분석한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는 다른 사물의 경험을 상상하는 일이 역설적으로 타인에 의해 규정되었던 자신의 고정성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대상의 감춰져 있었던 활동성을 포착하여 묘사하는 일이 단순히 대상의 해방일 뿐 아니라 주체에게도 부당한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단순히 어느 한 요소로 통합하지 않고 상호 작용 그자체로서 파악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김효선 시의 시적 진실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대상이 사실은 한시도 멈추어 있지 않는 활발한 운동성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새로이 발견하는 것에 놓여 있다면 이때의 ‘활발한 운동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사실 이 시집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에 놓여 있다. 존재를 이루는 어떤 구체적인 운동성이 존재의 핵심이 될 수 있으며 주체와 대상 모두를 부당한 억압으로부터 더불어 해방시킬 수 있는가? 또한 김효선의 시는 그것을 어떻게 포착하고 있는가?
“너는 비어 있다고 쓰려는데/두통처럼 서서히 퍼지는 노을/명치끝이었다가 환한 옆구리였다가/한 번도 본 적 없는 묵직한 게 만져진다”
ㅡ「서쪽 하늘」 부분
“오래전 다친 손목이 다시 앓는 소리를 내고/밤새 비가 아우성을 친다/운명이라 해도 상처는 일말의 동행”
ㅡ「화석(花席)」 부분
“망막을 다친 사람처럼 우리는/눈을 마주칠 수 없습니다/어딘가에 하얀 빛을 숨겨두었다는 삼백초는/이파리만 무성한 초록입니다”
ㅡ「고요의 시원(始原)」 부분
이 시집의 곳곳에서 가장 빈번하게 포착되는 이미지 중 하나는 통증에 관련된 것들이다. 「서쪽 하늘」의 경우, 노을은 “두통”으로 비유된다. ‘노을’은 사전적으로는 어느 시간을 통째로 지시하고 있지만, 사실 그 노을의 시간이란 빛의 농도와 밝기가 변하면서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는 도저히 하나의 단어로만 포착하기 힘든 역동적인 운동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시인은 이 운동성을 두통으로 비유한것이다. 김효선의 시가 주체와 대상의 은폐되어 있는 운동성을 드러내는 데 핵심이 있다면 이때의 핵심이 통증으로 드러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통증이란 ‘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현상이며 이는 삶이 철저한 물질성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두통과 노을을 연관시키는 이 비유를 곱씹다보면 통증이야말로 운동성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는 현상이며 살아 있음의 절대적인 표지임에 동의하게 된다.
「화석(花席)」은 삶과 통증이 사실은 동일한 것을 지칭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오래전 다친 손목”은 과거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건 한동안 잠잠하다가도 일정한 때가 되면 “다시 앓는 소리”를 낸다. 멈추거나 그친 일이라 여겨왔다고 해도 “밤새 비가 아우성을” 치는 것과 같은 통증에 도리 없이 휘말린다.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결국 살아 있다는 것은 상처 속에서 통증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일이며 시인은 그것이 “운명”이라고 여긴다. 이 시의 제목이 「화석(花席)」이라는 점에 주목해서 보자면 그것은 바늘이 수없이 통과하며 만들어낸 상처이며 통증일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기반이 될 때 「고요의 시원(始原)」과 같은 시편이 가능하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서로를 고정된 존재로서 파악할 때, 그리하여 한 사람의 본질이 일종의 정물(靜物)로서 나타날 때, 이 시는 그것을 “망막을 다친 사람”으로 이해한다. 망막은 단순히 시각(視覺)만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다치지 않은 망막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나 자신과 타인의 통증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며 그것을 그 존재의 핵심으로 여기는 일일 것이다. 나의 통증과 타인의 통증에 집중한다면, 살아 있는 존재를 정물로서 대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통증이야말로 결코 고정되지 않는 활달한 운동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고통에 집중하는 일이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가장 정확한 인식이며 그동안 그 존재를 고정된 것으로 얽매여 왔던 힘들에 저항하고 해방될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고통을 부정적인 것이자 극복해야 할 장애이기에 치료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정면으로 맞선다. 시가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한 통로라면, 그 통로는 본질적으로 일반화된 사고들에 맞서지 않을 수 없으며 시를 읽는다는 것은 멀쩡하다고 믿어왔던 우리의 망막이 사실은 찢어진 것으로서 기능해왔음을 알게 되는 일에 다름 아니다.
3. 빛과 고통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 존재를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존재를 결박하는 일이라면, 통증을 통해 존재를 이해하는 일은 어째서 한 존재를 고정되게 만들지 않는가? 가장 단순한 형태로 답한다면, 통증이야말로 가장 격동적인운동성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성이 그 자체로 존재를 결박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정지하는 일을 금지함으로써, 운동성과 고정성이라는 경계 자체에 갇힘으로써 말이다. 고통을 통해 한 존재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한편으로는 존재를 고통이라는 프레임으로만 인식하게 기능할 수도 있다. 이 질문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의 시적 가치를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러한가. 통증이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면, 결국 통증은 존재를 죽음과의 관계에서 통찰하게 만든다. 모든 인간은 죽음에 처해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제대로 통찰하는 유일한 길임을 다음의 시는 보여준다.
