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우리는
도서+교보Only(교보배송)을 함께 15,000원 이상 구매 시 무료배송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20,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5,000원 미만 시 2,500원 배송비 부과
1Box 기준 : 도서 10권
해외주문/바로드림/제휴사주문/업체배송건의 경우 1+1 증정상품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패키지
북카드
키워드 Pick
키워드 Pick 안내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다른 연관 도서를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는 서비스로, 클릭 시 관심 키워드를 주제로 한 다양한 책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키워드는 최근 많이 찾는 순으로 정렬됩니다.
작가정보
저자(글) 박정아
목차
- 프롤로그
1. 우연한 만남
2. 옆집 오빠
3. 좋아하는 걸까요?
4. 내가 어제 무슨 꿈 꿨는지 알아요?
5. 이게 다 선생님 탓이에요
6. 자꾸 헷갈리게
7. 끝까지 함께 가봐요
8. 마음 변하지 말고, 힘들어 하지도 말고, 지치지도 말고
9. 함께할 수 있어 가슴이 더 뜨거워지는
에필로그
외전 1
외전 2
작가 후기
책 속으로
지영과 점심을 먹고 들어오는 길이었다. ‘최서윤 씨?’ 하고 이름을 부르며 다가온 여자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서윤을 이끌고 카페로 발을 들였다.
갈색의 긴 생머리에 아름다운 얼굴.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의 수수한 차림인데도 여자에게서는 아름다움이 넘쳐흘렀다. 저도 빠지는 외모는 아니라지만 그 여자에게서는 그것과는 또 다른 자신감이 느껴졌다.
여자의 말을 들으며 서윤은 엄마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바로 오늘 아침, 겨우 몇 시간 전에 나누었던 그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그녀에게 닥친 것이다.
“이러면 믿겠어요?”
서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자는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며칠 전에 찍은 거예요. 내 방, 내 침대에서.”
서윤의 눈길이 절로 사진을 향했다. 믿을 수 없다고, 처음 보는 여자에게 놀아나지 말고 강민우 그 사람을 믿어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고작 침대라는 단어 하나에 그 생각이 어이없이 꺾이고 만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 야물게 다물고 있는 입술과 툭 튀어나온 목울대, 그리고 그 목울대 옆 초록빛이 도는 작은 점 하나. 그 남자는 분명 강민우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지금 마주 앉은 이 여자가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팔을 뻗어 셀프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자의 벗은 어깨는 매끄러워 보였고, 이불 밖으로 살짝 드러난 가슴은 아담한 크기를 짐작케 했다.
밤마다 전화를 걸어 달콤한 목소리로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 주던 남자였다. 어젯밤에도, 그리고 그제 밤에도. 며칠 전이라면 그날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강민우가 고작 이런 사람이었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서윤은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6개월 놀았으면 서로 질릴 때 되지 않았나? 우리 곧 약혼해요. 어른들까지 아시기 전에 이제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어요? 우리 아버님 성격 어떠신지 그쪽도 아실 텐데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같잖다는 듯 내뱉은 여자의 말에 서윤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서윤이 여전히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여자는 테이블 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서윤에게도 매우 익숙한 통화 연결음. 민우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들었던 그 음악이 여자가 들고 있는 휴대폰에서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왔다.
“어, 민우 오빠. 우리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 오늘 가봉하러 가는 날인 거 안 잊었지? 네, 그래요. 그럼 일곱 시에 데리러 와요. 응, 사랑해.”
여자는 그녀의 앞에서 보란 듯이 웃음을 띠며 그와 통화를 마쳤다. 표정이 바짝 굳은 서윤에 비해 너무나도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끝까지 한마디도 안 하시네. 난 몰랐으니까 무고하다, 그러니까 탓하려면 그 남자를 탓해라, 뭐 그런 건가요? 하지만 난 오빠 탓할 생각 없어요. 그렇게 꽉 막힌 여자 아니거든요. 결혼 전에 좀 노는 거, 그게 뭐 대수라고. 내가 오늘 찾아온 건 그냥 그쪽이 불쌍해서예요. 남자가 좀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해서 정말 날 사랑하나 보다, 그렇게 믿을까 봐. 그래봐야 힘들어지는 건 그쪽이잖아요. 안 그래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서윤을 보며 여자는 가방 안에 사진과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앞으론 오빠랑 만나는 일 없는 걸로 알겠어요. 믿어도 되죠?”
