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속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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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보
저자(글)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William G. Sumner, 1840~1910)
1872~1909년까지 예일(Yale)대학교 교수를 지낸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미국 사회학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집단이 공유하고, 사회의 유지·발전에 힘이 되는 ‘습속’(folkways)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으며, 다윈 진화론의 기본 틀을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를 설명하는 데 적용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저술은 [Folkways](1906)이며, 이외에도 [Andrew Jackson as a Public Man] (1882), [What social class owe to each other](1883) 등이 있다.
번역 김성한
전주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관심 분야는 함께 살아가는 삶, 채식, 진화론 등이고, 저서로는 [나누고 누리며 살아가는 세상 만들기], [어느 철학자의 농활과 나누는 이야기], [왜 당신은 동물이 아닌 인간과 연애를 하는가], 역서로는 [채식의 철학], [동물해방], [사회생물학과 윤리], [프로메테우스의 불], [동물에서 유래된 인간], [섹슈얼리티의 진화] 등이 있다.
번역 정창호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거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철학을 공부하였고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하였고, 현재 경기대학교 교직학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려대, 중앙대, 경희대에 출강하고 있다. 역서로는 존 듀이의 [공공성과 그 문제들](이유선과 공역) 등 다수가 있고, 다문화교육, 인성교육 등의 분야에서 다수의 논문과 글들을 발표하였다.
목차
- 제15장 모레스는 무엇이든 올바른 것으로 만들고 또 무엇에 대한 비난이든 방지할 수 있다
제16장 신성한 매음, 아동 희생
제17장 대중적 오락, 공연, 그리고 연극
제18장 금욕주의
제19장 교육, 역사
제20장 생활방식, 덕성 대 성공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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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번호 찾아보기
옮긴이 해제
책 속으로
[옮긴이의 글]
『습속(Folkways)』(1906)은 섬너의 대표적인 저술로, 원문의 분량이 700쪽이 넘는 방대한 문헌이다. 그는 책에서 ‘습속’과 ‘모레스’에 대한 정의로부터 출발하여 노동, 부, 노예제도, 식인풍습, 원시적 정의(正義), 성(性), 결혼제도, 스포츠, 드라마, 교육과 역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회 현상을 진화론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정리, 소개하고 있다. 책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위해 독자들은 그가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해보고자 한 점, 아울러 그가 자유라는 이념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책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점은 습속과 모레스 등 그가 사용하고 있는 핵심적인 용어에 대한 설명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섬너가 각론에 들어가 성이나 결혼 등 구체적인 주제를 설명할 때 적절한 방식으로 스며들어 있다.
책에서 섬너는 인류가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획득하게 된 본성을 전제하면서, 인간이 이와 같은 본성을 충족시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문화가 만들어졌으며, 결국 오늘날과 같은 거대 사회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는 인간이 주어진 환경 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문화가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개념이 바로 습속(folkways)이다. 습속이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에서 유래된 개인의 습관과 사회의 관습”을 말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이 습관적으로 취하는 행동 양식을 말하는데, 섬너에 따르면 인간은 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특성상 인간은 불가피하게 집단생활을 하며,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 집단 성원 전체가 잘 살아남기 위해 집단행동 양식을, 그리고 공동체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습관적인 방법을 개발한다. 바로 이것이 습속인데, 이는 인간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러한 습속이 실질적으로 집단의 안녕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면 ‘모레스’(mores)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모레스는 집단 구성원의 생각과 행동 등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며, 성원들은 이를 받아들이길 강요받고, 이를 어길 경우에는 제재가 이루어질 것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모레스는 단지 옳고 그름의 잣대로서의 도덕규범으로서만이 아니라 언어 습관을 포함해 의식주와 관련한 사람들의 수많은 행동 기준으로 작동하게 되는데, 섬너의 『습속』은 바로 이와 같은 습속과 모레스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인간사의 다양한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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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관통하는 섬너의 근본적인 입장의 적절함은 차치하고라도 미국 사회학의 효시가 된 이 책의 내용은 섬너가 수집한 방대한 민속지와 역사적인 자료를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고 유익한 읽을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습속’이라는 말이 비교적 흔히 쓰이고 있는데, 이와 같은 단어가 최초로 사용되면서 그 정의가 제시되고 있는 저작이라는 점도 이 책의 흥미를 더하는 부분이다. 