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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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겨레신문 > 2019년 3월 2주 선정
이런 점에서 독일의 분단 극복 즉 통일은 극히 국제적이다. 영토 만 보아도 독일의 재통일 즉 1937년 통일독일의 회복은 바로 폴란드의 영토 문제와 직결된다. 그래서 서독과 현재의 독일은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 관련 일연의 조약에서도 폴란드의 서부 국경 즉, 오데르-나이쎄 선 이동인 과거 동프로이센 영토의 폴란드 영유를 인정하였고, 1990년 10월 통일 후에도 폴란드와 국경조약을 통해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던 것이다. 이는 폴란드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현재 러시아 영토인 과거 폴란드 영토 문제에까지 연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동독 민주화 운동의 고조로 통일이 현실의 문제로 대두되었을 때 당시 서독의 콜 총리 정부는 통일에 대한 독일 국민의 자기결정권 즉, 자결권과 이의 국제적 승인 문제라는 두 축으로 접근해갔으며, 주변 국가의 긴장을 불러오는 극히 예민한 민족 문제는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이미 동독 주민의 입에서 “조국”(Vaterland)라는 구호가 나오고 있고 자기 당인 기민련의 기본강령에 조국의 재통일 명제가 명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다. 이런 시각에서 이 책은 유럽평화라는 관점에서 독일의 통일과 제국의 성립, 독일의 분단 그리고 통합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쓴 글이다.
작가정보
- 경북 영주 생 - 경복고, 서울대 법학과 졸업 - 국민대학교 대학원 졸업 석사논문: 독일통일과 헌법통합 연구 박사과정 수료: 북한법과 남북한 특수관계 연구 - 저역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역사(백산서당) 독일 사회민주당 강령집(백산서당) 독일 녹색당/좌파당 강령집 위대한 거부(허버트 마르쿠제, 광민사) 혁명과 반혁명(허버트 마르쿠제, 풀빛) 반핵의 논리(E. P. 톰슨, 일월서각) 모택동 전기 1. 2. 3(한수인, 일월서각)외 - 경기문화재단 사무처장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장(남한산성 세계유산 등재) 역임
목차
- 저자 서문
1장 서론: 근대 독일 민족의 형성 / 13
1. 1815년 비인 회의와 통일운동 ㆍ 13
2. 독일제국의 성립과 독일 민족 ㆍ 17
3. 유럽평화와 독일민족 ㆍ 19
4. 민족사회주의의 등장과 2차 대전 ㆍ 26
2장 2차 대전 종전과 독일의 분단 / 33
1. 연합국의 전후 세계, 유럽 질서 및 독일 점령 준비 ㆍ 33
2. 전승 4강국의 독일 점령 ㆍ 46
3. 냉전의 시작과 분단국가의 탄생 ㆍ 64
1) 서독(독일연방공화국)의 창설 ㆍ 81
2) 동독(독일민주공화국) 창설 ㆍ 86
3장 분단국가 시대(1949-1972년) / 91
1. 친서방, 반공의 서독 출범 ㆍ 91
2. 서독의 자본주의 서방 편입과 서독 경제의 부활 ㆍ 101
3. 분단의 고착화 ㆍ 106
4. 분단시대 서독의 동방정책 및 독일정책 ㆍ 111
5. 분단시대의 동서독 교류 ㆍ 131
4장 “사실상” 양국 체제 시대 / 143
1. 브란트 정부의 출범과 신동방정책 ㆍ 143
1) 사민당의 동방정책 변화 ㆍ 143
2) 빌리 브란트의 신동방정책 준비 ㆍ 149
3) 신동방정책 ㆍ 157
4) 동서독 기본조약 ㆍ 168
5) 동서독 특수관계 ㆍ 190
2. “사실상” 양국 체제 하에서 동서독 관계 ㆍ 195
3. 서독과 동독의 독일정책 ㆍ 202
1) 서독의 독일정책 ㆍ 202
2) 동독의 독일 정책 ㆍ 214
5장 독일 통일 / 221
1. 라이프치히 월요시위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ㆍ 221
2. 장벽 붕괴에서 통일까지 ㆍ 230
1) 장벽 붕괴 전후한 시기의 동서독과 국제사회 ㆍ 230
2) 헬무트 콜의 승부수 10개항 통일 방안 그리고 통일의 여정 ㆍ 238
3. 동독 국가의 소멸과 통일을 위한 내부 절차 ㆍ 249
4. 독일 통일의 국제적 절차와 통일의 완성 ㆍ 258
6장 독일 통일의 빛과 그림자 / 267
에필로그 ㆍ 283
참고문헌 ㆍ 287
사항 찾기 ㆍ 303
출판사 서평
우리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2차 대전 후 냉전과 유럽에서 냉전체제의 해체의 시각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의 신동방정책이 통일의 길을 열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패전국인 독일은 1947년 트르먼 독트린에 의해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945년 5월 8일 패전과 동시에 전승 4강국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의해 분할되어 점령되었다. 물론 독일의 심장부 베를린도 4강국에 의해 분할되어 점령되었다.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접수하고 점령을 하면서 4강국은 전체로서 독일과 베를린에 관한 최종결정권은 전승 4강국이 유보한다고 선언하였다.
