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퐁당
도서+교보Only(교보배송)을 함께 15,000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20,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Box 기준 : 도서 10권
해외주문/바로드림/제휴사주문/업체배송건의 경우 1+1 증정상품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패키지
북카드
키워드 Pick
키워드 Pick 안내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다른 연관 도서를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로, 클릭 시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최근 많이 찾는 순으로 정렬됩니다.
그러나 케이크처럼 부푼 꿈을 안고 출근한 그곳엔 바깥세상과 철저히 단절된 제빵실과 그 앞에서 커피를 내리는 천하태평 유유자적 바리스타 서준수뿐이다.
혼자만 기억하는 과거에 얽힌 약점과 좋지 않은 인상만 남긴 첫 만남이 자꾸만 생각나 준수를 피해 다니기 바쁘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그가 내린 한 잔의 커피로 유난히 길었던 하루를 함께 마무리하며 서로에게 한 발자국 가까워진다.
그러나 서서히 준수에게 빠져들던 하나는 끝내 그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마는데…….
작가정보
목차
- 프롤로그Ⅰ
프롤로그Ⅱ
1막 : L'amour - 사랑을 굽는 제과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당신의 1년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가을, 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
무지개 너머 그 어딘가에
2막 : 이상과 현실의 간극
운명인지 모를 무언가
각자의 아킬레스건
첫사랑에 실패한 자들에 관한 지침서
가장 보통의 사람으로 사는 법
답을 찾지 못한 날
어른이 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동화
3막 : 독백 혹은 방백
크렘 브륄레creme brulee 같은 남자
우리는, 어쩌면, 만약에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Happy Birthday to You
사랑, 그 달콤 씁쓸함에 관하여
커튼콜, 다시 막이 오르면
에필로그 - 여전히, 당신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작가 후기
책 속으로
프롤로그Ⅰ
전국 고등학생 미술 실기 대회 대상
주 하 나
그렇게 새겨진 트로피에 세상 모든 게 제 것 같던 열아홉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트로피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물 흐르듯 잔잔하던 하나의 세상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도착해 가족들에게 트로피를 자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집 앞에는 난생처음 맞닥뜨리는 한 무리의 인파가 진을 치고 있었다.
살벌한 표정으로 대답 없는 초인종을 연신 부서져라 눌러대는 이들의 행태에 그만 기가 눌린 하나는 개중 그나마 인상이 나아보이는 중년의 여인을 붙잡고 물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쌀쌀맞기 짝이 없는 반문이었다.
“그러는 학생은 누군데?”
“뭐야, 이름이…… 주하나?”
“주 씨면 혹시 이 집 딸 아니야?”
교복 앞자락에 달린 명찰을 발견한 누군가의 음성이 서릿발처럼 허공을 갈랐다. 거짓말 같은 건 모르고 자란 귀한 집 딸답게 하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저희 집 맞는데……. 누, 누구세요 다들?”
그 순진무구한 대답에 시끌벅적하던 인파 사이로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날이 시퍼렇게 선 반응이 되돌아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 사장 딸? 야! 잡아!”
이미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던 하나는 그 외침에 아예 돌아서서 사력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몇몇 날쌘 이들이 빠르게 뒤를 쫓는 기척이 뒤통수를 때렸다.
“야! 너 거기 안 서?”
손아귀에서 미끄러진 트로피가 낙하와 동시에 와장창 부서졌다. 그렇지만 하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금방이라도 잡힐 것 같은 두려움에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고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추는 순간 끝장이라는 걸 본능이 먼저 알았다.
그러나 머리와 다르게 다리는 점점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느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코앞에 막다른 골목까지 보였다.
“너 잡히기만 해! 어?”
쫓아오는 이들의 아우성이 확성기로 증폭시키기라도 한 듯 귓가에 왕왕 울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오른쪽 발에서 운동화가 벗겨지며 하나는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악!”
그대로 넘어지기 직전, 옆에서 불쑥 뻗어져 나온 누군가의 팔이 재빨리 하나를 끌어당겼다. 종이 인형처럼 맥없이 어두운 골목으로 끌려 들어가자마자 타닥타닥 쫓아오는 이들의 발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아, 씨. 뭐야? 없잖아?”
“더 도망갈 구석도 없는데 그새 어디로 튀었지?”
험악한 음성에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그러나 폭주하듯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보다 한층 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건 낯선 이의 숨소리였다. 제 팔을 움켜쥔 이질적인 손길에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낮은 음성이 한발 앞질러 하나의 귓가를 울렸다.
