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물을 믿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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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으로는 세번째에 해당하는 이번 『네 눈물을 믿지 마』와 앞선 소설집 『그 남자의 방』(이룸, 2010) 사이에는 10년의 세월이 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방』에 수록된 「검은 강」과 「장마」, 그리고 이번 소설집의 「프리페이드 라이프」 「믿지 마, 네 눈물은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몰라」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자」 등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며 나오는 ‘파산’의 모티브는 ‘작가의 말’과 같은 곁텍스트의 발언들을 참조할 때 작가의 실제 시련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유령의 시간』이나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이 씌어졌던 상황의 어떠함을 짐작게 한다. 10년의 시간은 작가 김이정보다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김이정에게 닥쳐온 헤어나기 힘든 늪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만큼 다음과 같은 허구의 세목에 새겨진 사실성의 편린, 소설 외부의 현실을 떠나 이번 작품집을 중립적인 진공의 텍스트로 읽는 일은 가능하지도, 온당하지도 않은 일인 듯하다.
작가정보
목차
- 프리페이드 라이프
하미 연꽃
죄 없는 사람들의 도시
믿지 마, 네 눈물은 누군가의 투신일지도 몰라
퐁니
노 파사란
압생트를 좋아하는 여자
붉은 길
작품 해설 | 울음, 그리고 나와 너에게로 가는 길 | 정홍수
추천사
-
소설을 읽다가 하마터면 울 뻔했다. 왜 아니겠는가.
어느 날 082 버스 백미러에서 문득 내 얼굴을 마주쳤을 때, 그게 불행을 피부 이식이라도 한 얼굴 같았을 때, 바라나시의 화장장에서 미처 불에 타지 않은 시신의 발을 보았을 때, 현실에 최신을 다하는 게 도덕이라 생각했던 내가 갑자기 생존 본능만 남은 짐승처럼 느껴졌을 때, 내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의 진실을 깨달았을 때, 하미, 퐁니…… 한 사람이 떠났지만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을 때, 무균실에 들어간 여자를 보고 세계는 무균실과 균 덩어리 세상으로 나뉜 것 같다고 느꼈을 때, 내 삶이 갑자기 복선 없이 사건이 벌어진 그리스 비극이라도 읽은 기분일 때, 기도야말로 그녀의 삶을 모욕하는 행위인 듯싶을 때, 그리하여 누군가 젖은 솜 덩어리를 내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 것만 같을 때, 당신이라면 무슨 수로 버틴단 말인가. 그냥 울었어도 좋았겠다.
책 속으로
소설을 쓰는 게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목뼈와 허리가 내려앉고 팔과 손에는 통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빚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엄마와 아이와의 생활비를 버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 팔순 노모는 백화점 화장실에서 휴지를 잔뜩 뜯어서 가방에 넣어 오고, 아들은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로 손이 퉁퉁 불어서 돌아왔다. 연체고지서가 쌓여가고 얼굴은 점점 굳어졌다.
그날 082번 버스의 룸미러에 비친 내 얼굴은 피로와 지친 기색만 역력할 뿐 자부심이라곤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낭떠러지를 건너는 자의 긴장감조차 보이지 않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라기엔 어떤 욕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프리페이드 라이프」, 31쪽)
이럴 때 사실의 진정성(authenticity)은 소설의 수사학과 문법을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의 문법과 수사학을 통해 변용되어 우리에게 도착한 ‘작품’에는 그 실제 현실을 넘어서고 다르게 비추는(때로는 현실을 새롭게 구성하는) 제3의 차원이 열리게 마련이며, 여기에 ‘사치’를 모르는 소설의 존재 의의가 있다는 점은 당연하면서도 새삼 강조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프리페이드 라이프」에서 밥벌이 글쓰기 노동의 장소로 매일 도서관에 ‘출근’하던 소설 화자 ‘나’는 버스의 룸미러에서 ‘데드마스크’ 같은 자신의 얼굴과 마주친 뒤 충동적으로 인도 여행을 감행한다. ‘나’가 콜카타 공항에 내리자마자 구입한 ‘프리페이드(prepaid) 택시 바우처’는 일종의 선불 택시 요금 제도로, 저렴하고 바가지를 쓸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인도 여행 커뮤니티에서 추천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범상한 여행의 세목에 그쳤을 수도 있는 ‘프리페이드 택시 바우처’의 삽화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소설의 주제적 선율을 형성하며 마침내는 좋은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울림의 순간에 이른다. 그 울림에는 소설의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한기(寒氣)로부터 우리에게 건너오는 “꽃불”(33쪽)의 온기가 있다. 바라나시의 강변에서 매일 이루어지는 시신의 장례 의식을 지켜보던 화자는 여행의 마지막 날 화장장 ‘버닝 가트’의 남은 숯을 줍거나 ‘꽃불’을 팔아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돕는 불가촉천민 아이 앞에서 중얼거리듯 한국말로 자문한다. “아무래도 내 생은 미리 받은 선불을 다 써버렸나 봐. 프리페이드 택시처럼 나를 아주 낯선 곳에 내려놓고 가버렸어.”(34쪽) 작가는 우리 독자 역시도 소설의 처음에는 예상 못했던 아주 낯선 곳에 내려놓는다.