전후 독일의 분단은 소련 점령지구와 통합된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구에 1949년에 각기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설립되어 분단체제를 유지하다가 1990년 동독 주민의 자결권 행사에 의해 내부적 통합이 결의되고 양국이 통일조약을 체결한 뒤 4강국이 최종결정권을 포기하고 교전 당사국을 대체한 유럽안보협력회의 회원국 35개국이 독일통일을 추인함으로써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독일은 냉전과 무관하게 2차대전 종전 시에 이미 분할되어 있었다. 분할점령과 종전 후 4강국의 독일 전쟁의 제1 목표는 독일의 전쟁잠재력 해체였다. 이를 점령정책의 목표인 4-D 즉 탈군사화(Demilitarization), 탈나치화(Denazification), 민주화(Democratization), 탈카르텔화(Decartelization) 정책을 하나로 묶어보면 결국 독일의 전쟁잠재력 무력화였다.
독일문제(Deutsche Frage)란 전체로서 유럽 평화와의 관련 속에서 독일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의 문제다.
독일문제가 유럽 국제질서에 등장하는 것은 멀리 올라갈 수 있지만 가까이는 종교전쟁인 30년전쟁을 정리한 근대 국제정치의 효시라 할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 평화체제다. 유럽의 거의 모든 세력이 참여하여 진행된 것이 30년 전쟁이라 하지만 전쟁의 무대는 오늘날의 독일 지역이 주된 무대였다. 독일을 폐허로 만든 이 참혹한 전쟁을 정리한 유럽의 평화질서는 유럽의 기득권 세력의 현상유지를 전제로 독일을 300여개의 독립된 왕국 내지는 제후국으로 분열시킨 것이었다. 어느 한 나라도 중부 유럽에서 강자가 되어 유럽의 평화질서를 교란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 질서는 150년 만에 프랑스 혁명과 뒤 이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흐트러지고 말았다. 나폴레옹 전쟁의 주무대 역시 독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나폴레옹은 북유럽 평원을 통과하여 러시아 내륙 깊이 모스크바까지 진격하였다. 이제 유럽의 평화질서에는 러시아까지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배하여 유배간 후 유럽의 강국은 1815년 비인에 모여 유럽의 평화질서를 재건하였다. 소위 비인 체제는 구질서의 복구를 목적으로 하면서 힘의 균형 하에 역시 독일을 30여개의 왕국과 공국으로 분할하였다.
그러나 비록 패배하였다고는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 특히 자유주의와 프랑스 민족주의는 여타 지역은 물론이고 분열된 독일 지역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 즈음 서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이 독일 지역의 산업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민족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산업화는 독일 지역에 통일 의식을 일깨워주었다. 독일 민족이란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은 밑으로부터가 아닌 프로이센에 의한 위로부터 통일로 독일민족 개념 역시 정치적으로 정의되었다.
독일의 통일은 1860년대부터 전쟁과 제국의 성립 과정을 거쳤다. 슈레스비히-홀스타인 영유권을 둘러싼 덴마크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전쟁, 이의 지배를 위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는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불과 10년 사이에 3개의 커다란 전쟁에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을 통일하였고, 1871년 패전국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우려하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중부 유럽에 강국이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민족이 탄생한 것이다.
