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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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손준영
손준영은 1964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하며 시와 동화, 청소년을 위한 경제서 등 다수의 책을 썼다. 또한 비씨스쿨출판사의 위대한 대한민국 시리즈 『조국의 별 최용덕』, 『신화의 시간』등을 기획하며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지사들에 관심을 갖게 되어 2012년부터『애국지사 손정도 목사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의 거대한 뿌리』를 쓰기 시작해 대한민국 해군 창설 70주년인 2018년 출간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자라나는 세대들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현실을 각성하고 외세에 맞서 싸운 이들의 정신이 기억되길 기원한다. 특히 아직도 곳곳에서 선열들의 흘린 피와 땀을 이용해 기득권만 챙기려는 이기주의를 비판하고 진정한 애국자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자랑스런 오천년의 역사가 후대에 온전히 물려지길 기원한다.
목차
- 머리말
1부 뿌리 깊은 나무
혼돈의 시대
꿈꾸는 자의 고통
독립운동의 요람, 상동교회 부흥사 손정도
전도사 손정도와 원일의 출생
안중근 거사와 105인 사건
원일의 경성 생활
정동 제일교회 목사 손정도
다시 평양으로
중국 축구왕 신국권
손 목사의 중국 망명
평양 3·1 만세 운동
상해 임시 정부 의정원 의장 손정도
상해 손님 ‘바람’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
임시 정부의 의친왕 망명 작전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권기옥
김상옥의 의열 투쟁과 길림으로 간 손 목사
원일의 길림 생활
문광중학교 체육부장
안창호 석방 운동과 새로운 도전
상해 중앙대학 항해과 학생 손원일
젊은 원양 항해사의 꿈
성찰의 시간
2부 조국의 바다여, 영원하라
거대한 뿌리
굴욕과 각성의 시간들
창살 없는 감옥의 사랑 노래
상해의 젊은 사업가
충무공의 후예, 해방병단
세상에서 가장 넓고 깊은 힘
조선 해안 경비대
신화의 시작,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
몽금포 작전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6·25 전쟁 최초의 승리, 대한 해협 해전
육군 17연대 후송 작전
진동리 전투와 귀신 잡는 해병의 신화
서해 도서 점령과 엑스레이 작전
장사동 상륙 작전과 함께 시작된 인천 상륙 작전
윌리엄 해밀턴 쇼
중앙청에 걸린 태극기
지체된 북진과 중공군 참전
흥남 철수
국방 장관 임명을 거부한 손 제독
제2차 인천 상륙 작전
해군의 날개 해취호와 최초의 병원선
해군 첫 공대함 전투와 무적 해병 신화
군의 정치 참여 반대
전쟁 포로 석방과 손원일 국방 장관
군사 원조 협상
약소국 외교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자유인
출판사 서평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의 거대한 뿌리』
[내용 요약]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당한 치욕의 역사가 있다. 이러한 외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영웅들의 역할이 컸지만 수많은 민초의 조국 사랑의 산물이었다. 영웅은 위기에 등장하지만 이들의 뒤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킨 이들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백성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러한 민초들의 저항보다는 소수의 영웅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우리가 영웅만 이야기하는 것은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간 민초들의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개항 이후 일제의 침탈에 맞선 한인은 일부 지식인을 제외하곤 대부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민초였다. 이들 가운데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이 앞장서게 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조선의 정치에서 소외된 아픔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조선 건국 이후 평안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을 비롯한 북방 민족이 살았다. 조선의 조정은 국경의 정치 상황을 고려해 이곳 백성들이 중앙에 진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런 아픔을 대신한 것은 개항 이후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산간 지역에서 세를 넓힌 천도교와 달리 서북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를 바탕으로 학교를 설립해 계몽에 나섰다. 이에 따라 이들 학교에서는 민족 의식을 가진 선각자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손정도는 평양 인근 강서군 오흥리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과거 시험을 보러 평양에 가다가 날이 저물어 감리교회에서 최 아무개 목사를 만나 기독교도로 변신했했다.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사당의 위패를 불태워 집에서 쫓겨난 뒤 평양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미국인 문요한 목사 도움으로 숭실학교에 다니며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숭실학교에는 훗날 북한 주석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과 조만식 등과 만나게 되었다. 숭실학교를 졸업한 손정도는 한성 감리교신학당에 유학하며 부흥사로 독립운동의 요람인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를 비롯해 이회영 등 청년회원들과 교류하며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만나 국제정세에 눈뜨게 된다.
