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을 읽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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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 전문기관 추천도서 > 문학나눔 선정도서 > 2016년 선정
작가정보
저자 이경교는 충남 서산에서 나고, 동국대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6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중국 CCIT대학 교환교수를 역임하였으며, KBS1 라디오 《책마을 산책》, PBC TV 《열려라 영상시대》 등을 진행하였다. 시집으로 『이응평전』 『꽃이 피는 이유』 『달의 뼈』 『수상하다, 모퉁이』 『모래의 시』, 저서로 『한국현대시 정신사』 『북한 문학강의』 『즐거운 식사』 『푸르른 정원』, 수상록으로 『향기로운 결림』 『화가와 시인』 『낯선 느낌들』 『지상의 곁길』, 역서로 『은주발에 담은 눈』 등이 있다.
작가의 말
나는 언어의 극한점을 꿈꾼다. 의미의 끝까지 밀고 나가 아슬한 벼랑과 마주하길 원한다. 그 언어의 꼭대기에서 내가 염원하는 건 문화어로서의 모국어다. 오브제와 한몸이 되는 것, 내가 대상 속으로 틈입하는 것, 나와 너의 사이가 사라지는 것! 물론,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꿈인지 나는 알고 있다. 가끔 그 언저리에서 몸을 떨기도 하지만, 나의 절망 또한 거기서 시작된다는 것도. 그곳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넉넉지 않다. 내가 여전히 ‘혼자’ ‘곁길’을 서성이고 있는 이유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등대로
붉은 방
목련 생일
세한도
목련을 읽는 순서
바리케이드
즐거운 배
꽃은
홍시가 물렁거릴 때
조팝나무란 이름
숨은 뿌리
설산, 까마귀의 비행
팽팽한 월식月蝕
깊다
다시, 깊다
무서운 순간
제2부
내 이름
붉은 시편
기몽記夢
다시, 기몽記夢
그림자를 찾다
꽃의 자궁
수입리水入里, 눈썹산
여자에 관한
꿈을 적다
태양 앞에서 잠자리의 비행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새벽 강
가을 개심사
꽃은 무얼 보고 있을까?
비, 44번 국도
제3부
연둣빛 순례
덜컥덜컥
빈집
부레옥잠
제비와 제비꽃에 관한
잎새 무덤
무덤새
메콩강, 반달
액자 꿈
북방으로
시월의 시
만항재를 넘다
안개의 족보
불가사리
다시, 숨은 폭포
길 끝에는
제4부
매화, 몇 세기를 흘러온 물소리
비 오는 날
폼페이, 소금꽃
단풍잎 편지
통영이란 이름
소설처럼 1
소설처럼 2
소설처럼 3
소설처럼 4
소설처럼 5
매춘란
하숙집
모래의 여자
구름 문양 돌층계
산을 내려오다
먹구름에 물들다
해설 꿈의 사생아, 꽃의 운명을 살다 / 이성혁(문학평론가)
책 속으로
빈집
벌판 끝에서 홀로 저물고 있는 빈집, 비었다는 건 밖이 아니다 기둥과 지붕 아래 집의 안쪽에서 아직도 서성이고 있는 빈방들 때문이다
새들이 분주히 추녀 끝을 오르내리며 풍경을 두드리거나 오래된 감나무의 홍시들이 띄엄띄엄, 가로등 대신 불을 밝히고 있는 것, 시든 꽃나무들도 일제히 길 쪽으로 고개를 길게 빼고 있으니
마치 빈 동굴이 견딜 수 없다고 외치는 대신 천장에 매달린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 고요를 뒤흔드는 것처럼 지금 벌판 끝에서 저물고 있는 저 빈집은 외롭다, 소리 내지 않고 넘치는 침묵의 무게를 햇살 아래 덜어내기 위하여 빈방들, 새들, 감나무와 시든 꽃나무들을 한꺼번에 불러낸 것
내 횡경막 안쪽이 텅텅 비어 공명을 울리거나 어느 높이에서 막 물방울 하나 떨어져 우레 소리 울리는 것도 내 몸이 이미 빈집이어서 동굴처럼 텅 비어 있다는 신호다
출판사 서평
도달할 수 없는 꿈을 향한 열망의 기록
《시인동네 시인선》 048. 이전 시집에서 삶의 현실을 초월하지도 그 현실에 속박되지도 않은 채 현실과 피안을 함께 끌어안고 더 앞으로 나아가는 시적 정신을 보여준 이경교 시인은 이번 시집에 이르러 사뭇 다른 시세계를 보여준다. 이경교 시인이 시도하는 새로운 시적 모험은 “오브제와 한몸이 되는 것, 내가 대상 속으로 틈입하는 것, 나와 너의 사이가 사라지는 것!”으로서, 이는 언어를 통하여 언어의 한계를 넘어 대상과 황홀하게 융합하고자 하는 시의 꿈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것, “언어의 극한점을 꿈”꾸는 것이다. 시인 스스로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꿈”인지를 알면서도 이러한 모험을 감행하는 것은 도리어 극한적인 꿈의 ‘무모함’이 시작(詩作)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까닭이다. 비록 예정된 실패일지언정 시의 꿈에 다가가려는 그 달성 불가능한 시도에 의해 실패의 산물로서의 탄생하는 시편들. 하여, 독자들은 이 실패한 시편을 통해 시의 꿈 한 자락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언어의 움직임, 그 한계와 극복의 긴장에서 피어난 이경교 시인의 시편들은 끝끝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상과 융합하고자 한다. 도달할 수 없는 꿈을 향한 열망으로 빼곡한 이 시집은 가장 환하게 핀 순간 지는 목련꽃과 꼭 닮은 시와 시인의 운명에 관한 아름다운 기록이다.