“쉿.”
그 나직한 목소리에 하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비명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하지만 뒤를 쫓아온 이들은 여전히 바로 앞 골목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중략)
더 이상 쫓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야 걸음을 멈춰 세운 남자가 그때까지 꽉 붙들고 있던 하나의 손을 놓았다.
“하아, 하아.”
맺혔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더니 그제야 맥이 탁 풀렸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머리는 온통 산발이었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떤 하나가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채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대자마자 다급한 부름이 새어 나왔다.
[하나야! 너 무사하니? 괜찮은 거야?]
“엄마…… 이게 다…… 무슨…….”
[지금 어디니? 잡히지는 않은 거지?]
“엄마는…… 엄마는 지금 어디 있어? 아빠랑 다애는? 우리 집은, 어떻게 된 거야? 집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누구야……. 대체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인데.”
[하나야. 우리, 이제 그 집으로 못 돌아가.]
“왜…… 왜 못 가는데?”
[아빠 회사, 부도났어.]
휴대폰을 간신히 붙들고 있던 하나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상을 받고 잔뜩 우쭐해 있던 오전의 풍경이 아주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건 몰래 카메라야!’라고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갑작스레 닥친 현실만 감당이 되지 않는 무게로 하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가까스로 난간을 짚고 기대자 넘실대는 강물이 코앞으로 밀려들었고 곧이어 머릿속이 핑그르르 돌았다.
“아, 꿈이 아니라 현실이잖아.”
고요하지만 어두운 강물이 시야를 가득 메꾸자 곧바로 느껴지는 이 어지러움은 분명 실제다.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강물에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절박할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가 아닌 철저히 타인의 사정일 뿐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느새 자신이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고작 열아홉 고등학생이 통감하는 심정이라고 하기에는 우습지만 지금, 하나는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금방이라도 작은 몸을 집어삼킬 듯한 강물을 쳐다본 순간 현기증이 일며 눈앞이 핑 돌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지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눈 깜짝할 찰나에 난간을 짚고 있던 손이 균형을 잃고 미끄러져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두 다리가 땅에서 붕 떠올랐다. 유난히 길었던 하루의 기억들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지나가고 몸이 사정없이 휘청거리기 시작했을 때, 하나는 다시금 두 눈을 꼭 감았다.
이대로 세상을 하직하는구나 하는 무의식에 빠진 순간이었다. 옆에서 단단한 손길이 하나를 휙 끌어내렸다. 검푸른 강물이 아니라 포근한 감촉과 나른한 향기가 바르작거리는 몸을 휘감았다.
죽는 것치고는 이상하리만치 행복한 기분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는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엷은 갈색의 니트 위로 보이는 셔츠 깃이었다. 조금 더 시선을 끌어올리자 남자의 깊은 눈망울이 두 눈 가득 들어찼다. 그 순간.
“나 어떡해…….”
꾹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고 하나는 끝내 엉엉 울고 말았다. 여전히 공포와 긴장으로 인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옷깃을 꼭 쥔 채 세상이 떠나갈 듯 울었다. 무서움과 두려움,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낯선 남자의 니트 자락이 온통 눈물로 젖어 들어갈 때까지 하나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기만 했다. 한참 지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어 남자의 품에서 떨어지려는데, 그때까지 묵묵히 하나의 말을 듣고만 있던 그가 팔을 뻗어 어깨를 끌어당겼다.
따스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너무 놀란 나머지 하나는 일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괜찮다, 다 괜찮다. 달래듯 흘러나온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마음이 녹았다.
“한강 쳐다보고 있으니까, 어때요?”
“네?”
“기분 묘하죠. 눈앞에는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뒤에서는 차들이 끝도 없이 쌩쌩 지나다니고, 강 위로는 붉은 해가 지는데 보이지도 않는 바람은 무섭게 부니까.”
“…….”
“해가 지면 더 무서워요. 새까만 강물 쳐다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괜스레 더 우울해져서 죽는다는 거 생각보다 별거 아니겠구나 싶죠.”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내가 그 나이에 늘 이곳에 와서 했던 생각이니까.”
그 말에 다시금 놀란 하나는 두 번째로 눈물을 뚝 그쳤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말의 뜻과는 어울리지 않게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결론을 내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아서, 그래서 살아요.”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가진 것들이랑 헤어져야 하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갖고 있던 것들을 이제는 가질 수가 없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꿈도 이룰 수가 없게 되면 어떡해요?”
