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말하였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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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작가정보
저자 고규홍은 나무칼럼니스트. 인천에서 태어나 서강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열두 해 동안 일간신문의 기자 생활을 한 뒤, 나무를 찾아 떠났다. 나무가 건네는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엮어 세상에 전한 게 14년째다. 『이 땅의 큰 나무』를 시작으로, 『절집나무』 『알면서도 모르는 나무 이야기』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나무여행』을 펴냈다. 나무를 노래한 시에 감상글과 사진을 더해 『나무가 말하였네 1·2』를, 나무 사진을 모아 『동행』을,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이야기를 모아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나무』(전 3권)를 펴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된 천리포수목원의 나무 이야기를 모아 『천리포에서 보낸 나무편지』도 냈다. 14년 답사길에서 찾아낸 경기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그의 지정 신청으로 천연기념물 제470호에 지정됐다. 마찬가지로 그가 세상에 알린 경남 의령 백곡리 감나무도 천연기념물 제492호로 지정됐다. 2000년 봄부터 ‘솔숲에서 보내는 나무편지’라는 사진 칼럼을 홈페이지 ‘솔숲닷컴’을 통해 나무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지낸다. 천리포수목원의 감사, 한림대와 인하대 겸임교수이기도 하다. ‘은퇴’가 허락된다면, 오전에 희랍어를 공부하고 오후엔 지는 석양 바라보며 첼로를 연주하는 게 꿈이라 한다.
목차
- 책을 내면서
1.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세상의 나무들 │ 정현종
한 호흡 │ 문태준
생명의 노래 │ 김형영
먼나무 │ 박설희
두 개의 꽃나무 │ 이성복
나무는 단단하다 │ 황지우
산수유나무 │ 이선영
나무와 햇볕 │ 오규원
갈대 │ 신경림
떨어진 꽃 하나를 줍다 │ 조창환
그늘 학습 │ 함민복
꽃에 대하여 │ 배창환
풀꽃 │ 나태주
밤 노래 4 │ 마종기
바람 나뭇잎 │ 고형렬
쑥부쟁이 사랑 │ 정일근
11월의 숲 │ 심재휘
나무와 하늘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하늘 │ 이하석
도라지 꽃 │ 정한용
나무 성자聖者 │ 배한봉
침묵 │ 백무산
몸을 던지다 │ 김형술
등나무 │ 강수니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 최두석
식물도감을 던지다 │ 이덕규
2. 대숲 바람 소리 속에는
석산꽃 │ 박형준
메타세쿼이아 │ 정한아
무화과 │ 이은봉
투구꽃 │ 백미혜
연잎 - 만남의 신비 │ 김영무
나무의 수사학 1 │ 손택수
모감주나무 │ 온형근
미루나무 연가 │ 고재종
멸종에 관한 단상 │ 한영옥
가을 숲 속에서 │ 김일영
낙엽 - 멀구슬나무 │ 김윤숙
대숲 바람 소리 │ 송수권
우리나라 꽃들에겐 │ 김명수
롱 테이크 │ 김요일
달개비 꽃 │ 박종국
상수리나무 │ 최동호
그리운 찔레꽃 │ 하순명
미시령 노을 │ 이성선
연꽃 │ 오세영
물푸레나무 │ 김태정
무궁화 │ 이백
그 섬의 이팝나무 │ 김선태
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 │ 김태형