[출판사 서평]
언어의 극한점을 꿈꾸는 시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경교 시인은 이 시집에서 예전과는 다른 시적 모험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오브제와 한몸이 되는 것, 내가 대상 속으로 틈입하는 것, 나와 너의 사이가 사라지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그 자신이 ‘무모한 꿈’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달성하기 어렵다. 그 시도는 언어를 통하여 언어의 한계를 넘어 대상과 황홀하게 융합하고자 하는 시(poetry)의 꿈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것, 시인이 말하듯이 “언어의 극한점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극한적인 꿈의 ‘무모함’은 시작(詩作)을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시의 꿈에 다가가는 그 달성 불가능한 시도에 의해 여러 시편(poem)이 탄생될 테니 말이다. 언제나 실패하겠지만, 실패의 산물, 즉 시편은 남는다. 하여, 독자들은 이 실패한 시편을 통해 시의 꿈 한 자락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의 꿈이 달성된 절대적인 시는 언어와 대상의 경계선이 없어진 질료적 세계 그 자체가 될 것, 그것은 시편이라고 말하기 힘든 현실 자체일 테다. 그것은 불가능의 세계다. 하지만 언어의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언어의 움직임, 그 한계와 극복의 긴장이 시편을 구성하게끔 하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상과 융합하고자 하는 것, 그 시도는 대상의 표면에 대한 관찰만이 아니라 대상의 비가시적인 안쪽으로 직접 들어가고자 하는 노력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시인은 아래의 시에서 섹스 또는 애무에 비유하고 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엉덩이다, 아니 깊게 파인 골짜기다 저건 분명 암컷의 빛나는 엉덩이다, 아니 골짜기다 수컷 벌들은 거기 달려들어 한바탕 허위 교미를 치른다 오프러스란이 매춘란으로 불리는 까닭이다/솔거가 그린 노송도를 향해 언젠가 고개를 처박은 새들도 있다 어떤 새들은 히말라야 설산을 넘다가 부리를 눈 속에 박고 고드름이 되기도 한다 오프러스란의 엉덩이가 매혹적인 죽음의 입구인 연유다//입 쩍 벌린 궁둥이, 음산한 피톨들 등 따습게 떠밀어 수컷 벌이 치루는 한바탕 잔치, 붉고 붉은 꽃잎의 그 음란한 뒤태 그걸 은유적 밀거래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시도 그렇지 않은가, 생각의 촉수들 어둠 속으로 스며들 때 엉덩이 벌린 꽃잎에 코를 처박는, 이윽고 수컷 벌이 되고 마는 시인은 음험한 은유의 밀수꾼들이니
―「매춘란」 전문
위의 시는 이 시집의 바탕을 마련하고 있는 시인의 시론을 보여주는 시라고 말해도 좋을 듯싶다. 위의 시에 따르면, 시인은 “엉덩이 벌린 꽃잎에 코를 처박는” ‘수컷 벌’과 같은 존재다. 그는 ‘생각의 촉수들’을 대상의 비밀스러운 곳에까지 침투시켜 은유를 음험하게 빼내 밀수하는 자다. 이러한 은유의 밀수는 섹스 또는 애무할 때의 긴장과 쾌락을 동반할 것이다. (「꽃의 자궁」이라는 시에서는 꽃잎이 여성의 성기로 비유된다.) 물론 진짜 섹스를 하는 것은 아니다. ‘수컷 벌’이 ‘오프러스란’과‘허위 교미’를 치르듯이 시인 역시 세계의 아름다움과 허위 섹스를 하는 것, 즉 그것은 언어-은유를 통해 이루어지는 섹스인 것이다. 하지만 이 ‘허위 교미’는 죽음이 뒤따른다는 치명적인 위험이 있다. “오프러스란의 엉덩이가 매혹적인 죽음의 입구”인 것은 그 때문인데, 시인 역시 은유의 밀수를 행하면서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죽음인가? 주체의 죽음일 것이다. 세계의 매혹은, 그것을 발견한 자를 자신의 발아래 굴복시킨다. 세계의 매혹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은 그 매혹에 점령당한다. 그는 어떤 힘에 의해 등이 떠밀려서 “엉덩이 벌린 꽃잎에 코를 처박”으며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어둠은 기성의 구성되어 있는 주체성이 와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인은 이성의 빛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없으며 매혹에 눈이 멀어버리게 된다.
