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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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 정태화(鄭太和) 1602-1673는 1602(선조35)년 1월 21일 정광성(鄭廣成)과 창원(昌原) 황씨(黃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양파(陽坡),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1624년(인조 1) 향시(鄕試)에서 당시 시관이었던 장유(張維)에게 높은 평가를 받으며 급제한 이후로 1628년(인조 6, 27세)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가주서(假注書)로 두각을 드러내며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인조(仁祖)조에서는 최명길(崔鳴吉)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조정의 핵심 실무행정을 익혔다. 특히 병자호란에선 김자점(金自點)의 종사관으로 출정하여 적을 방어하는 혁혁한 공을 세워 1637년(인조 15)에는 특별히 승진하여 충청감사가 되었다. 이후 1638년부터는 조정의 요직들을 두루 거치면서 인조 말년에는 우의정에 올랐고, 여러 차례 접반사(接伴使)로 차출되어 명·청나라 사이에서 민감한 과도기적 외교의 중심 역할을 했다.
효종(孝宗)조에서는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면서 효종의 북벌정책을 도우면서 유신(儒臣)인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조정에 출사(出仕)시키며 화합의 정치를 일구었다. 1656년(효종 5)에는 5남 정재륜(鄭載崙)이 효종의 넷째 딸에게 장가들고 동평위(東平尉)에 봉해지며 효종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한편 김육(金堉)과 더불어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여 민생의 안전을 기했으며 1659년(효종 10)에는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국제(國制)에 따라 기년(朞年)으로 결정하면서, 당색(黨色)에 빠지지 않고 화합의 정치를 실현했다. 특히 청나라와의 국경 유민(流民)에서 비화된 외교문제를 거시적 관점에서 해결하는 등,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며 20여 년간 정승으로서의 임무를 마무리했다.
저서로는 1629년(인조 7)에 봉화(奉化) 각화사(覺華寺)의 사고(史庫)를 조사하고 다녀오면서 쓴 『포사일기(曝史日記)』가 있고, 1634년(인조 12)에 원접사(遠接使) 김신국(金藎國)의 종사관으로 수행하며 주고받은 시들을 수록한 『서행기(西行記)』, 1649년(인조 27)과 1662년(현종 3)의 연행(燕行) 기록인 『음빙록(飮氷錄)』,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와 현종의 즉위식 때의 일을 소상히 기록한 『기해일기(己亥日記)』가 있다.
역자
박세욱 프랑스 고등문헌학술원 문학예술사 박사, 경북대학교 강사
신재환 경북대학교 문학박사, 경북대학교 강사
남민수 중국 산뚱대학교 문학박사,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연구교수
이종미 베이징대학교 문학박사, 영남대학교 강사
조인숙 동양고전연구회 회원, 전 석표중학교 교사
박한규 영남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영남대학교 강사
이경혜 동양고전연구회 간사
박은숙 계명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강사
감수 이장우 李章佑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국립 대만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중국 국립중앙연구원, 프랑스 파리 제7대학, 미국 하버드대학 등지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였으며, 현재 영남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부 명예교수, 사단법인 영남중국어문학회 이사장, 동양고전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주요 저서와 번역으로 『한유 시 이야기』(1988), 『중국문화통론』(1993), 『중국문학을 찾아서』(1994), 『중국시학』(1994), 『중국의 문학이론』(1994), 『도산잡영』(공역, 2005), 『고문진보(전?후집)』(공역, 2007), 『퇴계시 풀이』(공역, 2007),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공역, 2008), 『퇴계잡영』(공역, 2009) 등이 있다.