작은 풀꽃 │ 박인술
자귀나무 아래까지만 │ 권현형
회화나무 그늘 │ 이태수
고딕 숲 │ 송재학
허화虛花들의 밥상 │ 박라연
3.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누가 우는가 │ 나희덕
들국화 │ 곽재구
시월 │ 이문재
흔들릴 때마다 한잔 │ 감태준
능소화 │ 문성해
나이테를 위한 변명 │ 나석중
어디서 또 쓸쓸히 │ 최승자
감나무에서 감잎 지는 사정을 │ 오태환
꿈꾸는 가을 노래 │ 고정희
가을 하늘 │ 김광규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길상호
나무의 철학 │ 조병화
단식하는 광대 │ 진은영
나와 나무와 │ 조향미
순례 │ 박진성
허공이 키우는 나무 │ 김완하
벼락 키스 │ 김언희
입추 │ 조운
새 옷 입는 법 │ 문정희
고향으로 돌아가자 │ 이병기
낙엽 │ 안경라
11월 │ 김남극
석남사 단풍 │ 최갑수
나무 │ 이형기
순간의 거울 2 - 가을 강 │ 이가림
봄, 여름, 가을, 겨울 │ 이경임
천년 수도승 │ 여자영
책 속으로
땅에서 하늘 높이 솟구친 나무는 제 몸을 하늘에 온전히 내어놓는다. 가을 하늘이 맑디맑은 것은, 나무가 하늘에 닿은 나뭇가지로 부지런히 쓸어낸 까닭이다. 하늘을 비질하는 나무는 힘이 세다. 구름에 나무가 비질한 흔적이 담겼다.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 건 푸른 영혼을 하늘에 덜어주어서다. 바람 끝에 날리는 낙엽은 하늘을 쓸어내며 온 힘을 다한 나무의 살덩이다. 나무는 너그럽다. 잎 떨구고 궁핍해진 나무는 온 가지에 생명의 등불을 내걸고 겨울을 날 채비에 든다. 나무의 덕을 먹고 사는 사람은 이 가을에 행복하다.
―배한봉의 시 「나무 성자聖者」 감상글(67쪽)에서
상사화처럼 석산도 잎 없이 훌쩍 올라온 꽃대궁 끝에서 꽃을 피운다. 우리말로는 ‘꽃무릇’이라고 부른다. 붉은 꽃잎 사이로 삐죽이 뻗어 나온 꽃술이 아슬아슬하다. 아무 기별도 없던 꽃무릇은 가을 내음 풍겨오면 순식간에 50센티미터까지 꽃대궁을 키운다. 그 끝에 피어난 꽃은 화려하지만 여느 꽃보다 서글프다. 잎사귀가 없어서다. 꽃 져야 올라올 잎은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눈보라 맞으며 긴 겨울을 나야 한다. 꽃을 만나지 못해도 핏줄이 하나인 이유다. 지금 땅속에서 꿈틀거릴 잎사귀의 장한 아우성이 고맙다.
―박형준의 시 「석산꽃」 감상글(85쪽)에서
기다란 꽃술을 쭈욱 내밀고 달개비 꽃이 핀다. 꽃 중에는 흔치 않은 새파란 빛이다. 꽃잎과 꽃받침이 하나로 붙어서 ‘꽃덮이’ 혹은 ‘화피花被’라고 부르는 두 장의 파란 날개가 나비의 그것을 닮았다. 닭의 벼슬을 닮아서 달개비, 닭장 곁에서 잘 자라서 닭의장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아침에 피어나는 닭의장풀 꽃은 초록의 숲에 점점이 박힌 파란 보석이다. 안타깝게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한나절이다. 영롱한 꽃이어서 더 허무하다. 곧 시들어 떨어질지언정 화려함을 놓지 않는 달개비 꽃의 운명이 얄궂다.
―박종국의 시 「달개비 꽃」 감상글(121쪽)에서
수국은 가짜 꽃을 피운다. 진짜 꽃보다 예쁘다. 새파란 진짜 꽃만으로는 생식의 환희를 누릴 수 없어서다. 생식을 위해 피우는 꽃이 가짜 꽃, 허화虛花다. 진짜 꽃은 너무 작아서 벌, 나비를 부르지 못한다. 허화를 피워서 그들의 눈에 들어야 한다. 허화는 진짜에게 모자란 1퍼센트를 위해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번식의 쾌락을 내려놓아야 한다. 다 버리고, 오직 아름다워야 한다. 스스로 태어날 수도 죽을 수도 없다. 생존 자체가 가짜인 탓이다. 환희가 배제된 아름다움은 고통이다. 고통으로 태어난 허화의 생이 서럽다. 허화는 가짜 꽃이지만 진짜를 진짜로 키운다. 생을 대신 완성하는 진짜 꽃이다.
