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같은 몸에다가 황소 같은 짐을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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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준호 국악인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농촌으로, 산골 오지로, 때로는 섬마을로 찾아다녔다. 이 책은 그렇게 40년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닌 저자의 발품으로 가득 채운 기억과 기록의 곳간이다.
책에서는 그렇게 얻은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민속학, 인류학, 언어학, 한국학적으로 접근해 그 숨겨진 유래와 상징의 매듭을 재미있게 풀어내었다. 특히 춤꾼이자 작가의 부인인 손심심 씨의 그림은 보는 재미와 더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노랫말과 함께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공을 뛰어넘어 그때 그 시절을 황금시대로 이끈 근대 문물이 가진 문화의 힘을 재조명한다.
작가정보
국악인이자 풍속학인이다.
1963년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부산대에서 구비 문학과 민속학을 공부했다.
18세부터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장고, 북, 꽹과리, 판소리, 구음을 시작했다. 허종복, 한승호, 유영례, 한윤영, 김병하, 문장원, 양극수, 양극노, 임순이, 김말수 명인에게 서편 소리, 구음, 들소리, 상여소리, 중타령, 아라리, 밀양아리랑, 성주풀이, 어산영을 배웠다.
KBS 〈6시 내 고향〉, 〈TV쇼 진품명품〉, 〈국악방송 오락가락〉과 MBC 〈우리 소리 우습게 보지 말라〉, 〈달팽이〉 등을 진행했다. 그 후 다수의 방송 및 기업의 전통문화 강좌를 하였으며, 『우리 소리 우습게 보지 말라』, 『양산의 옛소리』, 동래 명무 문장원 포토에세이집 『빛으로 빛나다』 등을 집필하였다.
현재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동래지신밟기 예능보유자이며 방송, 공연, 글쓰기를 통해 사람들과 전통 문화 소통을 하고 있다.
전통예술가이고 방송인이다.
1963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17세부터 문장원, 양극수, 김동원 명무를 은사로 동래양반춤, 동래할미춤, 동래학춤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아 동래야류의 천재동 명인에게 탈 제작, 토우 만들기, 그림 그리기를 배웠다. 그 후 김수악, 한영숙, 이매방, 하보경, 김희상 명무에게 전통굿거리춤, 승무, 살풀이춤, 밀양양반춤, 동래두꺼비춤 등을 전수하였다.
20세에 부산시립무용단에서 활동하다가 동아대에서 한국무용학과를 졸업하고, 각종 공연을 통해 우리 춤을 알리는 데 매진했다.
KBS 〈6시 내 고향〉, 〈TV쇼 진품명품〉, 〈국악방송 오락가락〉과 MBC 〈우리 소리 우습게 보지 말라〉, 〈달팽이〉 등을 진행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승 교육사이자 회장, (사)문장원기념사업회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꾸준히 춤과 그림, 탈, 토우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목차
- 책을 펴내며
1부 처자권속 굶지 않게 밭을 갈고 논을 갈아
가을 운동회 / 나락 베는 날 / 나락 타작 / 마지막 얼음 뱃놀이 / 엿장수와 아이스께끼 / 참새 쫓기, 후여 후여
2부 고무공장 큰애기는 반봇짐을 싸누나
검정 고무신 / 나의 첫 자전차 / 연탄 시대 / 리어카 100년 / 영서 산지 벽난로 고콜 / 지게와 나
3부 쌍금쌍금 쌍가락지 호작질로 닦아내어
향장과 아모레 아줌마 / 조개탄 난로 / 샘터와 리더스 다이제스트 / 우실과 바람 / 바지랑대와 빨랫줄 / 문종이 바르는 날
4부 진주낭군 오실 때에 진주 남강에 빨래 가라
초가지붕 이기 / 빨래터의 전설 / 단지 왔심더 / 동네 이발소 / 아주 특별한 여름방학 / 인생 오일장
추천사
-
인류문명사의 박물지博物志
김준호의 글에는 민속지적 냄새가 물씬 배어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추억의 심연에서 길어낸 옛이야기들이 법고창신의 묘를 더한다.
멀리는 인류문명의 시원에서 시작해 가까이는 우리가 망각창고에 구겨 넣은 소년기 기억들에 이르기까지, 인류문명의 박물지가 담겨 있다. 동서고금을 망라한 기물, 풍습, 놀이, 음식 등 의식주행의 유래, 어원, 의미, 효능, 가치에 대한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텔링하고 있으니, 발로 쓴 ‘모던’ 인류문명사라는 명명에 손색이 없다.