말 그대로 제국인 독일제국은 성립 40년 만에 유럽과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미증유의 1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패배하였다. 일부 영토는 빼앗겼지만 제국의 실체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공화제로 바뀌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과 독일민족에게는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1,320억 금 마르크라는 절대로 갚을 수 없는 배상금의 멍에가 씌워졌다. 패전에 따른 실업과 절대 금액의 배상금으로 독일의 내정 불안은 도를 더해갔다. 이에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스)이 시대의 모든 정서를 당명에 담으면서 출범하여 세를 모으고 드디어 배상금을 상환을 중단하고 1938년 민족의 생활공간(Lebenraum) 확보를 위하여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침공에 나서면서 베르사이유 평화체제는 무너지고 아시아 태평양까지를 무대로 하는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종전을 2년 여 앞두고 연합국은 독일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여야 유럽과 세계 평화질서를 회복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게 되었다. 결론은 독일의 분할이었다. 1943년 미국 재무장관 모겐소가 내놓은 전후 독일정책은 독일을 18개주로 나누고 3개국가로 분할하며, 각국은 구성 주의 연합체와 같은 철저하게 탈중앙집권화한 농업과 경공업 중심의 유럽의 평균 소득보다 낮은 소득수준의 사회였다. 이에 따라 1945년 5월 8일 영시를 기점은 전승 4강국은 독일의 최고권위를 접수하고 전체로서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은 자기들이 보유한다고 선언하였다. 통일된 주권국가를 만들 수 있는 권한은 자기들이 보유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잠재력 제거와 배상을 위하여 자기들이 판단한 유휴 생산시설을 철거해갔다. 이후에 독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점차 냉전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서방 3개국 점령지구는 기본법 체계 하의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소련 점령지구는 동독헌법 체계 하의 독일민주공화국으로 분단국가 시대가 열렸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진영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냉전 대립은 동서독을 유럽 최전선으로 만들었지만, 한 편으로 서독에 경제기적을 가져다주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서독에 가해졌던 모든 경제적 제약을 없어졌다. 1973년에 서독은 세계 제3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반면 서독은 나토와 유럽연합을 축으로 하는 서방체제에 깊숙이 편입되었다. 동독 역시 바르샤바조약 기구와 코메콘 체제에 의해 동유럽 진영의 핵심국가가 되었다. 재통일 혹은 통합은 전혀 불가능해 보였다.
서독의 역대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독일문제 즉 독일통일과 민족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독의 경제기적을 이끌어온 기민련의 아데나워 총리 정부는 미국과의 동맹, 프랑스와의 우호를 기본으로 하는 서유럽 체제 내에서의 독일을 추구하였다. 유럽공동체의 정치통합 속에 서독이 녹아들어감으로써 중부 유럽에서 평화의 교란자로서 독일의 입지를 지양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통일 문제에 관해서는 1937년 12월 31일 현재의 통일독일의 회복으로 동독주민의 자결권 행사 즉 비밀이 보장된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이의 기본 입장은 기민련의 기본강령 속의 독일정책으로 명문화되어 1990년 통일 때까지 유지되었다.
사민당의 전통적인 민족과 독일정책은 보다 이상적인 것이었다. 일찍이 1925년 하이델베르크 강령에서 유럽합중국 창설을 제안하였다. 독일민족과 민족주의는 전체적인 유럽평화질서 속에서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여기서 유럽합중국 체제에 개별국가가 주권을 이양한다는 구상이었다. 전후에 재건된 서독 사민당도 이런 노선은 견지하면서 1950년대 60년대 초기에는 중립화평화통일정책을 추구하였다. 여기에 유럽의 평화 보장을 위하여 독일을 포함한 중부유럽의 비무장평화지대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냉전 대립이 깊어지면서 통일이 불가능해 보이는 1960년 중엽부터 빌리 브란트를 중심으로 한 소장파는 이런 이상적인 구상에서 현상을 인정하는 현실적인 평화체제 구축으로 노선 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1963년 브란트의 측근 에곤 바르의 “접근을 통한 변화”는 4강국의 최종결정권, 동독에 대한 소련의 종주권 현실을 인정한 바탕에서 동독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1960년대 말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에서 집권한 사민당의 브란트 총리는 신동방 정책을 바탕으로 무력 사용 포기와 현상 특히 현존 국경인정을 골자로 한 소련과의 모스크바조약, 폴란드와의 바르샤바조약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프라하조약을 체결하였고, 이는 베를린에 관한 4강국 협정의 뒷받침을 받았다. 이는 2차 대전 종전 문제에서 가장 예민한 미해결 문제로 유럽의 안전과 평화의 뇌관이 될 수 있는 폴란드 서부 국경, 과거 독일의 동프로이센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영유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동독과 서독은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서독의 입장에서 동독을 사실상 국가로 승인한 것이었다. 동서독은 유엔에 동시가입하고 동독이 주권국가로서 유럽안보협력회의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서독 연방헌법재판소는 동서독을 관계를 국제법상으로는 외국과의 관계, 서독 국내법상으로는 국내 관계로 정리하여 이 기본조약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었다. 한편 동독은 이 기본조약 체결 후 헌법 개정을 통하여 서독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민족으로 정의하고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서독의 승인을 받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동서독 기본조약 체제는 양국간의 관계를 사실상 2개의 국가관계로 규정하여 동서독 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를 정상적인 국가 간의 관계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양국 국민들 간에 통일에 대한 의지는 약화시켰다. 이 점은 1989년 동독 민주화 열기가 달아올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렸을 때조차도 동서독 국민 모두에게 통일 이야기를 낯선 이야기로 만들었다. 서독 언론의 보도 태도 역시 여느 동유럽 지역의 민주화운동 보도와 다르지 않았다.