번역 박세욱
목차
- 국역 『양파유고(陽坡遺稿)』 서
제1권 시(詩) 56
1. <놀기를 좋아하고 책을 읽지 않아 하루는 숙부가 왕부(王父) 옆에 계시며 엉뚱한 녀석을 주제로 시를 짓게 함(好遊戱不讀書, 一日叔父在王父側, 命以狂童爲題)>
2.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께 올림(上外王考)>
3. <제목을 잃은 연구(失題聯句)>
4. <송옥이 가을을 슬퍼함(宋玉悲秋)>
5. <도연명의 국화 따기(淵明採菊)>
6. <반첩여의 비단부채(斑姬紈扇)>
7. <산음에서 배를 돌리다(山陰回棹)>
8. <동각에서 매화를 바라보다(東閣觀梅)>
9. <이른 봄(早春)>
10. <눈에 비추어 책을 읽다(映雪讀書)>
11. <붉은 복숭아꽃나무(紅桃)>
12. <낙엽(落葉)>
13. <한유의 ‘백관들에게 앵두를 하사하다.’라는 시의 운자(韻字)를 빌려 지음(次韓退之賜百官櫻桃韻)> 14. <소동파의 ‘차를 끓임’이라는 시의 운을 빌림(次東坡煎茶韻)>
15. <매 그림(畵鷹)>
16. <꽃이 지는 시절에 다시 그대를 만났구려(落花時節又逢君)>
17. <송백은 본디 외롭고 곧은 것(松栢本孤直)>
18. <백수준명(白獸樽銘)>
19. <사신 나리께서 강선루를 회억하며 지은 시를 삼가 차운함(敬次使相憶降仙樓韻)>
20. <대호의 시를 차운하다(次大瓠示韻)>
21. <두 학사에게 바침(奉呈兩學士)>
22. <앞 시의 운으로 지음(前韻)>
23. <제목 없음(失題)>
24. <제목 없음(失題)>
25~27. <제목 없음(失題)>
28. <박 참판께 써서 보내드림(錄呈朴參判案下)>
29~30. <앞 시의 운을 사용하여 지음(又用前韻)>
31~32. <제목 없음(失題)>
33. <다른 사람이 보여준 시의 운를 빌려 지음(次人示韻)>
34~35. <제목 없음(失題)>
36~37. <앞 시의 운을 사용하여 군수께 드림(又用前韻呈大尹案下)>
38. <제목 없음(失題)>
39. <다른 사람의 운에 맞추다(次人韻)>
40. <제목 없음(失題)>
41~42. <제목 없음(失題)>
43. <제목 없음(失題)>
44~45. <제목 없음(失題)>
46~47. <앞의 운을 따라 지음(前韻)>
48. <(최명길) 지천상공께 올림(呈遲川相公)>
49. <지천상공님의 회선사를 차운하여 지음(次遲川懷仙詞韻)>
50~51. <소현세자께 올리는 만사(昭顯世子挽)>
52~53. <민성휘 판서께 올리는 만사(閔判書聖徽挽)>
54~56. <인조대왕 장릉에 올리는 만사(仁祖大王長陵挽)>
57. <(이경석) 백헌상공의 시를 차운함(次白軒相公韻)>
58. <장난삼아 시를 지어 아이들에게 보여줌(戱題示兒輩)>
59. <늙은 기생 일생의 편지 끝에 붙임(題老妓一生簡尾)>
60. <시첩(侍妾)이 술이 익었다고 아뢰므로 장난삼아 읊음(侍者以酒熟來告, 戱吟)>
61. <참봉 송덕기의 시에 차운하여(次宋參奉德基韻)>
62. <참봉 송자도에게 보냄(寄宋參奉子都)>
63. <중사에게 드림(贈仲師)>
64. <김익희 강원감사님을 이별하며(別江原監司金益熙)>
65. <아들이 임금님께서 지으신 시에 응대하여 지은 시를 차운함(次家兒應製韻)>
66. <남쪽 교외 정자에서 아들의 시를 차운함(南郊亭舍次家兒韻)>
67. <백헌공께서 궤장을 하사받는 연회에서 지은 시를 차운함(次白軒賜_杖宴韻)>
68. <봉해 진원군께 올리는 만사(蓬海君震遠挽)>
69~70. <인평대군께 올리는 만사(麟坪大君挽)>
71~72. <인평대군 부인께 올리는 만사(麟坪大君夫人挽)>
73. <효종대왕 영릉에 올리는 만사(孝宗大王寧陵挽)>
74~75. <심지원 영상대감께 올리는 만사(沈領相之源挽)>
76. <연경으로 가는 사신 길에 안주에 도착하자, 병사 김체건이 배에서 연회상을 베풀었는데, 평양판관 후 선(사촌동생 채화)이 동참하여 작별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시를 지어줌(赴燕之行到安州, 兵使金體乾 進宴床於舟中, 平壤判官後仙從弟采和同參作別, 口號以贈)>
77. <홀로 가평관에 앉아 부사 허적과 서장관 이동명을 기다리며(獨坐嘉平館, 待副使許積書狀李東溟)>
78. <옥하관에 머무름. 구월이 이미 지나 감회가 있어 우연히 노래함(留玉河館. 九月已過)>
79. <이시술 부윤의 죄를 법률에 의거하여 논한 상주문에 대한 황제의 비답이 내려오는 날에 네 운(韻)으 로 오언시를 지어, 군관이 먼저 돌아가는 편에 적어, 이세장 정자에게 보냄(李府尹時述擬律奏文批下之 日, 賦五言四韻, 軍官先來之便, 書送于李正字世長)>
80~81. <남용익 지신사님 시의 각운자를 빌려 아우 만화가 전라감사로 부임함에 전별하며 지어줌(次南知 申龍翼韻贈別舍弟萬和湖南伯)>