책 속으로
[머리말]
운명의 시작은 어릴 적 산에서 들에서 부르는 어른들의 일 소리를 들으면서부터였다. 소리가 신병같이 나를 당겼다. 인근에 매굿판이라도 벌어지면 온종일 따라다닐 정도로 신명이 남달랐다.
그러다가 18세에 길을 찾게 되었다. 우연히 진주에서 김수악 명인의 공연을 보고 구음과 장고에 깊이 매료되어 평생 공부의 다짐을 세웠다. 그것이 국악으로의 정식 입문이었다.
대학 시절, 어쩌다 좋은 소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만사 제쳐 두고 통일호와 완행버스와 통통배를 타고 전국으로 달려갔다. 농촌에서, 산골 오지에서, 때로는 섬마을에서 그들과 같이 모를 심고, 버섯을 따고 낙지를 잡으며 신뢰 관계를 쌓았고, 그 속에서 사투리를 익히고 노래와 문화를 닥치는 대로 배우며 참 행복했었다.
이렇게 방방곡곡 숨어있는 소리를 찾아 여러 어른을 스승으로 삼고 판소리, 구음, 들소리, 상여소리, 중타령, 아라리, 밀양아리랑, 성주풀이, 어산영 등을 배웠다.
그리고 결국 판의 주변인으로 머무는 것이 아쉬워, 아예 20대 후반에는 3년간 실제 굿판에서 장고와 구음을 담당하는 악공으로 들어가 굿 음악을 배우기도 했다. 그 후 전통문화를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여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로, 한 손에 펜과 장고 채를 들고 한 손에는 책을 들고 강의실과 도서관과 현장을 쫓아다녔다.
역마살이 낀 탓일까. 직접 사람과 문화를 전국 구석구석까지 접할 수 있는 방송인을 직업으로 택하여 ‘6시 내 고향’, ‘TV쇼 진품명품’, ‘TV 전국 기행’, ‘달팽이’ 등 많은 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지역의 소리와 풍물을 탐구하면서 폭을 넓혔다.
그렇게 40년을 여기저기를 바람처럼 떠돌아다닌 발자국의 기억과 기록이 곳간에 가득 찼다. 내가 과거를 쫓아다니는 동안 세상은 빠른 문명을 동력으로 무섭게 변했다. 그리고 우리가 누렸던 모든 근대 문물이 박물관이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
훌륭한 요리사가 묵은장으로 요리의 제맛을 살리듯이, ‘과거의 잔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어렵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노래가 들리는 글쓰기로 맛있는 밥상을 만들어 보았다.
[책 속으로]
6.25 전쟁 이후에는 오일장이 아니더라도 마을을 방문하는 엿장수가 있었다. 리어카에 엿판을 싣고 엿가위를 째깍거리며 등장을 하면, 동네 아이들은 돈이 없고 고물이 없어도 엿 냄새라도 맡기 위해 엿장수를 따라 다녔다.
이들은 곡물이나 공병, 쇠붙이, 고무신, 가죽, 골동품 같은 것을 받고, 그 값어치만큼 엿이나 빨랫비누로 바꿔주는 고물상을 겸하기도 했다. 제일 큰 값어치는 쇠붙이였다. 그때는 어느 집이든지 포탄껍질, 탄피 통, 철모, 기름통 등이 즐비했고 그것을 엿장수에게 갖다 주면 3일을 먹어도 녹지 않는다는 강엿과도 바꿀 수도 있었다.
그다음은 공병이었다. 만물이 귀하던 시절 공병은 유용한 살림도구였다. 최고는 제사나 명절이 지나서 나오는 한 되짜리 ‘정종병’이었다. 그것의 가치는 꽃엿 두 주먹으로 온종일 입을 오물거리고 다닐 수가 있었다. 집집이 석유를 받아오는 누런 정종병이 있었고 파란 막걸리병이 따로 있었다. 참기름, 들기름, 동백기름을 담는 소주병, 박카스 빈 병이 기본으로 10병은 넘게 있었다.