오랫동안 말을 참았다
눈부신 날들을 집어넣었다
모르고 내딛은 하나의 심장
평생 절박(切迫)을 끼고 산다
물 밖의 심장들 점점 가벼워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풀잎은 언제나 아슬한 영혼을 품는다
한번 들어가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의 내부는 환희로 가득하다
두통으로 휑궈낸 마침표 없는 문장들,
깊어질수록 가을은
녹아내린 햇살에 눈을 찔리고
약속이라는 긴 거짓말 끝에
갈대의 시간은 가을로 피어난다
흰 머리칼 쓸어 넘기는, 검은
물빛의 계절이다
ㅡ「습지의 기억」 전문
언어는 규정하려는 힘을 갖고 있지만 현상은 쉽사리 언어로 포박되지 않는다. 하나의 단어가 유리컵으로 비유된다면 그 단어가 지시하고자 하는 바는 언제나 컵을 넘쳐흐르는 액체이며 현상의 본질은 오히려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흘러넘침에 놓여 있다. 그러니 세계와 대상의 핵심에 도달하고 싶다면 “오랫동안 말을 참”는 일이 필수적일 수 있다. 그것은 함부로 명명하지 않음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훼손하지 않는 일이기에 “눈부신 날들을 집어넣”는 일이 된다. 이때의 “눈부신 날들”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김효선 시에서 존재의 핵심이 통증에 놓여 있기에 말할 수 없는 것 역시 통증의 고통일 터인데 그렇다면 “눈부신 날들”이란 곧 통증을 뜻하는 말이 아닌가? 2연은 이러한 의문을 더욱 선명하게 언어화시킨다. “한번 들어가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고통의 내부는 환희로 가득하다”가 그것이다. 고통은 많은 시에서 어둠에 비유되어 왔던 것에 비하면 완전히 대립되는 비유라고 할 법하다. 어째서 고통은 빛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앞서 분석했던 「정물은 정물이 아닌 채로」의 “그림자가 생기는 쪽으로 사과는 굴러갔지만/우리가 그리는 그림엔 붉은 과즙이 없다”는 구절에서 시인은 사과의 본질을 ‘붉은 과즙’에서 발견한 바 있다. “붉은 과즙”이 단순히 사과의 내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사과로 붉게 익도록 만들었을 그 모든 활동성을 뜻한다고도 썼다. 그런데 사과는 어떻게 붉게 익어갈 수 있었는가? 그것은 오로지 빛을 통해서다. 식물이 빛에 의한 것이라는 이러한 인식은 이 시집을 이루는 중요한 전제 중 하나인데, 「습지의 기억」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깊어갈수록 가을은/녹아내린 햇살에 눈을 찔리고”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의 배경은 가을날의 습지이며, 그것은 눈부신 빛으로 가득하다. 살아 있는 것들은 그 빛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변모시켜 나간다. 그러나 그 빛은 칼처럼 날카롭게 존재의 폐부를 찌르는 일이기도 해서 존재는 상처입지 않을 수 없다. 통증에 의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존재가 앓고 있다는 뜻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 매 순간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효선의 시적 주체가 고통의 운동성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고통이 새롭고 다른 세계를 열고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별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거리엔 별다방이 있다 음침한, 삼거리엔 삼거리별이 오거리엔 오거리행성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우주는 늘 반짝거렸다 누워 있기 딱 좋은 방,
목요일이니까 네가 지나가지 않을 날씨를 알려줘 목성으로 해둘게 우린 어느 별인지도 모르고 천칭자리인지전갈자리인지 너에게 행운이 있는 쪽을 선택해 주파수는 늘 흐린 쪽으로 흘러간다 점 하나로 이어진 어떤,
흐리거나 개인 목성이 연애의 전생이었다고 해도 빛을 내는 것들을 감출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상처는 대체로 죄가 되어 밤마다 우박이 쏟아지면 맞았다 별들이었는지도. 우리가 눈물이라고 믿었던 그것은,
ㅡ「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전문
마지막 연을 통째로 읽어보자. “흐리거나 개인 목성이 연애의 전생이었다고 해도 빛을 내는 것들을 감출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상처는 대체로 죄가 되어 밤마다 우박이 쏟아지면 맞았다 별들이었는지도, 우리가 눈물이라고 믿었던 그것은,” 여기에는 모든 존재가 흐리거나 어둡다 한들 그것의 내부엔 빛이 어찌할 수 없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 빛은 통증이기도 하지만 죄이기도 하며 우박처럼 쏟아지는 별, 눈물이기도 하다. 존재가 빛나는 순간을 고통 속에서 포착하려는 김효선 시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사실은 존재가 다른 존재로서 거듭나는 순간이기도 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58962654 | ||
---|---|---|---|
발행(출시)일자 | 2016년 06월 29일 | ||
쪽수 | 124쪽 | ||
크기 |
125 * 204
* 20
mm
/ 187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인동네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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