이와는 다소 다른 차원이지만 역자는 섬너가 ‘사회진화론자’로 분류되면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온갖 비판에 노출되는 것이 적절한지 가늠해 본다는 차원에서도 책을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섬너는 사회진화론자로 분류되면서 이러한 이론에 제기되는 비판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비판이 섬너의 저술이 상세히 분석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 2차 문헌을 통해 흔히 알려져 있는 바를 근거로 비판을 할 뿐, 정작 사회진화론의 본령으로 분류되는 저작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지고 난 후 가해지는 비판이 아님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을 어떻게 정의 내릴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그대로 답습하여 섬너를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번역자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와 정리의 차원에서도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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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어 특유의 난해함, 그리고 동서양과 고금을 오가면서 논의를 전개하는 저자의 박식함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는 역자들의 한계 때문에 이 책이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일부 내용은 미국인 몇 명에게 자문을 구해도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주변 분들의 많은 도움 덕에 이렇게 책의 출간으로 번역을 마무리하게 되어 기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책 내용의 난해함이 일부 번역 문장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있는 듯해 독자들께 죄송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책의 처음부터 7장까지는 김성한이, 8장부터 끝까지는 정창호가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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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분들이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가족의 사랑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실로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역 일에 전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가족으로서의 이런저런 아쉬운 점을 숨긴 채 늘 격려만 해 주는 가족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보낸다. 한국문화사 이지은 과장님의 헌신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출판을 하면서 과장님처럼 꼼꼼하게 교열을 봐준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과장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휴직을 하는 상황임에도 마지막까지 헌신적으로 책의 출간을 책임지셨다. 얼른 건강해져서 다시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날을 기약해 본다. 마지막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신 한국문화사 관계자분들, 그리고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 책의 번역이 관련 분야의 연구와 독자들의 지적 관심을 충족시키는 데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19년 8월
역자 일동
출판사 서평
[저자 서문]
1899년, 나는 지난 10년 혹은 15년 동안 강의에서 사용해온 자료를 바탕으로 사회학 교과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작업을 하다가 문득 ‘모레스(mores)’에 대한 나 자신의 견해를 소개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교과서 어디에서도 이를 언급할 수 없었고, 또 다른 책에서 언급한다 해도 한 장(章) 정도로는 이를 충분히 다룰 수도 없었다. 결국 나는 교과서 작업을 잠시 던져두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습속(folkways)’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습속’과 ‘모레스’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려면 본서 1절, 2절, 34절, 39절, 43절 그리고 66절을 참조하면 된다. 나는 사회학에서 이미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에서 유추하여 ‘습속’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또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단어로 라틴어 ‘mores’를 선택했다. 책에서 나는 이 라틴어 모레스(mores)를 사회 복리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포함된 ‘대중의 용례(usage)’와 ‘전통’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본서 42절 참조). 이는 어떤 권위에 의해서도 조정되지 않으면서 각 개인에게는 이를 따르도록 강제력을 행사한다. 한편 나는 ‘Ethos(에토스)’라는 단어도 친숙하게 만들고자 했다(본서 76, 79절을 볼 것). 이 책 제목을 ‘Ethica’, ‘Ethology’ 혹은 ‘The Mores’라고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지만(본서 42, 43절을 볼 것), Ethics는 이미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다른 용어는 매우 생소했다. ‘습속’도 생소하긴 마찬가지일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 의미는 훨씬 분명하다. 여기서 나는 어떤 습속에 쉽게 충격을 받는 사람이라면 습속에 관한 글을 아예 읽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관습(custom)은 자연의 가르침이다. 이에 뜻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햄릿 4막 7장 마지막) 나는 모든 습속을 진실되게 다루려고 노력했다. 여기에는 우리의 습속과 극단적으로 다른 것도 포함된다. 그러면서 우리의 관례(convention)에 대해서는 그 권위를 인정했고, 응당 받아야 할 존경의 끈을 놓지 않았다.
