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사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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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사서함
핸드폰 벨이 한참을 혼자 울다
제 풀에 끊어진
액정화면은 파도가 멈춰버린 바다였지요
탐조등을 비춰도 허우적거리던
바다는 가위눌린 채 웅크리고 있었죠
방파제를 서성거리던 바람이
덜컹덜컹 내 마음을 흔들었지요
헐거워진 경첩으로 물이 새어 들까봐
나는 문고리에 매달렸지요
두려웠거든요
바닷가 풍문에 귀를 닫은
내 사서함에는
읽지 않은 편지들이
구시불이 퉁퉁 불은 채
시간의 순서대로 포개져 있었죠
꾹 다문 봉투를 열자
한 주먹의 사금파리가 쏟아졌지요
못 다한 말들은
먹구름을 빠져나온 햇살처럼
물에 번진 행간마다 징검다리를 놓고
쏴 쏴아 사연들을 읽어갔지요
가위눌린 바다는 어느새
주름진 목을 끄덕이며 출렁이기 시작했지요
작가정보
목차
- 自序
제1부
독으로 키운 감자
스타카토
겨울강
불임의 봄
나비효과
활엽 카메라
무관심이 고마운 밤
히든카드
꼬리명주나비를 풀다
여성봉에 누워
쉿! 비밀이에요
당신의 처방
자마이카
젖몸살
지뢰밭
피터팬 신드롬
간단한 시술
두견새 울다
줌인
모과나무
제2부
박쥐우산
바닷가 사서함
목탁둥지
발광체를 품다
친절한 산파
보석눈
부드러운 드릴
유리창의 부부
섬을 다 건너기도 전에
손대지 마시오
수화를 듣다
씩씩한 대롱 속에는
안단테가 흐르고
알레르기 비염
야간비행
가위질
모란장엔 모란이 없다
유리벽화
육교 위
긴꼬리삼광조
제3부
멀미
거풍하는 날
괴력의 비밀
줄타기 선수
누수탐지기
저 큰 편지를 언제 다 읽나
문풍지
먼지의 방
훌쩍 커버린 상수리나무 뒤에
빈집
부러진 손톱
소래포구
선물
내성발톱
불감증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백신을 찾습니다
풍경 셋
신경치료
해설 - 서정의 운명 / 고봉준
출판사 서평
균형과 절제의 의지 뚜렷한 김정미 시집 『바닷가 사서함』
2005년 『문학과 창작』에 「활엽 카메라」 외 4편으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정미 시인의 첫 시집 『바닷가 사서함』이 출간되었다.
김정미 시의 중요한 시적 대상은 ‘일상’이다. 그녀의 시는 일상을 성찰의 계기로 전유하려는 경향과, 자아의 외부 세계를 묘사적인 시선으로 포착함으로써 세계를 풍경화하는 경향들로 양분된다. 전자는 삶의 세계와의 접점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후자는 세계와의 심리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맹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인의 태도가 목격된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김정미의 시편들은 ‘유사성의 발견’이라는 재래의 가치에 의해 매개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아이러니적 세계관에서 기원하는 파격보다는 아날로지적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균형과 절제에의 의지가 한층 뚜렷하게 느껴진다.
프린터가 A4용지를 자꾸 뱉어낸다. 점자 찍듯 드문드문 말머리를 돌리더니 빈 종이만 하얗게 쌓아놓는다. 혀 빼 물은 농아의 넋인 듯 아무 말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지? 빈 여백이 이토록 뇌리에 꽉 차 오르는 건 왜일까? 그렇다. 프린터는 잉크가 떨어졌다. 몸은 멀쩡한데 속이 텅 비었다. 그래서 쓰라린 걸까. 윙 윙 뼈마디 부딪는 소리가 싸락눈처럼 내린다. 내 몸도 그렇더라. 잉크가 떨어지면 공허만 울먹일 프린터처럼. 소모된 잉크만큼 가벼워지는 프린터처럼. 양쪽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른다. 총천연색 생각들이 두서없이 밀려나온다. 데칼코마니 원색의 날개를 펼친다. 검은 바탕 위에 무지갯빛 뜬구름도 흘러간다. 농염한 저 달이 지고나면 연보랏빛 나팔꽃도 수묵의 입을 오므릴 것이다. 뚝 뚝 끊어진 징검돌 문장에는 천년의 화석이 숨어 있을 터, 징검돌을 들추면 미꾸라지 올챙이 이쁜 새끼들이 수면으로 떠오를 것이다. 내 아들의 아들, 그 아들의 아들이 강물을 거슬러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줄 것이다.