82. <이 제주목사께 올리는 만사(李濟州寅挽)>
83. <구문치 어영대장의 어머니께 올리는 만사(御營大將具文治母夫人挽)>
84. <이승문 도사께 올리는 만사(李都事承文挽)>
85. <풍녕부인께 올리는 만사(豊寧夫人挽)>
86. <이시발 판서의 부인께 올리는 만사(李判書時發夫人挽)>
87. <신속 청주목사께 올리는 만사(申淸州_挽)>
88. <이민수 (의주)부윤께 올리는 만사(李府尹敏樹挽)>
89. <이확 현풍현감께 올리는 만사(李玄風穫挽)>
90. <김(육) 영돈령부사 부인께 올리는 만사(金領敦寧夫人挽)>
91~92. <○○을 위한 만사(失題挽)>
93. <이덕형 죽천 어른께 올리는 만사(李竹泉德泂挽)>
94~95. <강대수 (전주)부윤께 올리는 만사(姜府尹大遂挽)>
96. <정세규 판서께 올리는 만사(鄭判書世規挽)>
97. <전창군 유정량께 올리는 만사(全昌君柳廷亮挽)>
98. <서상리 승지께 올리는 만사(徐承旨祥履挽)>
99. <청녕군 한덕급께 올리는 만사(淸寧君韓德及挽)>
100~101. <유경소 이천부사께 올리는 만사(柳利川景紹挽)>
102~103. <박병 공주목사께 올리는 만사(朴公州炳挽)>
104. <○○을 위한 만사(失題挽)>
105~107. <○○을 위한 만사(失題挽)>
108~109. <○○을 위한 만사(失題挽)>
110~111. <지천 최명길께 올리는 만사(崔遲川鳴吉挽)>
112. <오이규 도사께 올리는 만사(吳都事以奎挽)>
113. <신익전 참판께 올리는 만사(申參判翊全挽)>
114. <이단상 부제학께 올리는 만사(李副學端相挽)>
115. <남용익 지신 아버님의 생신연회 시의 각운자를 빌려 지음(次南知申龍翼壽席韻)>
116~117. <박장원 구당께 올리는 만사(朴久堂長遠挽)>
118~119. <이현영 판서께 올리는 만사(李判書顯英挽)>
120~121. <윤지 참판께 올리는 만사(尹參判_挽)>
122~123. <허한 이천군수께 올리는 만사(許利川_挽)>
124~125. <김식 지사께 올리는 만사(金知事湜挽)>
126~127. <남석 경산현령께 올리는 만사(南慶山錫挽)>
128. <최후정 청안현령께 올리는 만사(崔淸安後定挽)>
129. <윤휘 판서 부인께 올리는 만사(尹判書暉夫人挽)>
130. <장(유) 신풍(부원군)님 이장할 때 지은 만사(張新豊遷葬挽)>
131. <서경우 정승께 올리는 만사(徐政丞挽)>
132. <홍영 동지(중추부사)께 올리는 만사(洪同知霙挽)>
133. <김광현 참판께 올리는 만사(金參判光炫挽)>
134. <○○을 위한 만사(無題挽)> (이하 생략)
제2권 시(詩)
제3권 시(詩)
제4권 시(詩)
제5권 충청도에서 지은 시(詩, 西湖作)
제6권 시(詩)
제7권 계(啓).소차(疏箚).정사(呈辭啓) 돈유(敦諭)와 비답(批答)을 첨부함
제8권
제9권 제문(祭文)
표전(表箋)
발(跋)
가장(家狀)
제10권 일기(日記)
제11권 일기(日記)
제12권 서행기(西行記)
부록
국역 『양파유고(陽坡遺稿)』 해제
책 속으로
북벌(北伐)을 넘어서 북학(北學)으로
“그의 시작(詩作)들은 매우 평이함과 진솔함이 특징이다. 저자가 종종 당나라 후기의 시인으로 그가 살고 있던 사회의 현실을 매우 평이하게 묘사하였던 백거이(白居易)의 시운(詩韻)을 빌려 온 것은 그의 평이함과 현실성이 자신의 사회적이며 현실적인 성향에 부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옮긴이 해설 중에서
출판사 서평
북벌(北伐)을 넘어서 북학(北學)으로
『양파유고』는 조선 중기의 재상 양파공(陽坡公) 정태화(鄭太和)의 문집을 모두 한글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인 것이다.
이 책에는 양파공이 일생 동안 쓴 수많은 시와 산문을 비롯해 사직 상소문 <포사일기(曝史日記)>, 1659년(효종 10) 5월 4일 효종의 승하 일부터 그 달 27일까지의 일기를 엮은 <기해일기(己亥日記)>, 세자 책봉을 위해 중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종사관으로서 사신들의 무례한 행패를 기록한 <서행기(西行記)>, 정사(正使)로서 2차에 걸쳐 내왕한 연행록(燕行錄)으로, 청나라의 일본 원정 때 조선에 원조를 요청한 사실, 조선 의관(朝鮮醫官)의 인기가 높아 수행하였던 의관 안례(安禮)가 청 태후를 비롯한 귀족의 병을 고쳐 주었다는 사실 등이 담긴 <음빙록>, 정승으로 있을 때 왕이 사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답글 을 모은 <불윤비답(不允批答)>과 어찰(御札) 등이 실려 있다.