그 뒤 손정도는 훗날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한 손원일 제독이 출생하여 진남포 감리교회에 전도사로 파견되어 1년과 생활하며 그곳 정신적인 지주인 임치정 김지간 등과 교류하며 교회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신망을 얻었다. 부임 초기 진남포교회 신도는 이백여 명 남짓이었으나 손정도가 전도사로 일한 일 년 동안 두 배가 넘는 오백 명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손정도의 활발한 선교 활동이 감리교 평양 선교회에 알려졌다. 당시 감리교 연회는 북만주 선교사가 필요했는데 이때 손정도가 눈에 띄었다. 진남포에서 많은 사람을 전도한 것을 본 평양 선교회는 그를 북만주에 파견하기 위해 북경에 중국어 연수를 보냈다. 이사이 상동교회에서는 안창호, 전덕기 등이 중심으로 신민회를 조직했다. 신민회원 대부분은 서북 지역(평안도) 기독교도가 중심이 되었다. 손정도는 북경에 가기 전 평양에서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 북경에 간 그는 중국어를 배우며 안창호 등 신민회원들과 만나 신민회에 가입한 뒤 북만주에 돌아다니며 교회마다 청년회를 조직하고 곳곳의 애국지사 소식을 국내에게 전하는 일을 했다.
이때 일제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항일 애국지사 체포 계획을 세우고 많은 밀정을 만주 곳곳에 파견했다. 이때 안중근 동생인 안명근이 평양에 들어와 만주에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마련하려고 신민회원 한경직 등과 모금활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었다. 일경은 안명근 일행을 조사하며 이를 조작해 항일 지식인과 김구 등 서북 지역 기독교인을 체포했다. 일명 105인 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북만주에서 활동한 손정도 목사마저 체포한 뒤 한성 경무총감부에 이송해 고문했다. 그러나 손 목사가 북만주 활동을 선교 활동이라 주장해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조작 사건이 탄로날 것을 우려한 일제는 다시 체포해 제령위반(일본법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경우 총독부의 재량으로 구금 처벌하는 법)을 적용해 일 년간 진도 유배형을 내렸다. 진도에 끌려간 손정도 목사는 그곳에서 목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 기독교도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일 년 뒤 유배형에서 풀려난 손정도 목사는 감리교 연회에서 최병헌 목사 추천으로 동대문교회 목사로 시무하며 일 년 사이 대형 교회로 발전시켰다. 이런 모습을 본 감리교 연회는 그를 정동 제일감리교회 목사로 임명했다. 이사이 평양에서 생활하던 그의 가족은 한성으로 이사했다. 일곱 살이 된 손원일은 동대문교회 목사관에서 정동으로 이사하며 새로운 생활에 빠져들었다. 정동교회로 옮긴 손 목사는 일제 몰래 경운궁에 유폐된 고종과 만나 밀사 정치를 돕기 시작했다. 고종 황제는 몇 번의 망명 시도가 실패한 뒤 밀사를 통한 외교 활동으로 독립을 이룰 계획을 세웠다. 정동교회 주변은 개항 이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들이 몰려와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선교 기지로 변모했다. 전임 목사 현순의 소개로 고종을 만난 손 목사는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 밀사인 의친왕과 하란사(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학사학위를 받음)를 돕기 위해 감리교 연회에 휴직계를 내고 평양 보통강가에 있는 삯월세 집을 얻어 가족과 이사했다. 평양에 이사해 밀사 안내 역할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손 목사는 갑작스런 고종의 승하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현순, 최창식 등에게 밀사 파견을 원래대로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갔다.