1장에서 나는 습속과 모레스를 열심히 정의하고, 이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들이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했다. 2장은 습속이 인간의 이해 관심(interests)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습속이 어떻게 작용하고 또한 영향을 받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습속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개인의 습관(habit), 그리고 사회 관습의 총계다. 이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goblinism)과 사신(邪神)에 대한 믿음(demonism), 그리고 운에 대한 원시 관념들과 뒤얽혀 있으며, 이로 인해 전통으로부터의 권위(traditional authority)를 확보한다. 이어서 이들은 후속 세대에게는 규제 원리로 자리 잡게 되고, 사회적 힘(social force)이라는 성격을 갖추게 된다. 습속이 어디에서 유래했고,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습속은 마치 내적인 생명 에너지가 작동하여 성장하듯 성장한다. 이들이 인간의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습속은 힘을 잃고, 쇠퇴, 사멸하며, 결국 변형된다. 이들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개인과 사회가 맡은 일에 대한 이들의 통제력이 크게 강화된다. 이 와중에 습속은 세계관과 살아가는 방침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내고 성장시킨다. 그럼에도 습속은 유기적인 것도,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습속은 관계와 관례, 그리고 제도적 장치로 이루어진 초유기적 시스템이다. 습속은 사회적 특징을 갖추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이들은 우리의 탐구 대상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회적 특징으로 인해 이들은 사회과학에서 탐구해야 할 주요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일단 습속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결론은 반드시 일련의 사례를 통해 정당화되거나, 혹은 분석을 통해 확증된 바에 부합되는 모레스의 작동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정당화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당화가 성공하려면 해당 모레스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해당 사례들의 뚜렷한 영향력과 논쟁적인 가치를 빈틈없이 찾아내야 한다.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는 지면을 넘어서지 않으면서 세부적인 문제들을 적절히 다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제시하는 민속지학적인 사실들은 다른 방법으로 이끌어낸 일반화된 명제를 사후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례가 아니다. 이들은 그러한 일반화된 명제를 이끌어낸 방대한 사실들 중에서 정선(精選)한 것이다. 이외에도 내가 증명하고 보여주려는 계획에 포함한 다른 수많은 매우 중요한 사례가 있는데, 이들은 지면 부족으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사신(邪神)에 대한 믿음, 원시 종교, 그리고 요술(witchcraft)은 이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그 밖에 여성의 지위, 전쟁, 진화와 모레스, 고리대금, 도박, 사회 조직과 계급, 매장 관행, 서약, 금기, 윤리, 미학 그리고 민주주의도 내가 제외할 수밖에 없었던 주제다. 이 중에서 앞의 네 주제에 대해서는 글을 썼고, 조만간 별도로 출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게 주어진 다음 과제는 사회학 교재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예일대학교에서
W. G. 섬너
[옮긴이 해제 중에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윌리엄 섬너의 입장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IV. 『습속』으로 본 섬너의 사회진화론
섬너는 스펜서를 계승하여 그의 입장을 미국에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한 사회진화론자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비판에 따르면 섬너는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진화론을 적자생존의 과정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옳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며, 이와 같은 근본 신념을 바탕으로 각종 차별과 침략 등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평가는 섬너가 스펜서와 다를 바 없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인데, 이러한 비판은 적어도 섬너의 주저인 『습속』에서만큼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섬너는 앞에서 정리한 스펜서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사회진화론에 제기되는 일반적인 비판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습속』에서 그는 습속과 모레스에 대한 정의에서 출발하여 노동, 부, 노예제도, 식인 풍습, 원시적 정의, 성, 결혼제도, 스포츠, 드라마, 교육과 역사에 이르기까지의 폭넓은 사회현상을 스펜서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습속』을 통해 보았을 때, 섬너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스펜서와는 입장을 달리한다.
