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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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내역/미디어추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최하석은 책 읽기를 좋아하고 어른들의 허위의식을 경멸한다. 취미는 자살수집인 당돌한 이 아이에게는 엄마가 아니라면 멋지다고 생각했을 피곤한 미구 씨와 정성스레 난을 죽이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인 아빠가 있다. 1996년 고1 여름, 같은 학교 남학생과 발가벗고 교실 커튼을 덮어쓴 채 잠을 자다 들킨 사건으로 자퇴를 하게 된 하석은 기숙사가 있는 Y고등학교에서 다시 학교 생활을 시작하지만 금방 이 생활도 혐오스러워졌다.
진심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하는 편이 낫다고 믿으며 바깥세계와 꾸준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하석은 언니 최재인의 기일에 맞춰 집에 갔다가 미구 씨와 아빠로부터 언니의 실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완벽하게 사라진 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하석은 자신이 왜 이렇게 자살에 집착해왔는지 깨닫게 되고, 겁이 많은 자신을 죽여줄 남자를 찾기로 하는데…….
-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
작가정보
목차
- 프롤로그 - 초록색 피와 초록색 숨
1. 올챙이는 언제 개구리가 되는가
2. 반성문에는 반성이 없다
3. 비둘기는 비둘기색이 아니다
4. 가슴 사이를 지나는 보라색 선
5. 파란 남자와 강박주의자의 식탁
6. 이 세상의 기울기
7. 조지 왕조풍의 파르테논 신전
8. 풀 죽은 변사와 다이어트 콜라
9. 테니스장이 있는 그림자 안치소
10. 미치광이 체조
11. 연필꽂이의 쓸모
12. 물빛 서점
13. 너구리 코트 혹은 사랑의 오류
14. 프로작과 7월의 쥴
15. 나의 눈깔과 너의 눈깔
16. 왈츠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17. 아무런 것도, 그러나 전부를
18. 자살 수집가
19. 개구리에게 키스하지 말 것
20. 금붕어 아니면 열대어
21. 발장구 레슨
22. 공중제비를 도는 돌고래
23. 마요네즈에 대한 햄버거의 관념
24. 시벨리우스와 노란 부리 새, 그리고 거미
25.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26. 숨소리
27. 끝내주는 자살이란 어떤 걸까
28. 그리고
에필로그 -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작가의 말
추천의 말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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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자의식은 유난스럽지만 매력적이고, 그것을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는 야무지고 잔인하다. 이것은 또한 작가의 자의식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의 가장 빼어난 지점이 이 부근 어딘가에 있다. 한국문학은 어떤 자의식을 지녔을까, 하는 점에 대해 종종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요즘, 이런 날카로운 자의식의 작가가 만들어갈 새로운 소설의 경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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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매력들은 다른 심사위원들께서 충분히 말씀하실 터이니 그건 넘어가고 나는 이 작가가 진일보하여 한국 소설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이루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나이도 그렇고 풍겨 나오는 만만찮은 분위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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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출생의 비밀’과 ‘자살’이라는 생의 두 모티브 사이를 바지런히 오가는 10대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일상은 탄생과 죽음이 한데 공유되는 자리인데, 거기서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빛나는 모험의 과정을 겪게 된다. 소설은 주인공의 성격처럼 시종일관 활달하고 힘이 넘친다. 생의 첫 섹스를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에피소드는, 이 소설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인상적인 부분이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해도 여전히 문학 출판은 소비자의 수준을 탓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산업 분야로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거짓말》은 근래의 어떤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말 그대로 가볍지만, 이 정도라면 가벼워도 좋잖아, 하는. -