여자는 마지막까지 웃음을 거두지 않고 서윤에게서 돌아섰다. 너무나도 여유로운, 완벽한 승자의 모습이었다. 서윤은 귀에서 점점 멀어지는 구두 소리를 들으며 피가 나도록 입술만 꼭꼭 깨물었다.
출판사 서평
낯선 사람, 낯선 환경이 필요해 집을 떠나 홀로 내려간 곳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 버렸다.
불편한 마음은 어느새 다른 감정이 되어 자라나고.
“혹시 제가 언니랑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이었어도,
그래도 전 안 되는 건가요?”
그녀와의 관계를 굳이 정의하자면, 그냥 이웃사촌이라는 것.
그 이상은 절대 될 수 없는 관계. 그래서는 안 되는 사이. 그뿐이다.
“그 질문에 대답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대답 듣고, 마음 아프지 않을 자신 있어요?”
사랑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마음.
축복받을 수 없는 인연.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든 사랑을 택해야만 했는지.
그럼에도 우리는…….
“가요. 끝까지 함께 가봐요.”
출판사 리뷰 and 만든 이 코멘트
형부가 될 뻔했던 남자와 처제가 될 뻔했던 여자. 혹자는 그들의 만남이 막장, 혹은 치정이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만남이 남자와 여자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많이 아파했고 또 그만큼 괴로워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들, 서로를 마음에 담고도 세상의 눈이 두려워 감추어야만 했던 그들은 결국 그 마음 하나만으로 모든 걸 이겨내고자 한다. 먼저 용기를 낸 서윤과 끝내 제 마음을 외면하지 못한 기주의 안타까운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그들을 응원하게 되었다. / 편집자L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관계가 아닌 인의로 예의로 가능하지 않는 남녀의 관계로 시작된 인연, 가족들의 반대, 관념의 이해를 넘어서는 절절한 두 남녀의 마음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흔들림 없는 마음에 대한 정의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다. / 편집자C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다, 서윤을 그리던 기주의 마음이. 당장에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픈 마음을 억누르며 그는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쥐었더랬다. 참자, 참아보자. 하루만 더. 한 시간만 더. 십 분만, 일 분만 더……. 하지만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서윤이 있는 청주로 밤새 내달려 갔다. 우연 같기도 운명 같기도 한 힘겨운 사랑에 읽는 내내 그들과 함께 질주하고, 쿵쿵쿵 심장이 요동쳤다. / 편집자G
책속으로 추가
[언니 왜 안 들어와요? 무슨 일 생긴 거예요?]
멍하니 앉아 있던 서윤이 정신을 차린 건 지영의 전화를 받고서였다. 그녀는 힐긋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을 그제야 인지했다.
[그 여자 누군데요? 언니 아직 카페에 있어요? 제가 내려갈까요?]
“어, 아냐, 지영 씨. 곧 들어갈게.”
전화를 끊은 서윤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카페를 나섰다.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하지만 손가락이 이성을 거스르고 건물 꼭대기층 버튼을 눌렀다.
옥상에 선 서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티 없이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그래서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그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 단축 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지난 6개월 동안, 그녀에게 늘 첫 번째였던 사람. 기쁜 일이 있어도, 힘든 일이 생겨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에도 가장 먼저 생각났던 사람. 강민우 그 남자였다.
[어, 서윤 씨. 점심은 먹었어?]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여전히 자상한 음성.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은 잠깐 졸다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네, 먹었어요, 팀장님.”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럴 때마다 거리감 느껴지는 거 알아?]
그의 말에 서윤은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만일 그 여자가 다녀가지 않았다면, 저는 분명 미안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그가 느끼는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애를 썼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 오늘 저녁에 영화 볼래요? 일곱 시에 주차장에서 기다릴게요.”
우리라는 단어에 새삼 목이 막혔다. 아니라고 말해주길. 그 여자가 말한 약혼 따위 다 거짓이라고 말해주길. 그 여자 혼자의 연극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길. 그렇다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진이라도 잊어줄 수 있다. 단 하루의 일탈이어도 용서할 수 있고, 저를 알기 전의 과거라면 문제도 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어? 오늘…… 저녁? 음, 어떡하지? 어머니께서 몸이 조금 안 좋으셔서.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은데.]