1) 섬너는 진화가 아닌 ‘습속’ 또는 ‘모레스’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2) 그가 말하는 진화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며, 진화 과정이 곧 발전도 아니다. 이는 단지 사회현상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데 활용하는 설명틀일 뿐이다.
3) 그가 사회변화를 설명하는 데 활용하는 개념은 ‘적자생존’이 아닌 ‘자연선택’이다.
4) 섬너는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5) 섬너는 습속이나 모레스 자체를 선(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섬너의 입장이 이와 같다면 그가 스펜서와 다를 바 없는 사회진화론자로 불리면서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방금 정리한 내용을 섬너의 주저인 『습속』을 통해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사회를 관장하는 힘으로서의 습속 내지 모레스
섬너가 인간 사회와 생물계의 진화를 이야기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진화 자체가 아니다. 스펜서와 달리, 그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삼라만상에 내재된 진화의 힘을 들추어내는 것이 아니다. 『습속』에서의 그의 관심은 사회 변화를 이끄는 힘으로서의 습속과 모레스의 특징을 규명하고, 이의 실재함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이는 것이다. 그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습속’과 ‘모레스’의 흥망성쇠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습속』의 부제인 ‘용례, 매너, 관습, 모레스, 그리고 도덕의 사회학적 중요성’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섬너가 이처럼 습속 내지 모레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서 그가 진화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관심은 진화 자체가 아니라 자연계의 진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는 습속이나 모레스의 진화다. 습속이나 모레스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섬너의 입장은 진화를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문화 결정론자로 일컬어지는 보아스(Boas)의 입장에 가깝다. 양자가 차이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보아스는 문화의 상대성에 매료되어 심지어 문화마다의 공통성이 전혀 없다는 극단적 상대주의적 입장에 도달하지만 섬너는 인간이 가진 공통적인 특징을 인정함으로써 보아스와 같은 입장에까지 이르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개인에게 미치는 문화의 영향, 섬너의 입장에서는 습속이나 모레스의 영향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그래서 문화에 의해 인성이나 품성이 좌우된다는 점을 양자 모두가 강조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섬너는 진화 결정론자보다는 문화 결정론자에 가깝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모레스를 만들 수 없다. 인간은 모레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러한 주장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에게는 미국의 스펜서가 아닌 미국 사회학의 창시자라는 별칭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다.
2.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는 틀로서의 진화
섬너가 말하는 진화는 보이지 않는 추진력을 갖춘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닌, 상식적인 의미에서의 ‘습속’과 ‘모레스’의 흥망성쇠다. 그는 습속이 사회와 그 안에 사는 개인에게 미치는 힘, 습속의 변화 과정 등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자 할 뿐이며, 이를 관장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상정하고 이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는 스펜서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섬너가 말하는 사회는 자연계와 유사한 방식으로 진화가 이루어지지만 그렇다고 양자가 같은 것은 아니다. 습속이 자연계와 다른 방식의 진화를 거치는 이유는 습속이 유기적인 것이거나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현상과는 별개 차원의 사회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관계와 관례, 그리고 제도적 장치로 이루어진 초유기적 시스템에 속해” 있다. 이에 따라 섬너는 양자를 관장하는 같은 진화의 힘을 상정하고 있지 않은데, 심지어 그는 진화론의 이론적 틀을 인간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는 데 차용하고 있을 뿐 그 이상의 역할을 진화에 부과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는 양자 간의 유사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을 하기도 한다. “모레스의 지속성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모레스의 가변성과 변이성(variation)이다. 비록 그 유사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여기서 생명계의 유전과 변이와의 흥미로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진화 개념 활용이 사회 내에서의 다양한 변화나 현상 등을 설명하고자 편의적으로 차용한 데 머물고 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는 형이상학자가 아닌 사회학자로서 진화 개념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섬너는 진화론의 기본적인 이론 틀을 이용해 습속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 머물고 있지, 그 범위를 확장하고 있지는 않다.