주체의 죽음 이후에 얻게 된 존재의 역설적 풍부성
얘야, 나는 목련을 만났지만 그릴 수가 없단다 목련은 텅 빈//이름이 아니라 언덕의 영역에 속하므로, 그보다 더 먼 늪이거나//쓸쓸한 그릇의 일부이므로 나는 목련을 썼다가 지우고, 그 빈터에//도랑을 파기로 했단다 목련의 몸에서 여울물 소리가 들리는 건//목련의 고향이 강물이기 때문이란다 네 몸에서도 악기 소리가 날 때,//그때쯤 네 안에서도 목련이 자라나겠지//얘야, 목련은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단다 화사한 눈빛으로//제 안의 비밀을 토해내지만, 그때 목련은 죽음의 발치에 다가선 것이므로//잊어야 한다 목련은 이제 뜯겨진 명부名簿, 네가 뒷골목에서//어둠을 두 눈에 담을 때, 너는 이미 목련을 익히기 시작한//거란다 이름을 보는 대신, 너는 꽃그늘이 되어//너 지워진 자리만 하얗게 남겨진 거란다
?「목련을 읽는 순서」 전문
시인은 목련이 “제 안의 비밀을 토해”낼 때의 그 “화사한 눈빛”에 속지 말라고 말한다. 그 눈빛은 목련이 “죽음의 발치에 다가”섰을 때 발산되는 것이다. 목련의 본질은 그 화사함에 있다기보다는 “화사한 눈빛”을 보여준 직후의 죽음에 있다. 그러므로 목련을 익힌다는 것은 죽음에 이르러 지워지는 것, “꽃그늘이 되어//너 지워진 자리만 하얗게 남겨”지는 것을 통해서 가능하다. 목련을 읽어낸다는 것은 이렇게 죽음까지 포함한 목련의 존재성을 경험해볼 때 가능하다. 그런데 “하얗게 남겨”지는 ‘꽃그늘’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삶이 끝난 뒤에 남긴 존재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시인은 「꽃은」이라는 시에서 “꽃은 결국 텅 빈 이름만 남기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목련을 읽는 순서」의 “목련은 텅 빈//이름이 아니라”는 진술과 모순된다고도 생각될 수도 있지만, 「꽃은」의 그 진술은 존재가 거두어진 꽃이 텅 빈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여서 앞의 진술과 모순되지 않는다. 이에 시인은 「꽃은」에서 “목련이//쓸쓸한 뒷모습으로 돌아서는 건, 이름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그림자들이 바로 “지워진 자리만 하얗게 남겨”진 ‘꽃그늘’일 테다. 꽃이 지고 난 후 남게 된 존재의 그림자들. 시인은 “핏빛 그림자를 모두 지울 수는 없”다면서,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너와 내 안에서 꽃은 쉬지 않고 피었다 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결국 꽃의 “텅 빈 이름”과 쓸쓸한 그림자들이 ‘너’와 ‘나’의 내면에서 쉬지 않고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여, 시인의 내면과 융합되어 갈 그 이름들과 그림자들은 시인 자신의 이름들과 그림자들로 전화되어 갈 것이다. 시인이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내 이름을 뺀다. 너는 그 여백에서 기억이 떨구는 꽃잎들을 아득히 바라볼 테지”(「내 이름」)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나의 이름은 꽃잎들의 이름과 융합되었기에, 나의 이름을 뺐을 때에는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꽃잎들이 깊은 기억으로부터 부상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시인은 “이름이 사라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는다. 꽃씨를 터뜨리는 저 풀꽃들. 내 이름이 사방으로 튄다 이럴 때 은닉은 죄가 아니라 확장이다. 꽃의 이름들이 팽창한다”(「내 이름」)라고 쓰고 있는 것일 테다. 나의 이름이 사라지자 꽃잎들이 등장하고, 그 꽃잎들은 또한 피었다 지면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꽃의 이름들이 팽창”하는 것인데, 꽃의 이름들과 동화되어버린 나의 이름 역시 “사방으로 튀”게 되는 것이다. 이때의 ‘내 이름들’은 나의 실제 이름을 뺀 빈자리에서 증식하게 된 것, 그것은 주체의 죽음 이후에 얻게 된 존재의 역설적 풍부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언어의 장막을 넘어 진실에 도달하는 꿈
하여, 이경교의 시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는 전도되고, 그의 시는 자동사적으로 써진다. 무엇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시인의 몸을 빌려 쓰는 것이다.