특히 다른 문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관기(官妓), 기녀(妓女)들에 대한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이야기들도 볼 수 있는데 염정(艶情) 문학 자료로서는 이만한 책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지지하면서 시작된 경세치용으로서의 실용적인 사고는 권13과 14에 실려 있는 두 차례의 연행(燕行) 기록에서 완성을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양파공의 사고 전환은 후기 실학자들보다 1세기를 앞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기해일기>는『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것보다 소상한 내용들을 저자가 본대로 서술하고 있어 당시 효종의 죽음을 둘러싼 문제들과 예송(禮訟)이나 상례(喪禮)에 대한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개요
이 유고는 필사본으로 16권인데,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구두점을 찍어 영인하여, 거기서 내는 『한국문집총간』 제102책으로 보급하였고, 이 책 내용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역시 같은 곳에서 낸 『한국문집해제』 제3권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 저자의 업적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같은 책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한국 역사에 관련된 책을 보면, 저자는 효종이 승하하셨을 때, 노론과 남인 간에 시빗거리가 되었던 조대비의 상복을, 수상(영의정)이면서 원상(院相)으로서, 1년으로 확정한 것으로 유명하며, 또 야담이나 소설 같은 책을 보면 우암 송시열 같은 분은 북벌론에 앞장을 섰으나 양파공은 오히려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진작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서 가장 많은 정승을 배출한 가문은 장동(壯洞)의 안동 김씨 집안과, 회동(會洞)의 동래정씨 집안이라고 하는데, 이 양파 정태화는 5대 조부 정광필(鄭光弼), 증조부 정유길(鄭惟吉), 조부 정창연(鄭昌衍)이 모두 정승이었고, 아우인 정치화(鄭致和), 사촌인 정지화(鄭知和), 둘째 아들 정재숭(鄭載嵩) 같은 이들도 두루 정승이 되었다. 그러니 이 정태화 같은 분은 회동정씨 재상 가문의 한 중심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에서 대개 조선 후기로 가면 장동 김씨들을 노론계, 회동정씨들을 소론계로 나누고 있는데, 이 김씨 가문이나, 정씨 가문에서 똑같이 정승이 16명씩이나 나왔지만 김씨들 중에는 재상이 되었다가 목숨까지 잃은 정승들이 있지만, 정씨 집안에서는 그렇게 과격하게 정쟁에 휘말린 정승은 없었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예송을 보아도, 다 같은 기년설을 주장한 쪽이었지만, 송시열은 중국의 예설을 인용하면서 승하한 임금이 비록 왕위를 계승한 것은 틀림없지만, 조대비에게 맏아들은 아니었으니 “체이부정(體而不正)” 하다고 하였으나, 정태화는 우선 우리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이와 비슷한 사례가 발생하였을 때 어떻게 처리하였던가 하는 선례를 조사하여, 국조의 선례[예종 상 때 정희왕후의 경우]에 따라서 처리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보았다. 이 문제 때문에 우암은 나중에 목숨까지 바치는 곤경을 당하게 되나, 이 분은 종묘 안에 있는 현종의 사당에 배향되기까지 한다.
역시 위에서 언급한 북벌론에 대한 견해와 함께, 이 분은 얼마나 매사에 현실 감각이 뛰어났으며, 또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평생 동안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특별히 모나지 않게 처신하여, 능히 명철보신할 수 있었던가 하는 점이 매우 경이롭게 느껴진다.