3. 최적자 생존이 아닌 자연선택을...
섬너가 스펜서와 다른 또 다른 점은 진화의 기작이 되는 원동력에 대한 견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펜서는 경쟁에서 싸워 이기는 ‘최적자의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고, 이를 정당한 것으로 파악했다. 반면 섬너는 ‘최적자 생존’을 이야기하지 않고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연선택을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1) 그가 ‘최적자의 생존’보다는 ‘선택’이라는 표현과 ‘변이’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 (2) 상황에 따라서, 우연적으로 사회선택이 이루어짐을 강조한다는 점, (3) 진화를 발전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4) 경쟁 외에 협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는 점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섬너가 스펜서의 최적자 생존보다는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에 충실하고 있음은 그가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진화와 관련된 개념들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어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이야기하지 ‘최적자의 생존’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그는 가변성과 변이(variation), 그리고 ‘선택’(selection)을 말하며, 그리고 필연성이 아닌 우연성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스펜서보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의 개념에 충실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사회 진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선택 개념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섬너는 습속이 “인간의 의도나 지혜의 산물이 아니며”, “우연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그는 다윈이 자연선택을 이야기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우연적인 적응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정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얼마만큼 부합되는지가 습속의 존속 여부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습속의 성공 여부는 항상 소기의 목적에 얼마만큼 적절히 적응했는지에 좌우된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삶의 여러 조건에서, 그리고 살아가려고 치루는 경쟁과 연결되어 이루어짐이 분명하다. 삶의 조건은 가변적인 환경 요소에 좌우된다.” 습속은 이와 같은 상황을 적절히 반영하여 모양새를 갖추게 되는데, 여기에서 핵심은 그 과정과 결과의 우연성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일관되게 섬너는 상황에 따르는 습속의 적응 방식이 항구적으로 유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절한 적응 방식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유로 상황에 대한 적응 방식으로서의 습속은 필연적으로 흥망성쇠의 과정을 겪는다. 이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로서의 개체가 우호적인 상황에서 흥했다가 적대적인 상황을 맞으면서 사라지게 되는 경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는 누군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우연히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진화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섬너나 스펜서가 아닌, 다윈이 말하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 충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 번째로 섬너가 최적자의 생존이 아닌 자연선택을 진화의 요체로 간주한다면 그는 진화가 곧 발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데, 그리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습속이 오히려 퇴보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모레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세련되어 간다는 견해(이러한 입장은 모레스가 스스로, 혹은 어떤 고유한 경향성에 의해 그러한 방향으로 진행되어 간다고 가정한다)는 전혀 근거가 없다.” 이러한 모레스는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결과물일 뿐 최적자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며, 이것이 발전 또한 아니다.
