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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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지금 이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저 너머의 세계를 추앙한다. 이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탐구는 한 권의 시집으로 좁은 길을 내고는 ‘길, 묘연’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 그 추상적인 표지판은 그곳에 들어선 우리로 하여금 더욱 마음껏 길을 잃도록 안내한다.
작가정보
작가의 말
세상은 내게 작은 씨앗 한 알로 내 삶의 시, 푸른 싹을 틔우게 한다. 나는 이 문단 한 줄을 써 놓고 고민에 빠졌다. 우리 집 겨울 마당에는 생명의 온기라곤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는데 나는 곧 푸른 기운들이 일어서서 초록의 숨을 틔우는 것처럼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쓰는 단어가, 내가 쓰고 있는 문장 한 줄이 다른 사람들 가슴속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소망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아직 생명의 눈도 뜨지 않는 겨울 마당, 메마른 잔디를 보면서 곧 푸른 초록으로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것이 곧 나의 글쓰기의 시작임을 잘 알면서도 난 쉽게 한 문단의 글을 쓰고는 밖만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다. 나의 시 쓰기는 잘 산다는 것과 잘 살아왔다는 것의 차이 즉 그냥 주어진 삶과 노력해서 얻은 삶의 질, 아직도 나는 그 중간쯤에서 늘 길을 잃고 방황을 하고 있다. 작은 씨앗 하나 손에 움켜쥐기 위해 살아왔던 시간과 노력 그리고 열정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내게 참 벅찬 우주였다고 한다면 내가 쓰는 시라는 우주도 참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물이라는 것에 나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나 스스로 단어의 좁은 감옥에 갇혀 있다 보면 한 편의 시를 쓰는 일도 잠이 든 생명의 숨을 틔우는 일이라고 자부하며 즐겁게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겨울 마당엔 보이지 않는 생명들이 무수히 많이 숨어 있다. 봄이 오면 하나둘 겨우내 참았던 숨길을 틔우며 은빛 물길을 따라 빛나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나도 내 속에 숨어 있는 생명의 보석 같은 단어들을 꺼내어 올해는 참으로 눈부신 봄 햇살 아래 빛나는 시 한 편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2020년
조덕자
목차
- ● 시인의 말
제1부
오래전 나는 떡갈나무 아래 서 있었다 10
서리 맞은 뽕잎을 따다 12
냄새 지우기 13
고래의 집에 가보았는가 14
흠 16
그물, 그리고 안과 밖 17
영양가는 길 18
꼬리박각시나방 20
벽화를 그리다 22
가을, 장안사 24
국화빵 25
때론 삶도 클릭할 수 있다면 26
목련 빛, 엄마의 꽃 27
분리수거 하는 날 28
출근하는 여자 29
익명의 바다 30
제2부
일곱 개의 붉은, 힘 32
과녁에 꽂힌 말 34
입안에 숨어들다 35
지금은 칩거 중 36
고장 난 청소기 38
꽃잎이 여는 소리 39
이사 오는 날 40
봄, 상흔록 41
내 삶의 시계 42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다 43
생生의 물소리 44
가을, 길을 잃다 45
길, 묘연猫緣 46
길, 묘연猫緣 2 48
길, 묘연猫緣 3 50
텃밭시계 51
제3부
푸른 낙인 54
오십의 바다 55
좋겠다 56
중독 58
생의 무게 59
1948, 부라더미싱 60
나이 61
엄마의 빛나던 시간 62
흥정 63
신호등 앞에서 64
흙을 찾는 시간 65
대나무 숲에 묻어둔 이야기 66
땅속에서 보내온 편지 67
비 오는 바다에서만 울 수 있었다 68
상처 혹은 깊은 블루홀 70
삶에 수를 놓는 일 71
제4부
죽음의 향기 74
시간의 길 찾기 75
소리의 감옥 76
담쟁이 78
식구 79
내 고향은 80
외출 82
미안하다 84
매미소리 86
집을 짓는 일 87
봄, 미나리 88
새우젓 항아리 90
후크선장과 피터 팬 91
국화꽃 밥 92
폭우가 쏟아지는 새벽에 94
추억의 한마당 95
쓰고 싶지 않은 자소서 96
▨ 조덕자의 시세계 | 신수진 97
추천사
-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진실을 모르며, 깨달음을 놓쳤던 어리석은 자신을 참회하는 시가 조덕자 시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이다. 시인의 섬세한 촉수는 낮은 곳에서 너무 작은 목소리밖에 낼 수 없는 존재들이 타전하는 이 모스 부호를 해독하고, 세상의 덫을 뛰어넘어 “푸른 바다” “푸른 사유”(「그물, 그리고 안과 밖」)까지 확장된다.