조선조에서 가장 재상을 오래한 이는 세종 때 황희 정승인데 27년을 집권하였다고 한다. 아마 그 다음이 이 양파공일 것이다. 양파공은 영의정만도 여섯 번이나 역임하였고,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하고 있는 중에도, 국사가 위급하나 마땅한 인재가 없으니, 전쟁 중에는 재상이 상주가 되었더라도 사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예를 들어 상복을 벗고 나와서 재상직을 다시 하여야 한다는 조정의 여론이 아주 강하게 일기까지 하였다. 이로 보면 그가 당시에 나라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비중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잘 알 수 있다.
그의 비중과 명망에 비하여, 그의 글은 오히려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그의 집에 화재가 나서 효종대왕이 그에게 보낸 어필(御筆) 여러 점과 함께 그의 유고 중 중요하게 여기던 것도 상당 부분 없어졌다고 한다. 이 유고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남의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만사, 사직 상소문과 같이 비교적 다시 수집하기 쉬운 글들이 많으나, 일반 명사들의 문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저(雜著:논술문), 명사들끼리 주고받은 서간문 같은 글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분의 전기에 보면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정실에 흐르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늙어가면서 친구를 의식적으로 많이 사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러한 편지가 없는 것인지? 또 그런 지위에 있으면 서문, 비문, 축사 같은 것을 지어 달라는 많은 청탁을 받았을 것 같기도 한데, 이런 것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유고에는 오히려 다른 문집에는 잘 볼 수 없는 특이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29세 통진현감 시절, 33세 원접사 종사관 시절, 36세 충청감사 시절에 아주 가까이 지내던 몇몇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기생이 지데리고 놀면서 장난삼아 지어 둔 시들이 이 유고에 수록된 모든 시 620여 수 중에 100수 가까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시들을 청루시(靑樓詩)라고 하며, 문학연구의 한 분야로 치는데, 한국에서도 틀림없이 이러한 장난기 어고 작품이 많이 지어지기는 하였을 것이나,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는 것은 별로 보지 못하였 격의 없이『양파유고』에는 이런 청루문학 작품이 이렇게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잃난삼아말 놀랍고도 이채롭다. 아마 이 한 가지 면에서라도 이 유고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 많 나오리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그가 쓴 몇 가지 일기들이 유고 16권 중에 5권이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다른 목판 문집의 본집(本集) 같은 데는 잘 나타나지 않을 내용이다. 원접사 종사관 때 쓴〈서정록〉 2권, 원상 시절에 쓴 〈기해일기〉 1권, 두 차례 중국에 정사로 나갔을 때 쓴 연행 일기인 〈음빙록〉 2권 등인데, 모두 생생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구성
이 유고는 원집 15권, 부록 12 페이지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은 없으며, 앞부분에 총목차가 있고 각 권별로 권의 목차가 있다.