이와 관련한 섬너의 구체적인 언급을 두 가지만 인용해보자. 섬너에 따르면 ‘인도주의’는 사람들이 새로운 땅을 획득함으로써, 또한 기술이 진보함으로써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의 힘이 더욱 증진됨에 따라 탄생한 이념일 뿐, 인간이 이러한 힘을 갖출 수 없는 다른 상황이었다면 ‘인도주의’가 아닌 다른 이념이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섬너의 생각에 따르면 인도주의는 하필이면 인류가 특정한 발달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요청되었을 뿐, 어떤 역사적인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그와 상관없이 인도주의가 시대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민주주의에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는 민주주의가 절대적이면서 영원한 진리를 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지구의 인구가 과소하여 사람에 대한 경제적 목적의 수요가 있을 경우”에 요청되는 이데올로기일 뿐 이러한 상황이 바뀔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으며, 그러한 상황에 부합하는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섬너는 진화가 이루어지려면 단지 경쟁만이 아니라 협동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자연이 투쟁과 경쟁의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제휴와 협력은 어떤 경우에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협동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사람 간의 이익이 지나칠 정도로 충돌하면 모두가 실패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고, 둘째, 그들이 제휴하여 협력하면 자연에 대항하는 노력을 더욱 강력한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섬너는 이러한 상황에서의 협력을 ‘적대적 협동’(antagonistic co?peration)이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협동은 “더욱 큰 공동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결합하면서 이루어지며, 이렇게 하면서 세세한 이익 충돌이 억제된다.”
만약 지금까지 정리한 내용이 섬너의 입장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면 우리는 섬너가 ‘사회’의 진화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스펜서 쪽에 가까운 면도 있지만 사회의 진화를 자연선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윈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차별의 논리?
이처럼 섬너가 다윈의 자연선택 개념을 채택하여 사회의 변화 추이 등을 설명한다면 그가 각종 차별과 약육강식 등의 논리를 정당화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이는 자연선택을 받아들이는 데 따른 논리적 귀결로서의 그의 주장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국가에 속하는 사람은 ‘그 국가’를 혹은 군국주의, 상업주의, 혹은 개인주의를 신봉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다른 나라 사람은 감정적이고, 신경질적이며, 미사여구를 좋아하고, 집단적 자만심으로 가득하다.”라고 하면서 쇼비니즘을 비판하고, “1898년 미국의 대중은 미국이 필리핀 군도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곳의 지배자가 되길 원했다. … 권력의 정당성을 지탱하는 원천으로서의 위대한 주의(主義)가 순식간에 밟혀 뭉개졌다.”라고 주장하면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판하며, “주인 때문에 아기 엄마가 된 노예 여성에 대한 이슬람 율법은 대부분의 기독교인을 부끄럽게 하는 규정 중의 하나다.”라는 주장을 통해서는 기독교중심주의 내지 자문화중심주의의 잘못을, “어느 한 집단도 다른 집단을 자신의 모레스로 개종할 합리적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 어떤 집단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습속이 다른 집단의 습속보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으로는 모레스나 습속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약육강식과 차별 등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데, 이는 그가 “우리는 선이고 타인은 악이라는 주장은 절대로 참이 아니다”라고 밝히는 데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습속』에서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듯이 보이는 대목 중의 하나는 그가 노예제를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듯한 주장을 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예제로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고, 짐수레 끄는 동물 사육으로 노예들의 지위가 상승했다.” “노예 자신의 바람과 무관하게 그를 무조건 내쫓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인도주의적 견해는 분명 합당하지 않다.”