아, 당신의 어머니는 그래서 그렇게 몸이 자주 아프셨던 거구나. 이제야 깨닫게 된 사실에 서윤은 기가 막혔다. 그러고 보니 가끔씩 집안일을 핑계로 휴대폰을 꺼놓았던 것도 모두 그 여자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저는 깊게 잠들지 못하고 그의 전화를 기다릴 때, 이 사람은 그 여자와 침대에서 그렇게 뒹굴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요, 집에…….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뭐.”
종료 버튼을 누르는 손길이 거칠었다. 서윤은 무겁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화가 났다. 미칠 것만 같았다. 놀았다, 라니. 우리가 단순히 놀았다는 표현을 쓸 만큼의 그런 관계였던가. 강민우에게 나는 고작 그 정도였던가. 난 정말 그가 가지고 논 상대에 불과했던 것일까.
“하! 무슨 썩은 동태눈도 아니고.”
사람 보는 눈이 겨우 이런 수준이었다니. 그를 철석같이 믿었던 제 자신이 부끄럽고 실망스러웠다.
엄마의 말이 모두 맞는 모양이다. 인생이, 사랑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닌데. 만만한 게 아닌데.
눈시울이 뜨겁다. 서윤은 눈물을 참아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하고 또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진심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한 제 잘못이지.
사무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지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입을 벙긋거려 물었고, 김 과장은 어디에 갔었느냐, 일은 안 하고 뭐 하는 짓이냐며 서윤을 나무랐다. 하지만 서윤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서고로 들어가 커다란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서랍을 열고 상자에 물건을 쓸어 담는 서윤을 직원들이 모두 일어서서 바라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그런지 다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만 볼 뿐이었다.
“언니, 뭐 하세요? 이 상자는 뭐고요? 짐은 왜 싸는데요?”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지영이 들고 있던 볼펜을 집어 던지고 서윤의 자리로 달려왔다. 그녀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상자에 물건을 담는 서윤의 손길을 좇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미안, 지영 씨. 우리 나중에 얘기해. 내가 연락할게.”
짐을 모두 챙긴 서윤은 양식 하나를 출력해 이름 옆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김 과장에게 가져갔다.
“이게…… 뭐야?”
글자를 못 읽어 김 과장이 묻는 건 아니겠지만, 서윤은 순순히 대답했다.
“사직서요. 사람 새로 뽑아서 인수인계할 때까지 붙어 있는 게 도리라는 건 알지만, 사람 우습게 알고 기만하는 사람들 주머니 불려주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게 열 받고 화가 나서요. 그래서 더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과장님. 이유는 팀장님이 아주 잘, 아실 거예요.”
서윤은 가방을 어깨에 걸고 물건을 쓸어 담은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뭔가 억울하다. 이대로, 바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주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진심과 거짓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제 잘못이라고 애써 치부해 버렸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끝을 내기에는 정말 억울했다.
인생의 가장 황금기였던 이십대. 칠 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의 흔적이 이곳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하지만 오너의 아들을 쫓아낼 수는 없음을 알기에 옥상에서 한숨을 쉬며 미련 없이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서윤은 상자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 강민우 팀장의 자리로 다가갔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책상은 종이 쪼가리 하나 없이 깨끗했다. 깔끔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딱 주인을 닮은 그런 모습이었다. 깨져 버린 두 사람의 관계처럼, 그런 흔적을 남겨줄 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명패가 서윤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는 크리스탈 명패를 주저 없이 집어 들었다. 그리고 두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가 바닥을 향해 힘껏 내려쳤다. 와장창, 커다란 파열음이 들리며 여기저기로 파편이 튀었다. 그 순식간의 상황에 놀란 사람들은 크게 비명을 질러댔다.
“꺅! 최 대리! 왜 이래, 미쳤어? 돌았어? 그게 얼마짜린데!”
“네, 미쳤습니다. 돌았어요. 저 지금 꼭지까지 완전히 돌았거든요. 이깟 명패, 해봐야 얼마나 한다고요. 아무리 비싸봐야 고작 몇십만 원짜리, 그게 사람 진심보다 중요해요? 있는 사람들은 사람 가지고 장난치고 놀아도 된대요?”
크게 내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직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장내는 언제 소동이 일었냐는 듯 아주 작은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바닥에 흩어진 크리스탈 파편들만이 방금 전에 있었던 큰 소동을 대신 말해주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 나의 칠 년. 그리고 6개월의 짧고 허무한 사랑.