권1-6은 시(詩)이다. 권1은 1611년 10세 때부터 1664년 63세 때의 작품까지 56제(題)가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고, 그 뒤로 70제(題)가 넘는 만시(挽詩)와 몇 편의 축시(祝詩)와 교왕시(交往詩: 교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시)가 연대 구분 없이 실려 있는데, 이 권1에 실린 시는 시수로는 도합 203수를 헤아린다.
이 책에서 더러 ‘실제(失題)’니, ‘무제만(無題挽)’ 같은 제목이 많이 보이는데, 글자 그대로는 ‘제목을 잊었다’, ‘누구를 위해 지은 만사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인데, 실제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래되어서 그럴 가능성도 있겠지만, 이러한 연유라기보다는 그들 시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들이 뒤에 정치적으로 실각하여 불명예스럽게 된 경우에 이렇게 제목을 밝히지 않은 것이 많은 것으로 생각 된다. 역자들이 이러한 시들을 역주하면서 이렇게 제목을 처리한 시에서도 실제로 그 시에서 언급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자세히 추적하여 숨긴 이름이 누구인지 찾아낸 것도 적지 않음을 밝혀둔다.
어찌 되었건, 이 제1권에서 특히 두드러진 경우이기는 하지만, 만사 같은 작품이 별다른 기준 없이 마구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유고』는 전반적으로 많은 작품이 유실되고 난 뒤에 남은 단편들을 하나로 엮으려는 시도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권2는 1629년부터 1631년까지의 작품인데, 통진(通津) 현감 시절에 창작된 시들이다. 저자와의 어릴 때부터의 친구로 관운은 없고, 여기로 자주 찾아와서 놀기를 즐기던 송덕기(宋德基: 자는 子都, 뒤에 참봉이 됨), 역시 친구로 이곳의 산사에 와서 공부하면서도 가끔 관아로 내려와서 같이 어울려 놀기를 즐기기도 하였던 이행진(李行進: 자는 士謙, 뒤에 고관이 됨)과의 차운시(次韻詩: 같은 각운자를 사용하여 지은 시)가 많다.
통진으로 부임하여 가면서 당나라의 백거이(白居易: 자는 樂天)의 시집을 가지고 가서 애독하였다고 하는데, 백거이가 한적한 생활 읊은 시, 술을 즐기며 읊은 시 같은 시에서 운자(韻字)를 빌려온 시도 몇 수 보인다. 여기는 도합 141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3은 1632년부터 1633년까지의 작품으로 79수 중, 절반 이상은 만시(輓詩)이며, 어릴 때부터 남산 아래 이웃 마을에 살다가 벼슬길에서 저자와는 상반되게 조금 불우하게 살다가 요절한 친구 박서(朴?: 자 尙之)와의 차운시가 많이 보인다. 권4는 1634년부터 1636년까지의 작품으로 원접사(遠接使) 종사관 시절의 시 등이 95 수 실려 있다. 권5는 1637년 충청 감사 시절의 작품 84 수이다. 역시 이 시절에 지은 만시(輓詩)도 많으나, 서울에서 찾아 내려온 친구, 친지와 충청도 각 고을의 수령들과 주고받은 시도 있다. 권6은 1638년부터 1640년까지의 시 33 수를 모아 놓았다. 역시 만시(輓詩)도 몇 수 있으나, 아버지와 부자간에 주고받은 시가 몇 수 있고, 과거에 일직 붙지 못하여 답답해 한 막내아우에게 지어준 시도 3 수나 있다.