―박라연의 시 「허화虛花들의 밥상」 감상글(155쪽)에서
찰스 다윈도 지구 상에 꽃 피는 식물이 갑자기 나타난 과정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태곳적 침묵을 깨뜨리고 불현듯 솟아오른 꽃의 탄생은,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들의 세상이 출현할 조짐이었다. 가을 들녘에 피어난 산국, 감국, 쑥부쟁이, 개미취의 꽃은 사람 사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게 한다. 들에 피어 그저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이다. 오래 기다려온 사랑의 꿈처럼 절벽 끝에 피어난 꽃 한 송이에서 사람의 내음을 찾는 건 어쩔 수 없으리라. 끝끝내 오래된 추억에 매달리게만 되는 가을이다.
―곽재구의 시 「들국화」 감상글(163쪽)에서
푸르던 잎, 붉은 노을 모두 떠남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길 위엔 저 홀로 반짝이는 햇살 한 줌만 꿈틀거리며 겨울을 일으킨다. 바짝 마른 풀잎 위에 바람 따라 날아온 낙엽이 내려앉는다. 개울 소리 따라 길 위를 방랑하던 돌멩이도 침묵에 들었다. 인생의 무게를 등에 지고 언덕을 오르는 노인의 굽은 허리춤으로 시린 바람이 스친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침묵이다. 도톰한 동백나무 잎 위에서 반짝이던 햇살이 정처 없는 나그네의 발걸음에 앞장선다. 길 위엔 오직 햇빛과 나무뿐이다. 길섶의 목련 가지 끝에 보송한 솜털에 싸인 꽃봉오리가 향긋이 부풀어 오른다. 봄을 기다리며 벌써 돋아난 목련 꽃봉오리가 서글퍼지는 입동 아침이다.
―조향미의 시 「나와 나무와」 감상글(191쪽)에서
사람보다 먼저 나무가 있었다. 처음 뿌리 내린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건 그의 운명이다. 나무를 찾아든 짐승은 잎을 갉아먹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렸다. 언제나 도도하게 하늘로 치솟아 오르지만, 나무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홀로 슬프다. 사람도 나무를 찾아왔다. 사람은 머무르는 자리마다 나무를 심으며 수천의 세월을 보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라도 나무 없는 곳은 없다. 나무가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사람도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다. 비바람, 눈보라 몰아쳐도 나무는 꼼짝 않고 제 속살에 차곡차곡 세월을 쌓는다. 말없이 서서 천년의 역사를 담는다.
―이형기의 시 「나무」 감상글(215쪽)에서
출판사 서평
“옴짝달싹 못하는 심장 속으로 생명의 박동이 파고든다”
- 이백에서 문태준까지, ‘나무 대변인’이 읽은 81편의 ‘나무-시’
12년 동안 해오던 중앙 일간지 학술기자 일을 관두고 무작정 나무를 찾아 헤맨 지 14년째. 지금까지 자동차로 달린 거리만 56만 킬로미터. 지구 14바퀴 거리다. 경유 값으로 쓰는 돈은 한 달에 60~70만 원. 버려지다시피 했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물푸레나무를 찾아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도록 만든 사람. 나무칼럼니스트 고규홍의 행보다. 열린 감수성으로 나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어 ‘나무 대변인’이라고 불린다.