목구멍까지 차오른 울분을 억누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그녀는 다시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큰 보폭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니? 그 짐은 또 뭐고?”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던 미경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서윤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연애를 하는지, 야근을 하는지, 매일같이 밤늦게 들어오던 작은딸이 훤한 대낮에 집에 들어오니 의아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답도 없이 쿵쿵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서윤을 그녀가 뒤따랐다.
상자를 방에 내려놓은 서윤은 장롱을 열어 한구석에 넣어두었던 커다란 배낭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꺼내 담기 시작했다.
“얘,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놀란 미경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서윤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짐을 꾸렸다. 알 수 없는 딸의 행동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지, 미경은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나, 한 달만 여행 좀 다녀올게, 엄마.”
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엄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왠지 엄마의 얼굴을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재수가 없어 그냥 똥 밟은 것뿐이라고, 집에 오는 길 내내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자꾸 가슴이 아팠다.
“한 달? 회사는 어쩌고?”
“그만뒀어. 짐 싸가지고 나오는 길이야.”
“뭐? 아니, 너…… 그동안 잘 다니던 회사를 왜. 무슨 일 있었니? 누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했어? 아침에도 아무 말 없이 잘 나갔잖아.”
미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을 쏟아부으며 두 손으로 서윤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이제야 겨우 마주한 얼굴. 운 것 같진 않았지만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무슨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은근슬쩍 피하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엄마.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그래요.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그만뒀어. 오늘 휴대폰 정지시킬 거야.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잘 살아 있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할 테니까.”
“대체 무슨 일이야? 연락까지 끊고 잠적할 일이라도 있어? 뭐 크게 잘못했어? 엄마가 뭘 알아야 어떻게든 해줄 거 아니야.”
그냥이라는 어설프고 허술한 거짓말은 역시나 먹히지 않았다. 표정만 봐도, 눈빛만 마주쳐도 귀신같이 마음을 읽어내는 엄마인지라, 칠 년이나 불평 없이 다닌 직장을 그만두며 추궁을 피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팀장이랑 연애를 했는데, 아침에 본 막장 드라마처럼 그 남자는 약혼녀가 있는 몸이었다고. 물론 그 사실을 알고 만난 것도 아니고, 또 자신도 피해자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철판을 깔고 회사에서 그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엄마, 내가 어디 가서 사고 치고 다니는 사람이야? 엄마 딸이 나쁜 짓 하고 다니는 거 봤어? 그냥 쉬고 싶다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그냥 좀 쉬고 싶다고. 그러니까 제발 그냥 나 좀 놔둬요, 응? 연락은 꼭 할게. 그리고요, 회사에서 전화 오거나 누가 찾아오거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요. 언제 올지도 모른다고.”
“맞네. 회사에 무슨 일 있는 거 맞네. 뭐야, 돈 문제야? 크게 손실이라도 냈어? 얼마나 되는데? 알아야 갚아주든 말든 할 거 아냐.”
서윤은 순간 피식 웃음이 흘렀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그 크리스탈 명패를 보며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고 방방 뛰던 김 과장이 떠오른 탓이다. 금전 손실이라면 겨우 그 정도. 그게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 아닌데. 그러고는 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조각난 그 크리스탈처럼 반짝반짝 빛이 날 거라 믿었던 제 사랑도 깨져 버렸다 생각하니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게 뭐 울 일이라고. 잘한 것도 없지만, 잘못한 것도 없다. 현실에서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쉬고 싶은 것뿐이었다.
“엄마, 정말 아냐. 진짜로 아냐. 그러니까 나 믿어줘요. 한 달만, 딱 한 달만 쉬고 다시 취직할게, 응? 쉬는 김에 바람 좀 쐬고, 여기저기 구경 좀 하고 그러고 싶어서 그래요.”
서윤은 잡혀 있는 손을 빼내 두 팔로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푹 묻었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엄마의 체취를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에 담았다.
“나 믿지, 엄마?”
“더워. 떨어져, 이것아.”
미경이 불퉁거리며 서윤의 등을 툭 쳤다. 그리고 안고 있는 몸을 떼어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딸이라 지레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전화 꼭 할게요, 엄마.”
방을 나서며 서윤이 말했다. 미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매우 짧았다. 그사이 서윤은 지명도 잘 모르는 곳을 열심히 헤매고 돌아다녔다. 6월 볕에 얼굴과 몸이 검게 그을리고, 살이 빠져 옷이 헐렁거렸다. 끼니도 거르지 않았고, 일부러 맛집을 검색해 찾아다니며 평소보다 더 열심히 먹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몸은 점점 야위기만 했다.