권7-8은 계(啓), 소차(疏箚), 정사(呈辭), 밀계(密啓) 등 모두 임금님께 올린 상소문이다. 1638년의 충청 감사 사직 계사(啓辭)부터 시작하여 1669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벼슬을 사직하는 글이 대부분이며,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권9는 제문(祭文), 표전(表箋), 발(跋), 가장(家狀) 시와는 다른 긴 글을 수록하고 있다. 제문은 10편으로 친척과 당시의 재상들의 죽음을 애도한 내용이다. 표전은 3편으로 임금님의 생일과 동지를 하례하는 내용 등이다. 발(跋)은 1638년에 쓴 것으로서 증조부인 임당공(林塘公)의 문집의 간행 경위를 적것으로서며, 가장(家狀)은 아버님인 제곡공(濟谷公)의 사적을 적은 글이다.
권10은 포사일기(曝史日記)이다. 1629년(인조 7) 6월 2일 왕명을 받고 도성을 출발하여 봉화 각화사(覺華寺)에 있는 사고를 살펴보고 23일에 도성에 돌아와 복명한 과정을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권11은 기해일기(己亥日記)이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이 승하한 날로부터 27일까지의 일기인데, 효종의 임종, 조정 신료들의 집상 절차, 복제와 능호(陵號) 등을 정하는 과정, 효종의 치료를 담당하였던 의관들에 대한 치죄, 재궁(梓宮; 임금의 관) 제작 등등, 효종의 상례를 치르는 전체 과정이 날짜별로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권12는 서행기(西行記)이다.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1634년(인조 12) 4월 6일부터 8월 1일까지 중국 사신이 들어올 때 평안도까지 나가서 맞고, 서울에 와서 사명을 마치고 돌아갈 때 다시 평안도까지 나가서 송별하는데, 시종 원접사 김신국(金藎國)을 따라서 개성과 평양 등을 오고간 일을 날짜별로 기록한 것이다. 원접사 이외에 같은 종사관 구봉서(具鳳瑞) 등과 세 사람이 거의 매일 서로 주고받은 시가 모두 다 수록되어 있는데, 도합 240여수나 되며, 이 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앞부분에는 일행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당시 원접사 일행의 규모, 이동 경로 및 전체 일정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이다.
권13-14는 음빙록(飮氷錄)이다. 권13은 1649년(인조 27) 3월 20일부터 6월 29일까지 북경을 다녀온 일기체의 기록이고, 권14는 1662년(현종 3) 7월 26일부터 11월 14일까지 북경을 다녀온 일기체의 기록이다. 각기 앞부분에는 일행의 명단이 실려 있다.
권15는 불윤비답(不允批答: 임금님이 저자의 사직상소를 허락하지 않는 답글)과 어찰(御札)이다. 앞의 것은 누차에 걸친 저자의 사직 상소에 대해 윤허하지 아니한 비답 가운데에서 1652년(효종 3)부터 1672년(현종 13)까지의 것을 모아놓은 것이며, 뒤의 것은 저자에게 내린 효종의 서찰을 모아놓은 것이다. 어찰 끝에는 1695년(숙종 21)에 동평위가 어찰을 베껴 적고 나서 쓴 후지(後識)가 실려 있다.
부록에는 김석주(金錫胄)가 지어 올린, 종묘 안의 현종대왕의 사당에 양파공을 함께 모시도록 하는 임금님 명의의 글[배향교서(配享敎書)], 정조(正祖)대왕부터 철종(哲宗)대왕까지 공에 대한 임금님들의 제문[致祭文]들이 실려 있다.
이 책에 실린 글의 특징 및 가치
저자는 일생동안 여덟 번이나 재상에 임명되었는데, 여섯 번이나 영의정으로 임명된 것이며, 도합 22년이나 재상 자리에 있었다. 이러한 자리에 있는 문인(文人)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그의 문집에는 당대의 혁혁한 일류문인들과, 조정 인물들과 주고받은 시문(詩文)들이 수록되어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 1권부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수록된 시들에 비록 유명한 문무 관료들과 주고받은 것, 또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도 보이지만 대부분 만사(輓詞)이며 역시 그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2권~6권까지의 시작(詩作)들은 일상사의 기록과 개인적 신변에 일어난 사소한 일을 적은 작품들이 많으며, 특히 시운(詩韻)을 주고받은 사람들을 보면 동향의 친구들로 조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고, 동생들이나 후배들이 많이 보인다.
