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지만 깊은, 치열하지만 평온한 황혼의 자화상

우리의 눈동자는 현재를 찍는 사진기다. 깜박깜박, 찰칵찰칵. 이렇게 찍어댄 수많은 사진들 중 얼마는 기억이라는 장소에 쌓아두는데, 가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꺼내서 보기도 한다. 그 추억들은 우리를 미소 짓게 하기도 하고 눈물 흘리게 하기도 하는 힘을 가졌다. 하지만 평온하고도 침착한, 그래서 조금은 쓸쓸한, ‘물빛 하늘’ 같기도 하고 ‘깊어만 가는 검푸른 바다’ 같기도 하다. 흐른 시간만큼 빛이 바랬기 때문일까? 아니면 흐른 시간만큼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강물이 깊어 소리로 울지 않는 것은// 속내가 퍼렇게 멍이 들면/ 달빛 비치는 깊은 밤/ 은빛에 출렁이는 춤을 추면서/ 멍든 기억을 쏟아내며/ 흐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흐느낄 뿐이다 中

박동수 시인의 시집 ‘그대 눈동자’는 바로 시인 자신의 눈동자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슬픔을 연상시키는 ‘물’의 이미지가 많지만 담담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깊은 눈동자를 가진 나이기 때문이다. 작고 사소한 이야기지만 삶의 의미를 담은 그의 시는 그래서 평온할 수밖에 없다.

큰 키와 작은 키 긴 사이/ 일그러져있는 세월들/ 오직/ 사랑으로 메우며/ 겹겹이었던 많은 사연들은/ 잊은 채 비워내고
- 할아버지와 손자 中

‘그대 눈동자’는 총 4부로 나뉜다. 1부 ‘능소화처럼’, 2부 ‘그대 눈동자’, 3부 ‘산다는 의미’, 4부 ‘낙타처럼 질긴’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시인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과 같은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끓어오르는/ 흘러간 세월 되새김되어/ 그때그때/ 엉킨 인연과 사연들/ 서럽고 그리워
- 바람이 불면 中

1부 ‘능소화처럼’에서는 인생이란 끝없는 초행길에서 능소화처럼 살아온 세월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시인을 볼 수 있다.
‘허물 벗을 일, 가시 세울 일 없이’ 인간으로 태어나 감사하고, ‘배꽃이 화드을짝 피어버린’ 밤에 무심한 세월을 잊으면서, ‘조금은 흔들리는 것 같지만’ ‘나를 찾으려고’ 살아온 시인의 바람을.

살아간다는 길은/ 날마다, 날마다/ 두리번거리며/ 초행길을 걸어가는 것
- 능소화처럼 中

2부 ‘그대 눈동자’에서는 깊은 그리움으로 그리고 긴긴 사랑으로 삶을 껴안고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긴긴 세월 속에 묻힌 ‘때 절은 앞치마와 검은 손’의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네잎클로버에 아련히 건’ ‘아리고 숨이 가빠’오는 사랑을 기억하는 시인의 마음을.

삭아지는 껍데기의/ 아픔을 참아내는 소라의 귀에/ 파도의 부르짖음을 듣는 것처럼/ 내 영혼은 어릴 적 흥얼거리던/ 고향의 꿈 소리가 들려온다
- 소라 껍데기처럼 中

3부 ‘산다는 의미’에서는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는 사람과 사물, 사건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시인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을 주워 모으고’ 또 ‘쓰레기 무더기에 덩그러니’ 올려놓는 것을 반복하는 처절함 끝에 ‘하늘의 은사’를 깨닫는 시인의 지혜를.

오래된 구두 한 켤레가/ 창가에서/ 따스한 봄빛에 몸을 담그고/ 찌그러져 바랜 세월을/ 씻고 있다
- 구두수선소 中

4부 ‘낙타처럼 질긴’은 1~3부와 달리 10편의 시밖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크리스천으로 살면서 느끼는 감정과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막 길 터벅이는’ 낙타와 같은 ‘긴긴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이 계신 ‘빛의 소리가 들리는 내 본향’을 그리는 시인의 노래를.

돌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선한 사도는 어디에도 없다/ 이정표 없는 세월/ 가슴도 눈물도 피멍이 든/ 깊은 세월뿐 그러나/ 샤론의 꽃은 곱게 피고 있다
- 연어처럼 가는 길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