힘들게 산을 오르기도 했고, 바다가 눈앞에 나타나면 고민 없이 가방을 벗어 던지고 물에 뛰어들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가는 날도 많았고, 또 해가 질 무렵 벌겋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장에서 예쁜 장식품이나 신기한 물건을 보면 장사꾼과 입씨름을 벌여 흥정했고, 그녀는 그렇게 구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가방에 담았다. 그리고 또 시골길을 지나가다가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 옆에 앉아 막걸리를 넙죽 얻어 마신 적도 있었다.
하지만…… 강민우와 함께했던 6개월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기에 한 달은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하루 종일 걸어 베개에 머리만 붙이면 지쳐 떨어질 만큼 몸이 고단해도, 또 가끔씩 알코올의 힘을 빌려 뇌를 마비시켜도,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은 불쑥불쑥 틈새를 비집고 찾아들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여행을 다니면서도 서윤은 틈틈이 시간을 내 PC방을 찾았다. 그곳에서 구인 광고를 검색하고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무역회사 몇 군데에 이력서를 냈다. 꼭 서울이 아니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다 보면 쓸데없는 기억들을 떠올리는 일은 자연히 적어질 테니 말이다.
강민우를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랬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다. 사랑도, 기억도, 사람의 마음도 모두 형체가 없고 바래기 쉬운 것이라, 그와 약혼한다던 여자가 서윤의 앞에 등장했던 순간 그 사랑은 퇴색해 버렸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정말 사랑이었을까.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수도 없이 자문했지만 답은 늘 한결같았다.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렇게 한 달간의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번호를 바꿔 새로 개통한 휴대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그 전화는 서윤의 발걸음을 청주로 이끌었다.
면접을 보고, 바로 출근했으면 좋겠다는 답을 들었다. 그녀는 그 길로 부동산에 달려가 즉시 입주할 수 있는 빈집을 찾아 계약했다.
토요일에 집에 들어가서 엄마에게 등짝을 열두 대 맞았고, 일요일에는 짐을 모두 싸서 이사를 했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 부모와 자식의 연은 끊기는 거라고 미경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서윤은 문턱을 넘어섰다.
규모가 작은 무역회사에는 서윤이 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간단한 영어 번역과 메일을 확인하는 일, 팩스를 보내고 전화 받는 일이 업무의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는 사무실의 잡다한 비품, 소모품들을 챙기고 확인하는 것과 사장의 심부름이나 은행에 다녀오는 일들뿐이었다.
삼 일을 출근하고 나니 많지 않은 업무에 완벽하게 적응이 되어버렸다. 여유롭게 커피를 마실 시간도 생겼고, 그에 따라 생각도 점점 많아졌다. 이따금씩 인연을 끊겠다고 소리치던 엄마의 얼굴도 떠올랐고, 때로는 민우의 얼굴도 떠올랐다.
서윤은 퇴근길에 집 근처 치킨집에 들러 후라이드를 한 마리 주문해 포장했다. 그리고 그 옆 편의점에서 6개들이 캔 맥주도 샀다. 잡생각이 파고드는 머릿속을 이렇게라도 마비시켜 잠재울 생각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서윤은 자신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활짝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고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다른 직장을 구해야 하나?”
더 바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그런 곳.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씻고 잠자기에도 바쁜 그런 직장을 알아봐야 하나. 6층으로 오르는 잠시 잠깐의 시간에도 서윤은 고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띵 하는 신호음을 듣고 눈을 떴다. 벽에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열린 문으로 내리려는 순간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뿔싸! 혼자가 아니었던가?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도 중얼거렸는데.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서윤은 치킨과 맥주가 든 봉지를 꽉 움켜쥐고 옆에 선 사람을 힐끔거렸다.
색이 짙은 회색 양복. 키가 큰 남자인지 살짝 올려다보았음에도 얼굴이 아닌 어깨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않도록 버튼을 누르고 서 있었다.
같은 층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든 남자가 내리지도, 문을 닫지도 못하는 이유는 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래서 서윤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움직였다.
“혹시, 서윤 씨?”
뒤를 따라 내린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잡아맸다. 낯선 곳에서 불린 제 이름. 귀에 익은 듯 아닌 듯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 음성. 서윤은 미간을 찡그렸다 펴며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형부?”
불쑥 튀어나온 호칭 때문인지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서윤은 아차 싶어 한 손으로 주책을 떤 입을 가렸다.