와장창 부서져 버린 트로피가 뒤늦게 마음에 사무쳤다. 10년이 넘게 그려온 꿈을 이제는 포기해야 한다는 걸,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하나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림은 열아홉 고등학생이 꿈꾸던 작은 세계의 전부였다. 전부였던 걸 잃었는데 그래도 죽을 용기로 살아가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그걸 알았는지 잠시 무거운 표정으로 답을 미루던 남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보기로 마음먹는다고 해서 별안간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는 않아요. 마음을 고쳐먹고 죽을힘을 다해 아등바등 살아도 세상은 여전히 날 힘들고 버겁게 만드니까.”
“…….”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적어도 그냥 그때 죽을 걸 그랬다고 후회한 적은 없다는 거죠. 그래도 늘 꿈은 꾸니까.”
그렇게 말한 남자가 빙긋이 웃었다. 그 웃음에 하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꿈이 뭔데요?”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는 저쪽 동네에 내 가게를 여는 거.”
다리 반대편을 가리킨 남자가 말했다. 하나가 사는 동네였다. 아, 이 남자가 지금 저쪽 동네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는 건 알고서 하는 소리인가? 기껏해야 아직 대학생인 것 같은데.
하지만 다음 이어진 말에 하나는 곧바로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앞으로는 여기 오지 마요. 여기에 서 있으면 이대로 죽어버려야겠다는 충동이 드는 거, 순식간이니까. 차라리 복수를 해요.”
“무슨 복수요?”
“그야 물론, 죽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만든 현실을 향한 복수죠.”
“…….”
“세상은 생각보다 공평해요.
출판사 서평
때때로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
“따라오지 마세요.?어설픈 위로라면 사절이니까.”
?
처음 보는 사람에게 최악의 인상을 남겼을 때.
?
“우리,?어디서 본 적 있죠?”
?
그리고 그 사람과 또다시 조우했을 때.
?
이대로 영원히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회의에 빠진 순간,
삶은 또다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좋아요. 그 거짓말, 진짜인 걸로 합시다.?단, 내가 기억해 낼 때까지.”
언제나 꿈을 꾸는 사랑스러운 파티시에와 커피를 내리는 천하태평 나무늘보 바리스타.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꽃다운 청춘들의 이야기가 함께하는 곳.
?
“어서 오세요.?「L'amour」입니다.”
?
회갈색 벽돌과 파란색 창문 너머로 갓 구운 빵 냄새와 커피 볶는 향이 새어 나오는,
슈크림처럼 부드럽고 마카롱보다 더 달콤한 사랑을 굽는 제과점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책속으로 이어서]
프롤로그Ⅱ
그라인더로 곱게 간 원두를 포타필터portafilter에 담고 탬퍼tamper로 꾹 누른다. 탬핑이 끝난 포타필터를 에스프레소 머신에 장착하고 버튼을 누르자 진한 커피가 떨어져 내렸다. 추출된 에스프레소 위에 거품을 낸 스팀 우유를 천천히 붓자 부드러운 라떼 향이 자그마한 가게 안에 그윽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 그냥 사진만 한 번 보라니까?”
그 평화로운 분위기를 깬 건 정훈의 말이었다. 방금 막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열변을 토하는 친구의 모습에 준수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결혼 정보 회사로 이직할 계획이야?”
“그러니까 미친놈아, 내가 생전 안 하던 중매쟁이 노릇까지 하고 있는데 그까짓 사진 한 번 봐주는 게 그렇게 어렵냐?”
(중략)
“그러니까 하는 소리다. 내가 오죽하면 황금 같은 휴가에 너 붙잡고 이러고 있겠냐. 제발 부탁인데, 내가 권하는 여자 만나기 싫으면 네 이상형이라도 말해봐. 지구 끝까지 뒤져서라도 찾아다 줄 테니까.”
오늘따라 유독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정훈의 집요함에 준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태평양 같은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어떻게 둘러대야 친구의 집착을 잠재울 수 있을지 궁리하던 차였다. 딸랑거리며 종이 울리더니 여자 한 명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준수가 안내를 하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여자는 곧장 혼자 온 손님이 차지하고 있던 테이블로 직행했다.
“늦었으면 뛰어오는 시늉이라도 해라, 좀. 내 표정 빤히 보면서도 태평하게 문 열고 들어오는 거 보고 진짜 분노가 차올랐다, 분노가.”
“미안해. 하지만 알잖아, 난 달리기는 정말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는 거.”