상해에는 여운형, 장덕수 등이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손 목사는 상해에서 신한청년당 인사들을 만난 뒤 북경으로 갔다. 하지만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의친왕이 파리에 갈 수 없게 되어 하란사만 한성을 떠났다. 그런데 안동(현재 단동)에 도착한 하란사가 교민들의 환영회에 참석했다가 독살되는 일이 발생했다. 북경에 도착해 고문 휴유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손 목사는 원래 북경 주재 각국 외교관과 선교사에게 대한 독립지지 요청한 뒤 하란사를 만나러 안동에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란사의 죽음을 전해 듣고 급히 현순 목사와 함께 상해에 도착한 그는 애국지사들과 임시 정부를 수립한 뒤 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지병인 위궤양이 발병해 의정원 의장을 정인과에게 물려주고 요양하며 안창호 보좌관 역할을 했다. 이 사이 한성과 연해주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 통합 협상에 나선 손 목사는 이들을 설득해 상해에 통합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임시 정부 대통령에 임명된 이승만이 상해에 오지 않아 손 목사는 설득 편지를 써서 귀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회의를 위해 미국에 돌아간 뒤 귀임하지 않아 임시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특히 외교 독립론을 주장한 이승만에 맞서 이동녕 등 대다수의 임시 정부 인사들은 이를 반대했다. 임시 정부 내 인사들이 외교론과 무장 투쟁파로 나뉘게 되면서 파벌 싸움은 임시 정부의 정체성 문제로 비화되었다. 안창호, 이시영 등과 독립 준비론을 주장한 손 목사는 국민 대표 회의에서 참가해 단합을 호소했으나 갈등이 가라앉지 않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길림으로 떠났다. 길림에 도착한 손 목사는 교회를 세워 목회 활동을 하며 평양 가족을 이주시켰다. 길림에 온 손원일은 학교에 다니며 의사가 될 꿈을 키웠다. 그러나 문광중학교 졸업 무렵 눈병이 난 그는 북경 의대 유학이 좌절되어 길림교회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상해 유학을 결심했다. 상해에는 그의 둘째누이 손성실이 국립 음악 학교에서 다니고 있었다. 상해에 도착해 의대 진학을 꿈꾼 손원일은 동제대학 의대 수술실에서 수술 광경을 보고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히 항구를 바라보다 항해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그는 중앙대학 항해과에 들어가 공부했다. 삼학년이 되어 실습을 하게 된 그는 중국 국영 해운 회사 초상국에서 일 년 동안 항해사로 실습한 뒤 학교를 졸업했으나 갈 곳이 없었다. 중국 해군에 들어가 일제와 맞서겠다는 꿈을 품었으나 주위에서 만류해 그는 결국 중국 정부에서 시행한 원양 항해사 시험에 응시, 독일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아메이카라인 상선 아벤슈타인 호에 승선했다. 첫 항해를 마치고 최신형 디젤 기관선인 람세스 호를 바꿔 탄 그는 이 년 동안 원양 항해사 생활을 하다 손 목사 부음을 전해 들었다. 인도양을 지나며 손 목사의 부음을 들은 그는 눈물을 흘리며 부친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다짐을 하며 원양 항해사 생활을 마쳤다.
그 뒤 새로운 길을 찾지 못한 손원일은 초상국 항해사로 이 년간 일하다 뜻하지 않은 포상휴가를 받게 되어 미국에 유학하다 윤치창(윤치호의 이복 동생)과 결혼해 경성 가회동에 살고 있는 큰누이 손진실을 만나기 위해 귀국했다. 그러나 일경에 독립운동가로 몰려 한 달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경찰서에서 어렵게 풀려난 손원일은 매형 윤치창과 수입 식료품 가게인 남계양행을 설립해 운영하며 홍은혜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당해 병보석으로 풀려난 안창호를 만나 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 보았다. 일제는 만주를 침략해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뒤 중국 침략에 나섰다. 이 사이 경성에 설립된 식료품 수출입 회사 동화양행에 입사해 금족평이 풀린 손원일은 텐진 지사장으로 일 년을 근무한 뒤 상해 지사장이 되어 전쟁 물자 유통 사업을 벌여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시작해 생활이 어려워진 홍은혜의 요청으로 급히 귀국하던 손원일은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손정도 목사, 안창호 등의 유지를 받들어 민병증, 김영철, 정긍모 등과 해군 전신인 해사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말만 해군 조직이지 보급도 없는 군대였다. 해사대 설립 초기 손원일은 상해에서 가져온 돈으로 운영했으나 운영 자금이 바닥나고 말았다. 운영 자금 때문에 고민하던 그는 조선 해운 보국단과 합병해 해사 협회로 개칭했으나 좌골신경통이 발병했다. 한 달동안 요양하는 사이 해사 협회 부위원장 석은태가 맡았으나 그 동안 자금이 바닥났다. 몸을 회복한 손원일은 여운영이 만든 건국 준비위원회 참가했으나 한 달 만에 탈퇴해 귀환 동포 구제회를 돕기 위해 회원들을 부산으로 보냈다. 