전작 『나무가 말하였네』(2008, 마음산책)를 통해 인간과 나무가 교감하는 순간의 진한 감동을 전한 그. 『나무가 말하였네 2』에서는 이백, 조운에서 문태준, 나희덕을 아우르는 ‘나무-시’ 81편과 그 시를 통해 만난 나무와 사람,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그루 나무와 시 한 편으로 얻는 삶의 지혜가 한층 깊어졌다. 나무칼럼니스트만의 독자적인 해설과 직접 찍은 사진은 문학을 통해 식물을 알고, 식물을 통해 문학을 알아 문학적인 감성과 생태적인 감수성을 키우게 한다. ‘나무 교양서’로서 손색없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문학과 자연을 모두 느끼고 누릴 수 있다.
“쉽게 살고 싶지 않다. 저 나무처럼”
- 나무의 무한한 관용에 기대어, 나무에게 길을 묻다
1부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에서 저자는 생명의 싱그러움을 말한다. 그는 꽃잎의 속삭임을 노래한 김형영의 시 「생명의 노래」를 읽으며, 크로커스 꽃이 피는 것을 ‘아가의 옹알이’라 느낀다. 엄마의 오랜 기다림 앞에 아가가 건넨 옹알이처럼, 꽃도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생명의 노래를 속삭인다. 오래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노래다. 순수한 영혼의 만남”이다. 고형렬의 「바람 나뭇잎」을 읽으면서는 “세상살이에 흔들릴 때마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바라보게 되는 건 분명 사람의 유전자에 나무의 흔적이 담긴 때문이리라” 하는 묘한 일체감을 느낀다. 정현종의 「세상의 나무들」은 그로 하여금 한 자리에서 늙어가며 더 아름다워지는 나무, 그리움으로 생명의 샘을 채우는 나무를 생각하게 한다.
세상의 나무들은 늙어가며 더 아름다워진다. 나무의 몸엔 늙어도 쇠하지 않는 탄력이 가득하다. 하늘 향해 곧추선 줄기는 수액으로 촉촉하다. 줄기 안에 든 생명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 나무는 스스로 제 사랑을 찾아 나설 수 없기에 그리움으로 생명의 샘을 채운다. 나무가 서 있는 그곳에 첫사랑의 기운이 팽창하는 건 그래서다.
- 정현종의 시 「세상의 나무들」 감상글(17쪽)에서
2부 ‘대숲 바람 소리 속에는’에서 그는, ‘나무의 삶’을 통해 인간의 삶을 반추한다. “떠돌이 빗방울들 연잎을 만나 / 진주알 되었다”로 시작하는 김영무의 「연잎」을 읽으며, 그는 연잎의 소수성疏水性을 생각한다. 길쭉이 올라온 잎자루의 보이지 않는 진동 때문에, 물은 연잎을 적시지 않고, 연잎은 물을 깨뜨리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이렇듯 서로를 품어 안으면서도 구속하여 해치지 않는 것일 터이다. 이은봉의 「무화과」는 그에게 중년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꽃 없이 맺은 열매여서 무화과無花果다. 사랑 없이 맺는 열매는 세상에 없다. 무화과나무에서도 꽃이 핀다. 보이지 않을 뿐이다. 무화과나무는 오월쯤, 잎겨드랑이에 도톰한 돌기를 돋운다. 영락없는 열매지만 꽃이다. 꽃은 주머니 모양의 돌기 안쪽에 숨어서 피었다. 그래서 은화과隱花果라 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메추리알만큼 키운 꽃 주머니는 그대로 열매가 된다. (…) 꽃 피우지 않고, 누가 알아보지 않아도 좋다. 비바람 몰아쳐도 수굿이 열매 맺는 중년의 삶이 그렇다.
- 이은봉의 시 「무화과」 감상글(91쪽)에서
나무와 꽃은 저자의 스승이다. 석산은 박형준의 「석산꽃」에 나오듯 “한 몸속에서 피어도 /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 잎 없이 꽃이 핀다. 꽃 져야 올라오는 잎은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긴 겨울을 난다. “나는 핏줄처럼 / 당신의 몸에서 나온 잎사귀 // 죽어서도 당신은 / 붉디붉은 잇몸으로 나를 먹여 살린다”라는 시구를 읽으면, 한겨울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초연함, 매해 힘겹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한결같음과 의연함에 숙연한 마음이 든다. 3부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은 평생 한 자리를 지키며 나고 죽는 나무의 숙명과, 그럼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다른 생명체와 더불어 사는 나무의 관용에 대한 헌사다.