“서윤 씨 맞네.”
밝게 웃어주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 괜찮아요. 나 어제도 서윤 씨 봤는데, 설마 아니겠지 그러고 지나쳤어요. 서윤 씨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겠다 싶어서.”
“삼 일 됐어요, 이사 온 지. 일요일에. 저기 606호요.”
말이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서윤은 그에게서 눈길을 돌려 제집 현관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랬구나. 난 지난 주말에 서울 다녀오느라 옆집에 이사 들어오는 것도 몰랐네요.”
“옆집이요?”
“응. 난 그 옆에 605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서윤을 향해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곧 그의 손가락이 그녀가 가리켰던 방향을 살짝 벗어나 안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청주에는 어떻게 내려오게 된 거예요? 직장이 여의도 아니었던가?”
“그냥, 거긴 그만뒀어요. 우연히 이쪽에 직장을 잡아서. 그런데 형부…….”
또다시 튀어나온 망할 호칭에 서윤은 입술을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벌겋게 붉힌 얼굴이 재미있는지 그가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니까, 마땅한 호칭이…….”
서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과거에 형부와 처제로 부르고 불렸던 관계. 다만 그 결혼이 식을 2주 앞두고 깨졌던 터라 형부라는 호칭마저 불편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편하게 불러요. 형부는 좀 그러니까, 그냥 이름 부르든지.”
“이름을요? 그래도 그건 버릇없어 보이는데.”
“무슨, 서윤 씨랑 나랑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그나저나 서윤 씨는 여전하네요. 상대한테 마음 쓰는 것도, 또 예의 바른 것도.”
“제가 뭘요. 당연한 거죠. 음, 그럼 선생님이라고 할까요? 병원에서는 다들 그렇게 부르실 테니까.”
“뭐, 편한 대로 해요.”
정말로 상관없다는 듯 기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떻게 불리든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이제는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관계니까.
“그런데 선생님이야말로 여기에 웬일이세요? 병원 일은 어떻게 하시고요?”
“나도 그만뒀어요. 이쪽에서 가정의원 하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 선배가 이민 가는 바람에 내가 인수했어요. 벌써 이 년쯤 됐나.”
“아!”
이 년이라면 그녀의 언니와 결혼이 깨지고 바로 그 직후라는 말이었다. 그러니 서윤으로서는 그 대답을 무심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사람도 저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내려온 것이 아닐까.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을 찾아, 집도 직장도 버리고 와야 했던 그런 마음이었던 건 아닐까.
“그런 얼굴 할 거 없어요. 서윤 씨가 무슨 생각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정말 그런 거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말아요. 그냥 우연히 그때 기회가 된 것뿐이니까.”
“……네.”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민우와의 일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이곳에 와 있을 이유가 없듯, 이 사람도 언니와의 파혼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 들어가요.”
기주가 먼저 발을 옮겼다. 그러자 서윤도 뒤를 따라 종종거리며 걸었다. 먼저 문 앞에 선 그가 긴 손가락으로 도어록 버튼을 틱틱 눌렀다. 그 소리를 들으며 서윤은 그를 지나쳐 갔다.
“저기, 선생님. 혹시 저녁 드셨어요?”
갑자기 발을 멈춘 서윤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띠릭 해제음을 듣고서 육중한 철문을 당기던 그도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제 먹어야죠.”
“그럼, 이거 같이 드실래요? 저 혼자는 좀 많은데.”
서윤은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위로 들어 올렸다. 순간 코에 확 풍겨오는 고소한 기름 냄새.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또 복도에서 그와 얘기하던 사이에도 냄새가 진동했을 텐데. 그런데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
기주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목을 긁적였다. 특별히 불편할 건 없어도 딱히 편할 것도 없는 그런 관계. 우연히 옆집으로 이사 온 탓에 이웃사촌이 된 것까지는 어쩔 수 없다지만, 일부러 시간을 만들어 무언가를 함께할 필요성이 있는가에 대해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서윤이 먼저 결론을 냈다.
“역시 불편하시죠? 죄송해요.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아니, 저기…… 옷만 좀 갈아입고. 내가 갈까요? 아니면 이쪽으로 건너올래요?”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그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서윤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옷 갈아입고 오세요. 준비해 놓을게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기주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서윤도 철컥 하고 그의 집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었다. 그러고는 거실에 작은 탁상 테이블을 폈다. 그 위에 치킨 상자와 맥주 두 캔을 올려놓고, 젓가락 두 벌과 앞접시도 챙겨놓았다.