이 책에 담긴 활자들은 응달에서 자라는 콩나물을 떠올리게 한다. 시선을 잠시 거두었을 때 두 배로 자라나는. 그러나 쉽게 가늠하지 마시길. 책을 덮었을 때, 안부를 묻고 싶은 소녀가 생긴 것도 예상 밖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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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언어는 독자의 상상을 기분 좋게 미끄러져 나간다. 여긴가 싶으면 어느새 저 어딘가로 날아가 있고, 저 너머인가 싶어 머나먼 시선을 던지면 어느새 등잔 밑이 어둡다. “내용과 형식의 착란은 대개 매혹적이지 않나”라고 읊조리는 주인공의 시선처럼, 이 소설은 내용과 형식의 매력적인 불협화음으로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지극히 탐미적인 형식과 지극히 사색적인 내용이 어우러져 《거짓말》의 멜로디를 풍요롭게 변주한다. 화가의 문체와 철학자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흥미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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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의 《거짓말》은 살아온 삶과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짓말’은 하나의 서사 속에 두 개의 삶이 겹쳐질 수 있는 공백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현실과 욕망의 팽팽한 긴장, 그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무중력의 서사로 읽힌다. 그곳에서 《거짓말》의 소녀는 현실을 지배하는 노동과 사회의 기율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욕망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다. 하지만 이를 부르주아적 욕망이 만들어낸 백일몽이라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살아온 삶과는 별개로 살고 싶었던 삶이 인간을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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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에 나오는 고1 여학생 화자의 위악과 당돌함은 의외로 이 소설의 겨냥점이 아닐 수도 있겠다.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위악의 상투성을 거절한 자리에서 투명하게 돌출하는 자기 배려의 순진성이 화자의 이야기에 특별한 감흥의 순간을 만들고, ‘거짓말의 시간’을 사라져갈 인생의 시간과의 관련 속에서 되새기게 한다. 무엇보다 서사의 흐름과 소설의 분위기를 단단하게 장악하고 있는 개성적인 소설 문장, 언어의 호흡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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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대만 추려놓고 보면 이야기는 어디선가 본 듯한 통속의 요소를 두루 갖췄다. 그러나 소설에서 뼈대를 추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동시에 실감할 수밖에 없다. 세련된 감각으로 응축된 날카로운 문장들이 익숙한 이야기를 팽팽하게 끌고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는 한 편의 통속극처럼 진부하고 지루하거늘, 오직 빛나는 것은 잘 벼려진 하나의 문장이다”라고 당돌하게 선언하고 있는 소설이다.
책 속으로
그 여름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 사라진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시간을 견딜 수밖에 없었던 나에 대해 생각한다. 거짓말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p.17
‘솔직’이라니. 한숨이 나왔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말 중 하나였다. 민주, 평화, 평등, 자유, 수호 같은 말들과 함께. ‘훌륭한’이라는 형용사를 쓰는 사람과 ‘오롯이’ 따위의 부사를 쓰는 사람도 싫었다.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 이게 솔직의 뜻이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거짓말을 즐겼고, 늘 뭔가를 숨겼으며. 바름을 혐오했고, 곧은 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나는 불투명한 사람이 좋았다. 어떤 투명함은 하나의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p.33-34
집에 있는 다른 ‘주부’들과는 달리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게 자부심이라면 자부심이었던 미구 씨로서는 예외적인 일이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는 예외적인 감각에 스스로를 도취시키느라 힘들었던지 미구 씨는, 우리를 힘들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밥 비슷한 무엇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성스럽고도 정성스럽게.
정성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그 정성에는 ‘내가 이만큼 정성을 들였으니 이 정성은 인정받아 마땅해’라는 당당함이 있었고, 그것을 모를 만큼 나와 아빠가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피차 힘들었다. 식탁 위에는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누구보다 잘한다’라는 마음을 재료로 해서 만든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1등주의자’의 폐해였다. p.67
책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친구를 발견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랄 만한 게 없었으니까. 여자애들과 도시락을 먹거나 화장실에 같이 갔지만, 그뿐이었다.