달리기라는 말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배시시 웃는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시선이 꽂힌 순간이었다. 준수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정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달리기 싫어하는 여자.”
“뭐? 아, 이 미친놈. 뭔 놈의 취향이 그러냐? 아무튼, 어디 말이라도 해봐. 들어나 보게.”
정훈이 채근했으나 준수는 더는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한편 지금 이 순간 가게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손님들은 본격적으로 둘만의 환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이후로 뜀박질 한번 안 하고 사냐?”
“너 잡혀도 죽고 뛰어도 죽을 것 같은 상황 겪어본 적 있어? 그 기분은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니까. 그래도, 늦은 건 내가 진짜 미안해. 오늘 내가 쏠 테니까 화 풀어라, 응?”
“엎드려 절을 받지. 위로해 주자고 부른 자리니까 내가 참는다, 참아. 그나저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남자 요새도 꿈에 나와?”
“그 남자? 아, 그러고 보니까 어제 꿈에 나타났어. 한동안 잠잠했는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남자 혹시 잘생겼니? 딱 한 번 봤는데 6년 동안이나 꾸준히 꿈속에 출몰하게.”
“얼굴은 잘 기억 안 나. 그때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그런 거 따지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거든. 꿈에서도 얼굴은 흐릿하게 나오고. 그리고, 나 원래도 사람 얼굴 잘 기억 못 하잖아.”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봐. 나 진짜 궁금하단 말이야.”
“뭐, 잘생겼던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마주하면 기억날 것 같은데. 그렇지만 다시 만날 일은, 아무래도 없겠지?”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지. 얼굴을 알아, 이름을 알아, 연락처를 알아. 단서가 아무것도 없잖아.”
“나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세월이 벌써 이렇게나 흘렀네. 있잖아, 그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은 하겠지. 그게 보통 일도 아니고 해 질 녘에 강남 한복판에서 한바탕 추격전을 찍었는데.”
두 손님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소곤거리고 있는 터라 무슨 사연인지는 정확히 들리지 않았으나 오래된 추억에 잠긴 표정만은 인상적으로 남았다.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은 준수가 정훈에게 두 번째 대답을 건넸다.
“옛날에 못 한 말을 빚으로 남겨둘 정도로 계산 확실한 여자.”
“들을수록 진짜……. 야, 차라리 그만 귀찮게 굴고 꺼지라고 해라.”
어느새 다 식어버린 라떼를 마시던 정훈이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을 성사시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글러먹은 듯했다.
“그래, 내가 미친놈이지. 내가 미친놈이야.”
누구보다 준수를 오래 봐온 정훈이었다. 한없이 느긋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놀랍다 싶을 정도로 칼 같은 사람이 바로 서준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덤덤한 대꾸가 돌아왔다.
“커피 다 마셨으면 영업 방해로 신고하기 전에 가라. 어차피 곧 주문받으러 일어나야 될 것 같거든.”
“바짓가랑이 붙잡고 매달려도 간다, 가. 매정한 놈.”
평소와 다르지 않게 들리는 준수의 태평한 말투 속에서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겠다는 무언의 경고를 읽을 수 있었다. 결국 커피 잔을 내려놓은 정훈은 퇴장을 자처했다.
“휴가 즐겁게 보내. 혹시 주위에서 그런 여자 찾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됐다, 됐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련다.”
질색하며 휙휙 손을 내저은 정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떠났다.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준수는 스툴에 걸터앉아 이제야 비로소 깃든 평화를 만끽했다. 한편 구석 테이블을 차지한 두 손님은 여전히 즐겁게 재잘대고 있었다.
“그런데 너 지금 상당히 아련해 보인다는 거 알지? 그 남자가 무슨 첫사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뭐? 그런 거 아니거든!”
“하긴, 여리고 섬세하고 풍부한 주하나 감성에 처음 본 사람하고 사랑에 빠지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긴 해? 진짜 첫사랑은 따로 있는 거 내가 몰랐으면 아마 믿었을걸.”
“첫사랑이고 끝사랑이고, 잠재적 백수한테 사랑은 곧 사치란다 친구야.”
“우아한 백조가 뭐 어때서? 이왕 그만두기로 한 거 뭘 그렇게 사서 걱정을 해.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즐겨.”
“우아가 아니라 으악이지.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데. 베짱이의 삶을 지향하기에는 내가 내 주제 파악을 너무 잘하고 있는 거지.”
