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한번 감았다 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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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시인’ 조항록의 다섯 번째 시집
조항록 시인은 흔히 이름은 있으되 얼굴은 없는 시인으로 불린다. 등단 27년의 세월을 채워가면서 묵묵히 작품을 발표하며 자기 시세계를 갱신하는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으나 좀처럼 문단 행사나 문인들과의 교류에는 인색한 편이어서 이런 불명예스런 평을 듣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충분히 그의 내성적 성격과 작품에 대한 자신감이 충분히 느껴진다.
1992년 『문학정신』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온 그는 “침착하면서도 정열이 있다. 호들갑스럽지 않고, 인식과 표현의 동시 운용에 무리가 없다. 좋은 재목 하나를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라는 평(황동규)을 받으며 시인으로 우뚝 섰다. 과연 조항록은 ‘좋은 재목’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단단히 여문 시어로 언어의 집을 지었다. 2016년 『여기 아닌 곳』에 이어 3년 만에 발표하는 『눈 한번 감았다 뜰까』는 그가 다섯 번째로 지어 올린 ‘시의 집’이다. 이번에 선보이는 시의 집에는 그만의 밀실(비밀의 방)이 가득하다. 그것이 그를 ‘비밀의 시인’이라고 명명한 이유다. “자신의 본색(本色)을 깊숙이 바라보고 있으며 섣불리 지나치기 십상인 주변의 작은 피사체들에도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기 아닌 곳』 책 소개문)이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에서도 그는 따스한 관조의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그의 눈길이 머무는 자리, 바로 그곳에 그의 비밀이 있다.
작가정보
목차
- 시인의 말
1부
그믐
다시, 생일
자코메티풍(風)
서향
옛 노래
동굴의 미움
수수방관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자
우울을 보다
스툴
노인이라는 잠언
생선이라는 잠언
당신의 발
이심전심
입춘
응달의 기술
심야의 예배당
유신론자
부럼
비교적
첩첩
잠깐의 가을
강박
몰입
꽃놀이
대체로 흐린 날
윤회
매일
사랑결핍증
미꾸라지를 위한 변명
뭐가 들었을까
돗자리 깔고 누워
2부
시간주(時間走)
휘파람을 분다
정물화
이역(異域)
산문(山門)
구운몽
공놀이
부고를 받다
내간체
곁
새해맞이
솔직히
식물도감 공부
소묘(素描)
길거리에서 기다리다
반문(反問)
낙천주의자
무기력
열쇠
긍정의 여름
비겁
거리(距離)
고깃덩어리
단편(短篇)
가시 맛
비관주의자
인산인해
생은 한가운데
슬프거나 한심하거나
성북동 호수
찬란에 대하여
할 만큼 하는 것
그럴 나이가 되었다
3부
별곡(別曲)
굴레방다리
체하다
역사가 흐른다
닭 잡는 날
안부
무언극
갈매기
엄살
빈둥거리다
책
뱀
일상적 반성
그늘의 인장(印章)
우리 만남은
연체동물
위악(僞惡)
아귀
막차가 달리네
시
누가 글썽인다
마중
물끄러미
오브제
뉴스가 시시한 날
공연히
아일랜드 식탁
사루비아
회전목마, 겨울
나의 투지
걱정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신발 한 켤레
해설 | 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멀쩡해지기 위한 응달의 기술
출판사 서평
밀실, 버리지 못한 것들을 응시하는 곳
그의 시가 시작되는 자리는 어디일까. 빛 들지 않는 곳, 그늘진 곳, 서늘하고 쓸쓸한 곳. 그 어딘가에서 그는 시를 짓는다. 이른바 그만의 ‘밀실’이다. 그에게 시를 짓는 일은 곧 아무도 모르는 밀실 하나를 늘이는 일인 셈이다. 그렇게 “몰래” 만든 밀실이 벌써 “삼백여섯 개째”(「강박」)다. 그는 왜 밀실을 짓는 것일까. 시인의 말에서 언뜻 내비치듯 “마음의 저수지”에 사는 “정체불명”의 존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인 자신조차 그 실체를 명확히 인지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의 내면에서 파문을 일으키며 “밤낮 물에 젖어 눈빛을 반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바로 그 정체불명의 힘으로 밀실을 지어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며 지난한 ‘겨울의 밤’을 “견딘”다.