그의 시작(詩作)들은 매우 평이함과 진솔함이 특징이다. 저자가 종종 당나라 후기의 시인으로 그가 살고 있던 사회의 현실을 매우 평이하게 묘사하였던 백거이(白居易)의 시운(詩韻)을 빌려 온 것은 그의 평이함과 현실성이 자신의 사회적이며 현실적인 성향에 부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작품들이 많이 유실된 뒤에 편집된 유고(遺稿)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남아 있는 작품은 무엇이라도 남김없이 모두 수록하여야만 하겠다는 후손들의 편집의도가 작용하기도 하였겠지만, 이 책에서는 딴 문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관기(官妓), 또는 기녀(妓女)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매우 많이 보인다. 여기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여인들에 관한 묘사에 있어서 저자는 매우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는 백거이의 작품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러나 이 점이 바로 한국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어떠한 문인들의 문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유고의 한 특색이자 큰 가치이다.
한편 산문에 있어서도 시작(詩作)의 특징들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7권과 8권에 수록된 글들은 일반적인 소차(疏箚)의 글과 별다른 특징을 지적할 수는 없지만, 효종때 올린 상소문들은 군신(君臣)의 관계를 넘어선 인간적인 애정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특히 15권에 보이는 불윤비답에서는 저자에 대한 인간적 접근과 평가가 매우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또한 외교, 국방, 인사, 내정(內政)에 관한 상소문들을 통하여 저자는 김육(金堉)의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지지하는 등 자신이 경세치용으로의 사고전환을 꾀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시대적으로 후기의 실학자들 보다 1세기를 앞선, 그러한 생각의 첫 걸음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1권에 실려 있는 기해일기(己亥日記)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것보다 매우 소상한 내용들을 저자가 본대로 서술하고 있어 당시 효종의 죽음과 둘러 싼 문제들 예송(禮訟)이나 상례(喪禮)에 대한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서행기(西行記) 형식으로 쓰인 12권의 글은 대부분이 원접사(遠接使)일행들이 지루하게 청나라의 사신들을 기다리고 돌려보내면서 주고받은 시작(詩作)들로 되어있는데, 당시 평안도의 실제 사정과 멸망해 가는 종주국으로서의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오랑캐로서 청나라와의 외교관계에 대한 젊은 문인 관료로서의 태도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내용들로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권 13과 14에 실려 있는 두 차례의 연행(燕行)기록은 청나라에 대한 저자의 인식변화를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일반적이었던 청나라에 대한 적대 감정이 양파에게는 다소 객관적으로 묘사되었고, 특히 두 번째 연행 기록에 이르러서는 감정적으로 치우친 묘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저자의 경세치용으로써 현실적 감각은 완성을 보이는 듯하다.
저자는 이 두 번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10월 18일 영평(永平)이라는 곳에서 강서(江西) 출신의 객가족(客家族) 선비 위제서(魏際瑞, 본명은 祥)를 우연하게 만나고, 그의 문집 『위백자문집(魏伯子文集)』초고본 한 부를 얻어 지니고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문집은 뒤에 청나라에서, 그의 두 아우인 위희(魏禧), 위례(魏禮)의 글을 합하여 『삼위전집(三魏全集)』으로 나왔고, 명말 청초에 경세치용 학파의 한 큰 흐름을 이루었다고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그래서 양파공의 사후 100여년 뒤부터는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같은 우리나라의 실학자들도 이 형제들의 학문을 매우 중시학파 시작魏禧서, 양파공과 위제서의 만남에 관하여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저서인 『아정유고(雅亭遺稿)』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각각 매우 흥미롭게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보면 양파공은 청나라를 치자는 비현실적인 “북벌(北伐)”보다는 이 어려운 국난을 타개하기 위하여서는 현실적으로 청나라를 배워야한다는 “북학(北學)”에 관심을 더 가졌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점이 바로 뒤에 나온 실학자들의 주목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정보
ISBN | 9788994054032 |
---|---|
발행(출시)일자 | 2010년 01월 15일 |
쪽수 | 1384쪽 |
크기 |
268 * 190
mm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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