그리고 미군정청 운수국 해사 과장 칼스텐 소령과 하지 중장 특별 보좌관 이묘묵의 도움으로 1945년 11월 11일 해방병단을 춤범시키고 진해로 이동해 해안 경비 업무를 시작했다. 그 뒤 미군정청이 해방병단을 조선 해안 경비대로 바꿔 경비대장이 된 손원일은 1948년 남한 총 선거로 이승만 정권이 들어서자 대한민국 해군으로 전환해 대한민국 첫 제독(장군) 겸 해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변변한 전투함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한 그는 해군을 중심으로 월급을 모금해 미국에서 첫 전투함 백두산함을 비롯해 총 네 척의 전함을 갖추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공격 당일 밤 게릴라 육백여 명이 탄 북한의 수송선을 백두산함이 대한해협에서 침몰시켜 첫 승전보를 올렸다. 그러나 적의 기습 남침으로 국군 한강 방어선이 무너져 이승만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한 뒤 함선을 이끌고 귀대한 손 제독은 김성은이 이끈 해병대를 마산 진동리 전투에 투입해 서부 전선 적 최강 부대인 6사단을 막아냈다. 진동리 전투에서 패한 적이 통영을 점령해 부산을 공격하려 하자 김성은 해병대를 상륙시켜 괴멸시켰다. 그 뒤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준비하자 손 제독은 해군 첩보대를 영흥도에 침투시켜 인천과 서울 수원 등의 적 정보를 수집하게 하여 상륙 작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인천 상륙 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 뒤 손 제독은 인민군 부역자들의 학살을 막는데 기여해 수복 뒤 생길 혼란을 막도록 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훗날 생길 혼란을 막는 조치여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원산과 함흥에 고립되자 해군 수송선을 파견해 피란민 수송에 노력한 그는 종전 직전 이승만의 반공 포로 석방으로 생긴 국제 여론을 무마하려고 국방 장관에 임명했다.
국방 장관에 오른 손원일은 각 군 참모 총장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자신은 국군 전력 증강에 힘썼다. 마침 정점 협정으로 미국과 맺은 군사 원조를 받아내기 위해 제네바 회의를 이용해 성공시켰다. 미국의 군사 원조를 통해 국방력을 강화한 손 장관은 1956년 야인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던 그는 1957년 서독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삼 년 동안 유럽에서 외교 활동에 매진했다. 하지만 1960년 영구 독재를 꿈꾼 이승만이 부정 선거로 국회를 장악하려다 4·19 학생 혁명으로 쫓겨나자 후임 대사에게 대사관을 인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시작했다. 이 사이 박정희 소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자 이에 반대하며 정권의 민권 이양을 촉구했다.
국제 여론의 반대를 돌파하기 위해 박정희는 손 제독을 외교부 장관에 영입하려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뒤 손정도 목사를 도우며 평생 독립운동과 가족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 박신일 여사를 떠나보낸 손 제독은 홍보협회를 만들어 우리나라 알리기에 앞장서다 1980년 2월 15일 향년 70세에 영면했다. 그는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대한민국 바다를 지키는 해군의 창설에 앞장서 가장 넓고 깊은 해군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다.
우리는 많은 국난을 통해 수많은 애국지사를 보아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친일파 후손들이 당당하게 조국을 팔아 치부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벌이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이런 행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은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 사이 미군정이 친일파들을 등용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이다. 손정도 목사와 손원일 제독의 삶을 통해 매국노들로 가득한 역사의 진실을 일깨워야 한다. 대한민국에 정의를 바로세워 기회주의 삶이 언젠가 역사 앞에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한다. 세계화의 확산으로 국경을 바탕으로 한 국가와 민족 개념이 희미해지는 사이 수없이 우리를 침탈했던 중국과 일본은 민족주의를 내세워 우리를 핍박하고 있다. 이들을 물리치려면 하루 빨리 북한과 평화 통일을 이뤄야 할 것이다. 식민지 조국에 평화와 행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91714298 | ||
---|---|---|---|
발행(출시)일자 | 2018년 11월 15일 | ||
쪽수 | 260쪽 | ||
크기 |
152 * 225
mm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위대한 대한민국 시리즈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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