준비를 모두 마쳤을 때쯤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인터폰에 비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연 서윤이 비켜서자 그가 거실로 올라섰다. 색이 짙은 면바지에 아이보리 셔츠 차림. 양복만 아닐 뿐 격식을 차린 옷이었다. 퇴근도 했고, 또 겨우 옆집인데. 집에서 입는 편한 트레이닝복이어도 괜찮으련만.
하기야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늘 정중하고 친절한 사람.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깊이가 있었던 사람이다. 서윤을 보고 예의 바르다고 말했지만, 정작 이 남자는 그 정도가 더하면 더했지 절대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함께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집 같지 않죠? 워낙 급하게 내려와서요.”
집 안을 둘러보고 있는 기주를 향해 서윤이 말했다. 소파도 없고, 냉장고나 TV 같은 가전제품도 없다. 있는 거라고는 식탁 대신 놓은 작은 테이블 하나. 그리고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주방에는 컵 두 개와 그릇 몇 개 놓인 것이 전부였다. 차라리 그의 집으로 가겠다고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불쑥 오긴 했는데, 와서 보니 미안하네요.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더군다나 이사도 했는데 빈손으로.”
“아니에요, 제가 오시라고 한 거잖아요. 그리고 집들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어서 앉으세요. 치킨 다 식었겠어요.”
테이블을 가운데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기주는 맥주 캔을 따서 서윤에게 건네고 또 하나를 마저 따 앞에 내려놓았다. 젓가락으로 그녀는 가슴살을, 그는 날개를 집어 들더니 서로 상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어,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러게요.”
지윤과 기주의 결혼식이 한창 진행되던 그 무렵, 서윤은 언니 지윤의 결혼 준비를 돕느라 여러 번 그녀를 따라나섰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기주와 셋이 어울리게 되었다. 눈치껏 빠지려고도 했었지만, 고생했으니 밥이라도 사 먹여야 한다며 한사코 붙잡는 기주 때문에 같이 저녁을 먹기도 했고, 또 오늘처럼 치킨에 맥주를 놓고 함께했던 기억도 있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던 서로의 취향. 다리를 좋아하는 지윤과 날개를 좋아하는 서윤, 그리고 가슴살을 좋아하는 기주, 그렇게 셋이 앉아 한 마리를 알뜰하게 먹으며 웃던 기억이 두 사람에게 불현듯 떠올랐다.
“그런데 청주에는 정말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직장이야 서울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사실은 낯선 환경이 좀 필요했어요. 나를 알아보는 사람 없는 그런 곳이요. 그래서 엄마한테 등짝도 몇 대 맞고 가출 아닌 가출을 했거든요.”
“아, 이런. 미안해서 어쩌죠?”
“예? 선생님이 왜요?”
미안하다는 기주의 말에 서윤이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이 사람이 미안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둘 중 굳이 누가 누구에게 미안한지를 따지자면 그건 분명 자신일 것이다. 두 사람이 파혼하게 된 이유에 제 책임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서윤 씨 알아보는 사람 없는 곳이요. 그거 실패잖아요, 나 때문에. 겨우 삼 일 만인데 날 만나 버려서.”
말은 그랬지만 그의 표정은 미안하기보다는 놀리듯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서윤은 힐끔 그의 얼굴을 살피고는 눈을 돌려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그러네요.”
작게 대답하고 그녀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어느새 가벼워진 빈 깡통. 그걸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다시 한 번 힐긋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또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요,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어요. 아까 선생님 보는 순간 그래도 완벽하게 혼자는 아니구나, 하고 마음이 놓였어요. 그래서 이것도 같이 먹자고 한 거고요. 참 웃기고 변덕스럽죠? 우리 이렇게 편히 마주 앉아 있을 사이도 아닌데.”
아직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는데도 마음속에 있는 말이 입술 사이로 줄줄 새어 나왔다. 서윤은 젓가락을 들어 애꿎은 치킨을 콕콕 찔러댔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말은 하는 게 아닌데.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편하지 않을 건 또 뭔데요. 만약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지윤 씨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서윤 씨랑 내가 불편할 이유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기주는 대답하며 뜨끔한 속을 애써 무시했다. 치킨 봉지를 들어 올리며 같이 먹겠느냐고 그녀가 물어왔을 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주춤했던 이유. 그걸 이 여자에게 들켰음에도 아니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래도요. 한 식구인데.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하자, 기주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서윤 씨, 잠깐 고개 좀 들어봐요.”