사실 내가 먼저 이 집을 설계한 적은 없다 누군가 내 안에 스며들어 낯선 조감도를 펼쳐놓고 지상에서 가장 높은 집을 짓고 있을 때, 발아래 구름바다가 펼쳐지고 새들도 눈이 부신 듯 발바닥을 올려다보는 창공 저쪽, 내 손과 부리는 분주히 허공 끝에 첨탑을 세우고 있었으니
바벨탑 한 모서리가 구름치마에 걸려 찢어지고, 몇 개의 상처가 내 안쪽으로 깊게 그어지고, 그어진 자리마다 빗금처럼 돋을새김 문양이 아로새겨져, 아프지 않았다 색깔 없는 창공 위에 새들은 날개를 접은 채 떠 있고, 떠 있다간 구름과 연신 자리를 바꾼다 모든 게 찰나마다 뒤바뀌는, 이곳엔 정물이 없다//나는 집을 지은 게 아니다, 바벨탑은 처음부터 없었다 시공은 멈추지 않고 일그러진 욕망도 빛이 바래어 슬프지 않았다, 모든 게 지워지고 그림자만 짙게 새겨지는//나는 이걸 기록이라 부르지 않겠다 먼 풍경이거나 부재하는 집, 몇 번이고 그 집을 지었다간 허물 것이다
?「꿈을 적다」 전문
위의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창작방법론의 일부를 누설한다. 시인이 집?시의 집이겠다?을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내 안에 스며”든 타자에 의해 집은 지어진다는 것이다. 시인은 누군가 펼쳐놓은 “낯선 조감도”를 통해 발아래 펼쳐진 ‘구름바다’를 내려다보고 눈부신 ‘창공 저쪽’을 올려다볼 뿐이다. 제목에서 유추해보자면, 그가 보고 있는 그 세계는 꿈의 세계다. 이 꿈을 받아 적는 행위, 즉 시 쓰기가 “내 손과 부리는 분주히 허공 끝에 첨탑을 세우”는 일이다. 그 꿈의 기록인 시 쓰기는 “내 안쪽으로 깊게 그어지”는 “자리마다 빗금처럼 돋을새김 문양이 아로새겨”지면서 이루어진다. 꿈의 기록은 타자에 의해 그어진 상처에 의해 문양처럼 현현하는 꿈을 아로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 꿈의 현현이 아프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아로새겨지는 꿈의 문양이란 “모든 게 지워지고 그림자만 짙게 새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지워진 존재의 이름들로 이루어진 “꿈을 적”은 집이다. 그래서 이 꿈의 집(시)은 새집보다도 더 가볍고 가변적이다. “모든 게 찰나마다 뒤바뀌는, 이곳엔 정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이고 그 집을 지었다간 허물”수 있는 것이 “꿈의 집”이다. 그렇게 “지었다가 허물”면서 “먼 풍경이거나 부재하는 집”, 시가 세워진다. 하여, 그 집은 집이라 할 수도 없어서, 시인은 “나는 집을 지은 게 아니”라거나 “이걸 기록이라 부르지 않겠다고”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타자에 의해 이끌려 지었다가 허무는 것이 이경교의 시다. 시인은 「다시, 기몽記夢」에서 “꽃송이 하나하나가 꿈이란 걸 알겠다”고 말하고 있다. “필 때 이미 지는 법을 익히”는 꽃 한 송이는 세계의 비의를 담은 꿈이자“별을 닮은”하나의 우주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사이가 사라지”길 바랐던 대상인 꽃, 그가 “속으로 틈입하”여 “한몸이 되”고자 했던 ‘오브제’인 꽃은 꿈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에서 유추해본다면, 그가 꽃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꽃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은 타자에 의해 건축되는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된다. 이 ‘꽃-꿈’ 속에서 시인은 세계와 ‘한몸’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 경험은 세계와 주체 사이의 경계선을 짓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을 제공한다. 그렇기에 대상과 주체와의 융합과 동화를 이루어내는 꿈(환상)은 언어의 장막을 넘은 진실에 도달케 한다. 또한 그 진실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진정한 사건(역사)을 역설적으로 형성한다.
