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푸와 한국
옌푸는 생전에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인물이다. 그가 직접 만난 한국인은 한말의 문인이요 역사학자였던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었다. 옌푸는 자신의 일기에 1909년 창강이 상하이의 처소를 2번 방문하였고, 필담을 나누고 한시를 주고받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자 창강은 중국의 장수성(江蘇省) 퉁저우(通州)로 망명했으며,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교정을 맡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1907년부터 중국의 난징으로 망명을 떠났던 도교적 사상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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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푸와 한국
옌푸는 생전에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낯선 인물이다. 그가 직접 만난 한국인은 한말의 문인이요 역사학자였던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었다. 옌푸는 자신의 일기에 1909년 창강이 상하이의 처소를 2번 방문하였고, 필담을 나누고 한시를 주고받은 일을 기록하고 있다. 을사조약의 체결로 일본이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자 창강은 중국의 장수성(江蘇省) 퉁저우(通州)로 망명했으며,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교정을 맡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1907년부터 중국의 난징으로 망명을 떠났던 도교적 사상가 서우(曙宇) 전병훈(全秉薰, 1857-1927)도 베이징대학 초대 교장을 지낸 옌푸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전병훈의 중국인 제자 위란톈(于藍田)은 ??정신철학통편??(베이징: 정신철학사, 1920)의 서문에 자신의 사부에 대한 당대 중국 명사들의 찬사를 정리해 두었는데, 그 중에는 옌푸의 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옌푸는 중국에 망명해 있던 조선의 지식인이 만나고 싶었던 중국의 문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옌푸와 한국과의 관계는 지식인들의 개인적 교류에 머무는 일만은 아니었고, 동아시아의 근대 경험과 연관되는 사건이었다. 을사조약 이후로 국내에 남아있던 한말의 지식인들은 조국의 자강과 민족의 계몽에 관심을 기울였다. 자강과 계몽을 정치적 운동으로 승화시켜 가기 위해 그들은 사회진화론을 수용했다. 그들이 자연과 인간세계를 꿰뚫고 있는 진화의 법칙을 파악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은 ‘진화’가 아니라 ‘천연(天演)’이었다. 옌푸는 바로 ‘천연’이라는 세계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천연론(天演論)??을 간행한 인물이었다. ??천연론??은 1860년대 영국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대중화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헉슬리의 저서를 한문으로 번역한 책이었다.
옌푸는 어떤 사람인가
옌푸(嚴復, 1854-1921)는 1870년대에 중국인으로는 최초로 영국의 왕립해군대학에 유학했으며, 중국으로 돌아와서는 리홍장이 지휘했던 북양해군의 양성에 주력했던 해군이었다. 중국의 근대적 해군 교육에 종사하면서도, 그는 사대부 관료보다 못한 자신의 직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 시험에도 거듭 응시하면서 좌절을 맛보았던 유학자였다. 또한 그는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 밀의 『자유론』과 『논리학 체계』,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등 서양의 근대를 대표할 만한 엄청난 양의 서적을 혼자서 중국어로 옮긴 번역가이기도 하였다. 진화론, 자유주의 경제학, 사회학, 윤리학, 정치학, 법학 등 서양의 근대적 학문을 중국에 소개한 서학(西學)의 대가였다. 중화민국이 성립된 해, 그는 위안스카이의 비호 아래 베이징대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던 교육자였다.
그의 삶은 20세기 전환기의 중국에서 살았던 한 지식인의 인생 역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가 융합된 중국의 근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
지난 30여 년 동안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표방하면서 지구화의 대열에 동참했다. 중국인의 시야는 스스로 죽의 장막을 뚫고 나와 외부 세계로 확장되었다. 새로운 시선으로 서양의 근대를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혁명의 역사로 그려졌던 지난 시대의 역사도 다시 바라보고자 했다. 서양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찍이 서양에 유학하고 서양 견문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해부하고자 했던 인물들도 새롭게 평가되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옌푸도 바로 이러한 중국의 사회적 변화 속에서 새롭게 부각된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책은 옌푸라는 근대 중국의 한 지식인에 대한 인물 연구이면서, 동시에 중국의 근대와 근대성을 천착하고자 한 연구이기도 하다. 동아시아의 근대 연구가 언제나 부딪히기 마련인 동양과 서양, 전통과 근대라는 도식을 넘어서기 위해, 저자는 전통적 학문과 서양의 학문이 교차하는 길목에 옌푸를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동서사상의 교차로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 못하고 두 갈래의 길을 함께 걸어가야 했던 옌푸를 통해 중국의 근대가 고민했던 딜레마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밝혀보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도서출판 태학사에서 <중국철학 해석과 비판>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으로 나온 ??옌푸: 중국의 근대성과 서양 사상??은 오늘의 동아시아 세계에서 반드시 음미해 볼 만한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1장은 중국과 서양이라는 근대적 공간 속에서 해군의 꿈, 서양의 꿈, 진사의 꿈을 함께 꾸었던 옌푸의 삶을 동시대 사상가들과의 교류 속에서 중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2장부터 제8장까지는 옌푸가 남긴 저작 중에서 대표적인 글을 뽑아 한글로 번역하고, 이를 통해 중국근대철학에 해당하는 저작을 읽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어로 번역된 옌푸의 글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책은 한국의 옌푸 연구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서세동점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서양을 학습한 옌푸가 서양의 학문과 과학 속에서 찾아내고자 했던 서양의 원리가 무엇이었는가를 다루고 있다. 나아가 이렇게 발견된 서양의 원리를 통해 변법과 혁명이라는 중국의 정치적 담론에 옌푸가 관여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이 연구는 옌푸라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해 근대 중국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즉 18,9세기 서양 사상의 정수를 번역한 옌푸가 만들어 놓은 중국의 번역된 근대, 중국에 최초로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한 옌푸의 사회진화론, 진화론과 연계된 근대 중국의 자유주의, 이로 말미암아 야기된 중국의 근대적 정치 담론, 서양의 진리를 추구했던 옌푸가 제기한 중체서용 비판, 종래의 화이론을 넘어선 새로운 문명론,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된 근대 중국의 학문, 19세기 서양의 과학으로서의 학문을 수용하면서 전개된 중국의 근대적 학문의 탄생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중국의 근대성을 밝혀 가는 새로운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철학 해석과 비판>은 어떤 시리즈인가?
오랫동안 중국 한자 문명권의 영향 속에서 살았던 우리에게 중국철학은 우리 삶과 사유의 중요한 부분으로 기능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아련한 추억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 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따라서 서양문명권의 영향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는 지금도 중국의 많은 철학자들과 만나야만 하는가?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이제 우리에게 충분히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중국철학을 다시 숙고하려고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선 조상들이 행하지 못한 중국철학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려고 하며, 그 다음 이런 비판적 자세를 통해서 현재의 우리 삶과 사유를 비판할 수 있는 철학적 입장들을 확보하려고 한다. 우리의 이런 노력이, 한반도라는 작은 땅에서 한국어라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에게, 냉철한 비판정신과 아울러 긍정적인 삶의 전망을 제공했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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