우리가 인생에서 미리 받아 안고 출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운명’이라 불러볼 수도 있겠고, ‘삶의 가능성’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테다. 아니면 우리를 영원히 안온하게 감싸는 ‘고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잠시 소설을 ‘선험적 고향 상실의 형식’이라고 부른 한 문예이론가의 통찰에 기댄다면, 우리가 미리 받았다고 생각한 ‘그것’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속한 적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고대 서사시의 조화로운 지평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소설이 앓게 된 ‘멜랑콜리’는 사실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의 ‘선험적 상실’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 써버린 선불 인생’의 탄식은 어쩌면 소설의 내적 형식에서 울려 나오는 ‘멜랑콜리’의 이야기일 수 있으며, 「프리페이드 라이프」에서 전격적으로 감행된 여행의 여로는 ‘길은 시작되었는데 여행은 끝났다’는 소설의 근원적 아이러니를 향한 출발일 수 있다. 그것이 시간의 파괴적인 힘에 맞서 소설이 실패의 순간들, 인생이 거절한 것들의 목록을 창조적 기억의 힘으로 변형시키고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막막한 길 떠남의 이야기로 가득 찬 김이정의 이번 소설집은 그 자체로 ‘소설’을 향한 여로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리고 그 여로의 끝에는 대개 소설의 역설적 충만을 증거하는 풍경들이 고독과 절제의 언어로 조용하게 남겨진다. 삶이 거절한 또 다른 시작을 예비하는 듯이. 「프리페이드 라이프」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꽃불 두 개가 검은 강 위로 나란히 흔들리며 떠가고 있었다. 어느새 여기저기 모여든 배에서 떠내려 보낸 꽃불로 강물은 붉은 꽃밭 같았다. 오른편 가트에선 여전히 화장장의 장작불이 축제의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왼편에선 뿌자를 위한 노란 조명들이 강물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바라나시의 마지막 밤이었다.(37쪽)
재난이든 폭력이든 세상의 부조리든 한 개인에게는 언제나 전면적인 것이다. 게르니카의 대학살 때 열한 명의 가족 중 홀로 살아남은 아이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년의 시간에도 여전히 그날의 공포를 끔찍한 환청으로 되살고 있다. 「노 파사란」에서 소설 화자 ‘나’가 묵게 된 호스텔의 여주인 레이레의 어머니 이야기다(믿고 따랐던 한국군에게 몰살당하는 베트남 아녀자들의 차마 따라 읽기 힘든 이야기가 「하미 연꽃」과 「퐁니」에도 나온다). ‘나’는 레이레의 슬픈 이야기를 들은 뒤 보름달이 뜬 게르니카의 광장에서 그날 이 작은 마을로 날아왔던 스물네 대의 폭격기 소리를 환청으로 듣는다. 그런데 그 환청은 돌연 남편의 전화 속 비명으로 바뀐다. “나, 무서워.”(191쪽) 그가 울먹이며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날 밤 남편은 파산으로 혼자 숨어 살던 고시원을 나서다 쓰러지고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나’를 만나기 위한 길이었다.
함께 있었다면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가 떠난 후부터 나를 짓누른 물음이었다. 적어도 그의 곁에 있었다면. 결국 폭탄과 총알이 쏟아질 걸 알면서도 노 파사란, 두려움의 노래라도 함께 불렀더라면……(192쪽)
1937년 스페인 게르니카의 한 소녀의 절규와 바뀐 세기의 한국 서울의 어느 고시원에서 터져 나온 한 사내의 비명은 어떻게 공명하고 만나는 것일까. 리스본 떼주 강변의 절망은? 베트남 하미 마을의 비명은? 김이정 소설은 인간 고통의 사회적 역사적 지평을 성실하게 기억하면서도 어쩌면 그 무력감에서라면 언제든 개인을 압도하고 좌절시키는 이름 붙이기 힘든 고통의 범속한 자리들도 함께 일깨우려 한다. 그래서는 있을 수 있는 고통의 위계를 제거하고 울음이라는 공통의 기반을 마련하려 한다. 과장 없는 서사, 단정하고 담백한 문체, 절제와 여백의 시적 울림은 김이정의 소설에 드문 기품을 부여하며, 때로는 터져 나오고 때로는 터져 나오기 직전에 끝나는 그 울음의 이야기들 안에서 나와 너에게로 가는 길을 조용히 찾아보게 만든다.
가느다란 흐느낌으로 시작된 울음이 점점 거세졌다. 그를 보낸 지 1년이 지났지만 한 번도 제대로 울지 못했던 울음이었다. 어디에선가 솟구친 울음이 종일 걸었던 골목골목으로 번져나갔다. 여자가 옆에 나란히 앉아 나를 안았다. 레이레의 커다란 두 손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너는 울 곳이 필요했구나.
갈퀴 같은 그녀의 손가락들이 내 등의 뼈 하나하나를 쓰다듬었다.(192~193쪽)
이 울음들을 신뢰하지 않기는 힘들다. 혼자만의 것으로 알고 있던 고통의 특권과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82182778 |
---|---|
발행(출시)일자 | 2021년 05월 07일 |
쪽수 | 276쪽 |
크기 |
137 * 200
* 22
mm
/ 304 g
|
총권수 | 1권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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