낙화의 운명과도 같은 시인의 운명
시 쓰기의 열망은 꽃이라는 꿈과 융합되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러나 이 열망은 곧 또 다른 죽음에 다다를 것이다. 「매화, 몇 세기를 흘러온 물소리」에서 보듯이, “꽃피는 시절은 지나갔다 나무들은 무덤마냥 잠잠해졌다 모든 게 무음無音이 되자, 내 잠도 끝났다”라고 말할 때가 있는 것이다. “매화꽃잎은 떨어”지고, 꿈은 깨어난다. 그런데 떨어진 그 “꽃잎 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낙화한 “무음無音의 속잎을 가만 열어보면 젖어 있다”는 것이다. 「산을 내려오다」에서 시인이 “한때 물이 올라 무거운 몸을 추스르지 못했”던 꽃잎은 “낙화의 시절 짐작도 못했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물’이란 시어는 생명력을 의미할 터, 낙화한 꽃잎 속에서 나는 물 흐르는 소리는 생명의 물이 빠져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소리 없는 죽음의 소리(무음)다. 그러나 꿈과 하나가 되었던 시인은 잠을 깨우는 이 쓸쓸한 꿈의 죽음에서도 시를 놓지 않는다. 즉 그는 “내 몸이 꽃잎 무게로 내려”온다면서 저 낙화의 운명과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이다. 꽃의 운명은 시인의 운명이다. 그것은 “향기에 취해 골짜기 헤매다 다 저물녘 꽃잎으로 가라앉”는 운명이다. 「산을 내려오다」는 시인으로서의 삶이 지니게 될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편이다.
어느 산에 다녀 오냐고? 산 이름은 물어 무엇 하나//향긋한 봄풀을 따라갔다가, 하늘하늘 지는 꽃잎 쫓아 돌아왔지//저기 저 꽃잎도 한때 물이 올라 무거운 몸을 추스르지 못했네 이제 한결 가벼워진 낙화의 시절 짐작도 못했네//내 몸이 꽃잎 무게로 내려와 밤의 산비탈에 쌓여 있거나 분분히 날리는 별빛으로 돌아가, 다시 꿈의 집 한 채 세워두거나 산다는 이 쓸쓸한 산행의 뒷자리면 나는 또 향기에 취해 골짜기 헤매고 다 저물녘 꽃잎으로 가라앉겠네
?「산을 내려오다」 전문
[시인의 산문]
이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 오랫동안 모국어로 글을 써온 나에게 그 경험은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환기시켰다. 나는 내가 모르고 있던 모국어의 알몸을 보았으며, 몇 가지 문제들과 대면했다. 이국의 책상머리에 앉아 모국어에 대한 단상들을 적어내려 갈 때, 생전 처음 글쓰기의 고민이 아니라, 우리 언어의 생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국어의 생존에 대한 고민은 문화어로서 한국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시편들은 나의 그런 고민이 반영된 시집이다. 사유는 물론 문체에도 유행이 스며드는 걸 본다. 그러나 유행이란 영구적 가치가 아니다. 시는 모국어의 절정이며, 그 절정에서만 사유력 또한 증강될 수 있다. 나는 그 번짐의 유대를 굳게 믿는다. 그러나 언어는 홀로 자립하지 못한다. 언어 안에 뜻밖의 정경은 물론 높은 문제의식이 가미될 때, 언어는 비로소 품격을 얻기 때문이다. 문화어로서의 모국어에 대한 고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58962388 | ||
---|---|---|---|
발행(출시)일자 | 2016년 02월 15일 | ||
쪽수 | 132쪽 | ||
크기 |
136 * 204
* 20
mm
/ 21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인동네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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