작가일 때도 있었고, 작가가 만든 인물일 때도 있었다. 동의를 얻지 않고 친구를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내 입장에서만 본다면 아주 괜찮은 친구들이었다.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그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든든해졌다. p.99-100
“벗으시죠”라고 내가 말하면 그림자 주인은 그림자를 티셔츠처럼 벗는다. 조심스레 팔을 먼저 빼는 사람도 있고, 목부터 훌렁 벗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나는 일단 그림자의 키를 잰 후, 우리 집 소들처럼 번호를 매긴다. 체중이나 가슴둘레, 체지방, 혈압 같은 건 재지 않는다. 그래서 뚱뚱한 주인이라도 안심하고 자기 그림자를 맡길 수 있다. 그림자는 자기의 방을 갖게 된다. 방이라기보다는 서랍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서랍에 하나의 그림자가 눕는다. 시체 안치소의 서랍을 떠올리지는 말았으면 한다. 그림자는 살아 있는 생명체니까.
그림자를 재워주는 일만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게으른 것을 싫어한다. 빈둥대는 것과 게으른 것은 다르다. 나는 그림자의 습도와 청결도를 관리한다. 그림자가 축축해지면 볕에 내놓고 말리기도 한다. 이불 말릴 때처럼 탁탁 털어주기도 하면서. 뽀송뽀송해진 그림자에는 곰팡이가 슬지 않는다.
p.113-114
내 짐작이 맞았다. 애들은 나를 작정하고 따돌렸던 것이다. 따돌림을 처음 당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일은 여러 번 겪는다고 무덤덤해지지 않는다. 애들은 나한테 관심을 보이다가 내가 시큰둥해하면 나를 미워하고 무시하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나는 내가 애들이 미워할 만큼 정말 형편없고 고약한 애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미구 씨와 아빠도 나를 사랑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건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p.159
나는 이 ‘언니’라는 말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니’가 아니라면 ‘언니’라고 부를 일이 없을 텐데 ‘언니’가 있어서 ‘언니’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도. 그리고 그 ‘언니’가 죽어버려서 ‘언니’라고 부른다고 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도.
언니라고는 하지만, 나는 언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내가 아니더라도 미구 씨와 아빠의 관심을 받고 있으니까. 본 적도 없고, 당연히 언니라고 불러본 적도 없다. 나이 차는 스무 살이 난다. 우연히도 나를 낳은 부모에게 오래전에 죽은 딸이 있었던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녀가 20대 초반에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약 오르는 일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더라도 나는 이 여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진지하고 모범적인 인생을 살다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죽은 뛰어난 여자를. 내가 언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즉 부모의 관심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이 유일했다. 언니보다 더 일찍. 그리고 더 애절하게.
나는 죽어서라도 사랑이라는 걸 듬뿍 받고 싶었다. 내가 언니보다 사랑스럽지 않다고 해도 불쌍하게 여겨진다면, 사랑 비슷한 걸 얻을 수 있다. 그럴지도
출판사 서평
“사라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습관적인 거짓말을 내뱉는 열일곱 살, 겁 많은 ‘자살 수집가’의 1996년 여름 이야기
1996년 제정된 한겨레문학상이 올해로 제20회를 맞았다. 2회 김연의《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3회 한창훈의《홍합》, 4회 김곰치의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 6회 박정애의 《물의 말》, 7회 심윤경의《나의 아름다운 정원》, 8회 박민규의《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9회 권리의《싸이코가 뜬다》, 10회 조두진의《도모유키》, 11회 조영아의《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12회 서진의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13회 윤고은의 《무중력증후군》, 14회 주원규의 《열외인종 잔혹사》, 15회 최진영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16회 장강명의 《표백》, 17회 강태식의 《굿바이 동물원》, 18회 정아은의 《모던 하트》, 19회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들》(1회, 5회 당선작 없음)까지 기존의 당선작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한국 문단의 주목과 동시에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015년 제2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은 한은형의 《거짓말》로, 총 291편의 경쟁작 가운데 심사위원 9명의 신중한 논의 끝에 본심 1차 투표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들은 《거짓말》이 “문장의 솜씨와 일관성 있는 색채, 예민한 감수성을 무기로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였”으며 “초반부터 빠르게 독자를 낚아채서 소설 속 인물을 따라가게 만든다”며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뽑았다.