너의 음악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가볍지 못했다
추위는 지루했고
먹물을 쏟듯 한꺼번에 밤이 찾아오고는 했다
그래서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차가운 바람벽에서 바싹 말라붙은 안개꽃을
오랫동안 내다버리지 못한 채 겨울을 지났다
―「입춘」 부분
먹물 같은 밤, 무수한 겨울의 밤을 지나며 그는 봄을 바라본다. “차가운 바람벽에” 붙어 몸을 떠는 안개꽃처럼 지루한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 안는 그는 보일락 말락, 아직은 보이지 않으나 이미 다가온 봄을 응시하고 있다. 섣불리 “가볍지 못했”기에 “바싹 말라붙은 안개꽃” 하나 오랫동안 내다버리지 못하는 그는 그 무엇도 ‘함부로’ 떠나보내지 않는다. 때때로 꺼내어 헤아려보거나(추억하거나), 되짚어보기(반성하기) 위해서다. 헤아림과 되짚는 행위는 모두 그만의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지난한 겨울, “공연히 버리지 못한 것”(「비겁」) 또는 “한 번도 버리지 못한 것”(「이역(異域」)들을 그러모아 골똘히 바라보는 그. 시간은 흐르고, 그러는 동안 겨울이 지나고 “봄은 온다”(「입춘」).
고난의 상황을 천천히 지워내는 ‘멜로디의 역설’
그는 질끈 눈을 감는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달라져 있을 풍경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쓸쓸하기도 하”고 “막 섭섭하고 화가 나서 느지막이 비밀을 닫아”(「구운몽」)걸고 만다. 현실은 눈 한번 감았다 뜬다고 해서 바뀌는 판타지가 아님을 그도 잘 아는 까닭이다. 여전히 생경하기만 한 현실 속에서 시인은 “세계가 기형인지 자신이 기형인지 다시금 질문”(해설, 「멀쩡해지기 위한 응달의 기술」)한다.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다. “껍데기가 내용을 정의”하고 “영광은 껍데기의 몫”이 되는 세계에서 “다람쥐의 등에 날개는 달리지 않을”(「부럼」) 테니, 차라리 그는 껍질 이면을 마음껏 상상하기로 한다.
붉은 사과는 껍질 속에서 어떤 색깔로 달그락거릴까 내가 보지 못하는 껍질 속에서 파란 꿈을 꿀까 노란 사랑을 나눌까 하얀 배반을 모의할까 아마 달그락거리는 것이 아니라면 순진한 손짓으로 누구를 기다리기만 할지도 모르고
붉은 사과의 껍질 속은 일찍이 행복의 갈변을 예감하지 않을까 칼날에 베일 것을 염려하는 검은 예언이 들지 않았을까 햇볕이 단물을 만들고 햇볕에 반짝이는 윤기가 위로가 되어도 붉은 사과의 소망은 어쩌면 저 너머의 붉지 않은 것
붉은 사과를 붉게 그리는 지상의 인정(人情)은 이해해 붉은 사과를 붉게 고백하는 현실의 작법(作法)은 모두의 일이지 그럼에도
―「정물화」 전문
그의 자유로운 상상에도 불구하고 ‘정물화’는 껍질 이면을 보여주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의 이치이기에, 그는 결국 “지상의 인정(人情)”에 대해 수긍하고 “현실의 작법(作法)”을 인정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의 한계는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반성”하게 만든다. 그는 “날카로워 쓰디쓴 돌풍”과도 같이 “식탁이든 변기든 버스 좌석에서든 반성의 습격”(「일상적 반성」)을 맞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시로 반성하는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이 “비겁”하다고 고백한다. “적을 만들 용기가 부족했고 갈대 같은 총을 들어 나를 지킬 자신이 없었”다고 담담히 말하는 그는 도리어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마치 고행의 수행”(해설, 「멀쩡해지기 위한 응달의 기술」)을 하듯 세계를 쪼개고 이탈하며 파국을 온몸으로 겪는 그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남아 있는 전투 의지를 다져”본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라는”(「나의 투지」) 마음가짐으로. 그렇게 “고난의 상황을 천천히 지워”(해설, 「멀쩡해지기 위한 응달의 기술」)나가는 시인의 우직한 투지는 시로써 ‘밀실’을 짓고 ‘시의 집’을 일구어내는 숨은 동력인 동시에 ‘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세계를 정지시키고 가장 인간적인 사유를 하는 순간은 눈에 보이는 규칙이나 논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멜로디가 가진 삶의 율동성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의 상황을 천천히 지워내는 ‘멜로디의 역설’은 안 보이는 세계를 오히려 더 자세히 보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삶에 대한 무수한 걱정과 역경보다 우리를 잠시 잠깐 흔드는 이런 종류의 미감이 어쩌면 우리를 진정 파국에서 구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이 단순히 착각이고 환각일지라도 그 착각을 믿어보고 싶은 마음. 그런 동력이 조항록의 시 세계를 지탱한다. “구원은 아니었으나 참 갸륵한 결말”(「굴레방다리」)을 믿어보게 되면서 말이다.
―해설, 「멀쩡해지기 위한 응달의 기술」 부분
기본정보
ISBN | 9788983927361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02월 28일 | ||
쪽수 | 152쪽 | ||
크기 |
124 * 198
* 15
mm
/ 212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시인수첩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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