그다음으로 떨어진 고무신이나 토끼 가죽 같은 잡화 고물들이었다. 엿장수가 오는 날은 달콤한 유혹에 홀린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고물을 가져다주고 엿을 바꿔먹는 바람에 집마다 매타작을 당하는 애처로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중략)
엿장수들은 저마다의 깊은 사연이 있었는데 우리 동네 엿장수는 황해도가 고향으로 전쟁 때 혈혈단신 월남해서 엿장수를 한다고 소문이 났다. 이북 말씨를 쓰는 엿장수는 엿 인심, 비누 인심도 좋고 넉살도 좋아 여기저기 밥도 잘 얻어먹고, 애경사라도 벌어지면 엿장수는 공을 치는 날이라 엿판을 접고 술도 한 잔 얻어먹었다.
엿은 밥도 술도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화폐와 같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선생님이 내준 산수 문제를 못 풀면 “답은 엿 바꿔 먹었냐.”라며 꿀밤을 얻어맞았다. 이렇게 우리의 달콤하고 황홀한 유혹과도 같았던 엿도 맥을 못 추고 임시 휴업하는 계절이 있었으니 바로 여름이었다.
열기에 약한 엿은 여름이면 질척하게 녹아내려 자르기도 쉽지 않았고 아무리 밀가루를 많이 뿌려도 손이나 옷 어디에나 철썩 들러붙기 때문에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엿의 비수기인 여름, 엿은 녹아내리고 들러붙는 이미지와 성질로 인해 배신한 연인처럼 부정적인 이미지로 변하였다.
상대방에게 욕으로 쓰는 “엿 먹어라.”가 있었고, 뭔가 직성이 풀리지 않을 때는“기분이 엿 같다.”라고 하였고, 일이 잘 풀리지 않고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면 “일이 엿같이 되었다.”와 같이 부정적인 의미의 욕으로 쓰이는데, 모두 여름 엿에 빗댄 말이었다.
-p. 54~56, 1부 ‘엿장수와 아이스께끼’ 중에서
흔히 농촌에서 장거리의 논밭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옮긴다든지, 팔 물건을 싣고 시장으로 이동을 할 때면, 자전거의 안장에 리어카의 손잡이를 매달아 우마차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원래 ‘쌀집 자전차, 짐 자전차’라 하여 프레임을 덧대고 짐대를 확장한 큰 자전거도 있었지만, 리어카를 매다는 것이 훨씬 효율성이 뛰어났다. 부피가 큰 짐을 실을 때면 자전거 튜브를 잘라 만든 고무 밴드로 짐을 리어카에 야무지게 묶고 브레이크를 잘 조정해야 했다.
오르막이나 내리막을 만나면 이따금 자전거에서 내려 손발로 속도 조절과 구동을 해야 하는 고단수의 어려운 수송방법이었지만 곧잘 밥값은 했다.
이 자전거·리어카의 운송방식은 평지에는 속도와 탄력으로 쉬운 일이나, 언덕이나 내리막에서는 잘못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는 위험이 있어 중학생이 되어서야 하는 꽤나 실력을 요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자전거의 용도가 꼭, 이동과 운송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자전거의 타이어에는 야간 운전을 할 때 사용하는 헤드라이트용 소형발전기가 달려 있었다.
작은 전구용 발전기였지만 속도를 내면 제법 앞을 훤하게 비추어, 가로등이 없던 그 시절에는 매우 유용한 과학장치였다. 재작스러운 우리들은 그 소형발전기를 연결할 전기선과 들통과 뜰채를 들고 냇가로 달려갔다.
물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힘 좋은 친구가 자전거를 젓고 나머지는 전기선 두 줄을 작대기에 연결해서 큰 돌 밑을 지졌다. 맨살의 우리 다리에도 약한 전기가 찌릿찌릿 정신이 바짝 들게 하더니, 이내 피라미, 기름쟁이, 은어가 기절해서 떠올랐다. 우리는 모두 그걸로 매운탕을 끓일 생각에 흥분하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비포장 흙탕길이 무척 많았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자전거 타이어 바람이 괜찮나 체크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웬만한 고장은 집에서 수리하였다. 그래서 집마다 바람을 넣는 바람 뽐뿌 커뮤니케이션이 하나씩 다 있었고, 펑크 정도는 집에서 수리하게끔 튜브조각과 오공본드, 끌, 가위 등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자주 벗겨지는 체인을 수리하기 위해, 아예 책가방 안에는 스패너, 펜치, 드라이버, 예비체인 등의 공구 정도는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이것들 때문에 학생주임이 책가방을 뒤질 때 불량학생으로 찍혀 교무실에 끌려다니며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그렇게 나와 애마는 함께 거의 10년을 넘게, 비나 눈을 맞으면서, 때로는 폭풍 속을 뚫기도 하고, 점점 커가는 나의 몸을 말없이 받아주며, 온갖 풍상을 같이 겪으며 애지중지 보냈다.