《거짓말》은 1996년을 배경으로 한 고1 여학생 최하석의 성장소설이다. 부족할 것 없는 가정환경이지만 무얼 해도 무덤덤한 미구 씨와 아빠 밑에서 자란 최하석은 어른들의 허위의식을 경멸한다. 집 안에는 자기가 태어날 즈음 사라진 언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지 못할 좋은 딸이자 모범생이었던 언니를 이길 수 있는 방법으로 하석은 ‘죽음’을 생각하고, 자살 방법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거짓말을 습관처럼 내뱉고, 사랑도 우정도 책으로 배우던 하석은 PC통신을 통해 ‘프로작’을 만나고, 그 만남은 조금씩 관계를 배우고 솔직해지는 계기가 된다. 열일곱 소녀의 거짓말은 자신의 상처 안에 가라앉지 않기 위한 발장구와 같은 필수적인 생존방식이자, “하나의 서사 속에 두 개의 삶이 겹쳐질 수 있는 공백을 만드는 원동력(서희원 문학평론가)”이 된다.
한은형은 독특한 문체와 인상적인 언어의 호흡으로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당긴다. “화가의 문체와 철학자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흥미로운 소설(정여울 문학평론가)”을 완성시켰으며, 읽는 이로 하여금 “날카로운 자의식의 작가가 만들어갈 새로운 소설의 경지”(최인석 소설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계속해서 생각하는 건 그리워한다는 거야.
그리우니까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궁금한 거지.”
1996년 여름, 여자아이는 열일곱이 되었고, 막 생리를 시작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 살아야 되는 이유를 찾지 못했고,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그해 여름에는 국민학교가 사라졌고, 전국적으로 〈마카레나〉 열풍이 휩쓸었으며, 복제양 돌리가 태어났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여름 하, 돌 석 자를 쓴다. 여름의 돌보다는 ‘여름 모래’로 해석하기로 한다. 하석은 뭔가를 하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걸 보면 마음이 거북하다. ‘나 좀 봐주세요’ 온 힘을 다해 외치는 것 같은 번쩍거리는 구두, 네온사인, 그럴듯해 보이려고 애쓰는 교장과 학교 건물, 지나치게 말이 많은 여자아이들, 자기주장이 강해 보이는 빨간색 등…….
그해 여름, 하석은 기숙사가 딸린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다. 이전 고등학교에서 퇴학 같은 자퇴를 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교실에서 남자아이와 맨몸으로 커튼을 덮고 자다 경비원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하석은 억울했다. 아무도 왜 그랬는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교칙에는 남자아이와 누우면 안 된다거나 밤에도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하석은 그저 너무 지루해서 벌인 일일 뿐이었다.
경기도 변두리에 있는 Y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된 하석은 거기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또 자신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다.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이해받기를 애초에 포기하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하석에게 거짓말은 즐거운 유희이자 아름다움이자 자신의 상처를 들키지 않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방식에 가깝다.
냄새나고, 서툴고, 남의 걸 흉내 내고, 아니 심지어 제대로 흉내 내지도 못한……. 그런 거짓말들은 거짓말 전체를 능욕한다. 거짓말은 그럴듯해야 한다. 말이 되어야 한다. 아름답다면 더 좋다. 내가 생각하는 거짓말은 그랬다. 거짓말주의자에게도 도덕이 있는 것이다. 기분이 점점 나빠졌다.