“그래, 그거야. 생각해 보면 개미가 아니라 베짱이가 진정한 승자 아니니? 좋은 시절에 풍류를 즐기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다가 빈털터리가 되기 직전에 극적으로 개미의 구제를 받아서 결국 잘 먹고 잘 살잖아.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들 다 재평가가 필요하다니까? 한 번 사는 인생 베짱이처럼, 어?”
익살맞게 받아쳤으나 사실 그녀는 친구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한때 공주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주하나는 이제 없었다. 온실 속 화초도 몇 년 사이 갖은 풍파에 휩쓸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면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잡초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산증인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되게 신기하다. 나 이쪽 동네는 처음 와보는데 깜짝 놀랐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국적인 것 같아.”
“야, 넌 나이가 몇인데 이제야 경리단길을 와보는 거야. 세상 구경도 좀 하고 살아라.”
“그러게, 나 여태 뭐 하고 산 거지.”
“또, 또 처진다. 안 되겠네. 얼른 밥을 먹여야지.”
“맞아, 나 배고파. 어제 집에 돌아오고 나서 내내 늘어지게 잠만 잤거든. 우리 빨리 맛있는 거 먹자. 여기는 뭐가 맛있어?”
“나도 처음 와봐서 잘 몰라. 물어보지, 뭐. 여기요!”
자신을 부르는 제스처를 놓치지 않은 준수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그의 눈길을 끌던 여자가 상냥해 보이는 눈을 또렷이 뜨고는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는 뭐가 제일 맛있어요?”
“매일 동해에서 갓 잡아 올린 대구로 만드는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가 가장 유명합니다. 메뉴판에도 쓰여 있지만, 전국에서 제일 맛있거든요.”
진지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게 능청스럽게 들리기까지 하는 답변에 여자가 비시시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준수 역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여자는 재차 물었다.
“정말 전국에서 제일 맛있어요? 제가 사는 거라, 맛없으면 안 되거든요.”
“물론이죠.”
“그럼 그거 말고 다른 메뉴도 추천해 주실래요?”
“비스트로 버거도 저희 매장에서 잘나가는 메뉴입니다.”
“그건 전국에서 제일 맛있다는 말이 없네요?”
“그런 장담은 못 드리지만 저희 가게에서 가장 잘생긴 요리사가 재료 손질부터 접시 세팅까지 직접 합니다.”
건조한 어투라 더욱 절묘하게 들리는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여자가 이번에는 소리 내 웃었다. 한참을 까르르 웃던 그녀가 주문을 했다.
“그럼 그 두 개로 주세요.”
“감사합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들어오다 보니까 커피 향이 좋던데, 커피도 잘생긴 바리스타가 내려주시는 건가요?”
그 말에 처음으로 당황한 준수가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곧바로 받아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 여자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커피는…… 제가 내립니다.”
“그래요?”
그 대답에 여자는 준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반짝반짝한 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은 여자가 말을 이었다.
“그럼 잘생긴 바리스타가 만들어주시는 거 맞네요. 라떼로 두 잔 부탁드려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요.”
“피시 앤 칩스, 비스트로 버거, 라떼 두 잔 주문받았습니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미소를 되찾은 준수가 주문 내용을 짚어주고는 메뉴판을 거두어갔다. 주방에 지시를 내리고 직원들이 조리를 시작하는 걸 확인한 후 돌아서다 말고 빙긋이 웃은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정훈은 절대 듣지 못할 세 번째 대답이었다.
“뭐, 웃는 게 예쁘면 더 좋고.”
나뭇결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마호가니 바닥 위로 테라스에서 비쳐 들어온 오렌지색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6년이라는 시간을 돌아온 재회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아주 사소한 마주침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기본정보
ISBN | 9791104918094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09월 04일 |
쪽수 | 524쪽 |
크기 |
131 * 191
* 28
mm
/ 482 g
|
총권수 | 1권 |
Klover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리뷰 종류별로 구매한 아이디당 한 상품에 최초 1회 작성 건들에 대해서만 제공됩니다.
판매가 1,000원 미만 도서의 경우 리워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일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불편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에 해당하는 Klover 리뷰는 별도의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도서나 타인에 대해 근거 없이 비방을 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리뷰
- 도서와 무관한 내용의 리뷰
- 인신공격이나 욕설, 비속어, 혐오발언이 개재된 리뷰
- 의성어나 의태어 등 내용의 의미가 없는 리뷰
리뷰는 1인이 중복으로 작성하실 수는 있지만, 평점계산은 가장 최근에 남긴 1건의 리뷰만 반영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200원 적립
문장수집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주문취소/반품/절판/품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