하지만 노예제에 전반적인 입장을 통해 보았을 때 섬너는 노예제에 분명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다. “노예제는 탐욕과 허식에서 탄생한 만큼 사람들의 기본 동기에 부합되었고, 곧바로 이기심과 다른 근본적인 악덕과 뒤얽히게 되었다.” “우리는 노예제가 서비스를 약속했지만 결국 주인이 되어버린 끔찍한 악마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등의 주장은 섬너가 노예제를 어떻게 파악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그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에 대한 적절한 견해를 보이려면 그가 옹호하는 듯한 노예제에 관한 주장이 ‘특정 환경 속에서 나타난 현상에 인과적 설명과 그에 따른 결론’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노예제가 발생하게 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있으며,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여 그 적절성을 판단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섬너는 “노예제가 문명사에서 좋은 역할을 했다고 해서 노예제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전후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노예제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경우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예제가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는 노예제가 정당하다고 하기보다는 특정 상황에서 노예제가 그 시대의 상황을 타개해 나갈 방법으로 부득이하게 노예제가 활용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섬너는 습속을 통틀어 일관되게 이러한 견해를 보인다. 가령 그는 “일반적으로 낙태, 유아살해, 그리고 노인살해는 개인의 직접적인 이기심 때문에 시행된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사회 복리가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이들 관행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러한 관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섬너가 생각하기에 현상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도모하면, 우리는 이들에 인간의 사악한 측면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더욱 커다란 재앙을 피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섬너가 스펜서 등의 사회진화론자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적 침략 등을 정당화하는 이론가로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습속이나 모레스가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그의 저서에서 눈에 띄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는 무엇보다 방해꾼들에게서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다시 말해 그냥 혼자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진화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이 섬너에게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섬너가 진화 과정에 놓여 있는 습속이나 모레스 자체가 선(善)이요 정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5. 진화=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보면 섬너는 습속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러한 추이는 우연의 산물이지 필연 법칙의 소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와 같은 흥망성쇠 자체가 습속의 발전을 함의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가 진화 자체를 선이나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섬너에게서 ‘진화’가 말 그대로 ‘진화 자체’를 이야기하는지, ‘진화 과정의 산물’을 말하는지, 아니면 ‘진화를 이끄는 힘’을 말하는지부터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섬너가 진화 자체를 이야기하면서 이를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만약 섬너가 사회의 진화 자체를 선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사회현상을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에 정당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사회의 진화는 어떤 경우에도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섬너는 습속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보이지는 않는다. 앞에서 언급된 여러 인용문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기존의 사회현상에 비판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다음으로 ‘진화 자체’를 ‘진화의 산물’, 다시 말해 이를 진화의 산물로서의 습속이나 모레스로 파악하고, 이들을 선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을 고려해보자. 섬너가 습속 내지 모레스가 진화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이들이 진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진화 과정을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습속이나 모레스가 선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진화를 매개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해서 진화의 산물로서의 특정 동물을 선하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진화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그 결과로서의 산물을 선하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남은 것은 섬너가 ‘진화를 이끄는 힘’을 진화 자체로 생각했을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섬너가 진화를 이끄는 힘으로서의 습속이나 모레스를 선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해석하면 이들은 적어도 우주의 변화를 관장하는 힘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이는 자연계의 진화를 관장하는 힘마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습속이나 모레스는 오직 인간 사회에서만 확인되는 사회현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섬너는 습속이나 모레스가 우주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오직 사회의 진화에만 관여한다.
이와 같은 문제가 있음에도 섬너가 ‘사회’ 진화를 이끄는 힘인 습속 내지 모레스가 선하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을 고려해보자. 만약 섬너가 사회 진화를 추진하는 힘으로서의 습속이나 모레스를 그 자체로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섬너가 사회 진화론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 다시 말해 진화 내지 진화를 이끄는 힘 자체를 선이나 악이라고 생각했다는 비판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습속과 모레스 중에서 섬너가 그 자체로 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후보는 습속보다는 모레스다. 물론 언뜻 보기에 섬너가 습속이 선이라고 주장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섬너는 “습속은 옳다”, “습속은 참이다”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들은 섬너가 습속 자체를 선이라고 생각했다고 읽힐 수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인데, 그 이유는 그가 습속은 ‘옳다’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상황에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일반적인 행동 방식들’을 언급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냥을 할 때, 아내를 구할 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낼 때, 질병을 치료할 때, 망령을 경외할 때, 동료나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출정 길에 오를 때, 회의를 할 때의 행동 등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대한 올바른 방식이 있다.” 이와 같은 올바른 방식은 특정 상황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편의적인 것이지 결코 도덕적인 옳고 그름은 아니다. 이들은 습속이긴 하지만 그 자체를 ‘도덕적인’ 선으로 판정할 수 없는 것이다.