무엇보다 학교 건물과 교장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거짓말을 할 때의 나는 즐거웠다). 교장이 즐거워 보였다면 속아주는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나치게 애쓰고 있었다. 바보 같았다. (p.86)
거짓말을 좋아하게 된 건 이런 이유에서다. 진심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하는 편이 낫다. 상대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위해서다.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는 눈에 나를 유기(遺棄)하고 싶지 않으니까. (p.139)
하석이 ‘죽음’에 사로잡힌 데에는 집 안에 짙게 드리워진 언니의 그림자의 영향이 크다. “친구한테도 인기 있고, 부모님한테는 좋은 딸이고, 흠을 잡을 데가 없는 인간”이었던 언니. 언니라고 하지만 스무 살 나이 차에, 본 적도 없고, 불러본 적도 없는 언니라는 사람. 20대 초반에 죽어버린 바람에, 부모의 모든 애정을 다 가져가버린 사람. 하석은 “죽어서라도 사랑이라는 걸 듬뿍 받고 싶”었고, 거짓으로 만나는 친구들보다는 책 속에서 만난, 이미 죽어버린 작가들과 더 잘 통했다. 그런 세계를 상상하는 것만이 하석이 이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다.
죽음을 생각하게 된 것도 이곳에서는 나를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저세상이 이 세상보다 사람이 훨씬 많다. 이 세상 사람 수는 저세상 사람 수에 비한다면 보잘것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이해할 만한 사람이 없을 리가 없다. 확률적으로. (p.139)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언니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언니의 첫 자살 시도도 열일곱 살 때였다. 나는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를 넘기면 죽지 못할 거라고 여겼을 거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서 잘 안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멈춰야 한다. 낡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완결된 이야기에 뭔가를 더 붙이는 건 억지로 늘려놓은 대하소설이나 다름없으니까. (p.203)
그런 하석에게 PC통신에서 만난 ‘프로작’이 눈앞에 거짓말처럼 나타난다. 하석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와 달리, 자연스레 자신의 머릿속 생각을 투명하게 그에게 쏟아내고, 이해를 구하고, 진실을 말해버린다. 그리고 프로작은 하석이 보는 삶의 방향을 살짝 바꿔주면서 소설은 끝을 향한다.
한은형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독자가 작가가 쓴 것을 보되 작가가 쓰지 않은 부분을 떠올리게끔 하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 또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에 대해 “자신부터 즐거울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 작가의 그런 마음은 《거짓말》에서도 살짝 비춰진다.
소설이란, 놀라운 것이었다. 내가 나의 일을 쓰면서 ‘나’라고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부끄러움과 민망함을 해결할 수 있다니. 3인칭은 기적이었다. ‘나’라고 하지 않았더니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왔다. (p.36-37)
그리고 글쓴이와 소설 속 주인공을 일치시키려는 독자들에게, 이 능수능란한 거짓말쟁이 소설가는 마지막 문장을 바친다.
어디를 믿어도 좋다. 어딘가를 믿지 않는대도 좋다. 어쨌거나, 거짓말은 거짓말인 것이다. (p.326)
■ 주요 내용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아이 최하석. 책 읽기를 좋아하고 어른들의 허위의식을 경멸하고 취미는 자살수집인 이 당돌한 아이에게는 엄마가 아니라면 멋지다고 생각했을 피곤한 미구 씨와 정성스레 난을 죽이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인 아빠가 있다.
1996년 고1 여름, 같은 학교 남학생과 함께 발가벗고 교실 커튼을 덮어쓴 채 잠을 자다 들킨 사건으로 자퇴를 한다. 하석은 기숙사가 있는 Y고등학교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이 생활도 금방 혐오스러워졌다. 하석은 “진심을 말하는 것보다 거짓을 말하는 편이 낫다”고 믿으며 바깥세계와 꾸준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 최재인의 기일에 맞춰 집에 갔던 하석은 미구 씨와 아빠로부터 언니의 실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다. 완벽하게 사라진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하석은 자신이 왜 이렇게 ‘자살’에 집착해왔는지도 깨닫는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낡기 전에 사라진다. 하석은 겁이 많은 자신을 죽여줄 남자를 찾아 나서는데…….
기본정보
ISBN | 9788984319158 |
---|---|
발행(출시)일자 | 2015년 07월 10일 |
쪽수 | 332쪽 |
크기 |
150 * 210
* 30
mm
/ 452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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