책 속으로
길, 묘연(猫緣)
지난겨울 옥상 창고 귀퉁이에 숨어든 길냥이 한 마리
영역싸움에 지쳤는지 내가 들여다봐도 눈만 끔뻑
커다란 눈 속에는 허공 같은 하늘이 들어앉아 있었다
가끔 길 잃은 박새들이 빨래 건조대에서 자고 가는 추운 겨울밤
도시의 밤하늘은 거대한 그물 같아서 새들이 자주 길을 잃고 날아들었다
창고 한쪽이 녀석의 영역이 되고 나서 새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내가 놓아둔 붉은 밥그릇 속 사료들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녀석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자리
개미들만 햇살 아래 잔치를 벌였다
봄, 여름 내내 마당 울타리 수풀이 무성하더니
두 마리 새끼를 데리고 녀석이 나타났다
뜨거운 내 마음까지 얹어서 다시 밥그릇이 채워지고
이번엔 옥상이 아닌 마당 한 귀퉁이가 녀석들의 영역이다
허공 같던 눈 속에는 아직도 경계심이 가득하지만
햇살 바른 날 아침 보은의 뜻인지
생쥐 한 마리 대문 앞에 얌전히 물어다 놓았다
/
내 삶의 시계
봄날, 이십 년을 살던 아파트를 떠나려고 하니 방 문턱에 걸린 세월의 흔적이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살면서 자기 색 잃어버린 문턱엔 내 얼굴 주름살 같은 남루한 삶, 허연 더께 덕지덕지 앉아 물기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본다 후줄근해진 벽지 위 내 아이들이 그어 놓은 하루 생활 계획표, 연필 자국 틈 사이로 생(生)의 키가 자라고, 그 틈 사이 내 삶 한 자락도 끼여 펄럭이고 있다 내 욕망처럼, 여름날 방충망 타고 오르던 나팔꽃 덩굴, 그쯤에서 멈추었는지 바삭 말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다 그 순간, 언젠가 마음이 허허로운 날 그린 벽지 위 내 그림 속 붉은 연꽃이 소리 없이 발을 뻗어 거실 바닥으로 내려선다 그 발자국에 내 삶이 푸르게 살아나고 덩달아 메말랐던 내 삶의 시계 속으로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문득,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들이 더욱더 환하게 불 밝히는 봄날,
/
상처 혹은 깊은 블루홀
비 오는 겨울 바다에 와서 비로소 걸어온 길 뒤 돌아본다
살아오면서 내면에 숨어 있던 수많은 상처와 흔적
이기(利己)로 뭉쳐진 옹이, 뒤틀린 감정들까지 고스란히
길 위에 놓고 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반성의 죽비 한대
나 스스로 세상 안으로 걸어 들어가 가시 세우며 살았던
삶의 치열했던 시간, 때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블루홀이라고 믿고 싶었던 그 푸른 구멍이 입을 열어
남루하고 고루한 내 시간을 풀어 놓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살아온 멍들고 지친 시간 들킬까 봐
늘 조바심으로 종종거리며 살아온 세월과 이기심
그동안 세상 안과 밖 소통에 눈멀고 귀 닫았던 나는
마음을 묶고 있던 질긴 끈 하나를 풀어 겨울 바다에 놓아 보낸다
그리고 젊은 날의 오만, 잠그고만 살았던 골방 빗장을 풀어내니
희망의 작은 씨앗 하나 내 마음에서 뛰어나와 푸르게 싹을 틔운다
문득, 사유의 바다 나는 새로운 블루홀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출판사 서평
이 책은 서평이 없습니다.
기본정보
ISBN | 9788961042710 | ||
---|---|---|---|
발행(출시)일자 | 2020년 10월 15일 | ||
쪽수 | 111쪽 | ||
크기 |
131 * 211
* 12
mm
/ 164 g
|
||
총권수 | 1권 | ||
시리즈명 |
현대시 기획선
|
Kl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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