섬너가 습속을 선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일부 습속을 나쁜 것으로 판정 내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습속이 이성적 혹은 윤리적 검토의 대상이 되면, 이들은 더 이상 소박하고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이때 우리는 이들이 조악하고, 터무니없으며, 적절치 못했던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습속이 선이 아니라면 모레스는 어떠한가? 섬너의 모레스에 대한 정의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모레스를 선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참됨과 옮음이라는 요소가 복리에 관한 교의로 발전하게 되면, 습속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 습속은 추론을 제시할 수 있게 되고, 새로운 형태로 발전을 이루며, 인간과 사회에 건설적인 영향력을 널리 발휘하게 된다. 우리는 이들을 모레스(mores)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은 습속을 강제로 따라야 하고, 습속은 사회생활을 지배한다. 이 경우 습속은 참되고 옳은 것으로 보이며, 복리를 지향하는 규범으로서의 모레스로 부상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섬너가 모레스가 곧 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밖에 섬너가 “한 시대와 장소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들 자신의 모레스가 항상 좋은 것이며, 자신들이 받아들이는 모레스의 좋고 나쁨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채택되고 있는 모레스 안의 모든 것은 그 시간과 장소에서는 정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모레스는 무엇이든 올바른 것으로 만들고 또 무엇에 대한 비난이든 방지할 수 있다”와 같이 주장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그가 모레스 자체를 선한 것으로 보았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습속에 제기한 의문과 마찬가지로, 섬너가 모레스를 곧 선이라고 생각했는지에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마녀 박해는 모레스의 극단적인 어리석음, 사악함, 그리고 터무니없음을 보여준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가 마녀 박해를 모레스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박해를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모레스가 어떤 경우에도 선임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섬너의 태도를 모순적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떻게 모레스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정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녀 박해를 비판할 수 있을까? 마녀 박해는 특정 시대의 모레스이고, 이에 따라 그 자체가 선으로 파악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와 같은 일관되지 못한 태도는 섬너가 모레스 자체를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레스를 수용하고 있는 사람이 이를 정당하거나 선하다고 ‘생각’할 따름이며, 이에 따라 당대에 받아들이는 모레스가 ‘실제로’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이해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 마치 과거의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었지만 그것이 옳지 않았듯이, 설령 특정 시대 사람들이 모레스 자체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해도 그것 자체가 모레스의 ‘실질적인’ 정당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섬너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볼 수 있다. ‘설령 당대의 사람들이 모든 모레스가 선하다거나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모든 모레스가 ‘실제로’ 정당한 것은 아니며, 모레스 중 일부만을 그렇게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섬너가 마녀 박해도 ‘설령 모든 사람이 당대의 모레스인 마녀 박해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어도 그러한 박해가 실제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이는 비판적인 통찰을 통해 그 어리석음과 사악함 등이 드러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해석하면 우리는 섬너가 모레스가 곧 선이 아니라 모레스 일부를 선이라고 생각한다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섬너가 주장하는 바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섬너는 모든 모레스를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섬너는 진정으로 선한 모레스와 그렇지 않은 것을 선별해내야 하며, 이를 위해 치열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는 현행 모레스의 특정 부분에 저항하려면 용기를 가지고 분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섬너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의 비판 능력이다. 그는 이러한 능력을 통해 모레스를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전통적인 모레스에 대한 자유롭고 이성적인 비판이 사회 복리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섬너에게 이러한 비판 능력을 이용해 우리가 진정한 선이라고 생각해야 할 모레스가 무엇인지, 이러한 생각을 근거 짓는 기준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물으면, 그는 이 모든 것의 답을 당대의 습속이나 모레스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구체적인 답변이 무엇인지를 떠나 적어도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섬너가 사회 진화의 엔진인 습속이나 모레스 자체를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본정보
ISBN | 9788968178108 | ||
---|---|---|---|
발행(출시)일자 | 2019년 10월 10일 | ||
쪽수 | 306쪽 | ||
크기 |
159 * 231
* 27
mm
/ 572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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