소모품을 품고 사는 덕분에 나는 눈부신 발광체가 되었다.
「발광체를 품다」 전문
위 시는 유사성의 문법을 뜻하는 “내 몸도 그렇더라”라는 진술을 기준으로 두 개의 장면을 병렬시키고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잉크가 떨어진 프린터가 빈 종이만을 배출하는 것이고, 두 번째 장면은 관자놀이 양쪽을 눌렀을 때 불현듯 나타나는 총천연색 생각들이다. 그런데 이들 장면에서 시인이 ‘발견’해 내는 유사성은 단순한 기능적 유사성만이 아니다. 그것은 잉크가 떨어진 프린터가 뱉어내는 백지가 “빈 여백이 이토록 뇌리에 꽉 차 오르는 건 왜일까?”처럼 충만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혀 빼 물은 농아의 넋”과 같은 여백의 침묵 속에서 고요라는 통념이 아닌, “뚝 뚝 끊어진 징검돌 문장”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언어의 소통적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불완전한 것이지만 시적 발견의 차원에서는 충만한 것이다. 김정미의 시에서 이러한 유사성의 발견은 대부분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는 바, 그것은 ‘나’의 내부와 외부, 일상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통로로 작용한다.
과거의 시간을 지금, 이곳으로 불러오는 ‘서정의 힘’
또한 김정미 시인은 모든 자연의 시간을 현재화하는 서정적 순간의 경험을 「육교 위」에서라는 시에서 보듯 한 순간에 30년의 시간을 응축시킨다. 추측컨대 시인은 여섯 살 적 엄마의 손을 부여잡고 올랐던 청계천 육교의 가파른 계단을 지금 혼자 오르고 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텨왔던 육교의 교각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데, 낡은 육교 위에는 오늘도 만물상이 졸고 있다. 낡은 육교 위에서 시인이 마주친 것은 만물상만이 아니다. 바닥에 비닐을 깔고 정물화처럼 움직이지 않는 노점상들과 플라스틱 바구니를 앞에 놓고 구걸하는 노인 역시 시인이 육교 위에서 마주친 것들이다. 이 만남에서 시인은 불현듯 30년의 세월을 가로지르며 다가오는 시간의 현재화를 경험한다.
“목 좋은 여기서 30년이 넘도록/ 여태 저 혹을 팔지 못하다니”라는 진술은 장구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낡은 정물처럼 변하지 않은 노인의 모습을 가리킨다. 이 대목에서 시인은 3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육교의 아래에서는 흘러갔으나 육교 위에서는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감각한다. 육교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변했으나 육교 위의 풍경은 여전히 30년 전과 동일하다는 이 감각이 결국 “육교 밑으로만 흘러간 시간을 잡아라!”라는 문장을 낳은 것이다. 시간을 진공 내지 부재로 경험하는 이러한 상상력이 가능한 이유는 서정시의 시간의식이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에 좌우되기 때문이며, 산문의 세계와 달리 시에서는 시인이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과 대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정미의 시에서 시간은 ‘현재’를 중심으로 한 순간의 경험으로 집약되며, 이때 ‘현재’는 고립된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을 지금 이곳으로 다시 불러오는 내면의 힘에 의해 지탱된다. 이 내면의 힘이 곧 서정이다.
섬세한 느낌과 광막한 울림을 선사하는 ‘괴력의 비밀’
선배 시인 함민복은 표지 뒷글에서 김정미 시인의 시가 가진 ‘괴력의 비밀’을 밝혔다.
“김정미는 시를 통해 우리 삶이 우주라는 피륙의 한 땀 한 땀임을 간파한다. 그의 시는 빗방울 한 방울이 강에 떨어지는 순간처럼 광막한 울림을 던져주기도 하고 바람소리에 울음 한 소절을 첨가하는 거미줄처럼 섬세한 느낌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는 꼬리명주나비, 식물의 성인식 등을 풀어내 사랑의 매뉴얼로 다시 직조해낸다. 상처의 꽃. 그는 상처를 성적 상상력으로 오롯이 품어 꽃을 피워낸다. “마른 감나무 빈 꼭지에도 퉁퉁 불은 하얀 젖이 넘쳐 흐른다”고 노래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그의 시가 품어내는 ‘괴력의 비밀’에 젖어 보는 내내 마음이 편편 깊었다”라며 시집 출간을 축하했다.
기본정보
ISBN | 9788991240858 | ||
---|---|---|---|
발행(출시)일자 | 2010년 10월 29일 | ||
쪽수 | 118쪽 | ||
크기 |
128 * 210
mm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현대시세계 시인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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