도시로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공부에 부대껴 주위 사물들이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의 공간은 큰 도시로 확장되고 기차와 버스를 더 자주 타게 되었다.
그리고 문학과 철학이라는 것을 공부하면서 녹슨 자전거가 내게 물음을 던졌다. “두 발로 계속 저어야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자전거일까, 인생일까.” 나는 낡은 자전거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20대를 넘겼다.
그렇게 군대에 갈 때까지 동생들이 함부로 타고 다녔는데, 휴가 때 집에 오니, 대문간에 비를 피해 맨날 세워져 있던 그 자리에 오래된 내 자전거가 사라지고 없었다.
“응 그 고물, 타이어가 다 낡아서 못 쓰게 돼서 고물장수가 왔길래 엿 바까 묵었다….”
-p. 85~87, 2부 ‘나의 첫 자전차’ 중에서
우리는 동네 입구에서부터 나보다 훨씬 큰 나뭇짐을 짊어지고 개선장군같이 어깨에 힘을 한껏 주고 요란하게 지게 작대기로 대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섰다.
나뭇짐이 마당 한쪽에 가득 쌓이면 그 나무로 아버지는 소여물을 삶고, 어머니는 내가 해온 솔가지로 맛있는 저녁밥을 준비하시고, 큰방에 군불을 깊이 지폈다. 부엌 가득 구수한 솔방울 숯에 고등어 굽는 냄새가 퍼지면, 눈이 오려는지 굴뚝에서 내리깔린 연기가 마당에 자욱했다.
지게가 때로는 슬픈 사연을 짊어지기도 했다. 내가 태어나기 6년 전쯤 봄날, 막내 고모는 지금의 내 나이에 장질부사에 걸려 헛소리를 하고 피를 쏟았다. 할부지는 고모를 지게에 짊어지고 읍내 병원으로 달렸다. 사흘 뒤, 고모는 머리카락이 다 빠진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죽고 말았다.
할무니는 기진하여 쓰러지고, 그날 오후에 거적에 둘둘 말은 시신을 할부지의 지게에 지고 가서 와룡산 중턱에 묻었다 한다. 할무니는 이따금 삐죽 나온 막내 발이 꿈에서 보인다고 눈물을 훔치셨다. 그러나 할부지는 끝내 고모의 무덤 위치를 할무니께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고모를 직접 묻은 할부지는 봄에 사탕을 들고 산에 올랐다. 그리고 내려올 때는 나뭇짐 맨 꼭대기에 진달래를 한 움
출판사 서평
40년을 바람처럼 떠돌아다닌 기억과 기록
빠르게 변하는 세계화 시대, 새마을운동에 치이고 산업화에 치인 농촌은 금세 그 풍물이 바뀌었다. 빠른 발전을 얻으면서 불가피하게 많은 것이 대체되거나 없어졌다. 누군가는 의미 없는 구시대의 잔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산골 방 안의 벽난로 고콜, 양은 도시락 얹어 눌은 밥 긁어 먹던 조개탄 난로, 근대 세일즈 우먼의 개척자였던 아모레 아줌마, 잡지 샘터와 리더스 다이제스트처럼 추억 속에만 남은 풍경은 이미 사라져 버린 문물이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이끈 원동력이다.