“네?”
무거워진 그의 목소리에 서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봐, 또 그런다. 서윤 씨 지금 나랑 눈도 못 마주치잖아요. 아까부터 내내 그랬어요. 힐끔 보고 피해 버리고. 난요, 지윤 씨한테 나쁜 감정 없어요. 결혼은 깨졌지만 차라리 잘된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대로 결혼했으면 오히려 서로 힘들었을 테니까. 마음은 다른 데에 두고 몸만 붙잡고 사는 거, 그거 못 할 짓이잖아요. 그래도 결혼하기 전에 지윤 씨가 솔직하게 말해줘서 괜찮아요. 그러니까 당사자도 아닌 서윤 씨가 자꾸 나한테 죄지은 그런 표정 안 했으면 좋겠어요.”
“네.”
들릴락 말락, 서윤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기주는 저만치에 있는 새 맥주를 집어 뚜껑을 따고 그녀의 앞에 놔주었다.
“자, 그럼 우리 묵은 관계는 전부 청산하고 앞으로는 그냥 이웃사촌으로 지냅시다. 좋죠?”
편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서윤의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졌다. 정말 좋은 사람. 언니는 왜 이런 남자를 힘들게 만들었는지.
“그런 의미에서 건배!”
그가 맥주 캔을 들고 건배를 외치자, 서윤도 그가 놓아준 캔을 집어 가볍게 부딪쳤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힐끔거리기만 했던 조금 전과는 달리,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
어느새 맥주를 두 캔씩 각각 비워내고, 치킨도 남김없이 싹 먹어 치웠다. 그사이 오간 대화라고는 근처 어느 식당에 어떤 메뉴가 맛이 있더라, TV에 나온 유명한 맛집이 어느 어느 위치에 있더라 하는 그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덕분에 잘 먹었어요. 음, 먹은 거 보답도 할 겸, 또 이웃사촌 된 기념으로 집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내가 하나 사주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요?”
“네? 아니에요, 선생님. 어차피 혼자 먹기엔 많은 양이라서 같이 먹자고 한 건데요. 괜히 신경 쓰지 마세요.”
“에이, 그러지 말고. 내가 정말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아! 혼자니까 아무래도 전자레인지가 필요하겠네. 나도 혼자 살아보니까 그렇던데. 어때요, 그 정도면 부담 없겠죠?”
물론 필요한 물건이기는 했다. 하지만 고작 치킨에 맥주를 대접하고 덥석 받아내기에는 너무 과했고, 그의 말과 달리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서윤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뇨, 진짜 괜찮아요. 그 정도 가격이면 부담 팍팍 된다고요. 굳이 사주시려면 그냥 휴지요. 집들이에 보통 그런 거 사 들고 가잖아요. 그 정도면 돼요.”
손과 고개를 동시에 흔들어대며 확실한 거부 의사를 밝히는 서윤을 보고 기주는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
기본정보
ISBN | 9791104911019 |
---|---|
발행(출시)일자 | 2017년 02월 08일 |
쪽수 | 432쪽 |
크기 |
130 * 191
* 28
mm
/ 657 g
|
총권수 | 1권 |
Klover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리뷰 종류별로 구매한 아이디당 한 상품에 최초 1회 작성 건들에 대해서만 제공됩니다.
판매가 1,000원 미만 도서의 경우 리워드 지급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일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불편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래에 해당하는 Klover 리뷰는 별도의 통보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도서나 타인에 대해 근거 없이 비방을 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리뷰
- 도서와 무관한 내용의 리뷰
- 인신공격이나 욕설, 비속어, 혐오발언이 개재된 리뷰
- 의성어나 의태어 등 내용의 의미가 없는 리뷰
리뷰는 1인이 중복으로 작성하실 수는 있지만, 평점계산은 가장 최근에 남긴 1건의 리뷰만 반영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200원 적립
문장수집
e교환권은 적립 일로부터 180일 동안 사용 가능합니다. 리워드는 작성 후 다음 날 제공되며, 발송 전 작성 시 발송 완료 후 익일 제공됩니다.
리워드는 한 상품에 최초 1회만 제공됩니다.
주문취소/반품/절판/품절 시 리워드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구매 후 리뷰 작성 시, e교환권 100원 적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