살아 있는 동안 아프지 않은 생명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나무는 모든 아픔을 이겨냈다. 부러지고 찢긴 가지 적잖아도 나무는 상승의 본능으로 지상의 조건을 초월했다. 하늘 끝에 가지를 걸어 올린 지리산 금대암의 전나무. 육백 년 동안 나무는 오로지 태양이 낸 빛의 길을 따랐다. 가을에도 푸른 잎 떨어뜨리지 않는 그의 자태는 견고하다.
- 조병화의 시 「나무의 철학」 감상글(187쪽)에서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건 나무가 긴 세월 동안 겪어낼 고통까지 달게 받겠다는 마음이다. 나무는 꼼짝 않고 한 자리에 붙박여 수천의 세월을 보낸다. 곁을 지나는 누구에게라도 그늘을 내준다. 누구라도 품어 안는 데 인색하지 않다. 비바람, 눈보라 피하지 않고 말없이 스쳐 보내야 한다. 그래서 푸른 하늘 아래 나무는 외롭고 고단하다. 희끗희끗한 저승꽃, 퉁퉁 불어터진 옹이를 잔뜩 매달고도 나무는 죽지 않는다. 백척간두에서도 진일보하는 수도승의 용맹 정진을 닮았다. 나무의 삶이 한없이 눈부신 까닭이다.
- 여자영의 시 「천년 수도승」 감상글(223쪽)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나뭇잎 새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
-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에 머무르다
나무와 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양하다는 것, 흔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쉽다는 것, 봐도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것, 하지만 가까이 두고 음미하면 할수록 보이고 들리고 느낄 수 있다는 것, 잠시 멈춰 관찰하고 기다리면 지금껏 몰랐던 감동을 준다는 것.
일본의 시인 다니카와 타로는 「산다」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나뭇잎 새의 햇살이 눈부시다는 것”이라 표현했다. 사소한 순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시는, 거창할 것 없는 일상이 모여 삶이 된다는 간명한 진리를 전한다. 천천히 걷다 보면 목적지만을 향해 빠르게 달릴 땐 미처 몰랐던 여러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우연적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무와의 만남, 그리고 시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천년 세월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의 향기에 눈뜨게 된다.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것,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까지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다.
시를 언어의 사원이라고 했던가? 지난 계절 그 언어의 사원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건 아마 앞으로도 가당치 않은 일일 게다. 나무는 아주 천천히 가만가만 속살거리며 언어의 사원을 지었다. 내가 머무른 이 찬란한 사원에는 나무가 무성했다.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이다. 그 안에서 더없이 즐거웠다. 슬픔에 겨워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쏟은 적도 있지만, 둥실 꽃구름 타고 하늘을 날아 닿을 수 없는 황홀경에 이르는 때가 더 많았다. (…) 나무의 무한한 관용에 기대어 죽는 날까지 나무에게 길을 물을 것이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온 가지로 품어 안고 다시 나무가 말을 한다. 오라, 숲으로, 나무와 더불어!
-「책을 내면서」(8~9쪽)에서
이 책에 실린 81편의 ‘나무-시’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생태적 감수성을 활짝 열어준다. “나무 앞에선 하늘도 땅도 사람도 푸르게 푸르게 두근거린다”. 이제 친절한 ‘나무 대변인’의 손을 잡고 ‘나무로 지은 언어의 사원’을 거닐 일만 남았다.
기본정보
ISBN | 9788960901223 |
---|---|
발행(출시)일자 | 2012년 01월 20일 |
쪽수 | 224쪽 |
크기 |
135 * 224
* 20
mm
/ 368 g
|
총권수 | 1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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