저자는 국악인으로 살며 역마살이 낀 것처럼 바람에 실려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해석하여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로 한 손에는 펜을, 한 손에는 장고 채를 들고 걸었다. 지역의 소리와 풍물을 탐구하기 위해 걸은 길은 기록이 되었고, 문득 뒤를 돌아보니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어느새 사라져 버린 풍물과 문물이 눈에 밟혔다. 가볍게 풀어내는 추억과 노랫말에 이제는 인생이 되어버린 민속학, 인류학, 언어학을 더하고 부인이자 춤꾼인 손심심 전통예술가의 삽화로 마무리하자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에헤에어 한 단이 나간다
어허어어 그 소리 뒤미쳐 나도 또 한 단
에헤에어 하더니 묶었다
새로 한 단이 묶어라
그 소리 거두미쳐 나두 또 한 단
에헤헤어 나도 한 단
에헤헤어 하더니 묶는다
새로 한 단이 묶는다
얼른 하더니 한 단을 묶어
에헤어어 나도 또 한 단이라
- 강원 양양, ‘벼 베는 소리’ 중에서
거둔다는 말에서 유래된 가을의 농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죽하면 죽은 송장도 꿈지럭하고 부지깽이도 덤벙인다는 속담이 생겼겠느냐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경운기도 없던 시절, 나락을 베는 일부터 타작까지 일일이 손이 들어갔다. 목매라 부르는 통나무에 볏단을 때려 탈곡하다 홑태로 일일이 훑는 방식을 거쳐 게롱게롱 소리가 나는 인력 탈곡기에서 발동기 탈곡기까지, 저자의 할아버지는 그 모든 변화를 거쳐 가며 나락 타작을 해왔다. 콤바인으로 벼 베기에서 타작까지 한 번에 하는 때에 보는 발동기 탈곡기는 새삼스럽다. 볏섬을 옮기는 일도 자전거에 연결한 리어카 몫이었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며 리어카질을 해 집으로 옮긴 볏짚으로는 덕석도 만들고, 가마니도 짜고, 새끼줄도 만들고 지붕도 이었다. 가축의 먹이, 퇴비, 땔감 역할까지 하는 요긴한 재산이었다. 선조들은 짚 위에서 태어나 짚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짚을 신성시했다. 산모와 아기를 이어주는 탯줄도 짚과 동일시하여 짚으로 꼬아서 만든 줄은 자식을 부르듯이 새끼라고 이름 붙였다. 풍작을 빌던 정월 대보름 대동 놀이에 빠지지 않는 줄다리기에 쓰인 새끼줄은 재수가 좋다고 서로 떼어가려 했다고 한다.
벼를 베고, 지붕을 이고, 지게를 지고, 빨래를 하는 고된 노동의 시간 동안 선조들은 노래로 그 힘듦을 달랬기에 노래에 시대가 담겼다. 농촌에서 일하는 동안 부르던 노동요 ‘벼 베는 소리’, ‘가을걷이 소리’, ‘새 쫓는 소리’, ‘줄 꼬는 소리’와 삶의 멍에가 된 지게를 지고 볏단 나르며 부르던 ‘나이나 타령’은 산업화 바람에 쓸려가고 그 자리를 다른 노래가 차지하게 되었다.
열여덟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눈물의 부산 처녀 고무공장 큰애기야
하루에 사백 환의 고달픈 품삯으로
행복하겐 못 살아도 부모봉양 극진트니
한 많은 네 청춘이 불꽃 속에 지단 말이냐
- ‘한 많은 내 청춘(1960)’ 중에서, 남인수 노래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신발은 계급을 나누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다. 지위 고하에 신을 수 있는 신발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던 조선 시대 이야기도 풀어 나간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고무신이라는 신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농사일 잦은 풍토라 방수성 뛰어난 고무신은 인기를 끌었는데, 저자의 어린 시절에는 그 신이 흙 놀이용 불도저가 되기도 했고 올챙이를 담는 어항이 되기도 했다. 급증하는 수요에 따라 들어선 고무공장에서 세계 대공황을 핑계로 노동을 착취당한 여공들은 파업에 들어갔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시위를 벌였던 강주룡 노동자 이야기와 부산 고무공장 화재로 인한 대참사 이야기는 가슴을 울린다. 이렇듯 이 땅의 고난의 시기를 함께했던 고무신도 20세기 말과 함께 사라졌다.
이 밖에 얼마나 많은 문물이 기록되지도 못한 채 사라졌을까. 이 책은 학술 서적이 아니다. 사회 격동기를 살아내며 전통 문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근대 풍물과 함께했으며, 마침내 현대 문물로 모두 바뀌는 과정을 겪은 사람의 추억 이야기일 뿐이다. 사라졌지만 잊어서는 안 될 우리 사회의 뿌리 한 조각이다. 저자는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민속학적으로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하면서 옛 풍물과 문물의 유래와 상징의 의미를 밝힌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잊은 줄도 모르고 지내던 것들에 대한 향수를 자극할 것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뉴트로로 나아갈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91158543198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9월 09일 |
쪽수 | 232쪽 |
크기 |
154 * 205
* 18
mm
/ 402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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