사민당에 이어 정부를 차지한 기민련의 헬무트 콜 총리는 기민련 강령 상의 독일정책 기본노선은 유지했지만 동서독 기본조약에 바탕을 둔 사실상의 양국 체제는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독에 대한 차관 공여 등을 통해 양국 관계를 심화시켜 나갔다.
폴란드의 자유연대노조운동을 필두로 1980년대 말 동유럽의 민주화운동의 파도에서 동독 역시 비켜나갈 수 없었다.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를 중심으로 여행의 자유 요구를 비롯한 인권운동에서 시작한 동독 민주화운동은 1989년 5월의 지방선거 부정을 계기로 폭발하였다. 11월 4일 베를린에서는 100만명이 시위에 나섰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도 통일 요구는 없었다. 동독의 혁명 수준의 개혁 요구였다. 11월 20일 무렵이 지나면서 동독 주민들 구호에서 통일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89년 11월 29일 콜 총리는 연방의회에서 10개항 통일방안을 제의하였다. 처음으로 나온 공식적인 통일 논의였다. 비로소 독일통일, 독일 민족 즉 독일문제에 관한 잊혀졌던 국제사회의 관심이 제기되었다. 원칙적으로 긍정하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일단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영국은 물론이고 독일문제의 직접적 당사자인 프랑스는 냉담하였다. 고르바초프의 소련은 나토, 바르샤바 체제와 직결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독일문제의 직접 당사자인 까닭에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동독 주민의 민주화와 통일 열망은 국제사회의 이런 태도로 제어하기에는 이미 그 정도를 넘어섰다.
이제 국제사회 특히 전승 4강국은 전체로서 유럽의 평화 문제의 시각에서 독일통일 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동서독 양국이 통일에 관한 국내절차와 통일 합의, 즉, 자기결정권 행사에 의한 통일 결정, 4강국의 동서독 국민의 결정 승인 및 전체로서 독일과 베를린 문제에 대한 최종결정권 포기, 2차 대전 종결을 목표로 한 개별 국가 간의 평화조약 체결 대신 유럽안보협력회의 회원국 35개국의 독일통일 승인이라는 절차에 의해 독일통일을 실현하기로 국제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1990년 3월 동독의 자유총선에서 서독 기본법 제23조 편입에 의한 조기통일 방안을 내건 보수 진영인 “독일을 위한 연합” 측이 승리하고 새로 구성된 인민의회에서 동독 5개주 신설과 편입이 결의되었다. 그 후 통일조약을 포함하여 양독 간에 2개의 조약이 체결되고 전승 4강국이 최종결정권을 포기함으로써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마침내 통일되었다. 이후 35개국의 추인이 있으면서 국내외적인 통일절차가 마무리되었다. 2차 대전도 최종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1990년 10월 3일의 독일통일은 1937년 12월 31일의 통일독일의 회복 즉 재통일이 아니었다. 통일 완료 후에 독일은 폴란드 및 체코슬로바키아와 현존 국경을 확인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 상으로 통일독일은 1990년 10월 3일 현재의 동독과 서독의 영토 통합이었으며, 과거 동프로이센 지역의 독일 국민 즉 현재 폴란드 서부 지역의 독일계 소수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규정밖에 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재통일이냐 통합이냐의 물음에는 중간 어디쯤이라고 답해야 될 것이다.
국내적인 통합 문제를 살펴보면 독일은 2000년대 초 사민당 슈뢰더 총리 시절 국내적으로 정치적인 격변을 일으켰던 복지, 노동, 조세 개혁을 통해 유럽연합 내 여타 국가를 압도하는 경쟁력을 확보하여 경제력 즉 국력을 유럽연합의 어느 국가도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국내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장미 빛만은 아니다. 책 6장에서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구서독 지역과 동독 지역 간의 격차는 통일 후 1세대 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극복이 지난하다. 총선에서는 여전히 격차 해소 문제가 등장하고 있다. 지난 2017년 총선 시 좌파당의 선거강령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적 사회 모델은 양 지역의 격차를 확대의 원인이 되었다. 연방정부는 불공정한 경제 및 사회 정책으로 이를 조장하고 있다. 수년 동안 동독 지역의 경제력은 서독 지역 수준의 불과 72%에 머물러 있다. 동독 지역의 경제구조는 파편화되어 있다. 대기업 본부는 전혀 없다. 2030년에 7%의 인구 감소가 예상된다. 빈곤의 위험에 처한 연금 생활자의 수가 2015년에만 0.7% 증가하여 16%에 달하였다. 이의 주된 원인은 저임금 분야의 확대다.” 이런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은 또 다시 “불이익과 경멸과 결부된다. 독일에서 의사결정권자의 2.8%만이 동독 출신이다. 연방정부 간부의 20%만이 동독 출신이다.”
통일의 주역은 동독 주민이다. 그러나 공직 추방, 재산권 상실, 공사주의 치하에서의 개인별 역량 저하, 새로운 5개주의 경제 및 재정적 취약 등 통일의 부정적인 결과는 모두 구 동독 주민이 떠안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2017년 총선에서 구동독지역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운 극우 정당인 “독일의 대안”이 제2의 정당으로 세를 모았다는 것은 독일 통일의 어두운 그림자의 일면이다. 여전히 통합은 독일의 과제이며 이는 유럽의 평화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런 독일의 경험 그리고 책에서 인용한 많은 자료는 현재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흐름에 귀중한 항해도와 나침반이 될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 역시 역사적이고 국제적인 것이다.
어쩌면 독일의 분단보다 국제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독일이 유럽 중부에 위치하면서 유럽의 동서남북의 가교듯이 우리 역시 동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세력권의 교량적 위치에 있다. 독일이 문화적, 종교적으로 그리고 역사를 공유하는 유럽 중부에 위치한 것과 달리 우리는 다른 문화와 종교를 달리 하는 세력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 19세기까지는 동아시아 유교권 문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 유교권 내에서도 격변기에는 대륙문화와 일본이라는 해양문화가 부딪히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서세동점 이후 세계적 대륙문화와 일본까지 가담한 해양문화가 교차하는 지점이 한반도였다.
냉전 이후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중국의 부상과 함께 한반도는 양대 세력이 교차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이런 조건 하에서 한반도에 평화의 틈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의 운명의 실타래를 풀어나갈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통일에 앞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도 우선 남북 상호 간의 평화에 대한 신뢰 구축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양대 세력 상호간 그리고 여타 세력 간의 한반도 평화에 대한 신뢰와 다짐 그리고 남북한 상 간을 규율하는 각종 협약과 규범의 실효성을 보장할 단단한 국제적인 틀이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독일통일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내부의 정치사회적 불안은 언제든지 평화를 교란할 수 있으며, 이는 국제적 틀을 흔들면서 또 다른 분열의 계기가 되어 새로운 운명의 굴레에 빠질 수 있다. 국내의 안정은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이는 남북에 모두 요구되는 명제다.
1989년 10월 7일 동독이 국내외에 과시한 건국 40주년 군사 퍼레이드는 국가 소멸로 향한 퍼레이드였다. 사회주의 선진국인 일당독재 국가 동독의 내부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이 증명되었다. 이는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에 의한 평화체제의 한 축이 무너졌던 것이다. 당시 동서 진영의 이해 당사국은 이를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동서독의 평화가 무너지면 새로운 대결의 시대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힘의 약화도 있었지만 동서독 문제는 국내적으로는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민주적으로 통일된 독일을 전제로 새로운 평화적 유럽 판을 짜기로 하면서 1989년 11월에 시작된 독일통일이 1990년 10월 3일 완료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해방 공간에서만 필요한 것인 줄 알았던 자기결정권 즉 자결권 행사가 요구될 것이다. 독일 통일에서 국제사회가 합의한 것 중에 중요한 것은 독일 국민의 자결권이었다. 동독 최초로 비밀이 보장된 자유선거를 통하여 민주적으로 구성된 독일민주공화국의 인민의회에서 결의된 통일과 서독 기본법 23조에 의한 가입방식의 통일방식을 동독 국민의 자결권 행사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서독 국민의 자결권이야 이미 기본법 제정과 독일연방공화국 창설 과정 그 후의 자유로운 모든 선거에서 확인된 것이었다.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일 것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73275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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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출시)일자 | 2019년 02월 20일 |
쪽수 | 313쪽 |
크기 |
152 * 224
* 21
mm
/ 463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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